강역 ()

인문지리
개념
경계 · 변방 · 봉역 · 영역의 의미를 갖는 강토의 구역.
내용 요약

강역은 경계, 변방, 봉역, 영역의 의미를 갖는 강토의 구역이다. 생활 문화적 동질 집단이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근대적 의미의 국경과 영토 개념을 아우르게 되었다. 현재 국경은 지역 개념에서 선의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영토도 영해, 영공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영공 침범이나 도서(島嶼)의 귀속 문제가 국가 간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가 간의 강역은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물리적 힘에 의해 변천을 거듭해 왔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강대국의 힘과 의지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강역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
경계 · 변방 · 봉역 · 영역의 의미를 갖는 강토의 구역.
내용

경계 · 변방은 국경이라는 말로 대치 사용할 수 있고, 봉역 · 영역은 영토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즉, 강역이라는 말은 개념이 세분화되기 이전에 사용된 복합 용어라 할 수 있고, 국경이나 영토는 근대적 개념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사실 국경과 영토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경의 변천은 곧 영토의 변화를 의미한다. 강역의 출발은 생활 문화적 동질 집단의 터전이다. 그러나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가 간의 강역은 물리적 힘에 의하여 변천을 거듭하여 왔다. 이에 따라 생활 문화적 공동체는 정치 · 군사적 힘에 희생되어 많은 국민들은 이민족의 통치 하에서 시달리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경계, 즉 국경과 영토의 개념이 변천해 온 점이다. 첫째, 국경이라는 개념은 지역 개념에서 선(線)의 개념으로 발달하였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산악이나 강하(江河)에 의하여 경계가 이루어졌으며, 자연환경에 따라 생활 문화권이 형성되어 영역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근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국경은 선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둘째, 강역은 영토에서 발전하여 영해 · 영공까지를 포함하게 된 점이다. 특히, 영해까지를 강역으로 인식하면서 도서(島嶼)의 귀속 문제가 국가 간에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강하를 경계로 할 때 등거리주의와 최심주의(最深主義)가 대두되고, 도서의 경우에는 근접주의와 국토의 자연연장설을 내세워 강역을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학술적 · 논리적 해결보다는 힘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의지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강역에 대한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생활 문화적 차원, 즉 역사성에 근거하여 해결점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강역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강역

(1) 고조선

고조선의 사회형태 · 문화단계 및 국가 형성 시기 등 많은 문제에 대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는 상태이며, 따라서 강역 문제 또한 예외는 아니라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제설만을 다루겠다. 먼저, 이병도(李丙燾)로 대표되는 대동강유역설은 지금의 평양 부근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는 견해이다.

청동기시대지석묘 사회에 해당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이 지역에서 새로 일어난 신지배씨족(新支配氏族), 곧 한씨조선(韓氏朝鮮 : 통칭 箕子朝鮮)에 밀려 진번(眞番, 지금의 安岳 방면)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며, 평양 지역은 이른바 한씨조선이 차지하게 된다. 이 한씨조선도 역시 지석묘를 조영하던 사회로서,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부족연맹을 형성한 유력한 세력이었다.

이들의 남쪽(지금의 慈悲嶺 以南, 漢江 以北지역)에는 진번이, 동쪽(지금의 함경남도 대부분 지역)에는 임둔(臨屯)이, 그리고 동북쪽에는 예맥(濊貊)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여국(夫餘國)이 있었고, 진번의 남쪽에는 진국(辰國)으로 총칭되는 무수한 부족국가가 산재하였다. 한씨조선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강역은 한반도의 서북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요하(遼河) 부근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는데, 이들은 동일 계통의 문화권 내에 속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동이와는 계통을 달리한다고 여겨지는 동호족(東胡族)이 있었다.

따라서, 연(燕)나라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공취(攻取)한 2,000여 리에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 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 등의 5군(郡)을 설치하였다는 『위략(魏略)』의 기사에서 앞의 4군은 실제 동호족의 영토이며, 고조선이 잃은 것은 사실상 요동, 즉 요하 부근에서 만번한(滿潘汗 : 지금의 평안북도 博川郡지역)에 이르는 약 1,000여 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뒤의 연 · 진(秦) 시대에는 중국 요동군(遼東郡)의 외계(外界)가 지금의 대동강까지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조선의 영토는 위축되었다. 그것은 평양 일대에서 나오는 진과(秦戈)를 비롯한 연 · 진 시대의 각종 유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衛滿朝鮮) 때의 판도는 이보다 약간 넓어져 지금의 청천강 이남, 한강 이북의 지역과 동해안의 함경남도 · 강원도 일부 지역에 걸쳤다.

이 밖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 있던 예맥은 위만조선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 되었다. 또, 서기 전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판도 안에 두었던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는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 유역, 진번군(眞番郡)이 자비령 이남과 한강 이북, 임둔군(臨屯郡)이 함경남도의 옛 임둔 지방, 현도군(玄菟郡)이 압록강 중류 동가강(佟佳江) 유역의 예맥땅으로 비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에 반대되는 주장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의 밖, 즉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구하는 견해들이 있다. 이 중 윤내현(尹乃鉉)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서기 전 2333년에 건국한 고조선은 지금의 발해(渤海) 북안(北岸)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난하(灤河) 유역으로부터 한반도의 청천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그 세력을 넓힐 때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전국시대(戰國時代)인 연나라 소왕(昭王, 서기전 311∼279) 때에 진개가 고조선을 친 후에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선이 난하 동부연안으로 잠시 이동하였지만, 얼마 뒤 중국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원래의 상태가 되었다. 다음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를 일컫는 것으로, 고조선이 망하고 기자조선이 건국된 것이 아니라, 이 둘은 공존한 것이다.

