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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제(軍制)

국방제도

 군의 창설·유지 및 운용에 관한 일체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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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 군제
분야
국방
유형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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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창설·유지 및 운용에 관한 일체의 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한 나라의 군제는 국방체제·병역제도·군비·교육훈련 등의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국가제도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시대적 성격이나 전쟁의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군제는 국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군제의 우열 여부는 민족의 생존과 국가 존립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가가 강성했을 때는 군제가 충실하였고, 국가의 정치가 혼란하고 군제가 미비했을 때는 비록 군대가 있어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대
(1) 삼국시대 이전
이전 역사시대로 접어들기 이전 단계인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나 청동기시대의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이나 부족 자체가 군사조직이었고, 성년이 된 씨족원이나 부족원이 곧 군인이었다. 미성년자들은 집회를 통해 무술을 익히다가 성년이 되면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군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유물의 대부분이 무기라는 사실도 성년이 되면 모두 군인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상태는 부족국가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국가에서는 예리한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는 권력자가 등장하여 부족국가의 대표자로서 군사지휘권을 행사하였고, 부족국가의 구성원은 바로 군인이었다.
서기전 9, 8세기경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늦어도 서기전 4세기경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부족연맹국가로 성장한 고조선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고조선 사회를 위만(衛滿)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멸망시켰다는 기사로 미루어 보아, 일정한 군사를 거느린 족장 또는 지배자가 각지에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부족국가가 부족연맹국가로 발전한 시기에는 각 부족국가군(軍)을 중심으로 편성된 연맹군을 연맹장인 왕이 직속으로 두었다. 그러나 부족연맹국가 말기에 이르면 각 부족의 군사조직은 서서히 내부에서 붕괴하기 시작한다. 즉,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아닌, 일부의 선택된 사람들로서 군대가 조직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조짐은 3세기의 부여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여러 가(加)주 01)가 이에 참여하고 하호(下戶)주 02)들은 식량을 날랐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전투를 담당하는 ‘가’와 식량을 운반하는 ‘하호’ 등으로 점차 본격적인 계층사회가 형성되면서 군사조직도 변하게 된 것이다. 이는 가장 먼저 정복국가로 발전한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세기경의 부여와 고구려는 ‘가’ 밑에 대가(大家)인 무사계층이 있어서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제각기 무장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무기를 장만하였다.
이러한 대가 내지는 호민(豪民)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가 삼국시대로 가면서는 고대국가로 성장한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가 차원의 군사조직을 형성하게 되고, 원시적인 씨족이나 부족을 단위로 했던 군사제도는 무너져 갔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정복을 위한 투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군사권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국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내지는 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국왕의 지휘를 받는 전국적인 군사조직이 편성되었다.
즉, 국왕은 모든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거나, 무장(武將)인 귀족을 파견하여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구체적인 부대편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흔히 독립된 단위부대를 군기(軍旗)의 뜻을 가진 ‘당(幢)’이라 하였고, 귀족이 당주(幢主)가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장군인 무관을 대모달(大模達) 또는 막하라수지(莫何羅繡支)라 하여 제5관등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으로 임명하였다.
대모달은 대당주(大幢主)라고도 했는데, 이는 여러 당의 연합부대장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대모달 밑에는 1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말약(末若 또는 末客, 郡頭) 등이 있어서 제7관등인 대형(大兄)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단위 부대장인 당주를 가리키는 듯하다.
백제는 왕도(王都)의 오부에 제2관등인 달솔(達率)이 각기 500명씩의 부병(部兵)을 거느렸다. 따라서, 당시 백제 왕도의 수비병은 25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에서는 처음에는 왕경육부 소속원으로 편성한 육부병이 왕경을 수비하였다. 그것이 6세기 초엽에 이르러 왕경 주위로 확대 배치되어 육기정(六畿停)주 03)으로 편성된 듯하다.
그 뒤 6세기 중엽 진흥왕 때에 6개의 부대를 통합하여 대당이 편성되고, 당시 군사력의 기본이 된 육정(六停)의 효시가 되었다.
그 동안 확장한 영토에 주(州)를 설치하고, 주마다 군단을 두어 대당 외에 상주정(上州停)·귀당(貴幢)·신주정(新州停)·비열홀정(比列忽停)·하주정(下州停) 등 육정을 편성한 것이다.
이들 육정은 모두 주치(州治)에 배치되었고, 왕경육부인을 기본으로 하는 대당 외에는 주병(州兵)을 기본 군사력으로 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진골 출신의 군주(軍主)주 04)가 이들을 통솔했다.
육정군은 그 복무를 명예로운 권리로 생각하는 이른바 특권을 누리는 신분으로서 명망군(名望軍)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육정군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 화랑도와 같은 청소년단체였다.
신라에는 육정 외에도 귀족 무장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선발하여 편성한 소모병(召募兵)이 있었다. 이 부대는 실제로는 당의 성격을 지녀 뒤에 서당(誓幢)·낭당(郎幢) 등의 설치로 점차 증가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각 지방에는 과거에 부족들이 웅거하던 지역에 쌓은 성이 있었는데, 성병(城兵)들이 이를 지켰다. 이들 성은 지방 군사조직의 핵으로서 그 본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방통치 구획의 기능을 하여 뒤에 중국식으로 군(郡)이라 표현되기도 하였다.
‘성’의 장관을 고구려는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 백제는 군장(郡將) 또는 도사·성주(城主), 신라는 당주 또는 군사대등(郡使大等)이라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성주라고 불렀다.
성주는 중앙귀족으로서 행정보다는 성병의 편성·동원 등의 군사적 성격이 더 강했다. 또한, 성병은 현지 토착민으로, 평시에는 농경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동원되었으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사훈련조직으로 고구려의 경당(幢堂) 등이 있었다.
군 규모의 성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小城) 또는 촌(村)이라고 구별했으며, 신라의 현(縣)이 이에 속한다. 소성의 장관을 고구려는 가라달(可邏達), 신라는 도사라고 했으며, 역시 중앙에서 파견되어 촌락사회를 직접 다스렸다.
군 규모의 여러 성을 통할하는 행정구획이 대성(大城)으로서 고구려는 오부(五部), 백제는 오방(五方)으로 구분했고, 신라는 ‘주’라 하여 통일 후 구주(九州)로 정비되었다.
삼국의 대성에는 각기 욕살(褥薩)·방령(方領)주 05)·군주(軍主)주 04) 등의 장관을 파견하였다. 대성도 군사적 성격이 강하여 군관구조직(軍管區組織)과 비슷하였다.
이와 같이 대성·성·소성으로 편제된 삼국의 지방행정조직은 군사적 성격이 더욱 강하여 전국이 군사조직체와 같았으며, 그 장관도 오히려 군정(軍政)의 책임자였다. 고구려에는 멸망 당시에 이러한 성이 176개가 있었고, 백제에는 57개의 군에 2백여 개의 성이 있었다.
(3)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군사제도는 한층더 정비되어 행정구획과 구분되어 갔다. 통일신라시대의 군사제도는 왕을 직접 호위하는 친위군(親衛軍)과 왕권 수비를 위한 중앙군 및 지방군으로 구분되었다.
국왕을 직접 호위하던 시위부(侍衛府)는 통일 이전인 624년(진평왕 6) 시위부에 대감(大監) 6인을 두고 처음으로 조직되었으나, 상설(常設)되지는 않은 듯하다. 651년(진덕여왕 5)에는 소속 군사의 수가 불어나 삼도(三徒)로 편제하였다.
통일 후인 681년(신문왕 1) 김흠돌(金欽突) 사건 직후 장군 6인을 두어 시위부를 강화하여 전제왕권을 보호하는 친위부대로 성장했으며, 군사의 수가 180명에 불과한 것은 가장 정예한 자로 편성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중앙 군사조직은 종전의 육정이 통일 후에 구서당(九誓幢)으로 정비되었다. 서당도 6세기 말에 신라인으로 편성된 중앙 군사조직이었으며, 672년(문무왕 12)에는 장창당(長槍幢)까지 조직했다.
그러나 통일 후 백제민으로 백금서당(白衿誓幢)을, 고구려·말갈인으로 황금서당(黃衿誓幢)·흑금서당(黑衿誓幢)을,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였던 안승(安勝)의 보덕성민(報德城民)으로 벽금서당(碧衿誓幢)·적금서당(赤衿誓幢)을, 백제의 잔민(殘民)으로 청금서당(靑衿誓幢)을 조직하여 이미 신라인으로 편성되어 있던 녹금서당(綠衿誓幢)·자금서당(紫衿誓幢)·비금서당(緋衿誓幢)과 함께 총 구서당으로 정비한 것이다.
이로써 종래의 육정이 존재 의미를 상실하여 전제왕권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주체는 구서당으로 옮겨졌다. 또한, 구서당은 피정복민으로 편성한 부대가 전체의 3분의 2에 달하여 백제·고구려 유민을 관용으로 포용하여 민족의 융화를 꾀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전제왕권을 옹호할 수 있게 한 부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조직은 중앙군을 천민의 성격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지방 군사조직은 십정(十停)으로 정비되었다. 신라는 통일 후 지방을 구주로 나누어 주마다 1정씩의 군부대를 두었다. 다만, 지역이 넓고 국방상의 요지인 한주(漢州)에는 2정을 배치하여 모두 십정으로 하고 각 지역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주치(州治) 가까운 곳에 배치하였다.
이들 십정의 군대는 대개 기병(騎兵)으로,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십정 외의 지방 군사조직으로는 오주서(五州誓)가 있었다.
오주서는 국방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청주(菁州)·완산주(完山州)·한산주(漢山州)·우수주(牛首州)·하서주(河西州)에 설치되었으며, 역시 기병으로 편성된 듯하다.
이와는 달리 주로 보병으로 편성된 지방군으로는 만보당(萬步幢)이 있었는데, 이들은 구주에 고루 배치되었다. 이 밖에도 순수하게 국방을 위해 국경지대에 배치된 삼변수당(三邊守幢)과 삼국시대에 조직된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 등도 그대로 배치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
(1) 고려 전기
9세기 이후 각지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세력을 휘두르던 호족들은 마침내 10세기 초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의 세력권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통일을 완성한 고려는 왕권과 이들 호족세력과의 대립에서 오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 10세기 말엽인 성종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해 갔다. 따라서, 성종 때를 계기로 군사조직도 중앙은 2군6위(二軍六衛), 지방은 주현군(州縣軍) 등으로 정비되어 갔다.
중앙군은 태조의 직속부대와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토대로 서서히 편제되었다. 당시 고려의 중앙군은 처음에는 중군(中軍)·좌강(左綱)·우강(右綱)의 3군으로 편제되었다.
