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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建築)

건축개념용어

 인간적 요구와 건축재료에 의해 실용적·미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진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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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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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인간적 요구와 건축재료에 의해 실용적·미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진 구조물.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건축(architecture)이라는 말은 원래 ‘큰, 으뜸, 으뜸이 된다, 우두머리’ 등의 뜻을 가지는 ‘archi’ 라는 접두어와 ‘기술’을 뜻하는 ‘tecture’의 합성어로서 ‘모든 기술의 으뜸’ 또는 ‘큰 기술’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는 ‘세울 건(建)’자와 ‘쌓을 축(築)’자를 합한 ‘건축(建築)’이라는 말을 그에 대응시켜서 쓰고 있다.
건축은 원래 인간적 요구와 건축재료에 의해 실용적·미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진 구조물을 말하며, 단순한 건조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구조물은 ‘건물(建物)’ 이라고 한다. 따라서, 구조물을 형성하는 공간에 작가의 조형의지가 담긴 구조물을 ‘건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건물을 세우는 방법과 양식 등에 기술공학적인 측면과 아울러, 그 건물이 요구하는 기능에 따른 미술적인 요소를 강하게 필요로 하게 되므로 미술의 범주에 넣어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술 속에는 회화나 조각과 같이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고 단지 미술작품으로서 감상하기 위한 순예술(純藝術) 또는 자유미술(自由美術)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미술적 효과를 더 높여 생활에 이용되는 실용예술(實用藝術) 또는 응용미술(應用美術)이 있는데, 건축은 공예품과 같이 실용예술 또는 응용미술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술의 범주 속에 들어가는 건축은 원시적인 기법으로 가구(架構)된 선사시대의 주거건축과 같은 미술적 조형감각이 담기지 않은 것은 포함되지 않고, 권력을 상징하거나 종교적 숭고성이 표현되어야 하는 권위건축(權威建築)이 발생한 시기 이후의 건축이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인류가 이룬 최초의 건축활동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인공적으로 가구된 가구물은 당시 사람들이 잠자고 쉬기도 했던 집, 즉 주거건축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후기구석기시대에는 이미 인공으로 가구된 주거건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구석기시대 유적에 관한 발굴보고서에서 그러한 주거지의 발견이 보고되기도 하였으나, 아직 당시의 주거건축의 확실한 형태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는 여러 유적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확실한 주거의 유구(遺構)가 발견되고 있으며 그 대강의 모습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땅 위에 적당한 넓이와 일정한 모양으로 움을 파서 바닥을 고르고 굳게 다진 다음, 기둥을 세우고 긴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덮은 움집, 즉 수혈주거(竪穴住居)로, 기둥이나 도리·서까래 등은 덩굴이나 새끼로 얽어매어서 가구한 원시적인 건축이었다.
이러한 수혈주거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초기철기시대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게 되자, 그 모습이나 가구방법도 변화,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주거의 대부분은 수혈주거였고 그 말기에는 일부지역에서 지상주거(地上住居)·귀틀집 또는 고상주거(高床住居)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그 가구기법은 여전히 원시적이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중국의 동북부지방과 직접 연결된 일부지역에서 이미 중국 한대(漢代)에 시작된,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기와나 전(塼)을 사용하고, 큰 나무를 깎고 다듬어 촉과 홈 등의 이음새로 건축부재들을 서로 짜올리는, 매우 발달한 새로운 건축기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는 이 새로운 건축이 널리 보급되어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를 통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고, 단지 각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양식이 변하면서 계속 우리 나라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건축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사람들이 사는 집, 즉 주거는 점차 사람들의 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주생활이 변화하고 그 내용이 다양해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잠자고 쉬고 밥을 먹는 공간 이외에 간단한 석기나 골각기(骨角器) 등의 제작작업을 하는 공간, 곡식과 생활도구들을 저장, 격납하는 공간 등이 점차 필요하게 되어, 주거건축과 별도로 독립된 작업장이나 창고 등의 부속건축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사회의 발전에 따라 통솔자의 주거와 통솔받는 사람의 주거의 변화, 즉 주거의 규모와 양식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점차 궁전건축이 확립되고, 귀족의 주택과 서민의 주택 등 계급이나 계층에 따른 주거건축의 변화가 나타난다.
사회가 더욱 발전되어 국가적 형태를 갖추게 되고, 국가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자 성곽건축이 발생하게 되고, 통일국가로서의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국가통치 업무를 맡는 관리의 업무수행을 위한 공간, 즉 관아건축(官衙建築)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귀신이나 영성(靈星)·사직(社稷)을 제사하기 위한 공간, 즉 종교건축이 나타났고, 사람들의 교류범위와 교류량이 증대됨에 따라 교통로의 정비와 아울러 교량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건축의 여러 종류는 그 건축에 요구되는 공간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건축들로서 사용목적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이 밖에 건축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자재에 따른 분류 방법도 있다. 즉 주요자재가 목재인 경우 목조건축이라 하며, 흙을 주요자재로 한 건축은 토축건축(土築建築), 흙을 빚어서 구운 전(塼)으로 구축한 건축은 전축건축, 돌을 쌓아 만든 건축은 석조건축이라고 한다.
또, 그 건축이 건립된 지역에 따라서 분류하는 방법도 있다. 서양에 세워지거나 그것을 모방한 건축은 서양건축이라고 하며, 동양에 세워진 건축이나 이를 모방한 건축은 동양건축이라고 한다. 동양건축은 더 세분하여 한국건축·중국건축 혹은 일본건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건축은 동양건축의 범주에 들어가는 한국건축이며, 대부분 목재를 주요자재로 사용하는 목조건축이 많다. 주거건축·궁전건축·관아건축·종교건축 등이 목조건축에 속하며, 성곽건축의 성벽은 주로 석재 또는 흙으로 축조하지만, 성곽 내부에 세워지거나 성곽 위에 세워지는 여러 가지 시설은 목조건축이 많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 건축의 특징
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으로는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소나무가 주요 건축자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목조건축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과 온대계절풍 기후를 나타내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므로 겨울에 추위가 심하여 모든 건축이 내한적 건축(耐寒的建築)으로 발달하여 왔던 점을 들 수 있다.
또, 우리 나라는 전국토의 70% 정도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조화하기 위하여 큰 규모의 건축보다는 작은 규모의 건축이 많으며, 층수가 많은 높은 건축보다는 단층의 낮은 건축이 많다.
이러한 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은 어느 지역, 어느 민족의 건축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그 지역과 지리적 조건에 따라 필연적으로 형성된 건축의 특징인 것이다.
이 밖에 우리 나라 건축에는 건축의 주요자재인 소나무가 가지는 재질의 특성에 따라 나타난 특징과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성격이나 취향·습성에 따라 정착된 특징들이 있다.
소나무는 수액이 많고 점성(粘性)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목재가 비틀어지기 쉽고 치목(治木)한 뒤의 변형이 많으며 정밀한 치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밀하게 치목한다 해도 변형이 심해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건축의 세부가공이 정밀하거나 정교하지 못한 점이 특징이다.