즉, 원래 지금의 중국 하남성 상구현(河南省商邱縣) 지역에 위치하였던 기자국(箕子國)은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서게 되자 당시 중국의 가장 변방인 지금의 하북성 연산(燕山) · 난하 하류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다시 지금의 난하 중 · 하류 동부 연안으로 이주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게 된다. 이때 기자조선의 크기는 고조선 전체 면적의 약 2백 분의 1쯤 되는 작은 것이었다. 그 뒤 서기 전 195년에는 연나라에서 위만이 기자국에 망명하게 되며, 그는 기자국의 준왕(準王)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기자조선의 강역을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

서기 전 180년경에 이르러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하고 한나라로부터 군비(軍備)와 경제적 원조를 받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 결국에는 고조선의 중심부까지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히 위축된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난하 상류와 중류 및 창려(昌黎) · 갈석(碣石)으로부터 동쪽으로 지금의 요하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까지이고, 고조선은 그 동쪽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서기 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나라 무제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자 그 지역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위만조선 ·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세력이 약화된 고조선은 구성 부족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고조선이 차지하였던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고구려 · 예맥 · 부여 · 옥저(沃沮) · 낙랑(樂浪) · 마한(馬韓) · 진한(辰韓) · 변한(弁韓) 등으로 나뉘어 열국시대(列國時代)를 맞게 되고, 얼마 후 다시 북방에서는 고구려, 남방에서는 백제신라가 주변을 통합하여 삼국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한편, 고고학적 측면으로는 강인구(姜仁求)를 들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동북 지방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써, 이 지역 우하량(牛河梁) · 노철산(老鐵山) · 누상(樓上) · 강상(崗上)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들은 한반도의 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이 지역에 있는 적석총(積石塚)은 강원도 춘천 천전리지석묘, 충청남도 조치원 부근의 적석총, 대구 대봉동지석묘,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21호분과 유사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보다 단순화하여 경주의 다곽식(多槨式) 적석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남산근(南山根)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에서와 같은 석곽묘 형식은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의 석곽묘와 근본적으로 같다.

지석묘는 황해도 연탄군(延灘郡) 오덕리(五德里)황주군 심촌리(沈村里)의 것이 이 지역, 즉 요령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지석묘와 연결된다. 이 지역의 대석개묘(大石蓋墓)는 송국리(松菊里)의 석관묘(石棺墓)나 한반도 남부 지방에 다수 분포되어 있는 변형지석묘(變形支石墓)와 동일 형식이다. 또한 석관묘는 같은 형식의 것이 공귀리를 비롯하여 부여 가증리 · 중정리, 대구 진천동, 김해 회현동 패총 등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이처럼 중국 동북 지방의 고분과 한반도 내의 고분이 구조 형식과 연대에 있어 서로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이들이 같은 계통에 속하는 문화임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지어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난 중국 동북 지방의 종족으로는 흉노(匈奴) · 동호 · 산융(山戎) · 선비(鮮卑) · 부여 · 예맥 · 숙신(肅愼) · 말갈(靺鞨) 등이 있는데, 이들 중 앞의 넷은 유목민족이고, 뒤의 넷은 농경민족이다. 전자는 이 지역과 관계가 거의 없거나 잠시 통과한 흔적밖에는 없다. 또 요령식 동검(遼寧式銅劍)과 같은 독특한 문화 산물은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여러 문화요소를 융합하여야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유목민족에게는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아직까지는 요령성 내에서 이들의 고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문화를 고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에서 위만조선까지의 활동 범위는 난하와 두하(陡河)선을 서쪽 경계로 하고, 북쪽은 서요하(西遼河)의 상류 지역과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동북쪽은 제2송화강(第二松花江) 유역, 남쪽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포함하는 지역을 경계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핵심 활동 지역은 대능하와 요하 본류 유역, 그리고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에서 전국시대에 걸치는 시기, 즉 서기 전 3000년경에서부터 서기 전 3세기에 걸치는 기간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보다 확실한 시기는 서기 전 9세기 이후가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어떤 확실한 강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유적의 분포상 나타나는 문화권 내지 활동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위의 세 가지 학설은 서로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고조선의 강역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2) 삼한

고조선 문제에 이어 주목되는 것으로는 삼한을 들 수 있다. 삼한이 성립하는 시기라든지 위치에 대하여, 아직도 학계에서는 논의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강역도 명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두 가지 해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원래 한(韓)이라는 것은 진한만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서기 전 1세기경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유민(流民)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진한을 형성하자 안성천(安城川) 이남의 충청남도 · 전라도 지방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선주민사회가 각기 마한과 변한을 칭하게 됨으로써 삼한이 성립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한강을 중심으로 예성강 이남의 경기도 지방과 춘천 서쪽의 강원도 일부를 진한, 안성천 이남의 충청도 · 전라도 지방을 마한, 영남지방을 변한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요동 방면에 있던 변한과 진한이 한반도 안으로 이동하여 본래부터 한반도 서부 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마한의 일부 지역에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한강 · 낙동강 방면을 거쳐서 한반도 동남쪽에 정착하였다는 이른바 이동설로서, 이를 각기 전삼한(前三韓, 北三韓) · 중삼한(中三韓) · 후삼한(後三韓, 南三韓) 등 단계별로 나누었다. 이처럼 뚜렷한 정설이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지만, 학계에서는 보통 마한을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지방, 진한을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 변한을 낙동강 서남쪽의 경상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3) 삼국시대