위와 같은 체제가 변해서 중앙군을 대표하는 6위가 편제된 때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가 대폭 정비된 995년(성종 14)으로, 왕의 친위군인 2군이 편제된 때는 거란의 침입, 김훈(金訓)·최질(崔質)의 반란 등이 일어나 궁성시위군의 강화가 절실했던 현종 때일 것으로 추측된다.
2군6위의 편성과 기능을 도표로 보면 아래와 같다. 여기서 보승과 정용은 각각 보군(步軍)과 마군(馬軍)으로 구분되며, 역령·상령·해령 등은 일정한 특수부대를 지칭한다. 이들 2군6위의 군대는 모두 45영으로 편제되었다. 1영은 1천 명을 단위로 하므로 그 총수는 4만5천 명에 이른다.
2군6위에는 각각 정·부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대장군 각 1인씩이 있어 해당 군·위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합좌기관(合坐機關)으로 중방(重房)을 구성하였다.
이군육위 밑에는 영(領) 이하의 더 작은 단위부대로 나누어져 따로 하급장교를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이들도 역시 회의체(會議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지휘관은 각각 회의기관인 방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장교의 권리를 보장받고, 군졸의 지휘통솔에 관한 여러 업무를 의논하였다. 영의 행정요원으로는 장사(長史) 1명,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2군6위는 신분과 군역을 세습하는 특수 신분층인 군반씨족 출신의 전문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앙군은 군호(軍戶)주 06)를 형성하여 군적(軍籍)에 따로 올려졌으며, 군인전(軍人田)과 이를 경작할 2명의 양호(養戶)주 07)가 주어져 장비와 생활비를 공급받았다. 중앙군에 결원이 생기면 선군(選軍)하여 보충하고 군인전을 지급하였다.
선군은 젊고 용략(勇略)이 뛰어난 농민을 대상으로 했으나, 때로는 천민도 선발되어 군인의 사회적 신분을 낮추는 원인이 되었다.
지방군은 군사와 역역(力役)주 08)을 주로 담당한 주현군과 국방을 주로 담당한 주진군(州鎭軍)으로 구분된다. 주현군은 그 계통에 따라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947년(정종 2)에 설치된 광군(光軍) 계통의 군사력이다. 광군은 호족의 지배 아래 있던 군사를 중앙정부의 통제 속으로 흡수한 예비군 성격의 군대로, 그 수는 30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그 지방의 농민으로 구성되어 중앙의 광군사(光軍司)의 지휘 통제를 받는 한편, 그 지방의 호족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력이었고, 뒤에 역역을 담당하는 품군(品軍)으로서 주현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중앙에서 12군과 5도호부의 진수군(鎭守軍)으로 배치된 군사력의 계통이다. 고려는 새로 정복한 지역의 군사적 통제를 위하여 후백제와 신라의 옛땅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동·서 양계(兩界)주 09)에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황해도 돌출부에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두어 군대를 상주시켜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방지대가 변경으로서의 의의가 없어지자 양계를 제외한 기타 지역의 도호부는 거의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한편, 983년(성종 2) 설치된 12목(十二牧)이 995년에 12군, 즉 12주 절도사로 개편되면서 군사적으로 지방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다시 1018년(현종 9) 지방행정조직이 완성되면서 이로부터 주현군이 분리되어 12군을 비롯하여 중앙에서 배치된 군대는 중앙군과 같은 전투부대적 성격의 보승·정용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양계를 제외한 남도지방의 주현군 수는 보승군 8,601명, 정용군 1만9754명, 일품군 1만9882명 등 총 4만8237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구획을 단위로 하여 그 치소(治所)주 10)뿐만 아니라 속현(屬縣)에도 배치되어 있었다.
위의 군사력 외에도 행정구획의 최하단위인 촌에 2품군(二品軍)·3품군(三品軍)의 군사조직이 있어서 이 수를 합치면 주현군은 약 60만 명에 이른다.
보승·정용 등은 대개 자영농민인 데 반해 촌을 단위로 하는 2품군과 3품군은 전군(佃軍)으로서 집단으로 과전(科田) 등의 경작에 동원되는 전호(佃戶)주 11)의 지위에 있었다.
주진군은 북방 국경지대인 양계의 지방군으로, 주현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고려가 후백제나 신라의 접경지대에 설치했던 진(鎭)은 통일 뒤 점차 주현으로 대체된 반면, 북쪽의 국경이 확대됨에 따라 양계에 점차 진을 증설하여 1018년경에는 그 수가 28개나 되었다.
이들 진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무장도시로서 독립된 전투 단위부대를 형성하여 안북·안변 두 도호부에 예속되었다. 주진군도 주현군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양계의 주진군은 초군(抄軍)주 12)·좌군(左軍)·우군(右軍) 및 보창군(保昌軍)·영새군(寧塞軍) 등의 기간부대와 북계의 신기(神騎)·보반(步班)·백정대(白丁隊), 동계의 공장(工匠)·전장(田匠)·투화(投化)·생천군(鉎川軍)·사공대(沙工隊) 등의 예비군 성격의 군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주진군 총수는 약 14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 핵심은 역시 초군 및 좌·우군이었고, 보창군과 영새군은 일종의 후원부대였다.
이들의 신분은 양반(신기 등)부터 백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으나, 주류는 역시 농민인 백정이었고, 중앙군과는 달리 둔전군(屯田軍)주 13) 성격을 띠었다.
상비군 성격을 띠는 주진군의 지휘권은 중랑장(中郎將) 또는 낭장(郎將) 가운데서 임명되는 도령(都領)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주·진의 예비군이나 둔전을 포함한 모든 책임은 주의 방어사(防禦使)와 진의 진장(鎭將)이 졌으며, 이들은 양계의 장관인 병마사의 통제를 받았다.
주진군의 주요 임무는 요지에 설치된 성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특히 장성(長城)이 지나가는 주·진은 수(戍)주 14)자리를 설치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의 소규모 침입을 막는 등 북방국경의 제일선을 지키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2) 고려 후기
문신귀족 중심인 고려사회에서는 군사를 동원하는 일도 문신이 맡아 최고사령관인 원수(元帥)의 직책까지 독점하였다. 그러므로 무신은 비록 상장군이나 대장군이라 하더라도 한갓 전투기술자에 불과하였다.
2군6위의 군인도 가혹한 역역에 동원되는가 하면,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군역을 피하여 도망함으로써 군반씨족이 서서히 소멸하는 군사제도의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국가가 큰 규모의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병력 염출방법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 노력이 숙종 때 여진족토벌을 위한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의 세 부대로 나누어진 별무반(別武班)의 설치로 나타났다.
별무반의 편성은 군반씨족과 관계없이 문·무의 산관(散官)·이서(吏胥)에서부터 상인·노복, 주·부·군·현민 및 승도(僧徒)에 이르기까지 모두 징발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주·부·군·현민 가운데서도 백정으로 표현되는 농민이 주체를 이루었다.
이 같이 농민 중심의 군사조직이 생겨난 것은 고려 군사제도의 새로운 변화이지만, 이 변화가 몰락과정에 있던 군인들에게는 또 다른 불만요소가 되어 무신난으로까지 연결되었다. 고려 전기의 군사제도가 실질적으로 기능이 정지되는 것은 12세기 후반의 무신난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그때까지와는 달리 무신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군사제도의 변화가 없을 수 없었다. 2군6위의 중앙군은 형식적으로 존속할 뿐이었고, 용력(勇力) 있는 군인은 모두 무인정권의 최후 승리자인 최씨의 사병으로 편입되는 형편이었다.
최씨 사병의 중심은 도방(都房)이었다. 도방은 앞서 집권했던 경대승(慶大升)이 처음 조직했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도방병은 집권자와 주종관계로 연결되어 사병의 성격을 지녔다.
무인집권기의 무신들은 모두 무장한 문객(門客)·가동(家童)을 사병으로 거느렸는데, 최씨의 도방도 이러한 사병집단을 조직화한 것이다. 초기에는 하루에 6번 교대로 최씨의 사제(私第)에 당직하고, 출입할 때는 합번하여 신변을 보호하던 도방병이 뒤에는 수가 불어나 36번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또한, 최씨 정권은 기병을 편제한 마별초(馬別抄)를 두어 의장(儀仗) 구실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름뿐이던 6위의 금오위가 경찰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게 되었다.
야별초는 뒤에 그 수가 늘어나 좌·우 별초로 나누어졌고, 여기에 몽고와의 항쟁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온 자들을 신의군(神義軍)으로 만들어 삼별초(三別抄)로 발전한 것이다.
삼별초는 2군6위를 대신하여 경찰·전투 등의 공적 임무를 띠고 국가재정으로 유지하는 공병(公兵)이었으나, 사실상 최씨의 사은(私恩)을 입은 자들로 편성된 최씨정권의 전위부대여서 사병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로써, 군반씨족을 중심으로 한 고려 전기의 군사제도는 붕괴되고, 무인집권기의 사병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1258년(고종 45) 최씨 정권이 타도되고 이어서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는 과정에서 도방과 마별초 등이 없어졌고 삼별초도 해체명령을 받았다.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 항쟁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충선왕이 군사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사실상 고려의 군사제도는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시기의 군사 동원은 예컨대 13세기 후반의 일본 정벌이나 14세기 후반의 왜구(倭寇) 방어 등에는 원수 등을 각 도에 파견하여 농민을 별초(別抄)해서 전투의 주력으로 삼고, 전쟁이 끝나면 총사령관인 원수직을 해임하는 등의 임시방편을 취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농민 중심의 병농일치적(兵農一致的)인 군사체제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원수 중심의 병농일치적 군사조직을 제도화한 것이 지방의 익군(翼軍) 조직이다. 익군은 공민왕 때 서북면(西北面)의 서경(西京)·안주(安州)·의주(義州)·이성(泥城)·강계(江界) 등 국경이나 군사적 요지에 만호부(萬戶府)를 두고, 그 밑에 몇 개의 익(翼)을 둠으로써 제도화하였다.
익군이란 원래 동원된 부대의 우익(羽翼)이 되는 후원부대라는 뜻이며, 당시 일정한 지역에 몇 개의 군익(軍翼)을 두고 이것을 합쳐 하나의 군사 단위로 삼은 것이 익군조직이었다. 이에 소속된 군인은 바로 농민이었다.