우리 민족의 성격이나 취향·습성에 따라 정착된 건축의 특징으로는 우선 자연경관과 잘 조화되도록 규모나 형태를 정하며, 자연경관을 해치거나 억눌러서 그 경관을 변혁시키지 않도록 의도하고, 오히려 그 건축에 의하여 그곳 자연경관의 허점을 보완하고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건축을 건립한다.
또, 건축 자체에 있어서는 그 건축을 한 조형미술로서 아름답게 건축하기 위한 기법이나, 구조역학적으로 안전도를 높이는 기법들은 그 기법이 아무리 어렵거나 복잡해도 버리지 않고 잘 보존하여 왔으며, 세부장식에 있어서는 기능과는 상관없는 부가적인 장식을 많이 채용하지 않고 매우 간결하고 담백하게 건축을 만드는 특징을 가졌다.
세부가공이 치밀하지는 못하나 주위경관에 알맞게 조화되며, 조형미술로서 번잡하지 않고 균형잡힌 안정감이 넘치는 우리 건축의 특징은, 역시 목조건축이 주류를 이루는 동양건축에 포함되는 중국의 위압적이며 독존적인 건축이나, 일본의 규격화되고 수공예적인 감흥만을 노린 건축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 건축의 역사
  1. 1. 선사시대의 건축
    일제강점기에도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었으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된 것은 광복 이후의 일로서, 공주 석장리유적과 웅기 굴포리유적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의 대부분은 중기 또는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었으나, 연천 전곡리유적은 전기구석기시대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석장리와 굴포리유적에서 각각 주거지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으나, 그 보고만으로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 사람에 의해 가구(架構)된 주거나 건축을 말하기는 어렵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가구물의 유구, 즉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봉산 지탑리, 온천 운하리, 웅기 굴포리, 서울 암사동 등의 유적에서 당시의 주거지인 움집이 발견되었다.
    이 시대에는 동굴주거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수혈주거로, 원시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최초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가구물이었다.
    이 시대 움집의 평면은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정방형이 많았으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것도 있었다. 규모는 대부분 지름 7m, 깊이 0.6m 안팎으로 움집바닥 중앙에는 돌을 두른 화덕이 있고, 화덕 곁에 큰 토기항아리바닥을 잘라 움집바닥에 거꾸로 묻은 저장공(貯藏孔)이 있는 것이 많았다. 주거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은 움집바닥에 직접 세우기도 하고 구멍을 파서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기둥은 수혈벽 안쪽을 따라 원형으로 배치된 것이 많았고 기둥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기둥머리에는 도리를 걸고 가늘고 긴 나무를 움집 바깥 지표에서 도리에 걸쳐서 얽어매어 서까래로 삼고 그 위에 긴 풀이나 짚을 이었다. 이들 기둥과 도리 또는 서까래들은 덩굴이나 새끼로 서로 얽어매어 만든 원시적인 것이었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움집 평면이 장방형인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움집 평면은 거의 모두 장방형으로 바뀌었다.
    무산 호곡동, 강계 공귀리, 영변 세죽리, 송림 석탄리 등과 파주 교하리 및 옥석리, 서산 해미,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유적 등이 중요 유적들이며, 그 밖에도 압록강·두만강·대동강·한강·영산강 등의 유역에서 적지 않은 주거지가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의 주거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주거와는 달리 화덕이 꼭 움집 안 한쪽으로 치우쳐서 만들어졌고, 화덕이 두 곳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움집의 규모는 넓이가 20㎡인 것이 가장 많았고, 50㎡가 넘는 것이나 10㎡ 안팎인 것도 더러 있었다. 기둥은 기둥구멍에 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움집바닥에 직접 세우기도 하고 원시적인 초석 위에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기둥 배치는 대부분이 움집 긴 변에 평행하여 석 줄 또는 넉 줄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둥 배치로 보면 당시의 주거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이 많았던 것 같다.
    주거의 처마는 신석기시대의 경우와 같이 끝이 땅에 닿은 것도 있었을 것이나, 점차 땅에서 떨어져서 기둥이 직접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수혈주거 이외에 완전한 지상주거인 귀틀집과 집 마루를 높게 만든 고상주거도 있었던 것이 고문헌에 의해서 알려졌으며, 김해지방과 영암지방에서 고상건물의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 부여족 사이에는 중국의 발달된 기법과 자재로 만들어진 건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2. 삼국시대의 건축
    삼국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교류하여 중국의 발달된 각종 문화를 도입하여, 각기 그들의 고유문화와 조화시키면서 선진문화단계에 도달하였고, 나아가서는 중국을 능가하는 개성있는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는 그 시원종족인 부여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초부터 발달된 기법과 자재로 된 새로운 건축을 가지고 있었고, 백제 역시 건국초부터 새로운 건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소부족국가의 연합체로 시작되었고, 중국과는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격리되어 있어 건국 초기에는 원시적인 건축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국권이 안정되고 고구려나 백제와 교섭이 잦아지자 이들로부터 새로운 건축을 배웠을 것이며, 늦어도 5세기초에는 그러한 건축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경주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큰 무덤 속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나,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확인된 목곽(木槨)과 목관(木棺) 등의 치목법(治木法)이나 제작기법 등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에는 고분벽화에 그려진 성곽이나 전각(殿閣) 및 주택의 부속건물의 그림, 석주(石柱)와 두공(斗栱) 등을 모각(模刻)한 것과 기둥 따위 건축 세부를 나타낸 그림 등이 있어 당시의 건축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밖에 사찰이나 궁궐 등의 건축유적이 있으며 약간의 문헌자료도 있다.
    고분벽화 가운데 성곽그림이 있는 것은 용강대총(龍崗大塚)·삼실총(三室塚)·요동성총(遼東城塚)·약수리벽화분(藥水里壁畫墳) 등이다. 용강대총과 삼실총은 성곽의 일부를 바라본 그림이며, 요동성총과 약수리벽화분은 성곽의 부감도(俯瞰圖)이다.
    전각그림이 있는 고분은 쌍영총(雙楹塚)과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안리(大安里)1호분·팔청리(八淸里)벽화분·통구(通溝)12호분·안악(安岳)1호분들이며, 각저총(角抵塚)에는 전각 내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쌍영총은 장막 속에 맞배지붕으로 된 기와집을 그리고 그 속에 피장자 부부의 초상을 그렸다. 통구12호분은 중층(重層)의 전각그림이며, 안악1호분은 큰 주택의 부감도를 그리고 있다.
    이 밖에 고분의 그림은 퇴락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주택의 부속건물그림은 안악3호분·약수리벽화분·마선구(麻線溝)1호분 등에 비교적 많은 종류의 그림이 있고, 대성리(臺城里)1호분·무용총(舞踊塚)·각저총·통구12호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는 부엌을 그린 것이 가장 많고, 그밖에 마구간과 창고 등의 그림이 있다. 고분 묘실에 기둥그림을 그린 것 가운데 두공이 이중으로 된 것은 무용총·쌍영총·안악1, 2호분이며, 단층의 것은 각저총·귀갑총·용강대묘·감신총(龕神塚)이다. 이 밖에 기둥을 도식적(圖式的)으로 그린 고분도 있고, 대성리2호분은 수목형(樹木形)으로 그렸다.