비교적 강역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시기는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상쟁하던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중에서도 이들 삼국이 한반도를 삼분하여 다투던 4세기에서부터 신라가 통일을 이루는 7세기 후반까지가 사료적으로도 복원이 가능한 시기이며, 그 이전은 아직 강역을 언급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고구려의 경우는 태조왕 때인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옥저를 비롯한 주위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세력 확장을 꾀한 다음, 그 뒤 미천왕 때에 낙랑군과 대방군(帶方郡)을 쫓아냄으로써 지금의 황해도 일부지방에까지 이르는 영역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는 고이왕 때에 국가 체제를 어느 정도 정비한 다음, 그 뒤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는 시기를 틈타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크게 넓혀진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때에 가서야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지배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삼국은 4세기 초까지는 서로 직접 충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백제가 근초고왕 때에 남쪽으로는 마한을 멸하며 전라남도 지방을 완전히 손에 넣고, 북쪽으로는 예전의 대방군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자 고구려와 부딪치게 되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북쪽 변방인 치양(雉壤 : 지금의 황해도 白川)을 침입해오자 근초고왕은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을 보내어 격파하였다. 또한 371년에는 직접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세력을 펼쳐, 지금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전부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북진정책은 근구수왕에 의하여 계속되었으며, 기본적으로 근초고왕 때의 영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진사왕 말기부터는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 수세를 취하게 된다. 즉 즉위년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396년에 백제를 침입하여 한강선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계속적으로 백제에 압력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중국의 길림성 집안(集安)에 남아 있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광개토왕은 395년에 서북쪽으로 비려(碑麗)를 정벌하여 지금의 시라무렌강까지, 그리고 398년에는 동북쪽으로 숙신을 정복하여 목단강(牧丹江)까지, 407년에는 서쪽으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하선을 넘어섰으며, 410년에 북쪽으로는 부여를 정벌하여 지금의 하얼빈 부근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신라에 대하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때에는 광개토왕 때의 영역을 유지하는 동시에 427년에 국도(國都)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보다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잡아 죽이는 전과를 올려, 백제로 하여금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는 지금의 아산만에서 죽령 · 조령 일대를 거쳐 평해(平海)에 이르는 선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신라는 실성왕 때까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다가 눌지왕 때인 433년에 백제의 비유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음으로써 자주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점차 그 영역을 확장, 512년(지증왕 3)에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하게 된다. 또한 뒤이어 522년(법흥왕 9)에는 대가야(大伽倻)와 혼인동맹을 맺고, 532년에는 오늘날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金官伽倻, 本伽倻)를 합병하게 된다.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진흥왕 때였다. 그는 백제 성왕과 551년에 공동으로 북진 운동을 벌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략하였는데, 이때 백제는 한성(漢城) 등의 한강 하류 지역 6개 군을 되찾았다. 또한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高峴 : 鐵嶺) 이남의 한강 상류 지역 10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어 553년에는 신라가 동맹을 맺고 있던 백제를 급습하여 백제가 회복한 땅을 그대로 점령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562년에는 대가야를 공격, 가야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밖에도 신라는 계속적인 북진을 감행, 한반도 동쪽으로 함경북도 이원(利原)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오늘날 창녕 · 북한산 · 황초령(黃草嶺) · 마운령(摩雲嶺) 등지에 남아 있는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를 통하여 입증된다.

반격에 나선 고구려와 백제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백제가 신라의 서부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실패하였지만, 백제는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경상남도 陜川)을 공취함으로써 낙동강 방면으로 그 세력을 뻗쳐나갔다. 그러나 곧이어 백제와 고구려는 내부 문제가 복잡하게 되어 분열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틈을 타 수나라 · 당나라 등 중국 세력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한 신라가 두 나라를 공격, 결국에는 660년과 668년에 당나라와의 합작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백제 옛 영토 전부와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흡수, 영역화하였다.

이상과 같은 삼국시대 강역의 변천 외에 주목되는 것으로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 있어 간단하게 부기(附記)하고자 한다. 요서경략설은 『송서(宋書)』를 비롯한 중국측의 몇몇 사서(史書)에 근거한 것으로서, 백제가 우수한 수군력(水軍力)을 바탕으로 4, 5세기경에 요서(遼西)를 비롯한 중국의 화북지방(華北地方)을 공취하여 요서 · 진평(晉平) 등의 군을 둠으로써 그 지역을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아직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개연성(蓋然性)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많은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삼국시대의 강역을 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 내용은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일본 대화(大和) 정권의 직할 식민지로 인정되는 임나일본부가 4세기 중기에서 6세기 중기까지 약 2백 년간 있었으며, 그 위치와 범위는 대략 가야 지역과 일치하는 지금의 낙동강 서쪽 지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서기』를 토대로 광개토왕릉비문 등에서 필요한 자료만을 발췌하여 입론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그 실제 존재여부의 문제에서부터 그 성격상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이 가해져 지금은 존재 자체가 부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오히려 일본열도 내에 있었던 한국계 주민들의 식민국가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우리측 자료와 광개토왕릉비문의 재해석에 따른 결과 삼국으로부터 수많은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가서 그곳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일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려(高麗)’ · ‘백제(百濟)’ 등의 지명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확실한 정설은 없는 형편이다. 이와 같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볼 때 삼국시대의 강역은 입론의 근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강역 문제의 하나이다.

남북국시대의 강역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되면서 신라가 한반도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고구려의 유장(遺將)인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에 의하여 발해(초기에는 震國)가 건국되면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 즉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남북국시대는 7세기 말에서 1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북국의 강역 문제(넓이 · 경계 · 시기 등)에 대하여는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고대사상의 문제와 같이 관계 사료나 명확한 물증, 즉 조사된 유물 · 유적의 불충분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용 가능한 자료와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학설을 참고로 통일신라와 발해의 강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통일신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역 확보 과정은 곧 당나라와의 투쟁 과정이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백제의 옛 땅에는 오도독부(五都督府 : 뒤에 熊津都督府로 개칭)와 고구려의 옛 땅에는 구도독부(九都督府)를 두고, 이어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 신라조차도 그 지배 하에 두려고 66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문무왕을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당나라가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을 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또한 신라가 멸망시킨 백제 · 고구려와 같이 당나라의 지배 체제 속에 예속, 편제됨에 따라, 신라는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귀족인 안승(安勝)을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아 금마저(金馬渚 : 지금의 益山)에 봉하는 한편, 백제의 옛 땅을 공략하여 671년(문무왕 11)에는 드디어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扶餘)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백제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양국의 충돌은 옛 고구려 지역으로 옮겨져, 672년에는 당나라의 고간(高侃) · 이근행(李謹行) 등이 거느린 4만 대군을 백수성(白水城 : 禮成江口說) 부근에서 대파하였다. 이듬해 다시 당나라 · 거란 ·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 북변(北邊)을 침입하자, 모두 아홉 번 싸워 이들을 격퇴하였다. 675년에는 이근행이 20만 대군으로 매초성(買肖城 : 楊州)을 쳐들어 왔는데, 신라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전마(戰馬) 3만 380필,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병기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다음해 설인귀(薛仁貴)의 군대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 : 錦江入口)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676년에 요동성(遼東城 : 遼陽)으로, 다음해 다시 신성(新城 : 撫順 부근)으로 옮겼다.