익군체제는 1378년(우왕 4)에 이르러 전국 조직이 되었다. 그 조직은 10명을 통할하는 통주(統主), 1백인을 통할하는 백호(百戶), 1000명을 통할하는 천호(千戶)가 획일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였고, 몇 개의 천호부를 합쳐서 만호부에 소속시켰다. 또한, 해당지역 안의 모든 장정(壯丁)이 군인으로 편성되어 유사시에는 출정(出征)하고,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는 병농일치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남도지대에서는 1년 만에 익군체제가 폐지되어 익군은 양계에만 존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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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전기
조선 전기의 군사조직은 중앙에 5위(五衛)와 금군(禁軍: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경비하던 군대)이 있었고, 지방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 정부는 또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입각한 병농일치체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민개병제의 원칙은 당시 형성되어 있던 양반계층이 사실상 군역에서 제외되고, 천민계층도 때로 특수병에 뽑히게되는 경우 외에는 군역에서 제외된 까닭에 군사력의 주류는 역시 절대 다수인 양인농민(良人農民)이었다. 한편, 중앙군은 병농일치체제와 관계없이 특수병으로 채워지기도 하였다.
중앙군은 건국 초엽 고려 때의 2군6위를 바탕으로 하여 10위(十衛)·10사(十司)·12사(十二司) 제도로 변혁이 반복되다가, 1451년(문종 1) 5사(五司)로 개편된 뒤, 1457년(세조 3) 5위제도로 정착되었다. 이는 고려 이래의 전투편성인 5군진법(五軍陣法)에 따른 편제로 강화된 체제이다.
또, 5사 25영으로 편성하여 각 영마다 여러 병종을 분속시키던 것을 5위에 병종별로 분속시킴으로써 조직의 일원화가 아닌 기능의 일원화를 도모한 것이 특색이다.
5위제도는 1469년(예종 1) 각 위 소속 병종의 재조정을 거쳐 5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지휘 아래 5위가 연계되는 체제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의흥위(義興衛, 중위)…갑사(甲士)·보충대(補充隊)
중부(中部)…경중부(京中部), 개성부(開城府), 경기도
양주·광주·수원·장단 진관(長湍鎭管) 군사
좌부(左部)…강원도 강릉·원주·양양 진관 군사
우부(右部)…충청도 공주·홍주 진관 군사
전부(前部)…충주·청주 진관 군사
후부(後部)…황해도 황주·해주 진관 군사
용양위(龍驤衛, 좌위)…별시위(別侍衛)·대졸(隊卒)
중부…경동부(京東部), 경상도 대구 진관 군사
좌부…경주진관 군사
우부…진주진관 군사
전부…김해진관 군사
후부…상주·안동 진관 군사
호분위(虎賁衛, 우위)…족친위(族親衛)·친군위(親軍衛)·
팽배(彭排)
중부…경서부(京西部), 평안도안주진관 군사
좌부…의주·구성·삭주 진관 군사, 창성·창주·방산·
인산 진관 군사
우부…성천진관 군사
전부…영변·강계·벽동 진관 군사, 벽단·고산리·위원
·이산·연원 진관 군사
후부…평양진관 군사
충좌위(忠佐衛, 전위)…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
파적위(破敵衛)
중부…경남부(京南部), 전라도 전주진관 군사
좌부…순천진관 군사
우부…나주진관 군사
전부…장흥·제주 진관 군사
후부…남원진관 군사
충무위(忠武衛, 후위)…충순위(忠順衛)·정병(正兵)·장
용위(壯勇衛)
중부…경북부(京北部), 영안도 북청진관 군사
좌부…갑산진관 군사, 삼수·혜산 진관 군사
우부…온성·경원·경흥 진관 군사, 유원·미전·훈융
진관 군사
전부…경성·부령·회령·종성 진관 군사, 고령·동관
진관 군사
후부…영흥·안변 진관 군사
위와 같이 5위에 소속된 병종은 모두 13종으로서, 이를 정리하면 다음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족친위·친군위·충의위·충찬위·충순위·보충대 등 왕실의 먼 일가나 왕실과 관계되는 자, 공덕으로 음직을 받은 자손 및 고급관리의 자손 등 신분상의 특전으로 편입되는 병종과, 둘째 갑사·별시위·파적위·장용위·팽배·대졸 등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신분의 사람들이 특전과 관계없이 무예시험을 통하여 선발되는, 군사적 기능에 치중한 병종, 셋째 정병과 같이 양인 농민의 의무군역자로 중앙에 번상하는 병종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숫자로나 기능면으로나 뼈대를 이룬 병종은 갑사와 정병이었다.
5위는 각 위마다 5부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 5부의 하나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지방군의 지휘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에게 맡겨져 있었으므로 이러한 진관의 배속은 실제 지휘체계가 아니라 바로 전국적인 대열(大閱)·강무(講武) 등의 훈련체제였다.
이들 5위군은 병종마다 그 설치 연대와 목적 및 신분·군사적 기능과 번차례가 각각 다르면서도 각각 맡은 바에 따라 입직(入直)·시위(侍衛)는 물론 수도 경비와 때로는 부방까지도 해야 하는 조선 전기 군제의 뼈대를 이루는 군대였다.
5위의 조직편제는 진법체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졸(卒)·오(伍)·대(隊)·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어, 1여는 125인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편제는 지방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 이상은 반드시 5위=25부=100통(統)으로 편성되도록 하되, 말단 편성단위인 통의 인원 규모는 병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조정할 수 있어 통의 인원 수에 따라 전체의 병력 규모가 결정되었다.
5위의 군 계급은 각 병종 자체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에 공통된 계급제도로 존재할 수 없었다. 다만, 서반 체아직(遞兒職)주 15)을 받아 근무하는 군사는 그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5위의 체아직은 5위 병종의 일부에만 지급되었고, 실상은 군사관계 이외의 요원들에게 서반직(西班職)주 16)을 줌으로써 많은 수가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앙군의 테두리에 들면서도 5위에 속해 있지 않는 군대로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의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수는 적으나 왕권강화와 직결되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설치되고 법제화하였다.
내금위는 1407년(태종 7) 왕이 궁중에 숙위하던 내상직(內上直)을 개편한 것이며, 『경국대전』에는 190명 정원으로 규정되어 있다. 겸사복의 설치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61년(세조 7)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며, 정원은 50명이었다.
우림위는 1492년(성종 23) 특수신분층인 서얼 출신을 대상으로 편성되었고, 정원은 50명이었다. 이들은 국왕 측근에서 근무하는 친병인 까닭에 엄격한 무예시험을 거쳐 선발되었고, 대체로 번차(番次)주 17)없이 장번(長番)주 18)으로 근무하면서 전원 체아록(遞兒祿)을 지급받았다.
이들 3개 위는 각각 내금위장 3원(員), 겸사복장·우림위장 각 2원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들은 모두 내장(內將)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1484년(성종 15) 행행(幸行)주 19) 때의 시위를 전담하도록 할 목적으로 청로대(淸路隊)를, 이와 비슷한 것으로 1489년 영별군장(領別軍將)을, 1512년(중종 7)에는 한량(閑良) 등을 구성원으로 하여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군사들은 모두 금군을 강화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두었으나, 역시 금군의 주체는 내금위 등의 3개 위였다.
지방군은 건국 초기에는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남방에는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육수군은 의무적으로 번상(番上)주 20)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이나 진에 부방(赴防)주 21)하는 영진군(營鎭軍)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와 그 밑에 둔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영진군이 부방하는 영과 진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내륙지방은 방어할 군대가 없었다.
이러한 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과 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고, 1442년(세종 24) 이후 재정비하였다.
잡색군은 마병(馬兵)주 29)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명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시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조직 체계를 갖추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기선군은 뒤에 선군(船軍), 다시 수군(水軍)으로 명칭이 바뀌어 갔다. 건국 초 사병이 혁파되고 특수병인 갑사 등이 강화되어 시위패의 중요성이 줄어 들자 그 일부를 영진군과 기선군에 편입시켜 보강하였다. 이로써 기선군의 수는 약 5만 명에 이르렀다.
대개 연해민(沿海民)주 22)들 가운데서 기선군이 충당되어 고된 해상근무의 대가로 어염(魚鹽)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특전이 주어져 왔으나, 점차 어염의 이익이 자염(煮鹽)주 23)의 역으로 변하여 군역에 덧붙여져서 더욱 고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선군의 역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그 신분이 신량역천(身良役賤)주 24)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별로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와 그 밑에 수어처(守禦處)별로 두어진 포(浦)에 배치된 만호·천호 등이 지휘하였다. 기선군은 양번(兩番) 교대로 복무하였다.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고려 말 이래의 익군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익군은 중요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몇 개의 군익도(軍翼道)에 나뉘어 소속되어 유기적 군사단위를 이룸으로써 하나의 계통을 가지고 군사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짜였다.
행정구획 도를 단위인 도별로 역시 병마도절제사가 있었으나, 구체적 군사행동에서는 군익도가 중심 단위가 되었다. 익군도 양인농민으로 편성된 점에서는 남방의 영진군과 비슷하나, 거주지가 곧 복무하는 곳이어서 번차에 의한 부방과는 매우 달랐다.
이상과 같은 군사조직이 진관체제로 정비된 것은 1455년(세조 1) 이후의 일이다. 이때에는 전국적으로 내륙지방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三翼)으로 나누어 소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이로부터 다시 일원화되어 1458년 진관체제가 편성되었다.
진관체제는 행정구역상의 도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군사기지로서의 주진(主鎭)·거진·진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일원적 군사체제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어서 1464년에 모든 지방군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함으로써 이름 그대로 균일한 국방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각 고을의 정병은 평시에는 거주하는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다가 번차에 따라 상경, 숙위하거나 배정된 진에 머물러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수군의 경우는 이미 세종 때부터 진관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1466년 지방군의 최고지휘관인 병마도절제사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바꾸고, 그 동안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로 바뀌었던 수군의 최고지휘권자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바꿔 주진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은 각각 병사·수사로 통칭되었다. 각 도의 육수군은 병사 아래로 우후(虞侯)와 대개 지방수령인 첨절제사·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절제도위(節制都尉)로, 수군은 수사 아래로 우후와 만호·천호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이 형성되었다.
병사와 수사는 도별로 국방상의 중요성에 따라 1∼3원까지 두었다. 병사와 수사가 1원인 경기도와 같은 경우, 관찰사가 모두 겸하였고, 2, 3원인 도에서도 1원은 반드시 관찰사가 겸하여 지방행정의 최고책임자인 관찰사가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거진·진의 군사지휘권자도 역시 수령이 겸하여 군사 전문가가 아닌 문신 중심의 지휘체제가 되어 자칫 형식에 흐르는 폐단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관체제 아래서 정병은 각 진관에 적을 두고는 있었으나, 병농일치의 상태인 이들을 항상 무장시켜 주둔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이른바 호(戶)·보(保)주 25) 제도가 있어서 현역으로 근무하는 호, 즉 정병과 이를 돕는 보를 두어 정병이 상번(上番)주 26)일 때는 포(布)를 내어 보조하도록 하고, 하번일 때는 정병 스스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병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조선 정부는 도마다 전략상 중요한 지역에만 군사를 배치하여 그곳을 집중적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이 군사력을 유방군(留防軍)이라 하였다.