    고분 내부에 돌기둥을 세운 것은 쌍영총·안악3호분·대성리1호분·요동성총·팔청리벽화분·마선구1호분 등이며, 천왕지신총은 전실(前室) 지붕이 마치 목조건물의 가구를 보는 듯이 도리나 대공을 돌로 만들었고, 주실(主室) 벽면에는 내부로 돌출한 첨차를 돌로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것을 보면, 당시의 목조건축은 근세의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는 별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사찰건축은 불교가 도입된 372년 이후 성문사(省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평양의 구사(九寺) 등 많은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미루어 매우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들 사찰의 터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으나, 평양 근처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시대 절터들이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몇몇은 발굴조사된 바 있다.
    금강사지(金剛寺址)라고도 전하는 평양의 청암리절터는 평면 팔각의 넓은 기단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팔각기단을 향한 건물이 있었고, 팔각기단 남쪽에는 문터가 있었다. 이와 같은 배치는 대동 상오리절터와 평양의 정릉사지(定陵寺址)에서도 밝혀졌고, 중앙의 팔각기단은 탑의 기단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가람배치(伽藍配置)는 탑을 중심으로 세 곳에 탑을 향해 금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궁궐건축은 평양시내에 있던 안학궁지(安鶴宮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배치 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안학궁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쯤 되는 마름모꼴의 왕성 안에 58채의 건물들로 구성되었다.
    궁궐은 남·중·북의 삼궁(三宮)과 동궁으로 형성되고 각 궁이 문과 회랑·궁궐건물로 서로 연결되고 있었으며 대체로 좌우가 대칭으로 되어 있었다.
    도성으로는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있으나 본격적인 도성은 평양의 장안성(長安城)이었다. 장안성은 북성·내성·중성 및 외성으로 구획되어 평지와 산악을 포용한 평면이 삼각형인 큰 성곽이었다. 북쪽은 절벽, 동·서·남의 삼면은 대동강과 보통강(普通江)으로 구획된 천연의 요새지이다.
    산성으로는 집안(輯安)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순천의 자모산성(慈母山城), 용강의 황룡산성(黃龍山城) 등이 유명하다.
    이들 산성은 읍락에 가까운 험한 산악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에 편리하고 수원(水源)이 풍부한 곳에 축조되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획하였는데, 거의 모두 삼면이 높은 산이나 절벽에 면하고 남쪽이 경사지로 되고 계곡을 포용하고 있었다.
    백제의 건축에 관한 자료로서는 2기의 석탑과 많은 절터와 산성들이 있고 문헌자료는 극히 적다. 중국의 고문헌인 『신당서 新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조에, “풍속은 고려와 같다(俗與高麗同).”고 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조에는 “궁실과 누각대사가 장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宮室樓閣臺榭不無壯麗).”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실·누각·대사 등의 건물은 궁궐 안에 세워졌던 건물이며, 이들은 발달된 새로운 기법과 자재를 사용하여 세워진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양식들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와당(瓦當)이나 유물 등으로 미루어 건축의 가구기법이나 구조는 고구려의 경우와 별다를 바 없었고, 세부양식은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으로 좀더 부드럽고 경쾌한 느낌의 건축이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미륵사는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무왕이 건립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최근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지금 남아 있는 석탑은 미륵사의 서탑이며, 동쪽에 똑같은 모습의 동탑이 있었고, 중앙에 좀더 규모가 큰 목탑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탑은 반파되었으나, 탑의 동쪽 부분이 잘 남아 있는데, 목조탑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하여 만든 우리 나라 석탑의 시원탑(始原塔)으로, 따라서 석탑의 구조양식에 약간의 결점이 있었던 탑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미륵사탑의 구조적인 결점을 시정하여 완전하게 석탑구조를 완성한 백제양식의 석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백제사찰의 가람배치는 초기의 한성(漢城)시대와 웅진(熊津)시대의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후기인 사비(泗沘)주 01)시대의 것에 대해서만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절터에 대해서는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금강사지(金剛寺址) 및 정림사지가 발굴조사되었고, 미륵사지는 198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가람배치가 밝혀졌다.
    그 결과 군수리사지와 금강사 및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나온 회랑이 탑과 금당을 쌓아 강당 좌우, 혹은 강당 좌우에 있는 건물 양끝에 닿는 형식, 즉 1탑식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는데, 정림사만은 탑이 석탑이었다.
    동남리사지는 1탑식 가람배치에서 탑을 뺀 형식이며, 미륵사지는 강당을 뺀 1탑식 가람 셋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을 그 뒤에 마련한 특이한 배치였다.
    백제는 건국 초에 한강 남안의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고, 371년에 한산성(漢山城)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하나 그 자리는 확실하지 않다. 475년에는 도읍을 웅진에 옮겨 도성을 공산성(公山城)으로 정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궁궐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538년 다시 사비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삼았다.
    사비에서의 도성은 부소산(扶蘇山)을 뒤에 두고 부소산성의 남쪽 백마강(白馬江) 서쪽 강가일대를 포함한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그 안을 오부오항(五部五巷)으로 구획하여 처음으로 조방제(條坊制)를 갖춘 왕도(王都)를 이룩했다.
    도성의 외곽에는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석성산성(石城山城)·노성산성(魯城山城) 등의 성을 축조하여 방어선을 삼고 그 밖에 많은 성을 배치하였다. 백제 영역에는 지금도 많은 성들이 남아 있으며, 그 대부분은 서해안 부근에 배치되고, 평지에는 토성, 산악에는 산 정상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였다.
    신라의 건축에 관한 자료로는 가야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몇몇 가형토기(家型土器)와 2기의 석조건물 이외에는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芬皇寺) 등 당시의 사찰유적과 왕성이었던 월성(月城)뿐이다. 가형토기는 대부분이 창고나 축사(畜舍)를 모방한 것이며, 당시의 주택 안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가 한점 있다.
    주택의 안채로 보이는 토기는 기와지붕으로 된 맞배집으로 전면 중앙에 출입구인 문 두 짝이 있고, 그 왼쪽에 방을 나타내는 창, 오른쪽에는 부엌을 나타내는 작은 문 3개가 선각되었다.
    창고를 모방한 토기는 고상(高床)의 창고를 모방한 것과 내부가 이층으로 된 지상건물 형태가 있다. 축사를 모방한 토기도 지상건물로 된 창고와 비슷한 모습인데, 이들은 모두 긴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를 나타내고 있다.
    신라에서 발달된 새로운 기법과 자재로 된 건축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택 안채를 모방한 가형토기나 경주지방에서 발견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목곽이나 목관 등의 제작기법, 호화로운 유물 등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초에는 새로운 건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목조건축은 황룡사지 발굴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향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건축과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조건축으로는 첨성대와 분황사석탑이 있다.
    첨성대는 원형을 거의 남기고 있으며, 장대석으로 된 정방형 기대(基臺) 위에 위가 좁아진 원통형의 본체를 올렸다. 분황사석탑은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아 탑신이나 옥개를 만든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고신라의 사찰 가운데 가람배치가 밝혀진 것은 황룡사와 분황사뿐이다. 황룡사는 궁궐을 짓기 위한 공사 중에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바꾸었기 때문에 창건당시의 가람배치는 매우 특이한 형태였다.