735년(성덕왕 34)에는 당나라와 발해의 대립(大門藝 문제로 발생) 속에서 당나라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의 남경(南境)을 공격하였는데(733년) 그 대가로 당나라는 패강(浿江) 이남의 땅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후 신라는 북변 지역의 경영에 착수하여 748년(경덕왕 7)에 대곡성(大谷城) 등의 14군 · 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762년에는 이곳의 방어를 위하여 오곡(五谷) · 휴암(鵂巖) · 한성(漢城) · 장새(獐塞) · 지성(池城) · 덕곡(德谷) 등의 6성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다. 이어서, 782년(선덕왕 3)에는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민호(民戶)를 이곳에 옮겼고, 826년에는 패강 지역에 300리에 달하는 장성을 수축하였다.

한편, 신라의 동북경(東北境)에 대하여 『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는 북쪽의 발해와 이하(泥河)에 접하고, 721년에 하슬라도(何瑟羅道)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북경(北境)에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하는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 부근의 용흥강(龍興江), 그리고 장성은 지금의 용흥강 부근의 영흥에 있는 고장성(古長城)에 비정된다. 733년 신라가 발해의 남경을 침입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가 발해와 이곳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나라와의 투쟁을 거치면서 확보한 강역은 서북 방면으로 현재의 대동강 하구에서 중화(中和) · 상원(祥原) · 곡산(谷山)을 거쳐, 동북쪽으로 원산만의 덕원에 이르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발해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 지금의 朝陽)에 끌려와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대조영의 지휘 아래 이곳을 탈출하여 동쪽으로 나와 지금의 길림성 돈화(敦化) 부근에 나라를 건국하고 ‘진(震 : 뒤에 渤海로 개칭)’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기까지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일찍이 9세기 초에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발해인 자신이 남긴 역사 기록, 또는 유물 · 유적이 극소한 까닭에 현재까지 발해에 대한 이해에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발해의 강역에 대하여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어서 『신당서』와 『구당서』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을 근거로 각양의 주장이 있어왔다. 다행히 근자에 이 지역에서의 발해 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발해의 5경 15부의 위치나 그 경계의 비정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발해는 일찍이 구국(舊國 : 敦化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지방 5천 리에 호(戶)가 10여 만이며 날랜 군사 수만을 보유한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선왕 때에는 현재의 흥개호(興凱湖) 북쪽의 여러 부락을 정벌하여 ‘대경우(大境宇)’를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영토의 확장과 함께 발해의 정치 · 문화 · 군사 등의 중심지로서의 도읍(都邑)도 몇 번에 걸쳐서 이동하였다.

발해 문왕 연간에는 구국에서 상경(上京)으로 천도하고, 문왕 말년에는 상경에서 동경(東京)으로, 794년에는 다시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여 발해가 망할 때까지 이곳에 도읍하였다. 또한, 발해는 그 늘어난 영토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을 일률적으로 편제하여, 전국에 걸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였다.

발해의 강역에 대하여 『구당서』에서는 ‘방이천리(方二千里)’라 하고, 『신당서』에서는 ‘방오천리(方五千里)’라 하여 각기 상이한 기록을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구당서』의 기록은 발해 건국 초기의 강역이고, 『신당서』의 것은 발해 전성기의 강역을 기술한 것이다. 즉 10대 선왕의 활발한 영토 확장 이후의 상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두 사서와 관련 자료를 근거로 발해의 사방 경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발해의 서남계는 박작구(泊汋口) 및 장령부(長嶺府)의 남쪽 경계에서 당나라와 접하였다.

『신당서』 지리지에서는, 당나라에서 발해로 갈 때 압록강의 입구에서 약 130리 상류에 있는 박작구부터 발해의 영역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지금의 대포석하(大浦石河) 입구로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한다. 또한, 장령부는 지금의 해룡현(海龍縣)의 분수령에 해당한다. 발해가 박작구에 이른 것은 732년(무왕 13) 이전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대문예(大門藝) 문제로 발해가 732년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해는 무왕 때에 이미 현재의 관전(寬甸) · 신빈(新賓) · 청원(淸源)을 잇는 선에서 당나라와 접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발해의 15부 가운데 부여부(扶餘府 : 吉林省 農安縣)막힐부(鄚頡府 : 黑龍江省 阿城)는 거란과 인접한 곳으로서 발해 서변의 요충지였다. 특히, 부여부는 거란도(契丹道)로서, 발해에서는 항상 이곳에 용맹한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거란과 접하였던 곳은 대체로 현재의 창도(昌圖) · 이수(梨樹) · 농안(農安) · 건안(乾安)을 잇는 선이었다.

발해의 남계는 이하(泥河)로 이곳을 경계로 신라와 접하였다. 이하는 신라의 동북경인 정천군(井泉郡 : 고구려 때의 泉井郡) 북쪽에 있는,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만 부근의 용흥강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이하의 위치를 현재의 강원도 명주군의 연곡천(連谷川)으로 비정하는 주장도 있다.

발해의 동계에 대하여 『신당서』는 바다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발해는 동부 지역인 지금의 소련 우수리강 동쪽과 연해주 지역에 각기 안원부(安遠府) · 안변부(安邊府) · 정리부(定理府)를 설치하였다. 이곳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선왕 때로 보인다. 발해의 동북쪽에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어 서로 접하였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예속 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조공하기도 하였는데, 그 거주 지역은 지금의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발해의 동북쪽 경계는 현재의 동류 송화강까지 걸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결과를 요약하면 발해는 그 전성 시기의 강역이 현재의 길림성 · 흑룡강성의 대부분, 요령성 및 연해주의 일부분, 그리고 한반도의 함경도 · 평안도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대왕국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강역

신라 말기인 9세기 말엽 견훤(甄萱)후백제전주에서 건국하여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일부를 장악하고, 궁예(弓裔)후고구려철원에서 건국하여 강원도, 충청북도 일부, 경기도, 황해도, 경상북도 일부를 장악하면서 신라의 강역은 경주 일원으로 줄어들었다.