그 숫자는 충청도는 9여(旅)에 1125명, 경상도는 24여에 3천 명, 전라도는 13여에 1375명, 황해도는 8여에 1천 명, 강원도는 2여에 250명 등이며, 4번 교대로 1개월씩 상경, 숙위하던 정병이 8교대로 2개월씩 복무한 것과 사실상 같았다.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의 정병과 갑사는 거주지에서 방어에 임하도록 하여 국경지대의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경기도는 대개 중앙군이 방어에 임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에 번상하거나 지방에 유방하는 정병과 보 및 잡색군을 합치면 진관체제 아래의 지방군은 약 50만∼6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측한다.
진관체제는 전쟁도 하고 방위도 한다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원칙 아래 전국을 방위지대로 조직, 편제한 것이었으나, 많은 적이 침략해 올 때는 오히려 군사력이 분산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더욱이 정병의 군역부담이 커져 도망과 유리(流離)주 27)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 틈을 타 공역에 다른 사람을 대신 내보내는 폐단도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15세기 중엽부터 공행(公行)된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는,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장정을 늘려 사실상 군사조직이 유지되지 못하는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허약해진 방위체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적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응변책이 강구되었다.
제승방략은 먼저 함경도에서 이일(李鎰) 등에 의하여 시도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응전하는 방책이었다.
따라서, 유사시에는 각 읍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지정된 방어지역으로 집결하나, 이들은 군사지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중앙에서 파견되는 순변사(巡邊使)·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防將) 등의 경장(京將)과 병·수사가 지휘권을 가졌고, 수령은 인솔책임만을 졌다.
제승방략은 이와 같이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 방어태세의 이점은 있으나, 후방지역은 군사가 없어 한 번 방어선이 무너진 뒤에는 이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진관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창궐하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16세기 초반부터 남방에도 제승방략체제를 적용하게 되었다.
결국, 16세기 말엽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이일의 상주싸움과 신립(申砬)의 충주싸움에서 패전한 뒤, 후방군이 없었던 까닭에 왜군이 상주에서 충주, 다시 서울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북방은 그래도 무장(武將)이 파견되어 방어에 임하였으나, 남방은 군사를 모은 뒤 경장(京將)의 파견을 기다려야 하는 불합리성을 안고 제승방략이 실시되던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2) 조선 후기
조선 후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5군영(五軍營)과 금군,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는 거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있었다. 이를 틈타 침입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사제도의 재정비·재편성이 시급하였다.
이에 16세기에 변방비어(邊方備禦)를 위하여 설치한 비변사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하는 훈련도감을 중앙에 설치하였다.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개발한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바탕으로 한 훈련도감의 설치는 조선 후기 중앙군사제도의 핵심이 되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성룡(柳成龍)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 이름과 같이 임시군영으로서 설치되었으나, 그 뒤 필요에 따라 영설군영화(永設軍營化)하여 중앙의 핵심 군영이 되었다.
유성룡은 기민구제·정병양성을 주안점으로 하여 훈련도감군을 장번(長番)주 18)의 급료병(給料兵)으로 편성함으로써 용병제의 시초를 이루었고, 과거의 궁시(弓矢) 중심의 편제를 포수 중심의 편제로 바꾸었다.
훈련과 조직도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 단위 전투형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는 편제로, 일정하지는 않으나 120∼125명의 병력이 군사조직의 기본 단위인 1초를 이루며, 초의 다소에 따라 사의 수가 결정되었다.
훈련도감의 지휘부는 의정(議政)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1원과 병조판서 및 호조판서가 겸하는 제조(提調)의 자문 아래, 대장(大將)주 28) 1원, 중군(中軍) 1원, 별장(別將) 3원, 파총(把摠) 6원, 종사관(從事官) 4원, 초관(哨官) 34원으로 편제되었다.
이 지휘부 아래 좌·우 양부 6사 33초로 편제되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마병(馬兵)주 29) 7초에 833명, 포수 20초에 2440명, 살수 6초에 738명 도합 33초에 4011명이었다.
이 밖에도 군관·별군관·지구관(知彀官)·기패관(旗牌官)·도제조군관·감관(監官)·약방(藥房)·침의(鍼醫) 등 군사훈련이나 각종 행정에 종사하는 직종이 있었다.
또, 일반 군사 외에 권무군관(勸武軍官)·별무사(別武士)·한려(漢旅)·국출신(局出身)·무예별감(武藝別鑑) 등 약 2백 명의 특수군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개의 경우 군공(軍功)이나 무과 남발 및 대우를 위하여 분속된 병종이었으며, 각 부서에 배치한 표하군(標下軍)도 1,230명이나 되었다.
훈련도감군은 후대로 내려 오면서 국가재정의 어려움으로 몇 차례 증감이 있었으나, 대개 5000여 명의 군총(軍摠)을 유지하며 수도방어의 핵심군 노릇을 했다.
훈련도감과는 달리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이 어영청과 금위영이다. 어영청은 인조반정 뒤, 후금(後金)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그 뒤 왕권 호위와 북벌의 선봉으로 존치되던 어영청은 북벌의 의미가 감소되면서 수도방어군으로 정착되었다.
어영청의 편제
어영청의 군사는 보인(保人)주 30)의 부담으로 번상하였으므로, 조선 전기 5위체제의 정군번상과 같은 체제이다. 어영청은 1704년(숙종 30) 5부 25사 125초 1만 6300명으로 속오법체제에 따라 정비되어 법전화하였다.
초의 구성은 1초는 3기(旗), 1기는 9대, 1대는 정군 10명, 화병(火兵) 1명, 복마군(卜馬軍) 1명으로서 모두 127명으로 편제되었다.
125초의 군사는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향군으로, 25번으로 나누어 5초씩 두 달 간 복무하여 실제 서울에 상주하는 병력은 700명 정도였다. 어영군에는 훈련도감군과는 달리 화포군(火砲軍)인 별파진(別破陣)이 설치되었다.
어영청에는 또한 겸파총(兼把摠) 11원을 두어 무예에 소질이 있는 수령을 임명하여 도내의 번상하지 않은 향군의 훈련을 담당시켰다.
이 밖에 훈련도감과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교련관(敎鍊官)과 별무사·재경군관(在京軍官) 등 무과 남발로 인한 대우군 및 표하군·아병(牙兵) 등의 장번 근무자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급료병과 향군의 번상군이 섞여 있었다.
금위영은 군제변통·양역변통의 논의가 절정을 이루는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궁핍한 국가재정과 양역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설치되어 있던 정초청군(精抄廳軍)과 훈련도감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하나의 군영으로 개편한 것이다.
즉, 정부는 번상하는 6도 향군이 주축을 이루도록 하되,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을 감축하여 금위영군을 편성함으로써 재정의 부담을 덜면서도 수도방어를 충실히 하게 하였다.
금위영은 정초청의 후신인 까닭에 초기에는 병조판서가 대장을 겸하였으나, 1754년(영조 30) 단독으로 대장을 두게 되면서 수도방어 핵심 군영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그 조직편제는 어영청과 대동소이하다.
이들 3군영은 국왕의 행차시 수행과 전좌(殿座)주 31)의 시립(侍立)을 담당함은 물론, 비상시의 궁성호위를 위한 위치 또는 순행 구역을 정하여 분담하고, 도성수비도 책임구역을 정하여 맡았다. 궁궐 내외 및 도성 내외의 행순(行巡)주 32)과 입직 등의 임무와 아울러 수도방위와 관계가 있는 준천(濬川)주 33)·금송(禁松)·적간(摘奸)주 34)·착호(捉虎)주 35) 등도 책임구역을 설정하여 맡고 있었다.
조선 후기 중앙군제를 오군영이라고 하나,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은 경기도일대의 방어에 주안점을 두고 설치한 군영이었다. 이들 양청의 장(將)은 경관(京官)으로 임명되어 때로는 수도권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중심의 수도 외곽방어에 치중하였다.
또한, 양청의 군대는 경기도 내의 속오군이 중심이 되었으며, 경기도 각 읍의 삼수미(三手米)를 유치하고 둔전을 널리 열어 양향(糧餉)주 36)을 확보하는 동시에 군사들에게는 정병의 예에 따라 급보(給保: 급료로서 보포(保布)를 줌)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왕권 호위의 취약성이 드러나 보완을 위하여 경기도일대의 속오군 등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총융군은 정군·속오군·별대마군(別隊馬軍) 등으로 조직되었고, 그 수는 약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처음에는 수원·광주(廣州)·양주·장단(長湍)·남양(南陽)의 5영(營)을 두고 5영 15부 45사 135초로 편제하였다가 곧 척계광의 『연병실기(練兵實紀)』 체제에 따라 영과 부는 지역의 특성에 따르도록 하여 7영 12부 25사 123초로 편제하고, 사마다 중초(中哨)만은 마군(馬軍)으로 편성하였다.
총융청은 병자호란 이후 숙위(宿衛) 보강을 위하여 겨울 3개월 동안 궁성숙위를 담당하게 되어 중앙군의 테두리에 들게 되었으며,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내영처(內營處)가 성립되어 2부 6사 26초의 내영이 편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외영(外營)은 수원·장단·양주의 3영제로 바뀌고, 일부는 수어청의 방어지로 되었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 군제변통 때 내영제가 폐지되고, 3영제로 개편되어 중영은 3부, 좌·우영은 각 2부로 하되 1부 2사 10초로, 1초는 125인으로 편제되었다.
내영제가 폐지된 뒤에도 총융청 본청은 관념적으로나마 2부의 편제를 유지하였고, 3영은 속영(屬營)이라 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지만 총융청은 계속 북한산성 중심의 수도외곽 방어 군영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수어청의 설치는 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의 개축으로 구체화되었다. 후금의 압력이 가중되던 당시로서는 남한산성이 수도외곽의 방어진지 내지는 왕이 피신하는 곳으로서 중요시되었다. 한산성을 개축하면서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이를 관할하다가 1632년 산성을 전담하는 수어사를 두었으나 독립된 군영으로 변모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이곳을 중시하여 때때로 훈척중신(勳戚重臣)을 수어사로 임명하여 서울에 경청(京廳)을 두고 산성을 관할하도록 하는 이원체제로 운영하였다. 그
런데 이곳은 행정적으로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의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각종 부작용이 일어나서 때로는 경청을 출진시키고 광주 부윤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하는 일원체제로 운영하는 등 변혁이 잦았다.