    그러나 574년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조(鑄造)하고, 이를 안치하기 위하여 584년에 금당을 중건하여 645년에 오층목탑이 완공되면서 이루어진 중건가람(重建伽藍)이 본격적인 가람배치를 갖춘 것이었다.
    이 가람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를 신라의 개성에 따라서 변형한 신라식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탑 뒤에 세 금당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었다.
    분황사 역시 황룡사와 같은 형식의 가람배치였으나 동·서 금당이 중금당보다 조금 남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밖에 흥륜사지(興輪寺址)의 경내 일부를 발굴조사한 바 있으나, 그 가람배치를 밝힐 수 있는 본격적인 발굴이 아니었다.
    신라의 도읍은 건국 이래 멸망할 때까지 경주였다. 그것은 경주가 가지는 지리적 조건이 자연의 요새지로서의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궁궐은 당초 남산(南山) 서쪽 기슭의 고허촌(高墟村)에 있었고, 이어 금성(金城)으로 옮겼다가 101년(파사왕 22)에 월성(月城)을 축조하여 여기로 옮겼다.
    월성은 남천(南川) 북안(北岸)을 남쪽 끝으로 삼고, 반월형으로 축조된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성으로 본래는 성밖에 해자(垓子)가 있었다.
    월성 내부에는 많은 궁전건축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 그 건물의 배치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신라의 산성은 경주를 둘러싼 여러 산에 축조되었으며, 그 밖에 신라 영역 안에도 많은 성이 축조되었다. 이들 산성은 대부분 산꼭대기를 포함하여 산 능선을 따라 석벽을 쌓은 것으로, 석벽은 수직에 가깝게 축조되었다.
  1. 3.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통일신라시대의 목조건축은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의 내용과 당시의 기와나 전돌의 문양, 석조건조물에 표현된 목조건축의 요소 등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당시의 가장 호화로웠던 건축을 추측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기단은 잘 다듬어진 석재로 이중 또는 삼중으로 만들었고, 지붕에는 치미(鴟尾)나 귀면와(鬼面瓦) 및 막새기와로 장식했으며, 처마는 겹처마였다. 기둥 위에는 이출목(二出目) 이상의 출목을 가지는 두공을 올리고, 건물을 오색단청과 각종 장식금구(裝飾金具)로 장식했다. 건축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였으며 초석에는 원형 주좌(柱座)를 조각했다.
    이러한 건축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의 가구구조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중국 당나라의 건축을 신라적으로 조화, 정착시킨 것이었을 것이다.
    석조건축으로는 석굴사원과 석탑 및 부도 등이 있다. 석굴사원으로는 인공적으로 축조된 것이기는 하나 경주 석굴암이 있어 그 가구기법이나 불상조각들의 우수함은 당대 제일이다.
    또,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은 암벽에 굴을 파고 그 속에 석조삼존불을 안치한 것으로 석굴암에 앞서서 건립된 것이다. 석탑은 감은사(感恩寺) 동·서 삼층석탑에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형태가 확립되어 그 뒤 세부적인 변화를 나타내면서 전시대를 통해 성행하였다.
    전형양식의 석탑 이외에 이형탑(異形塔)이라고 할 수 있는 석탑도 있다. 즉 목조건축의 세부양식을 일부에 나타낸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조각과 전체의 균형이 절묘한 불국사 다보탑 및 정혜사지(淨惠寺址)십삼층석탑이 있다.
    또,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과 같이 기단을 네 개의 사자상으로 만들어 그 위에 전형양식의 삼층석탑을 올린 것과 실상사백장암(實相寺百丈庵)의 삼층석탑과 같이 탑신에 목조건축의 난간을 조각한 탑 등도 이에 속한다.
    석조부도는 어느 시기부터 신라에서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844년경에 건립된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부도는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대석 위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탑신 세부가 목조건축의 세부양식을 비교적 자세히 모각하였고 우리 나라 석조부도의 기본형태 중의 하나로 되었다. 그러나 석조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고려시대에 들면서 크게 성행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창건한 사찰은 사천왕사(四天王寺)이며, 이어 감은사·망덕사·고선사 등이 건립되었다. 경주 이외에도 각처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 가운데는 오늘날까지 그 법등(法燈)을 이어 오는 사찰도 적지 않으며, 이미 폐허가 되어 그 유적만 남은 것도 적지 않다. 그러한 유적 가운데 발굴조사되어 가람배치가 밝혀진 것은 감은사지·망덕사지·고선사지·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 및 불국사 등이다.
    고선사지 이외의 절터는 금당 앞 좌우에 탑을 세우고 금당 좌우에서 동·서 회랑 사이에도 회랑, 즉 익랑(翼廊)이 설치된 이른바 쌍탑식(雙塔式) 가람배치로 된 사찰이었다.
    그리고 망덕사는 목탑, 그밖의 것은 석탑으로 된 쌍탑식 가람이었다. 이 밖에도 발굴조사되지는 않았지만 탑 기단이 남아 있거나 석탑이 남아 있어 그 가람이 쌍탑식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절터도 많다.
    즉, 사천왕사지·원원사지(遠願寺址) 및 실상사 등도 이에 속하므로, 쌍탑식 가람배치가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임을 알 수 있다. 고선사의 가람배치는 금당원(金堂院)과 탑원(塔院)이 동서로 나란히 놓인 배치였는데,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고선사 이외에는 아직 그 존재가 밝혀진 바 없는 새로운 가람배치 형식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궁궐건축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굴조사된 안압지(雁鴨池) 주변에서 나타난 건물유구가 유일한 구체적인 자료이다. 안압지 서쪽에는 아마도 그중의 하나가 임해전(臨海殿)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큰 규모의 건물 세 채가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되고, 이들 건물은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세 건물의 동쪽 회랑은 안압지 서쪽 기슭에 면하여 몇몇 건물이 못가에 세워져 이들과도 연결되고 있었다. 안압지 남쪽은 못에서 좀 떨어져 규모가 작은 건물들과 회랑 및 보도(步道)·담장 등으로 구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안압지 서쪽은 임해전을 비롯한 궁궐의 중심부이고, 남쪽은 궁궐의 부속시설이 있었던 것 같다.
  1. 4. 발해의 건축
    발해는 699년 고구려의 유신(遺臣) 대조영(大祚榮)이 대동강 이북에서 모란강(牡丹江)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한 강대한 나라로서, 신라의 남조에 대하여 북조라고도 했으며, 920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멸망하였다. 대부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도읍을 두었으며, 그 밖에도 5경(五京)이 있었다.
    상경용천부는 동서 약 5㎞, 남북 약 3.4㎞의 장방형 외성을 쌓고 그 주위에 해자를 둘렀다. 성안에는 조방(條坊)에 따라 주택·사찰·시장 등을 배치했고 북쪽에 궁궐을 만들었다. 궁궐은 한 변이 약 1㎞의 방형이며, 내부를 중심구와 동·서·북구로 갈라 중심구에 궁궐의 공식적인 시설을 두었다. 그 밖의 구역에는 궁궐의 부속적인 시설을 만들고, 궁궐의 정문 앞에 관아를 배치하였다.