궁예의 태봉국을 계승한 고려의 왕건(王建)호족 연합 정책을 유효하게 씀으로써 각 지방의 호족의 귀부를 받아 강역을 넓혔고, 수군으로 후백제의 배후인 전라남도 나주 지방을 점령하였다. 또한 신라에 친선 정책을 써서 935년 신라 왕실의 귀부를 받았고, 끝으로 후백제의 신검(神劍) 세력을 논산 지방에서 격파함으로써 분열되었던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 결과 고려의 강역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철원에서 건국하였을 때 평양 지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곳에 행차하여 완전히 폐허가 된 이곳에 황해도 황주(黃州) · 봉주(鳳州) · 해주(海州) · 백주(白州) · 염주(鹽州) 등의 백성을 이주시켜 의도적으로 도시를 개발하고 평양 대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개경으로 천도한 직후에 이곳을 서경으로 개칭, 승격시켜 북방 진출의 전진기지 겸 개경의 배후 세력으로 육성하였으며, 서북 지방의 여러 곳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한편 926년(태조 9)에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 일원을 차지하였던 발해가 거란족에 의하여 멸망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강역에서 만주를 완전히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태조는 동족의 국가인 발해의 멸망을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여 발해 유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발해를 멸한 거란이 친선 사절단을 파견하였을 때 강경한 정책을 써서 단교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거란과 화친하지 말 것을 당부한 점에서 기회를 보아 북진할 것을 시사한 것이라 해석된다.

태조 이후의 정종 · 광종 때에는 거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서경에 자주 행차하고, 그 주위에 성을 쌓았으며, 광군(光軍) 30만이라는 농민군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정종 때로부터 979년(경종 4)까지 청천강 북쪽인 안주(安州) · 박천(博川) · 운산(雲山) · 희천(熙川) 일대에 18개의 진성(鎭城)을 축조하여 강역을 넓혔다. 동북쪽으로는 1031년(현종 22)까지 원산 북쪽인 문천(文川) · 정평(定平) · 함흥 주위에 14개의 진성을 축조하여 방비 태세를 갖추고, 주진체제(州鎭體制)를 마련함으로써 강역을 넓혔다.

이렇게 고려가 북진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북부 지방에 여진족이 살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곳은 아직 요나라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정치적 공백지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의 북진정책의 의욕이 강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하여 오자 당황한 고려 조정은 서경 이북을 포기하여 황주에서 절령(岊嶺) 이북을 떼어주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서희(徐熙)가 반대하며 거란의 의중을 파악한 뒤에 조처하여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여 그가 직접 담판에 나섰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 구실이 거란과 단교하고 송나라와 친선외교를 하고 있는 것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임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거란과의 통교를 위해서는 압록강까지의 길이 막혀서이니 이곳을 확보하면 통교하겠다고 하여 담판을 끝내고, 그 결과 오히려 압록강 이남의 강동육주를 개척할 권리를 공인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94년에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이남인 장흥(長興 : 해천의 동쪽) · 귀화(歸化)의 두 진과 구주(龜州) · 곽주(廓州 : 廓山)에 성을 쌓았다. 또한 안의(安義 : 安州) · 흥화(興化 : 의주 동쪽)의 두 진, 그 이듬해에는 선주(宣州 : 宣川) · 맹주(孟州 : 孟山) 등지에 성을 쌓아 영토를 압록강까지 손쉽게 확장하였다. 그 뒤 덕종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의주로부터 함흥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정종(靖宗) 때에 완성하였다. 이것은 이미 곳곳에 쌓여 있는 성을 연결시킨 대역사(大役事)였다.

그러나 천리장성이 고려의 강역이 아니라 제2의 방어선이었고, 문종 때에는 장성을 넘어 동북쪽인 함경도 지방에 성과 진을 구축함으로써 강역을 확장해 갔다. 그리고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 그 추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그 지방의 자치를 여진족에 허가하였다. 한편으로는 진과 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이곳을 그들의 조공을 받는 기미주(羈糜州)를 삼아 강역을 꾸준히 넓혀갔다. 문종 때 여진족이 주군(州郡)의 설치를 요청해 와서 천리장성 너머 함경도지방에 설치된 기미주는 15주에 달하였다.

고려 시대 북방 지역은 남부 지방처럼 군현 체제가 아니라 주진 체제로 군정과 민정을 함께 나누는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남부의 도(道)라는 단위와는 달리 북계(北界) · 동계(東界)라 하여 양계(兩界) 지방으로 통칭되었다. 양계 지방의 행정은 군사령관인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주관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군사를 동원해 농지를 개간하여 군량에 보충하게 하였고, 양계 지방에는 남부의 백성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로써 강역의 확장은 곧 농경지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 되었다. 숙종 때는 지금까지 독립국으로서 고려에 조공을 바쳐오던 탐라국(耽羅國 : 제주도)을 병합하여 탐라군으로 삼아 강역을 확대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길림성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여 함경도 지방에 사는 숙여진을 충동하여 왔고, 그 결과로 잦은 침략이 잇따랐다. 이들 숙여진은 만주의 여진족이 수렵생활이 주인 데 비하여 농업이나 어로를 주산업으로 하여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식량을 자급자족하기가 어려워 항상 고려에서 식량의 공급을 받아왔는데 그들은 식량이 부족해지면 고려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해갔다. 때로는 그들로 인한 피해가 원산만 이남의 동해안 지역에까지 미쳤다.