특히, 당인(黨人)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변혁을 거듭하다 1795년(정조 19)에 장용영(壯勇營)의 설치와 관련되어 경청을 매각하여 출진을 영구화함으로써 수어청은 사실상 폐지되고 광주유수의 직권 아래 놓여 기보군화(畿輔軍化)하였다.
수어청은 처음 경청은 아병(牙兵)을 중심으로 하여 3부로, 외영은 속오군을 중심으로 하여 4영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다가 1704년 경청은 좌·우부로 나누어 각각 아병 16초, 마병 3초 및 훈·어마보군(訓御馬步軍)과 친아병(親牙兵)으로, 외영은 광주·양주·죽산(竹山)을 전·중·후영으로 하여 각각 속오군으로 5사 25초로 편성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일원체제이든 이원체제이든 3영2부 체제에는 변동이 없었으나, 지휘체제나 경제기반은 총융청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이와 같이 수어청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좌도, 즉 광주·양주·죽산의 3영이 속하고, 총융청에는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 우도, 즉 남양·수원(지금의 파주)·장단의 3영이 속하여 수도 외곽을 남북으로 수어하고 있었다.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과 용호영(龍虎營)주 37)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훈신(勳臣)주 38)인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군인을 거의 그대로 궁궐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그 해 9월 호위청을 설치하고 10월에는 반정 주류 가운데서 대장 4인과 당상관 2인을 정하여 이들의 사모군 중에서 대장은 1백 명, 당상관은 50명씩 총 5백명을 뽑아 군관으로 삼고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는 동시에 국가에서 급료를 지불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호위청은 실제로는 반정공신이 자기 세력기반과 정권유지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뒤 호위청은 군관의 수가 점점 불어 1천 명에 이르게 되어 다시 호위3청으로 개편하고 대장은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과 국구(國舅)주 39)로 임명하여 그들의 군사적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실제 군사지휘권자인 별장(別將) 3원이 각 청의 군관 350명(총 1050명)씩을 영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조 때에 이르러 왕권의 강화와 결부된 숙위소체제가 갖추어지자 그 수도 400명으로 줄이고 대장도 훈신이나 척신이 아닌 자로 임명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체제로 바뀌었다.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에도 내금위·겸사복·우림위가 사실상의 금군이었으나, 호위청의 설치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효종 때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금군도 강화되어 금군3위를 내삼청(內三廳)으로 묶는 동시에 기마군화에 노력하였으나, 이후 왕권 약화로 그 수가 감소되었다.
현종 때에는 금군을 700명으로 정하고 이름도 금군청(禁軍廳)으로 바꾸어 10번으로 교대 근무하도록 하였다. 금군청이 용호영으로 개칭된 것은 1755년(영조 31)으로, 실제 책임자인 별장을 금군별장이라 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금군 100명을 줄여 600명으로 정하고 6번으로 나누었다가 순조 때 700명으로 복구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금군은 대개 700명 내외였다.
금군은 국왕이 동가(動駕)주 40), 전좌(殿座)주 31)할 때의 호위와 인정전(仁政殿) 월랑(月廊)의 입직 및 도성 8문과 목멱봉수(木覓烽燧)주 41)·오간수문(五間水門) 등의 요소의 입직, 여러 곳의 부정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왕권호위의 핵심군이었다.
이 밖에 중앙군으로서 정조 때 장용영의 내·외영(內外營)이 설치된 바 있으나, 곧 순조 때 왕권이 약화되면서 혁파되었다.
지방의 군사제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편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의 진관체제를 복구한 위에 새로이 속오군이 등장하고, 그 훈련을 위해 영장제도(營將制度)가 실시되어 지방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행정권에서 독립시킨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수군은 조선 전기 후반에 시도된 제승방략체제가 진관체제에 가미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1593년(선조 26) 이순신(李舜臣)이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3도의 수군을 통할함으로써 바다로 침략해 오는 왜군의 대부대에 일원적으로 대처하여 해방(海防)을 튼튼히 하였다.
수도 외곽에 해당되는 경기·황해·충청도의 수군도 1633년(인조 11) 3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두어 집중적으로 해방에 임하도록 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강화도에 진무영(鎭撫營)을 두어 통어영을 통할하게 하였다. 이러한 수군통제의 강화는 외침에 대한 수도방어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해안과 내륙 지방의 주요 요지에는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도록 하였다. 방어영은 경기도 2(육·수군), 전라도 1(수군: 제주도), 강원도 1(육군), 함경도 1(육군), 평안도 4(육군 2, 수군 2) 등 9개처에 설치되었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별장을 두어 지키게 한 것도 두드러진 변화이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속오군조직의 등장과 영장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도감과 같이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한 임기응변의 비상조치로 설치되어 역시 영·사·초·기·대로 이어지는 속오법으로 편제되었다.
왜란 당시 지방의 핵심군으로 등장한 속오군은 양반에서부터 공천(公賤)·사천(私賤)에 이르는 총동원체제로 편성되어 국난을 타개하였다.
당시 속오군은 일정한 대우가 없었고, 다만 도로 내왕이나 훈련에 군량을 가지고 훈련에 참여하는 등의 폐단제거에 중점이 두어져, 전국이 군사훈련기지화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양(良)·천(賤)으로 속오군이 편제됨으로써 본역 이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가 발생하였다. 1729년(영조 5)을 전후하여 속오군이 천례화되었고, 양역변통 등의 노력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속오군의 수는 전국적으로 20여만 명으로 파악되나, 조선시대 말엽이 되면 다만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거의 유명무실하게 된다.
영장제도는 1627년(인조 5)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는 과거 문신 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전문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군사제도상 하나의 진전을 이루고 속오군도 충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 문신 수령의 반발과 재정적 뒷받침의 부족, 유능한 무장의 부족 등으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병자호란을 계기로 다시 문신 수령 중심의 훈련체제로 바뀌었다. 북벌을 의도하던 효종 때 다시 전문적 영장제도로 회복되었으나, 효종 사망 뒤 바뀌어 결국 『속대전』에서는 수령의 겸영장제도로 개정되었다.
문신 수령의 겸영장제도는 도마다 5, 6개의 진영을 두어 군사권을 장악하는 수령 영장을 둠으로써 일단 모든 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비록 문신이지만 영장에게 묶은 점에서 조선 후기 지방군사체제의 진전을 볼 수 있다.
(3) 개항기
조선 후기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근대지향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군사제도는 쉽게 개혁되지 못하여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 아래서 군정의 문란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때에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방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대원군은 당시 의정부의 직권을 침해하고 있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국초의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두어 의정부와 양립시켜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동시에 중앙군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중앙군의 기강을 바로잡고 노약자를 도태시키는 등 각종 모순을 해결하고 부단한 훈련과 함께 막대한 내탕금을 풀어 무기 수선, 화약과 연환(鉛丸)주 42)의 제조, 식량의 비축, 새로운 무기개발에 힘써 외적 방어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872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왕권호위의 강화가 더욱 절실하여 훈련도감 등에서 가장 우수한 군사 500명을 뽑아 궁궐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武衛所)를 설치하였다. 그 지휘권자인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의 권한도 강화되어 무위소는 수도의 모든 군무에 관여하는 군영으로 발전하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뒤 조선 정부는 근대 무기 도입과 군사조직에 관심을 기울여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모든 군국기무를 총령하는 통리기무아문 밑에는 13사(司)를 두었고, 국방과 관계되는 관서로는 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군물사(軍物司)·선함사(船艦司) 등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와 함께 군제 개편에 착수하여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설치하고, 구군영(舊軍營)을 개편하였다. 별기군은 1881년 오군영에서 신체 강건한 지원자 80명을 특선하여 무위영에 속하게 하고, 일본 공사가 추천한 호리모토(掘本禮造)가 훈련시킨 군대이다.
이들 별기군은 급료와 피복 지급 등의 모든 대우가 구식군대보다 월등하였다. 모든 군을 근대화하기 위한 시험조치로 설치된 별기군은 이듬해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말미암아 해산됨으로써 실제적인 면에서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고 군무에 관한 사항은 군무사로 일원화하는 동시에, 당상경리사(堂上經理使) 4, 5인을 두어 직무를 분담시키는 한편, 오군영도 다음과 같이 양영체제(兩營體制)로 개편하였다.
무위영(武衛營)·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
장어영(壯禦營)·금위영·어영청
금위영·어영청의 편제
이로써 종래의 중앙군체제는 대폭 간소화되었으나 지휘계통의 명칭만은 구군제인 영초제(營哨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양영 가운데 무위영은 국왕의 근위군영으로, 장어영은 수도방위군영으로 추측한다.
통리기무아문과 양영체제에 의한 개혁은 모두 임오군란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통리기무아문은 대원군에 의하여 폐지되고 군령권은 삼군부로 돌아 갔으며, 중앙군도 오군영체제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된 뒤, 군사제도는 다시 청나라식으로 개편되어 신식 친위부대인 친군영(親軍營)이 설치되었다. 친군영은 좌·우 양영으로 나누어졌으며, 대장을 감독(監督)이라 하였고, 청나라 장수가 훈련시켰으나, 그 수는 5백 명에 불과하였다.
오군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그 해 10월 훈련도감이 혁파됨으로써 신식 군영 2영, 구식 군영 4영의 육영체제로 수도를 방위하였으며, 다시 삼군부가 혁파되어 국왕 직속의 친군영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1883년 10월에는 교련소(敎練所)를 설치하였다가 친군전영(親軍前營)이라 고치고, 이듬해 7월 연융대(鍊戎臺)로 옮긴 부대를 친군우영(親軍右營)이라 함으로써 신식의 친군 4영과 구식의 4영이 난맥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구식 군영인 금위영과 어영청을 합쳐서 친군별영(親軍別營)을 편성하여 중앙군은 사실상 친군 5영으로 정비되었다. 친군영은 1888년 이후 다음과 같이 변개되었다.
┌ 統衛營(〓中營)…親軍右營·後營·海防營
三營―┫ 壯衛營(〓左營)…親軍前營·左營
└ 摠禦營(〓右營)…親軍別營
이 삼영체제의 편성은 종전의 오영체제와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1영의 실제 병력은 5백 명에서 병정(兵丁) 2250명, 작대병(作隊兵) 196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1891년 2월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탕춘대(蕩春臺)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하여 통위영에 속해 있던 전 총융청군을 다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였다. 그 뒤 갑오경장 전까지는 왕의 호위를 전담한 친군 용호영을 제외한 이들 친군 4영이 수도권을 방위하였다.