    사찰의 터는 상경 용천부 부근에서 10여곳이 발견되었고, 다른 경(京)에서도 얼마간 발견되고 있으나, 가람배치를 알 수 있을 만큼의 조사는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나 전돌의 문양은 고구려적인 요소가 많았고, 특히 수막새기와의 4엽 또는 6엽의 연화문은 고구려의 그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발해의 건축 역시 고구려적인 구조양식을 바탕으로 얼마간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 5. 고려시대의 건축
    고려 초기 건축을 비롯한 모든 문화는 신라를 계승했다. 그 뒤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송나라와의 교류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당시 건축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양상을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중기에 들어와서는 남송(南宋)과의 교류로 중국 화남지방에 있던 새로운 양식의 건축이 고려에 도입되어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정착시켰고, 그 말기에는 원나라와의 교류로 화북지방에 있던 또 하나의 새로운 건축양식이 도입되어 다포(多包)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들 두 양식의 건축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나라 권위건축의 주축을 이루었다. 주심포양식은 두공이 기둥 위에만 설치되고 천장가구가 없으며, 따라서 옥개가구재가 옥내에 노출되므로 장식적 의장(意匠)이 많다.
    이 양식의 원형은 옥내 공간을 크게 만들 수 있는 구조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원형양식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재래의 건축에 부가됨으로써 원형과는 전혀 다른 우리 나라 특유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봉정사극락전은 재래 건축의 일부에 새 양식이 부가된 과도적인 양식을 나타낸 건물이며, 부석사무량수전에서 비로소 우리의 주심포양식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주심포양식은 고려 말에는 세부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나타냈는데, 수덕사대웅전·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등의 건축이 남아 있다. 다포양식은 주심포양식의 경우와는 달리 원형양식이 그대로 도입되었던 것 같으나, 도입 직후부터 세부적인 변화를 나타내며 조선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이 양식은 두공이 기둥 위뿐만 아니고 기둥과 기둥 사이 상부에도 배치되며, 이들 두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돌려놓인 평방(平枋) 위에 설치되어 천장가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옥개가구재가 천장에 가려져서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장식적 의장이 없다.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이 다포양식의 목조건축 세부를 충실히 모각한 석탑이며,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은 고려 말에 세워진 다포양식의 목조건축이다.
    고려의 석조건축으로는 석탑이 가장 많으며 석조부도도 성행했다. 석탑은 대부분이 신라양식의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세부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데 장식적인 조각이 많아졌다. 백제의 옛터에는 백제양식의 석탑도 몇몇 남아 있다.
    그 밖에 이 시대에 들어서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석탑으로 평면이 육각 또는 팔각인 다층석탑이 평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이 대표적인 예로서, 『삼국유사』 권4의 고구려 영탑사석탑조(靈塔寺石塔條)에 기록된 팔각칠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고려 말에도 원나라의 영향으로 평면이 아자형(亞字形)으로 된 경천사십층석탑이 나타나기도 했다.
    석조부도는 여전히 팔각원당형이 기본형태이나 대석(臺石)에 조식(彫飾)이 많아지고 탑신은 간략화되었다. 또, 이형부도(異形浮屠)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부도도 나타났다.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이 석탑형으로 된 것을 비롯하여, 탑신을 편구형(扁球形)으로 만들고 옥개를 연엽형(蓮葉形)으로 만든 정토사홍법선사실상탑(淨土寺弘法禪師實相塔), 보련형(寶輦形)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이다. 또, 말기에 와서는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성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국 후 개성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태조는 법왕사(法王寺)·자운사(慈雲寺) 등의 십찰(十刹)을 창건하고 계속 여러 왕들이 개목사(開目寺)·불일사(佛日寺)·흥왕사(興王寺)·안화사(安和寺) 등을 창건하였으며, 지금도 법천사(法泉寺)·거돈사(居頓寺)·만복사(萬福寺) 등의 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절터 가운데 흥왕사지와 만복사지만 발굴조사되었을 뿐이다.
    흥왕사는 중앙에 팔각의 탑을 배치한 중원(中院)과 그 좌우에 동원·서원이 배치되었다. 만복사지는 서쪽에 법당, 동쪽에 목탑이 배치되고, 이 밖에도 그 동쪽에 석탑이 있는 매우 복잡한 가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1탑3금당식과 같은 형식임이 밝혀졌고, 석탑 등은 후대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불일사지는 표면 관찰로도 일탑식 가람배치로 된 사찰임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가람배치 형식은 매우 다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태조 2년(919)에 도읍을 개성에 정하여 이를 개경(開京)이라고 하였고, 몽고의 침입으로 한때 강화로 왕도를 옮긴 일 이외에는 이성계(李成桂)에게 국권을 넘길 때까지 이곳에 도읍하였다.
    도성 안에는 방리(坊里)를 정하고 그 속에 관아·사원·시장 및 민가를 배치하였으며,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여 토성을 쌓아 나성(羅城)으로 하였다.
    중경(中京)인 개경 외에 평양을 서경(西京), 경주를 동경(東京), 한양을 남경(南京)으로 정하고 각각 성곽과 이궁(離宮)을 만들었다. 왕궁은 개경의 만월대(滿月臺)에 만들어 문과 회랑, 그리고 궁궐은 능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겹겹이 배치하였다.
  1. 6. 조선시대의 건축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이 궁궐이나 사찰 등 주요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두 양식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부의 가공기법이 간략화되고 두 양식이 혼용되기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건물의 두공의 주두와 소로에서 가장 일찍이 나타났다.
    주심포양식의 주두와 소로에 있던 굽받침이 없어지고 다포양식의 주두와 소로에서는 굽의 곡면(曲面)이 없어지며, 두 양식의 주두와 소로가 같은 형태로 변한 것이다.
    주심포양식의 건축에 다포양식이 혼용된 건축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및 관룡사약사전(觀龍寺藥師殿) 등 규모가 작은 건물을 들 수 있는데, 이와같은 건물들은 첨차가 다포양식의 첨차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포양식의 건축에 주심포양식이 혼용된 것으로는 평양의 보통문(普通門), 개심사대웅전(開心寺大雄殿) 및 전등사 약사전(傳燈寺藥師殿) 등이 있다.
    보통문은 건물 내부에 세운 네개의 고주(高柱) 위에 평방을 돌리지 않고 두공을 올렸고, 건물 갓기둥의 두공도 이출목이면서 첫출목 밑에 첨차가 없는 것 등 주심포양식과 상통되어 있으며 천장가구가 없다.
    개심사대웅전 역시 천장가구가 없고 마루도리를 화반(花盤)이 지탱하는 주심포양식의 기법이다. 전등사약사전은 평방을 돌리지 않고 두공을 직접 기둥 위와 창방 위에 올리고 있다.
    이들 두 양식은 시기가 내려오면서 세부에 장식적 의장이 많아진다. 주심포양식의 첨차는 점점 길어져 그 끝이 반전(反轉)되며, 다포양식의 제공 끝의 쇠서[牛舌]가 길어지고 위로 올라가며, 건물 내부의 제공은 화려한 운궁(雲宮)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현저해진다.
    이 시대에는 앞에서 말한 두 양식의 건축 이외에 익공양식(翼工樣式)이라고 부르는 건축양식의 건물이 있고, 또 기둥머리에 아무런 장식적인 가구물이 없는 도리집이 있다.