여진족의 침략이 격화되고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烏雅束)의 정치 세력이 함경도 지방에 미치자 1105년(숙종 10)에 임간(林幹)이 이들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다. 그 해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또한 패배하였다. 윤관은 공격에 패배한 원인을 여진족의 주력 부대가 기병인 데 반하여 고려의 군사는 보병이었다는 점으로 파악하고 기병 중심의 군대를 징집하여 훈련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1107년(예종 2)에 3년간 준비한 별무반 17만을 윤관이 인솔하고 공격하여 승승장구 승리를 거듭하고 이른바 9성(九城)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9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라 행정력을 가진 주와 진의 설치로서 현재까지 기미주로 확보되었던 지역을 직접 통치화하였음을 뜻한다. 9성은 함주(咸州) · 영주(英州) · 복주(福州) · 웅주(雄州) · 길주(吉州) · 공험진(公嶮鎭) · 의주(宜州) · 통태진(通泰鎭) · 평융진(平戎鎭)이었다. 9성에는 6900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생활 근거를 잃은 여진족은 반격을 집요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외교교섭을 시도해 왔다. 즉, 1109년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은 사신을 보내 9성의 환부를 요청해 왔다.

고려에서는 여진족의 강한 반발과 요나라의 개입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9성을 환부해 주었으나 윤관이 설치한 9성을 모두 환부하지는 않았다. 즉, 의주 · 평융진 · 공험진은 환부하지 않고, 그 대신 진양진(眞陽鎭) · 숭녕진(崇寧鎭) · 선화진(宣化鎭)을 돌려주었다. 이에 여진의 사신은 감격한 나머지 거듭거듭 사례하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매년 바칠 것이며, 고려의 땅에 돌멩이 하나라도 감히 던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다. 고려의 9성 환부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직접 통치에서 이 지역에 대한 자치를 허용한 것으로 기미주로의 환원이라 할 것이다. 이는 그 뒤 1111년에 9성 북쪽인 길주에 중성(中城)과 공험진산성 등은 직접 통치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요지는 고려에서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9성의 현재 위치에 대한 학설은 공험진에 대하여 대립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된 조선 초기에는 공험진의 경계가 두만강 북쪽 600여 리에 다다랐으며 선춘령(先春嶺)에 윤관의 경계비가 세워졌다는, 당시 거주민인 여진족이 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조선 후기 한백겸(韓百謙) · 신경준(申景濬) · 정약용(丁若鏞) 등의 실학자로서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자들은 공험진이 길주 이남에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들의 주된 근거 중의 하나는 길주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곳을 어떻게 지배하여 성을 쌓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지리적 형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윤관이 정벌 당시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여 영주의 청사에 현판으로 새겨 걸게 한 기록 중 “그 땅이 사방 3백 리이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개마산이 끼여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 · 정주(定州 : 정평)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을 9성의 범위로 해석한 것이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조선 초기의 윤관이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을 날조된 것으로 해석하고, 함흥 부근의 옛 성터에 자의적으로 비정함으로써 그 위치를 남쪽으로 축소시켰다. 특히, 공험진을 함흥 남쪽에 비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윤무병(尹武炳)은 길주성은 지금의 홍원군(洪原郡) 학천면(鶴泉面) 천계봉산성(天鷄峰山城)에 비정하고, 공험진은 함주군(咸州郡) 덕산면(德山面)의 상대리산성(上垈里山城)에 비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두만강 북쪽 6백 리에 세워졌다고 하는 윤관의 공험진비와 선춘령비는 믿을 수 없는 자료로 논증하였다. 즉, 1392년에 한도리족(翰都里族)이 처음으로 전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 땅의 비석’이라는 것은 혹 고구려의 옛 비석인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고려 말기 고려에서 동북면의 최북상 경계를 공험진으로 알았으며 대명 외교에서 이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사』의 윤관 비에 대한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그가 고려 시대의 산성의 유적에 유념하면서 문헌 자료를 검토한 점은 학계에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으나, 일본인 학자의 설에 추종한 듯한 느낌이 든다.

김구진(金九鎭)은 조선 초기의 문헌 자료가 진실성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600리 지점에까지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 근거에는 앞에서 소개한 영주청에 현판으로 걸었던 임언의 글을 전체의 성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영주(英州)에 대한 기술로 이해하고, 그 땅의 사방 300리라는 것을 6주가 각각 300리로 해석하였다. 또한, 공험진은 9성이 환부되었을 때 환부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축성이 된다고 하여 부한 성의 남쪽에 비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윤관의 군대가 수군을 이용하여 17만이 출정하였다면 두만강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고려 시대 윤관이 설치한 9성은 전혀 근거 없는 곳에 새로이 개척한 것이 아니라 이에 고려의 세력이 미치고 있었던 기미주였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설은 여진족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서 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공험진의 현재 위치 문제와 두만강 북쪽 600리 지점에 공험진비와 선춘령비가 세워졌다는 문제는 앞으로 현지 답사를 통하여 좀더 신중하고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고려는 13세기에 몽고족이 건설한 세계적인 대제국 원나라와 투쟁하고 교섭하는 동안 반란자들에 의하여 강역이 일시 축소되었다. 즉 1258년(고종 45)에는 함경도지방의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에 투항함으로써 원나라는 화주(和州)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1270년(원종 11)에는 최탄(崔坦)이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황해도 지방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자 원나라는 이곳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동녕부의 이 지역은 1290년(충렬왕 16)에 고려의 끈질긴 반환 요구로 인하여 고려에 환부되었고, 쌍성총관부는 1356년(공민왕 5)에 고려의 공략에 의하여 수복되었다.

공민왕 때에 몽고족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지방에 쳐들어왔으나 이자춘(李子春)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우왕 때에는 명나라의 후원을 받은 여진족 호바투(胡拔都)가 쳐들어왔으나 역시 이성계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이로써 함흥 이북과 두만강 유역은 고려의 세력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명나라는 쌍성총관부가 지배하던 지역은 명나라가 지배하여야 한다 하여 철령위(鐵嶺衛)라는 군단을 설치하려 하였다.