1894년 일제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게 하여 갑오경장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개혁을 강요했다. 이에 따라 군사담당 최고 관청도 군무아문(軍務衙門)으로, 다시 을미사변 뒤에는 군부(軍部)로 변경하였다.
이후 국·과를 통폐합 또는 증설하기도 하였으나, 군부체제는 변동이 없었다. 갑오경장 때에는 또한 「육군장관직제(陸軍將官職制)」를 반포하여 과거의 영초체제를 근대 직제로 개변하여 이후 그대로 준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장(大將)주 28)은 1품, 부장(副將)·참장(參將)은 2품, 정령(正領)·부령(副領)·정위(正尉)는 3품, 부위(副尉)·참위(參尉)는 6품, 정교(正校)·부교(副校)·참교(參校)는 품계 외관이었다. 이와 같은 직제 아래 친군영체제는 일제의 건의로 1895년 이후 훈련대(訓鍊隊)와 신설대(新設隊)로 개편되었다.
훈련대는 종래의 병종 가운데서 선발하여 근대식 체제인 1개연대·2개대대·4개중대·12개소대로 편성했고, 1개 중대의 병력은 대개 2백 명 안팎이었다.
이들은 다시 제1훈련대와 제2훈련대로 증설되어 왕실 호위의 명목으로 유지되었다. 과거 친군영의 군대 가운데 훈련대에 편입되지 않은 자들은 신설대 13대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주로 공병·치중병(輜重兵)·마병 등으로 편제되었고, 그 수는 약 5000명이었다. 신설대는 옛 친군영 군대의 구제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우면에서도 훈련대에 미치지 못하여 사실상의 현역병은 훈련대였고, 신설대는 후비병(後備兵)에 불과하였다.
이 밖에 1895년 5월에는 일제가 3국 간섭에 의하여 견제당하는 기회를 틈타 시위대(侍衛隊)를 설치하고 연병(鍊兵) 2개 대대로 편성하여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 시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 편제는 훈련대와 거의 같았고, 1개 중대는 역시 200명 내외로 편성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군악대(軍樂隊)가 편제되고 미국인 교관이 훈련시켰던 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위대는 훈련대에 편입되었다가 훈련대가 민비시해에 개입했다는 여론 때문에 해산되고 중앙군은 친위대(親衛隊)로 개편되었다. 친위대의 편제는 훈련대와 마찬가지였으나 총 8개 중대였고, 1개 중대의 병력이 220인으로 총병력은 약 1700명이었다.
1896년 1월 친위대에 공병으로 편제된 제3대대가 편성되고 다시 고종이 아관(俄館)으로 파천한 뒤, 제4·5대대가 편성되어 제1·2·3대대를 친위연대로, 제4·5대대를 독립대대로 존치하는 동시에 마병대를 독립시켜 기병대로 개편하였다.
아관파천(고종이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음모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1년간 거처한 사건) 당시의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영향 아래 친위대대에서 하사(下士)와 병졸 1070명을 선발하여, 1897년 3월 다시 시위대를 편성해서 궁궐시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시위대는 일본식 편제와는 달리 1개 대대·5개 중대·20개 소대로 편제하였고, 1개 대대의 병력은 친위대보다 약 100명이 더 많았다.
한편, 시위대를 친위대에서 선발했기 때문에 220명으로 편성되었던 친위대의 1개 중대는 110명으로 편제되어 1개 대대의 병력이 850명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중앙군은 수도방어를 전담하는 친위대와 왕권을 직접 호위하는 시위대로 나누어져 유지되었다. 광무 연간에는 시위대가 보병·기병·포병으로 편성된 시위연대로 증강되었으며, 친위대도 2개 연대로 개편되면서 공병중대·치중중대 등이 증강되어 전투능력이 강화되었다. 당시의 중앙군은 시위연대 약 3000명, 친위연대 약 2000명 등 모두 5000명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령 계통도 광무 연간에 원수부(元帥府)가 설치되어 황제가 군 통수권자인 대원수로서 군기를 총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과거 설치되었다 폐지된 무관학교(武官學校)도 1898년 복구되는 동시에 연성학교(硏成學校)·유년학교 등이 설립되어 사관 양성과 간부 및 생도교육도 본격화했으며, 1900년에는 군사경찰을 위한 「육군헌병조례」가 반포되고 육군병원도 개설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다음해부터 각종 군사조직을 감축 또는 폐지시키고 말았다. 중앙군은 시위연대 등을 모두 폐지하고 보병 1개 연대와 포병 1개 중대로 축소 편성되었다가 마침내 모든 중앙군을 합쳐 시위혼성여단(侍衛混成旅團)을 만들더니, 1907년 7월 징병법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만 것이다.
한편, 지방군은 대원군이 섭정할 때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으로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 잦아지자 수도권 방어에 관계되는 연해의 군비를 강화하였다.
강화도에는 다시 진무영을 설치하여 여러 갈래의 군사체제를 일원화하고 해방(海防)을 위한 요지에 진과 방어영을 설치하였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북방의 방어군을 증강하고 파수처를 늘려 대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당시의 지방군사조직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방어를 강화하여 국제정세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하자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중앙의 군제를 반복, 개혁하는 가운데 지방에는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일제의 압력으로 갑오경장이 추진되어 1895년 중앙은 물론 지방에도 훈련대를 설치, 확대해 나갔다.
이해 4월 중앙의 훈련 제2대대에 이어 평양에 훈련 제3대대, 7월에는 청주에 제4대대, 9월에는 전주에 제5대대 등 제7대대 설치까지 계획되었으나, 실제로 설치되었던 것은 평양과 청주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일제는 이와 관련하여 각종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각도 외영(外營)의 병정을 해산하고, 각도의 병영과 수영 및 각 진보(鎭堡)를 폐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실행여부는 기록이 없으나, 을미사변 이후 각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중앙의 훈련대를 파견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종래의 지방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의 실용성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을미사변으로 중앙의 훈련대와 아울러 지방의 훈련대도 폐지되고, 지방에는 그 대신 진위대(鎭衛隊)가 편제되어 지방의 진무(鎭撫)와 수비를 담당하였다. 진위대는 평양과 전주에 각 1개 대대씩 배치되었다.
그 조직편제는 중앙의 친위대와 같았으나 1개 대대가 2개 중대로 편제되어 1개 대대의 병력은 400명에 불과하였다. 진위대는 지방군으로서는 최초의 근대적 군대였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지방의 의병운동이 활발해지자 아관파천 뒤인 1896년 5월 치안강화를 위하여 각 지방에 남아있던 구식군대를 중심으로 각 도의 요해처인 북청·강계·해주·춘천·강화·청주·공주·대구·통영 등지에 지방대를 설치하였다.
그 군사력은 각각 300∼400명 정도여서 모두 약 2,300명에 불과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충주·홍주·상주·원주 등지에도 지방대가 설치되었으나, 의병이 진압되자 그 대다수는 폐지되었다.
한편, 의병이 일어난 각 지방에 30∼40명씩 포수군(砲手軍)을 두었으나, 뒤에는 북방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진위대와 지방대 및 포수군은 모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상황에서, 혹은 의병진압 과정에서 설치되었기 때문에 때로는 통제가 불가능하였고, 의병이 진압된 뒤로는 폐지된 곳도 많아 결국 지방은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뒤, 대한정부는 지방군 강화를 위해 1899년 1월 지방대 조직을 통일하는 동시에 모두 대대로 칭하고, 원칙적으로 1개 대대는 5개 중대로 편제하도록 하였으나 여건상 대개 2개 중대 400명 단위로 대대를 편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방대는 지방요지 중심의 진위대로 일원화되어 갔다. 즉, 1900년 7월 원수부의 명으로 모든 지방군을 진위대로 통합하고 전국을 5개 연대로 편제하였다.
그 뒤 제주도에 진위대대가 증설되기도 하였다. 진위대의 1개 대대는 병졸 900명, 장교와 하사 108명으로 총 1008명이었으며, 1개 연대는 대략 3000명이었다. 따라서, 지방군의 총수는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국제정세에 따라 포군의 증강이 절실해져 전국 연해지방의 해구(海口)주 43)를 지키기 위해 1901년 31개소의 요해지에 포대(砲臺)를 설치하여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내정개선이라는 허울로 내정간섭을 적극화하여 1905년 이후 지방군의 감축이 거듭되다가 마침내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일제강점기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당한 1910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의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통일된 군제를 가지지 못하였지만,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활동한 우국지사·독립운동가·항일투쟁가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들이 각기 독자적인 군관체제를 정비하고 전술을 익히며 작전에 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 독립운동단체들 중 정부형태를 띤 것으로는 노령 해삼위(海蔘威)신한촌(新韓村)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국내에서 세운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그리고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등을 들 수 있다.
거의 동시에 수립된 이 3개 정부를 두고 법통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협상을 통하여 단일화 된 정통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항일기의 군제는 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제정, 반포한 법령과 그 소속 군인인 광복군을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1) 임시정부의 군편제
임시정부는 수립 후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령과 함께 군사관계 법령을 제정하였다. 「대한민국임시관제」·「대한민국임시군제」·「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군무경위근무조례」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임시대통령의 직할기관으로 군사에 관한 최고통솔부인 본영(本營)과, 국방 및 용병(用兵)에 관한 모든 계획을 비준하는 참모부(參謀部), 그리고 중요 군무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기관인 군사참의회(軍事參議會)가 있었다.
그리고 정부부서에는 군무부(軍務部)를 두고 그 장인 군무총장은 육해군의 군정과 군속을 통할하고 소관 각 관서를 감독하였다.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상비병과 국민병으로 구분하여 부과하였다. 상비병은 만 20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의 장정이며 징집령으로 모집하며, 18세 이상 50세 이하로 자원입대한 남녀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병역의무기간은 현역은 1년, 예비역은 3년이었다. 특히, 독립군을 모집하기 위해 서간도군구·북간도군구·강동군구를 두고 지방사령관이 모병하도록 되어 있다. 이들 상비병은 의무 연한을 복무하면 50세까지 국민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군대 편성은 분대(17명)·소대(51명)·중대(155명)·대대(687명)·연대(2,219명)·여단(6,189명)·군사령부로 하고 3개 분대를 1개 소대, 3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며, 군사령부는 2∼5개 여단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군계(軍階)는 장교로 장관(將官)·영관(領官)·위관(尉官)·하사(下士)가 있었고, 사병으로는 병원(兵員)이 있었다. 장관에는 정장(正將)·부장(副將)·참장(參將), 영관에는 정령(正領)·부령(副領)·참령(參領), 위관에는 정위(正尉)·부위(副尉)·참위(參尉), 하사에 정사(正士)·부사(副士)·참사(參士), 병원에는 일등병·이등병·상등병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군제는 현실적으로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임시정부 요원의 산재(散在), 재정의 궁핍, 일본의 탄압과 방해, 중국정부의 몰이해, 즉 망명정부의 한계에서 오는 취약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기간의 군제는 형식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직제성격을 지니나, 실질적으로는 각지에 산재한 독립운동단체들의 독자성이 크게 작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직할군단인 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그 맥을 이었다고 하겠다.