    익공양식은 그 시원이 확실하지 않으나 16세기에 건립된 주택건축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양식은 주심포양식의 두공부를 극도로 간략화한 형식이며, 보의 뺄목 끝이나 초공(草栱)을 길게 빼어 새의 날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고분인 환문총의 주형도(柱形圖)는 기둥머리에 초공을 끼운 모습으로, 이 초공을 새의 날개처럼 만들면 익공이 될 수 있어, 그 당시에 이미 익공양식의 시원적인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공양식은 궁전의 침전(寢殿)이나 관아건축, 사찰의 이차적 건물과 같이 화려한 모습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 건물이나 묘사(廟社)·향교·서원 등의 유교적 건물에 주로 채택되었다.
    조선시대의 석조건축으로는 석탑·석조부도·석빙고 등이 있다. 석탑이나 부도는 조선조의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앞시대에 비하여 볼만한 것이 적으나, 청나라와 명나라의 영향을 나타내는 유구들이 얼마간 남아 있다.
    석빙고는 경상도지역에만 분포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이다. 석탑은 거의 전시대의 것을 계승하였다.
    낙산사칠층석탑은 신라양식의 석탑을 조금 변형한 탑이며, 선암사화산대사사리탑(仙巖寺華山大師舍利塔)은 석탑형태로 된 부도이다.
    또, 평면이 8각인 수종사팔각오층탑(水鐘寺八角五層塔)이라든지 경천사십층석탑을 그대로 모방한 원각사십층석탑(圓覺寺十層石塔)이 있다. 조선시대의 개성을 강하게 나타낸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신륵사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을 들 수 있다.
    석조부도는 팔각 평면의 2단대석 위에 간석(竿石)과 상대석(上臺石)을 놓고 그 위에 구형 또는 편구형의 탑신을 올린 뒤 두툼한 팔각의 옥개석을 올린 형식이 성행하였다.
    복천암수암화상탑(福泉庵秀庵和尙塔) 및 등곡화상탑(燈谷和尙塔)·회암사(檜巖寺)의 두 기의 부도, 장안사무경당영운탑(長安寺無竟堂靈雲塔) 등이 대표적인 부도이다. 석종형부도는 이 시대에 가장 성행하여 전 사찰에 유구가 분포하고 있다.
    석빙고는 홍예구조(虹蜺構造)를 연결시킨 석실을 반지하식으로 만들고, 출입구와 지붕에 바람구멍을 내어 흙으로 덮은 것이다. 문헌상으로는 신라시대에 이미 빙고가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18세기의 것으로 경주를 비롯하여 안동·청도·창녕·영산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도성은 1394년(태조 3)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종묘와 관아를 건립하여 한성(漢城)이라고 이름하여 도성을 완비하였다.
    한성은 북에 백악(白岳), 남에 남산(南山), 동에 응봉(鷹峰), 서에 인왕산(仁王山)이 있는 천연의 요새지로, 전체 길이 18㎞의 성벽을 쌓았다. 성벽에는 여덟 곳에 크고 작은 문을 열었는데 정문이 숭례문(崇禮門)주 02)이었다.
    도성 안에는 궁궐을 건립하였으며 지금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및 경운궁(덕수궁)이 남아 있다. 경복궁은 태조가 창건한 조선왕조의 중심궁궐이었으나 임진왜란에 불타 폐허가 된 것을 고종대에 와서 중건한 것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창건한 것이나 역시 임진왜란에 불타 광해군이 중건한 것이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경궁은 성종대에 건립되었는데,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과 회랑 등은 건립당시의 것으로 현존 궁전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후에 건립된 것이나 왕궁으로 사용된 일은 없었다. 도성 이외에 도성에 준하는 화성성곽(華城城郭)주 03)이 정조에 의해 건립되어 성문을 비롯한 성벽과 성안 여러 시설들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또, 이 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군 및 현의 관아를 중심으로 읍성(邑城)을 건립하였다. 지금 해미읍성·강화읍성 및 고창읍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주택건축은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주택은 지역에 따라서 평면형태에 차이가 있으며, 서민주택과 중류 및 상류주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서민주택과 중류주택은 주택의 규모나 사용되는 건축부재에 질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차이는 없으나, 상류주택에는 누마루가 있고 건축의 구조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1. 7. 근·현대의 건축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다른 문물과 함께 낯선 서구양식이 유입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통건축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체제와 생활의 기능이 서구화함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건축은 우리 나라가 능동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에서 타율적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개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인 만큼 일본의 외교공관시설이 처음으로 들어와 원산(1880)·인천(1883)·서울(1884)·부산(1884) 등지에 그들의 영사관과 공사관이 차례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초기 일본기술에 의한 의양풍(儀洋風)의 목조 2층건물들이었다.
    1890년 이후부터는 서양 각국의 외교공관도 출현하였는데, 러시아(1890)·영국(1890)·프랑스(1896)·벨기에(1905)·독일영사관(1900년경) 등 준 르네상스식 벽돌 2층건물로 격식을 갖춘 것이었다.
    또, 신구 기독교의 유입에 따라 배재학당교사(1886)·정동교회(1898)·천주교 명동주교관(1890)·약현성당(1892)·명동성당(1892∼1898) 등 고딕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이무렵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에는 주거형식의 외국상인들의 상용건축(商用建築)이 세워졌으며,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관민이 협력하여 독립문(1897)이 건립된 사실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열강의 각축과, 특히 러시아 세력하에 정국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의 환궁을 위하여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중건하면서, 1900년을 전후하여 그 구내에 궁전으로서 몇 개의 서양건물을 세웠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조전은 고전주의적인 수법의 세련된 건물이다.
    한편, 1900년대 전반에 전차·철도 시설에 따른 회사건물, 외국선교계통의 종교 및 의료시설들이 세워짐에 따라 양옥건축이 일반시민에게 눈익은 것이 되어갔다.
    1905년 러일전쟁 결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게 된 일본은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를 창설하여 다수의 일본인 기술자를 관리로 침투시켜 침략준비로서의 관아건물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의정부청사(1907)·대한의원본관(1908)·한성재판소(1908)·내부청사(1910) 등 적지않은 건물이 그때 세워진 것이다. 그밖에 기독청년회관·서북학회회관 등 민간의 건물도 약간씩 출현하였다. 이 시기의 건물들은 벽돌 2층의 준 르네상스식인 것이 많았으며, 한옥과 양옥 절충의 점포가 종로 등에 생겨났으나 상가의 대형화로 오래 가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의 행정기구 재조직과 함께 관아건물을 더욱 많이 세우게 되었는데, 1916년에서 1926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세워진 총독부 건물은 르네상스식 석조건축으로 일제강점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밖의 관아건축들은 르네상스식에 바탕을 둔 절충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1922년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조선건축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회원 122명 중 우리 나라 기술자는 한 사람뿐이었고, 다음해에 10명이 가입하였는데 대부분은 1919년 첫 한국인 졸업생을 낸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일가를 이루어 작품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이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전문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서구인 기술자의 설계도 약간 있었는데, 조선호텔·성공회·이화학당·연희전문·숭실전문 등 주로 종교계통의 것이었다. 조선호텔이 네오바로크, 성공회가 로마네스크, 기타 기독교계학교들이 고딕의 각 양식을 취하였다. 1925∼1926년경부터는 지금까지 양식주의(樣式主義)로 일관하던 것과는 그 양태가 달라진다.