이에 우왕과 최영(崔瑩)은 철령위의 배후 세력인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14만 대군을 징발하여 출정시켰으나 압록강에서 이성계가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 문제를 포기함으로써 이 지역은 고려의 세력권 안에 들어왔다. 고려에서 철령위 설치를 반대함에 있어서도 고려 국경의 최북단은 공험진이었음을 강조했다. 고려 말의 강역은 압록강 중류의 벽동으로부터 강계(江界) · 장진(長津), 함경도 갑주(甲州 : 지금의 甲山) · 길주 이북까지에 걸쳐졌다.

조선의 강역

조선 초기에 중국 대륙은 명나라에 의하여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영향력은 요동반도 일대에 미칠 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만주 대륙은 여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정치 세력의 공백 지대였다. 특히, 두만강 유역은 태조와 그 선대들이 건국의 기틀을 연 땅이라 하여 왕실에서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즉, 경흥에는 목조(穆祖 : 李安社)와 그 비(妃)의 두 능이 있으므로 이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태조는 1393년에 이지란(李之蘭)을 보내어 공주(孔州 : 慶源)와 갑주에 성을 쌓았고, 1398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군현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다.

그 뒤 여진족의 침입이 있자, 세종은 “선대의 영토는 한치라도 줄일 수 없다.”고 하여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뒤 1434년(세종 16)에 회령부(會寧府), 1441년에 종성부(鍾城府) · 온성부(穩城府), 1443년에 경흥부(慶興府), 1449년에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하여 1398년(태조 7)에 설치한 경원부(慶源府)와 함께 소위 육진의 설치를 완료하였다. 또한 2차에 걸쳐 삼남 지방의 백성 3200호를 이주하게 하였다. 이로써 두만강이라는 큰 강을 자연 국경선으로 확정하였다. 육진의 개척에는 김종서(金宗瑞)의 공로가 컸다.

압록강 방면에는 1403년(태종 3)에 이전의 만호부였던 강계와 갑산을 각각 부(府)으로 개혁하고, 새로이 1416년에 여연군(閭延郡), 1433년에 자성군(慈城郡), 1442년에 무창군(茂昌郡), 이듬해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군(四郡)이다. 사군의 개척에는 최윤덕(崔潤德)이천(李蕆)의 노력이 컸다. 사군의 개척으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우리 나라의 강역이 되었다.

사군 지역은 산이 험악하고 광역이 넓어서 지키기에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세조 때에 몽고족의 오이라트부(瓦刺部)가 맹위를 떨치자 이들의 침입이 예상되므로 사군을 폐하였다. 1458년에 이를 폐사군(廢四郡)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행정 군현의 철수였을 뿐이었다. 폐사군에는 정조 때에 다시 사군이 설치되어 압록강 이남을 다스리게 되었다.

17세기에 만주족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청나라를 건국하고 만주는 물론 중국 대륙을 지배함으로써 만주 지역에 대한 새로운 국경상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길림 북방으로부터 봉황성 부근에 제방을 쌓은 다음 버드나무를 심은 유조변책(柳條邊柵)을 국경선으로 하였다. 이로써 간도 지방은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닌 상태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근 · 현대의 강역

근대에 이르러 강역에 대한 국경 및 영토 분쟁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서 비롯된다. 세계 열강이 각기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러시아는 동진 정책을 취함으로써 자연히 인접 국가인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 및 국경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에 자극된 청나라는 종래의 막연하고 관념적인 영토관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 · 현실적 자세로 인접국과의 강역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청나라의 영토관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그 실례가 백두산정계비로 나타났다.

이 비는 1712년 5월 15일 청나라가 백두산 천지(天池) 남쪽 4㎞ 지점에 세운 것으로, 높이 2척, 너비 1척 정도의 조그마한 빗돌에 모두 80자쯤의 비문을 새겼다. 그 중에 “서쪽은 압록강으로(경계를) 삼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으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으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領上 勒石爲記).”라는 대목은 경계에 대한 명문(明文)이다. 이 비는 우리 나라와의 협의 없이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세웠을 뿐 아니라, 백두산 주변의 지리적 상황에 미숙한 청나라의 관원들이 획정한 것이므로 뒷날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특히 ‘토문(土門)’이라는 말의 해석이 우리 나라와 청나라가 서로 달라서 녹둔도(鹿屯島) 및 간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 녹둔도 문제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은 북경조약에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우리 나라 동북 변경은 러시아와 역사상 최초로 국경선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토문’을 그들 나름대로 ‘두만강’이라 해석하고,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상류를 향한 만주 혼춘(琿春) 근역에 토자비(土字碑)를 세워 국경선을 획정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 나라와 청나라 간의 쌍방적 접경 관계가 삼각 접경 관계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종래 우리 영토였던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가 러시아령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이 섬은 사차내도(沙次乃島)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섬으로 일찍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의 내륙 침입을 방비, 견제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으로써 조선 정부에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882년 1월 고종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고 임지로 떠나는 그에게 “녹둔도는 본시 우리 땅이니 이번에 가서 되찾을 수 없겠는가 잘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1899년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국경 재감(再勘) 때에는 청나라측 대표인 오대징(吳大澂)에게 녹둔도 반환 교섭을 의뢰하였다. 그 뒤 우리 나라와 러시아 간에 국교가 열리자 러시아 공사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그들의 무성의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고종은 김광훈(金光薰) · 신선욱(申先郁) 두 사람을 현지로 파견하여 녹둔도 관계 지도를 작성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지도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의 녹둔도의 지리적인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나타낸 것이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주민 가운데 우리 민가가 113호로 인구 822명이 우리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는 녹둔도가 그들의 영토로 귀속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함은 물론 타국인의 접근도 막고 요새화해 갔다.