(2) 광복군의 창설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창설을 계획한 것은 1936년이었으나 실제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된 것은 1940년 9월 17일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군무부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정규 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1931년 이래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150여 명과 일본 등지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100여 명 등 250여 명의 한국청년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 광복군 창설계획은 1939년 9월 중국 장개석 정부의 승인을 얻어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총사령부 창립식을 가짐으로써 실현되었다.
(3) 광복군의 편성과 충원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군을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의 6단계 위계부대로 편성하되, 2년 이내에 3개 사단 규모로 확대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응모자 부족으로 4개 지대로 출발하였으며, 각 지대는 각기 초모공작(招募工作)을 통하여 장교와 병원(兵員)을 충원하였다. 초급장교의 경우 뤄양군관학교 외에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그 밖에 신흥무관학교와 박용만(朴容萬)이 1914년 하와이에 세운 대조선국민군사관학교(大朝鮮國民軍士官學校), 1921년 이르쿠츠에 세워진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 출신자들로 충원되었다.
한편, 광복군의 병원은 대부분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훈련국장을 두고 자체적으로 실시한 군사교육을 통하여 배출된 사람들이었다.
(4) 광복군의 지휘권
광복군은 창설부터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군사활동이 주로 중국영토 내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중국정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중국측에 의하여 활동내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휘권을 포함한 행동요령은 ‘한국광복군행동준승9개항(韓國光復軍行動準繩九個項)’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측에서 통고받은 이 9개 항의 내용은 광복군이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형식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는 규정을 비롯하여 광복군의 군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항대로라면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군대가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3년 12월 이래 이 9개 항의 개정을 교섭하였으며,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45년 4월 9개 항을 폐기하였다. 이에 따라 광복군은 즉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4월부터 미군과 협력하여 공정대까지 편성하면서 김구(金九)가 직접 진두지휘했던 이 작전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실천에 옮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광복군은 임시정부와 함께 미군정 당국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 뒤 이들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광복 이후
한 나라의 군제는 그 자체만으로 발전하는 것 아니라 국력과 다른 제도와의 관련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군제 역시 정치·경제·교육 제도나, 국방사상·국방정책·군비 등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군제의 파악은 그 배경이 되는 문물제도 전반에 대한 검토가 같이 이루어져야 하나, 그 범위를 군의 운용과 유지에 필요한 국방체제·병역제도·군사교육제도·군수제도 등에 국한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1) 국방체제
대한민국의 현 국방체제는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에 의거하여 설치된 국방사령부기구에서 비롯된다. 미군정 당국은 당시 미군이 담당하고 있던 38선 경비를 미군과 교체하여 맡을 준군사적 경비요원을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비업무를 전담할 기구로 국방사령부 산하에 기존 경무국 외에 군무국을 신설하면서 그 밑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1946년 1월 14일에 국방사령부 군무국 관할 아래 조선경비대(정식 명칭은 조선경찰예비대였으나 한국측에서는 남조선국방경비대라 칭함)를 창설하였다. 한편, 군정청 교통국 해사과에 해안경비업무를 위해 1945년 11월 11일 창설된 해방병단(海防兵團)도 국방사령부에 편입되었다.
군정 당국은 1946년 3월 29일 국방사령부의 지휘·감독 아래 있던 경찰국을 독립시키고, 그 날 군정청 집행부서의 국제(局制)를 부제(部制)로 개정함에 따라 국방사령부는 국방부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군무국은 국방부 관할하에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육군부와 해군부는 조직상 이름뿐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 뒤 1946년 3월 20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한임시정부 문제가 토의되었을 때, 소련측이 국방부라는 명칭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1946년 6월 15일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국측에서는 국방의 뜻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조선 말기의 군제인 3영(三營) 중의 하나인 중영(中營), 즉 우영·후영·해방영을 통합한 명칭인 통위영의 이름을 따서 통위부(統衛部)로 호칭할 것을 주장, 국방부는 통위부로 개칭되었다.
이에 따라 이미 설치되었던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남조선국방경비대사령부는 조선경비대사령부로 각각 개칭되었고,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 해방병단총사령부는 조선해안경비대총사령부로 각각 개칭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에는 통위부의 기구개편에 따라 참모총장제를 신설하고 참모총장으로 하여금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지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합군체제를 갖추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에 기초하여 「정부조직법」과 「국군조직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새로운 국방기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즉,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설치되어 육·해·공군의 군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또한 국방기관의 설치·조직·편성의 대강이 정해졌으며, 군정·군령의 유기적이고 체계 있는 국방기능의 수행을 목적으로 국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국군은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고 대통령이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대한민국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국군통수상 필요한 명령을 발할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필요한 자문을 위하여 최고국방위원회와 그 소속 중앙정보국·국방자원관리위원회·군사참의원이 설치되었다.
국방장관은 군정을 관리하는 외에 군령에 관하여 대통령이 부여하는 직무를 수행하며, 국방차관은 장관을 보좌하고 국방부장관 유고시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방부에는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두고, 그 밑에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설치하였다.
육군본부와 해군본부에는 각각 육군총참모장과 해군총참모장을 두고 각 군 총참모장은 국방부 참모총장의 명을 받아 해당 군을 통리하여 예하부대를 지휘, 감독하도록 하였다. 한편, 국방부는 육·해군의 작전·용병과 훈련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연합참모회의를 설치했으나, 1949년 5월 기구 간소화 작업으로 국방부 참모총장제와 연합참모회의는 폐지되었다.
1949년 5월 5일에는 「해병대령」에 따라 해군에 해병대가 창설되고, 1949년 10월 1일에는 육군항공대가 육군에서 독립하여 공군으로 창설되었다. 이리하여 국군의 편제는 현재와 같이 어엿한 육·해·공군의 3군체제를 일단 갖추게 되었다.
그 뒤 국방부장관의 3군의 군사적 통합기능 강화가 절실해짐에 따라 1952년 국방부에 임시합동회의를 설치하였고, 이 기구는 1953년에 연합참모본부로 개칭되었다가 1963년 5월 「국군조직법」의 개정에 따라 합동참모본부와 합동참모회의로 되었다.
한편, 1978년 11월에는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병역제도
우리나라 국민의 병역관계를 제도로 규정한 것은 1949년 1월 20일에 공포된 「병역임시조치령」이다. 이 조치령은 「병역법」을 제정, 시행할 때까지 병역제도의 임시조치에 관한 긴급사항을 규정한 것으로서 이에 따르면 국군의 편입은 지원하는 의용병제(義勇兵制)로 하고, 병역은 현역과 호국병역으로 구분하였다. 복무 연한은 현역 1년, 호국병역은 2년으로 하되, 호국병역은 자택통근을 원칙으로 하였다.
임명권은 현역장교는 대통령령으로 발령하고, 호국병역소속 장교·현역·하사관 및 호국병역 하사관은 편성부대 소속 연대장이 발령하도록 하였다.
그 뒤 1949년 8월 6일 대한민국 최초의 「병역법」이 공포되었다. 전문 8장 81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은 모든 국민은 국토방위의 의무를 진다는 헌법 제30조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남자는 병역의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며, 국민 개병주의에 의거하여 의무 징병제도와 자유의사에 따르는 지원제를 병용하여 여자도 지원하여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병역은 상비병역·호국병역·보충병역·국민병역으로 구분하고, 상비역은 현역·예비역·후비역으로, 보충역은 제1·2 보충역으로, 국민병역은 제1·2 국민병역으로 세분하였다. 병역의무 연한은 만 17세부터 40세까지로 하되, 징집 또는 소집된 자와 지원에 의하여 지명된 자만이 실역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1950년 2월 1일에 「병역법시행령」이 공포되어 1950년 1월 6일부터 전국적으로 징병검사를 실시했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이 「병역법」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면 전쟁, 일면 건군이라는 역경 속에서 급격히 증대된 병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병력보충은 비상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민방위군설치법」(1950. 12. 21.)을 제정하여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국민방위군으로 집단소집하였다.
그러나 계획의 부실과 고급간부의 의혹사건으로 1951년 5월에 이 설치법을 폐지하고 대신에 「민병대령」·「지원병령」·「비상국토방위법」을 시행, 학도의용군 편성, 후비병 소집 등의 비상수단에 의하여 70만 대군을 확보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휴전 뒤 정부는 응급조치에 의한 병무행정을 재확립하기 위해 1957년 4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병무행정쇄신 요강을 기초로 1957년 8월 15일 새로운 「병역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세워진 정부는 1950년대의 무질서한 병역풍토와 혼란기에서 파행된 병무행정의 난맥상을 바로잡기 위해 1962년 10월 1일 「병역법」을 전면 개정하였다.
이에 앞서 1961년 12월 27일에 「향토예비군설치법」을 제정, 공포한 바 있으나 실시를 미루어 오던 중, 1968년 북한의 대남무장공비 침투사건의 빈발을 계기로 그 해 2월 27일 이 법의 시행령을 제정하여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경제발전과 병역자원의 잉여현상이 나타나는 등 사회적 변화에 따라 1970년 12월 31일에 「병역법」을 다시 전면 개정하였다.
1973년 1월 30일에 병역의무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1973년 3월 3일에 국가기간산업·방위산업·농어촌지도요원·자연계교원·대학원졸업생 등을 국가 발전에 기여하게 하기 위해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을 추가 제정하였다.
이 밖에 방위소집제도·병역의무특례제도의 확대 등 여러 차례에 걸친 발전적인 개정, 또는 보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병역제도는 「헌법」·「병역법」·「병역법시행령」(1982.4.)과 「병역법시행규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병역법」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는 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에 복무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현행 병역제도는 원칙적으로 국민 개병주의에 입각한 의무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특수분야 요원의 충원과 병역의무자의 조기병역 의무이행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지원제를 인정하고 있다. 장교·하사관으로 장기복무하는 직업군인과 지원하여 병역에 복무할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병역제도는 의무병제와 지원병제를 병용함으로써 운영의 묘를 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병역은 현역·예비역·보충역·제1국민역·제2국민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현역은 징집 또는 지원에 의해 입영한 병과 현역으로 임용된 장교·준사관·하사관·무관후보생을 말하고, 예비역은 현역을 마친 자와 「병역법」에 따라 실역을 마치지 아니한 자로서 예비역에 편입된 자를 말한다.