    그것은 1920년대에 출현한 서구의 합리주의운동이 일본을 거쳐 들어왔고, 또한 「조선회사령」 철폐로 일본자본이 우리 나라에 크게 진출하면서 건축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식주의가 전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시대까지 관아건축이 대부분 양식주의로 그 수효를 채워, 그 수는 적지만 은행·미술관·학교 등에 약간씩 그대로 존속하였다. 합리주의적인 건물은 경성전기주식회사(1929)·상공장려관(1929)·체신국분관(1934)·부민관(1935) 등을 비롯하여 주요간선도로에 연이어 나타났다.
    1928년경부터는 한편으로 건축에 조선의 향토적 정서를 포함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선 전주·남원·서평양·경주 등 유서깊은 지방의 역사(驛舍)라든가 박물관 등에 채택되었다. 말하자면, 한·양(韓·洋)의 의식적인 절충이라 할 것이다. 1929년경부터 한국인 건축가의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요 건축가로는 우선 박길룡(朴吉龍)을 들 수 있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성북동 김연수씨저택(1929)·조선생명보험사옥(1930)·경성제국대학본관(1931, 지금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동일은행남대문지점(1931)·한청빌딩(1935)·화신백화점(1937)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근대주의 대두 후의 작품이지만, 경박한 기능주의에 흐르지 않은 무게 있는 것들로 평가된다.
    다음 박동진(朴東鎭)은 보성전문학교 본관(1934, 지금의 고려대학교)·조선일보사 구사옥(1935)·보성전문학교 도서관(1937)·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1937)·대전지방법원 청사(1939) 등 석조고딕양식 건축에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강윤(姜沇)은 태화기독교사회관(1939)과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음악당·본관·기숙사 등 고딕식 석조건축에 능하나,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는 한·양 절충의 개성있는 작품을 보였다.
    그 밖에 박인준(朴仁俊)의 세련된 양옥주택, 김순하(金舜河)의 전라남도청 및 동 강당(1932), 유원준(兪元濬)의 종로일가장빌딩(1936년경)·함흥명보극장(1940년경), 이천승(李天承)의 종로영보빌딩(1937), 김희춘(金喜春)의 남대문로 동경건물회관(1941) 등이 있다. 그중 이천승과 김희춘 등은 해방 후 건축설계의 선도자로서 한국건축을 다음 세대에 잇는 구실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경제사정과 체제 미확정 등으로 실질적인 건축활동은 소규모의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축인들은 의욕에 넘쳐 광복 즉시 ‘조선건축기술단’을 조직하여 기관지 간행을 통하여 계몽하는 한편, 국민주택설계공모를 하는 등 능동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에 두각을 드러낸 이천승·김희춘·이희태·강명구(姜明求)·송민구(宋旼求)·김정수(金正秀)·김태식(金台植) 등은 6·25전쟁 뒤 건축계의 중견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중에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국군충효탑설계공모 등 추상적이나마 건축의 의욕은 계속되었고, 그 뒤 전후 복구를 위한 공사는 많은 건축가들의 활동의 장을 마련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건축학회’가 ‘조선건축기술단’ 후신으로 발족하였고, 1957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의 전신인 ‘한국건축작가협회’가 조직되었다.
    1950년대의 주요작품으로는 남산국회의사당현상설계(1959, 미실시, 김수근 외)·명보극장(1957, 김중업)·부산대학교 본관(1957, 김중업)·서울대학교 농과대학교사(1957, 김희춘)·국립중앙기상대(1959, 정인국)·중앙대학교 도서관(1959, 차경순)·동국대학교 본관(1956, 송민구)·정신여자고등학교과학관(1958, 김정수)·혜화동성당(1958, 이희태) 등이 있는데, 대체로 국제주의적인 경향의 작품들이다.
    1961년 5·16으로 시작되는 1960년대는 경제개발과 더불어 건설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서울시민회관(1961, 이천승)과 프랑스대사관(1962, 김중업), 워커힐 각 동(1962, 김희춘 외)·명동성모병원(1963, 김정수), 한양컨트리클럽(1964, 이광노)·예총회관(1964, 강명구)·자유센터(1964, 김수근)·남산시립도서관(1964, 이해성)·제주대학교본관(1964, 김중업)·조흥은행본점(1964,이천승·정인국 외)·유네스코회관(1966, 배기형)·경기도청(1967, 김희춘)·복자기념성당(1967, 이희태) 등이 있다.
    이것들은 국제주의적 경향이 기반이 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는 표현적인 노력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밖에 196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여박물관의 설립 등을 계기로 전통논의가 있었으나, 어떤 귀결점에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국수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의 변화로는 기념적 공공건물의 속출과 업무용 건축의 대형화 및 주거건물의 변모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기념적 건축인 국립극장(1973, 이희태)·국회의사당(1975, 김정수 외)·세종문화회관(1978, 엄덕문) 등은 열주(列柱)를 사용한 고전적 근대주의와 한국적 건물의 세부를 반영한 것이며, 업무용 건물인 동방생명빌딩(1976, 박춘명)·대우센터(1976) 등은 합리주의적 근대주의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거건축은 합리적 기능주의에서 유기적 형태로의 변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와우아파트붕괴(1970), 대연각호텔 화재(1971) 사건 등은 이 시대의 조악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1980년대는 대한생명 63빌딩의 착공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건축대전은 1982년 새로이 탈바꿈되어서 나타났고, 1980년대 초 우리의 근대건축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 건축의 근대화·식민성, 그리고 보존 문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건축사를 보존하고 재생하는 운동’으로서, 중앙청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재사용하기로 한 국무회의 의결(1983)이나 화신백화점의 보존 운동 등으로 이어져 갔다.
    1980년대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은 도심의 재개발이었다. 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심 재개발은 서울을 대대적으로 확장시키고 고층화시켜 나갔는데, 이는 1960년대 청계천 복개 등에서 시작된 것으로, 을지로 2가 구역재개발사업(1983)은 물량주의적 작업이었다.
    19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의 서울올림픽 개최는 처음으로 국제사회의 인식권에 들어간 것으로, 국립경기장 선수촌·기자촌·올림픽공원 등은 우리 건축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2백만호 주택건설에 따른 분당·일산 등의 주택정책은 여과를 거치지 못하고 강행되어, 그 후유증은 건축 전분야에 퍼지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의 국제그룹 사옥, 중앙일보 신사옥 등에 국외 건축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는 공동책임의 시대로서, 1993년 청주 우암상가아파트의 붕괴, 서울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은 물량시대, 정신 황폐화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만달러시대에 걸맞는 건축의 발전은 더욱 요원해지고, 본질적인 사명감이라든지 도덕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 있다.