(2) 간도문제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동쪽은 토문으로 경계를 삼는다.”에서 ‘토문’은 실제로 만주 땅에 있는 송화강의 한 지류인데, 청나라는 이것을 두만강이라 우겨, 두만강의 이북에 위치한 간도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1883년(고종 20) 청나라의 돈화현 당국은 우리 나라 종성회령 읍민에게 토문강 이서(以西)와 이북 지역에 사는 한국인을 1년 이내에 추방하겠다는 방을 게시하였다. 이러한 조처의 근거도 백두산정계비 가운데 ‘토문’을 두만강으로 비정한 데 두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리하여 조 · 청간에 국경 분쟁이 야기되어 1885년 양국은 약 두 달간에 걸친 을유감계사정(乙酉勘界査定)에 이어 1887년 다시 두 달 반에 걸쳐 정해사정(丁亥査定)을 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가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 격동하는 극동의 정세 속에서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 외교권을 강탈, 대행하면서 1909년 2월 소위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국경선으로 결정함으로써 간도를 청국령으로 넘겨주고 말았다. 이는 오로지 일제의 대륙 침략 간계의 희생물이었다. 일제는 단기적으로는 행정관할의 편의주의에 따른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장차 만주 전역을 장악할 흉계로 잠시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체 선심을 쓴 결과였다.

간도의 청나라 귀속의 부당성은 정계비의 해석뿐만 아니라 실제적 상황에서 더욱 뚜렷하다. 첫째로, 간도 지방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 백성들이 우리 풍습 그대로 살아오던 우리의 터전이었다. 둘째로, 정계비가 건립된 이후에도 두만강 · 압록강 건너편 북쪽과 봉황성 사이에 완충 무인 지대를 설정하고, 조선과 청나라가 이를 엄격히 지켜왔다. 완충지대란 곧 중립지대이니 양측의 합의가 없는 한 어느 한편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측이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위 간도협약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 하천화함으로써 하천 관리 문제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마찰이 일어났다. 이 두 강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하상도서(河床島嶼)가 많이 있어 그 섬들의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두 강은 유로의 변동이 심한데다가 가끔 강물이 범람하여 강의 중심선으로 분계하든지 또는 최심지로 분계하든지 간에 강상도서(江床島嶼)의 영유권 결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우선 두만강 상의 고이도(古珥島) · 유다도(柳多島), 압록강 상의 황초평(黃草坪) · 유초평(柳草坪) · 신주평(信倜坪) · 영문강(迎門崗) · 신도(薪島) 등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 중 신도에 대하여는 조선 중기에 청나라가 자국령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일이 있었으나 곧 우리 영토임을 시인한 바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조선 말엽까지 양국 간의 이해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으나 인문 · 지리 · 교통상의 발달로 인하여 수자원 이용에 따른 발전소나 교량의 건설, 국제 철로 설치 운영 등등에 점점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광복 후에도 북한과 중국 간에 경계 문제로 말썽이 끊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초에 백두산 정상의 천지를 양분하는 국경선을 설정함으로써 일단 타결을 보았으나, 국경 하천 관할 상의 문제는 속출하여 양측은 각종 의정서의 작성 및 관련 위원회를 두어 조정해 오고 있다고 전한다.

(3) 독도 문제

이상 제기된 우리 북방의 강역 문제 외에 당면한 현안으로서 동해상의 독도 문제가 있다. 독도는 삼국시대 이래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우리의 어업전진기지로서 해상활동의 근거지가 되어왔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 『성종실록』 · 『숙종실록』 · 『동국여지승람』 등 허다하다. 우리 나라의 역대 왕조는 변경의 낙도에 대하여 때때로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써왔으나, 1881년(고종 18)에 울릉도 개척령을 발포하여 이 지역의 개발에 착수하면서 이 섬이 독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최초로 공식 문서에 나타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작성한 보고서이다.

그 뒤 일본이 소위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실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일본 내각에서 1905년 2월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일본령이라고 부당하게 발표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8 · 15광복 후 독도는 재론의 여지없이 우리의 영토로 환원되었으며, 1953년부터 우리 경비대가 상주하며 우리 주민이 정착,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자국령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해 지역은 동해 지역과 함께 일본과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는데, 대마도(對馬島)가 우리 판도에서 벗어남으로써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경계 수역(水域)을 설정하고 있다. 대한해협의 너비는 대체로 200㎞라고 하지만 가장 좁은 해역은 50㎞ 안팎의 곳도 있다. 경계는 서수도(西水道) · 동수도로 구분되며,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210m나 되고, 평균 수심도 100m가 넘어 동해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요 항로가 되어 있다. 서해 경역은 제주도 남단의 마라도(馬羅島)에서 압록강 최하류인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馬鞍島) 서단으로 이어지는 해역이 우리 나라 영해이다.

(4) 우리 강역의 현황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강역은 「대한민국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반도 내륙과 그 연안의 부속도서’로 이루어지는데, 위도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극동은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 동단인 동경 131°52′42″, 극서는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 서단인 동경 124°11′, 극남은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인 북위 33°06′44″, 극북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진(柔浦鎭) 북단인 북위 43°00′39″에 해당한다. 내륙 면적은 약 22만 1,000㎢, 남북 길이는 1,100㎞, 동서 간의 최단 길이는 175㎞, 부속도서는 약 3,962개이다.

영해는 세계적 추세에 따라 1978년부터 동해는 해안으로부터 12해리선을, 황해 및 남해는 가장 바깥쪽 도서를 연결하는 선을 기선(起線)으로 잡아 여기서부터 12해리선을 원칙으로 삼아 영해 범위로 선언하고 있다. 다만, 제주도 · 울릉도 · 독도는 단순히 해안으로부터 12해리까지를 영해로 설정하였다. 영해는 원칙적으로 내륙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배타적 관할 하에 들어가는 수역이지만 국제 관례상 제주도 북쪽 수역에는 무해통행(無害通行)이 허용되고 있다. 끝으로 영공권은 영토와 영해를 포함한 고공(高空)의 공역(airspace)으로 여기서도 배타적 주권이 미친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의 강역은 북방의 일면이 대륙과 연접해 있으면서 백두산 지역의 영유권 문제, 간도 귀속 문제,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 귀속 문제,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하천상의 강역 및 강계(疆界)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강역 문제들을 논함에 있어 구강 상실 지역 · 재감계 지역 · 원상 회복 지역 등으로 구분하여 꾸준히 그 해결책을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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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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