보충역은 징병검사를 받아 현역에 복무할 수 있다고 판정된 자 중에서 병력수급 사정에 따라 현역병으로 징집되지 아니한 자와 「병역법」에 의하여 보충역에 편입된 자를 말한다.
제1국민역은 만 18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 입영할 때까지의 자로서 현역·예비역·보충역 또는 제2국민역 이외의 자를 말한다. 제2국민역은 징병종결 처분을 받고 현역·예비역, 또는 보충역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자와 「병역법」에 의하여 제2국민역에 편입된 자를 말한다.
한편, 병무행정기구는 「병역법」의 제정·공포와 아울러 1949년 8월 27일 중앙기구로서 국방부에 병무국을, 서울을 비롯한 각 도청소재지에는 병사구사령부가 설치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어 각 지구 병사구사령부를 해체함과 동시에 그 업무를 지역사단에 이관하였다.
6·25전쟁중에 병무행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국방부에 병무국과 각 지구병사구사령부를 부활시켜 국방부 직속기관으로 운용하였다.
그 뒤 5·16군사정부는 병무행정의 문제점들을 시정하기 위해, 1962년 10월 1일 「병역법」 전면개정과 함께 국방부 직할 특별행정기관으로 각 시도병무청을 설치하여 병무행정의 일원화를 기하였다.
현재는 병무행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과학화하기 위해 전산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사회 발전에 부응하는 합리적인 병무행정을 위하여 병역제도의 부분적인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3) 군사교육제도
국군은 오늘날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된 정예 60만 대군을 길러내기까지 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현대적 군사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1월 31일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남한의 국방력을 조직, 편성, 육성하기 위한 제반업무에 착수하였다. 그 일환으로 군조직의 간부 양성에 반드시 필요한 언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12월 15일 서울에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군사학교였다.
그 뒤 국방사령부는 남조선국방경비대 확장으로 간부 양성이 필요하게 되자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대신에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치하였다. 한편, 조선해안경비대에서는 이미 1946년 1월 해군병학교를 설치하여 장교를 양성했으며 1946년 6월 15일 해군병학교를 조선해안경비사관학교로 개칭하였다.
군정청은 경비대가 군사적 임무를 띤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치안경찰예비대로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경비대의 간부 양성을 위주로 경비사관학교만 설치하고 그 밖의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은 군조직 운영을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었으므로 1946년 6월 국방경비대에 통신과를 설치하는 한편, 통신기술병 양성을 위해 1947년 1월에 조선경비대 통신교육대를 경상남도 진해시 해안경비대기지에 설치하였다.
이어, 1947년 8월에는 군기학교(지금의 헌병학교)를 설치하였고, 조선해안경비대는 사관학교 출신만으로 장교가 충원되지 않으므로 사관후보생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1948년 6월에 특별교육대를 설치하였다.
또한, 하사관 교육을 위해 1947년 9월 항해교육대를 비롯하여 각종 교육대를 학교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정부수립시까지 군사학교는 사관학교를 포함하여 총 17개 학교로 증가하였다. 1948년 7월에는 교관 요원 양성을 목적으로 최초로 미국보병학교 고등군사반 과정에 6명의 장교를 파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기존의 경비대사관학교는 각각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되고, 신병훈련소를 비롯하여 많은 병과학교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48년 7월 육군에서는 고급지휘관과 사단급 이상 부대의 참모의 자질향상을 위해 참모학교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에는 육군항공대가 육군에서 독립함에 따라 육군항공사관학교가 공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의 교육제도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군의 교육이 막 그 틀을 잡고 있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대부분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전쟁수행을 위해 부대가 급히 편성됨에 따라 교육훈련을 계속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8월 전선이 일단 안정을 되찾게 됨에 따라 부산에 보병·포병·기갑·공병 및 통신교육 등을 위한 육군종합학교를 개설하여 장교후보생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전시학교는 그 뒤 각 병과학교로 발전하여 각각 간부후보생과정·기초군사반·고등군사반과정 및 특기교육 과정으로 발전됨으로써 1951년 9월에는 당시의 군 요구에 따를 수 있는 교육체계와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951년 4월과 5월의 2차에 걸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물리침으로써 개전 이래 약 1년간에 걸친 유동적인 전세가 일단 안정되고, 작전양상도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휴전을 성립시킨다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이와 함께 유엔군 작전부대의 전선 유지 임무를 인수하여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만한 수준으로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강화키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휴전협상 개시와 함께 한국군의 전투능력 향상을 위한 일련의 조처들이 실행에 옮겨졌다. 예를 들면 육군은 1951년 8월 간부교육 전담기구로서 교육총감부를 부산에 설치하고, 11월에는 논산에 대규모 신병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1952년 1월에는 교육총감부를 전라남도 광주로 이전함과 동시에 각 병과학교의 교육훈련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영관급 장교의 보수교육을 위해 지휘참모학교(지금의 육군대학)를 대구에 다시 개설하였고, 1952년 1월에는 4년제 정규 사관학교를 설치하였다.
한편, 1951년부터는 대규모 장교단을 미국 군사학교에 파견하여 교관 확보에도 힘썼다. 그리하여 1952년 여름까지는 현대식 군대육성을 위한 교육체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성립과 더불어 군사교육도 전시 교육체제에서 평시 교육체제로 전환되었고 교육내용도 군의 전문화 교육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대전의 특징인 합동 및 연합작전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합동참모대학을 설치하였다. 이어 국가 차원에서 안보정책 및 군사전략과 이를 지원하는 자원관리 정책의 기획과 집행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군 최고교육기관인 국방대학원을 설치함으로써, 한국군의 교육체제는 일단 완성되었다. 물론 이때까지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은 미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전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 자주국방체제 확립을 전제로 한 군 현대화계획과 전력 증강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군의 교육훈련도 이제까지의 미국 교리의 전수교육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교리와 훈련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는 어엿한 자주독립국가의 군사교육제도로 발전되었다.
(4) 군수제도
국군의 군수제도는 1945년 국방사령부 군무국에 조달보급과를 설치한 것을 효시로 하여 점차 확대, 발전되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 시절의 보급은 현지조달로서 연대별로 이루어졌고, 피복은 일본군 보급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군정청에서 인수받아 할당했으며, 급식은 일본군 급식기준표에 따라 공급하였다.
그러나 1948년 「국방부직제령」이 공포됨에 따라 관리국이 설치되었고, 1948년 11월에는 중앙에 조달본부가 설치됨으로써 국내외에서 물자를 구입하여 군 소요를 일부 충당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군량미는 연간 소요량을 정부보유 양곡에서 일괄구매하여 각 군에 배당하였고, 유류를 제외한 보급품은 국내 생산공장에서 생산하여 충당하였다.
한편, 장비는 1950년 1월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따른 미국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의 수원국의 경제부흥이 우선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한국에 제공되는 물자의 종류와 제공방법은 미국측의 판단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50년 3월 미국은 대한군원으로 1097만 달러를 책정하였음에도, 이 해 6월 25일까지 한국에 도착한 군원물자는 약 1천 달러 상당의 통신선뿐이었으며 기타는 미국에서 선적중에 있었다.
더구나 6·25전쟁 초기에 국내 생산시설이 파괴됨으로써 6·25전쟁중에는 거의 모든 보급물자와 장비를 미군에서 지원받았다. 따라서, 6·25전쟁기간중의 군수지원은 단순히 군원물자를 수령하여 사용자에 분배하는 대미의존형 군수지원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와서 미국의 군원이 점차 감소됨에 따라 원화 국방예산이 증가해 갔으며, 이에 따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군수지원체제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1964년 11월 한미합동군수시설조사단을 구성하여 군원 및 원화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연구를 하게 하는 한편, 국방부에 군수 및 상호지원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군수지원체제 개선에 노력하였다.
즉, 각 군의 군수시설이 중복됨으로써 생기는 물적·인적 낭비를 방지하고, 운영관리의 효율화를 위하여 통합 군수지원제도를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3군의 후방병원과 통신시설 등을 지역별로 통합운영하고, 3군 상호지원 개념을 도입하여 군에 관계 없이 가장 가까운 군수시설에서 지원을 받거나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각 군의 군수기관에서 일반 기업체를 통하여 군수품을 조변함으로써 생기는 문제, 즉 소량 조변으로 생긴 고가구매, 규격의 다양성과 예산·시간·인력의 낭비 등을 지양하고 3군의 공통 품목을 합동조변함으로써, 행정의 간소화, 규격의 표준화 및 품질관리의 향상을 기하기 위해 1967년에 국방부 직할로 조달본부(調達本部)를 설치하는 등, 많은 개선을 하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는 자주 군수지원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야전군수지원 능력의 향상과 통합군수지원 제도의 확대, 그리고 과학적 자원관리에 힘쓰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고대 부여나 고구려에서 족장이나 고관을 일컫던 칭호
주02
가난한 백성
주03
경주 근방에서 궁궐과 경주의 경비를 맡았던 여섯 군영
주04
都督
주05
方鎭
주06
군역을 담당하고 이를 세습해 가던 하나의 단위. 군인과 양호로 구성됨
주07
공역을 면제 받은 대신, 조세를 대납해 준 부자의 집에서 일하던 백성의 집
주08
각종 공사에 동원되는 役
주09
특별 행정구역. 평안도지방인 西界와 함경도지방인 東界를 가리킴
주10
다스리는 곳
주11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내던 농민
주12
정용
주13
변경에 주둔, 정착하면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던 병사
주14
수비하는 군사가 주둔하는 군영
주15
현직에서 물러난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
주16
무반직
주17
번을 드는 차례
주18
장기간 교대 없이 번을 듬
주19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함
주20
지방의 군사를 골라 뽑아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던 일
주21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방면을 지키기 위하여 파견 근무함
주22
바다 가까이에 사는 백성
주23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으로 만듦
주24
양민 신분이면서 천역에 종사함
주25
조선 후기에 군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베나 무명을 거둠
주26
군인이 번들러 군영으로 들어 감
주27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님
주28
종2품
주29
사수
주30
군역에 복무하는 사람을 위해 나라에 베나 무명 등을 바쳐야 하는 사람
주31
왕이 앉은 자리
주32
순찰
주33
하천 준설
주34
부정척결
주35
호랑이 잡이
주36
군사의 양식
주37
禁軍廳
주38
공을 세운 임금의 친척
주39
왕후의 아버지
주40
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감
주41
남산 봉화
주42
납으로 만든 탄환
주43
바다의 후미진 곳으로 들어간 어귀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차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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