    청와대에서, 남산에서, 여의도에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또 다시 큰 것이 부서져 나갔다. 우리 모두 경험도 여과되지 않은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에 빠져 지내는 동안 1990년대도 이미 다 지나가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건축기술의 발달
철제의 연모를 부리게 되면서 집짓는 일은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된다. 돌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주춧돌을 다듬을 수 없었으나 쇠를 사용하여 돌을 다듬는 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자, 나무를 다듬는 일은 훨씬 수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솜씨가 향상되었다.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에서 살던 집은 주춧돌을 일곱 모로 다듬고 소나무기둥을 세운 그런 구조였다. 뒤에 그의 아들이 이 주춧돌 밑에서 신표(信標)를 얻어 임금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돌을 다듬어 일곱 모를 접을 수 있는 수준이면 치석(治石)하는 솜씨는 물론, 부정형의 돌을 일곱 모로 접을 수 있는 수리응용의 능력도 배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주몽이 졸본에서 등극한 것이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면, 고주몽의 동부여의 집은 그 이전 시기에 경영되었던 초기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건축조영의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어서 건국 4년 뒤인 서기전 34년 성곽과 함께 궁궐도 경영한다. 서기전 24년 어머니인 유화(柳花)를 위하여 신묘(神廟)를 세우고 서기전 17년에는 이궁(離宮)을 건립한다. 이러한 사실은 필요에 따라서 여러 유형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가락국 또한 건축이 발전되어 있었다. 서기 42년에 등극한 수로왕은 가궐(假闕)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집은 석자 높이의 토단 위에 지은 초가집으로 아직 기스락(처마끝)조차 가지런히 잘라내지 않은 질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등극한 이듬해에 좋은 터전을 골라 1, 500보의 나성과 함께 궁궐도 경영하였는데 그 모습이 장려하였다.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에서 가락국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좋은 집들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은 옛날부터의 경험과 배양된 능력 등 많은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 짓는 일은 석기시대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물고기를 잡고 들짐승을 사냥하고 조개를 잡아먹던 시절에는 아무리 풍요한 음식물이 있었다고 해도 저장이 불가능하였다.
철에 따라 달라지는 기후의 조건에서 안정된 공급이 절실한 것이기 때문에 저장의 가능성이 탐색되었다. 소박한 대로 흙을 빚어 그릇을 구워내게 되면서 저장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저장의 효과적인 보장을 위하여서는 집도 정착성향으로 옮겨간다. 즉, 동굴이나 비탈을 의지하고 짓던 질박한 집에서 의도된 집을 짓는 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농사짓는 일에서 익숙해진 나무도끼나 돌도끼, 또는 적당한 연모로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든 것이 움집의 시작이다.
돌도끼나 돌낫·돌끌 같은 연모들을 사용하여 적절한 재목들을 마련하고, 이를 적당히 다듬어 땅을 파고 박아 묻어서 벽체를 구성하였는데, 기둥 사이에 알맞은 나무를 건너질러 짐승가죽이나 풀로 외벽을 구성하였다.
이때 기둥과 가로지르는 나무를 끈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이음과 결색의 능력이 이로써 함양되기 시작하였다. 오두막집을 짓거나 귀틀집을 짓는 시기가 되면 다듬고 잇고 맞추는 기술에 걸치고 의지하는 방식까지 터득하게 된다. 벽체와 지붕의 분화가 이룩된 것이다.
인구가 늘고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됨에 따라 통치자가 생겨나고 살림집 이외의 건축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어야 할 건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전문기능인들이 작업의 중심이 되었고, 이들의 기능은 기술로 발전하게 되는데 더 편리한 연모를 제작하는 창의성도 발휘되게 된다. 이럴 때 철제연모의 등장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게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철재는 돌에 비하여 연모를 만들어내기가 쉬웠으며,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다. 부러져도 재생산이 가능하였고, 무디어지면 날카롭게 가다듬을 수도 있었으며, 돌보다 강하여서 돌을 다듬을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다듬어 만들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을 만들어 망치로 두드려 가공하기 위해서는 알맞은 석재가 있어야 했다.
흔히 뜬돌들이 활용되었는데, 일터 부근에서 구할 수 없으면 멀리에서라도 알맞은 돌을 운반하여야 했다. 이 운반의 능력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운반의 능력이 없으면 가공하였더라도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운반의 능력은 일찍부터 시작되어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있는 기능도 배양되었다.
또한, 구조물 경영에 척도(尺度) 사용이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척도의 사용은 고대국가에서도 기본되는 일로서, 신정(神政)의 제도라 하더라도 척도는 타량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요긴하게 응용되었던 것이다.
척도의 사용은 수의 개념이 정리됨에 따라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수는 신정의 사제들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즉, 수가 표현하는 내용이 신의 섭리를 표출한다고 믿는 종족들에게는 수 그 자체가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수를 척도로 마름하여 위대한 구조물을 경영한다는 일 그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구조물을 조성하기 위하여는 줄을 사용해야 했는데, 뒷날의 먹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줄의 사용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건의 한 바탕이 되었다.
줄은 그만큼 상징되는 바가 컸고 효능 또한 대단하여서 이 줄을 자유자재로 다스려 집을 짓는 기능인을 대단한 능력자로 인정하였다.
건축기술의 발달과 조영에 대한 의미부여와 사회적인 후원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되어 있을 즈음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가락국들이 건국하였는데, 건국하자 곧 장려한 궁실을 경영할 수 있었던 데는 이와 같은 성숙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조직에 의한 정치라기보다는 임금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으므로, 궁궐을 짓는 일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사(神事)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궁실 경영에서도 일반주택과는 다른 형상의 건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역대에 이어져 최근세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궁실은 백성에게 군림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녀야 하였다.
일반주택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구조에 금은보화를 들여 화려하고 장중하게 치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건축의 조영에는 많은 식견이 소용되었으므로 지식인들의 대거 참여가 종용되었다. 이웃나라와의 교통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건축기능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건축물의 수준은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지식인들의 수리에 대한 지식은 건축물 구성에서 비례치의 계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적절한 공간구성과 함께 격조있는 집의 규모설정에도 이바지하여서, 중심건물을 장대하게 하고 그에 버금가는 격조의 집을 그보다 적게 구조하는 등의 조화를 구상하게 되었다. 궁실건축에서의 이 능력은 대단히 요긴한 것이었다.
철제의 도구가 사용되기는 하였어도 아직도 주류는 도끼에 있었다. 돌도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둥구나무를 다듬어 알맞은 재목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도끼와 자귀의 사용이 보편적이었다.
도끼별이라고도 하는 도끼를 써서 재목의 표면을 다듬는 일은 아무리 정교하게 한다 해도 대패를 사용해서 마무리짓는 것만 못하였다. 대패가 아직 일반화되기 이전, 도끼와 자귀가 중요한 연모일 때에 그 거친 표면을 가리기 위하여 비단을 감아 쌌다.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으로 중요부재들을 포장하고 나면 집이 아주 돋보였다. 이처럼 비단을 감아 치장하던 관습에서 단청(丹靑)의 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비단으로 기둥을 감던 시절에는 아직 수장(繡帳)을 드리우는 기술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기둥은 살기둥인 채로 비단을 씌웠으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담을 칠 수 없었다.
이 시절에는 기둥 사이의 주간(柱間)에 장막을 늘이거나 발을 드리우고 살았다. 장막과 발의 사용은 『삼국사기』 옥사조나 금제(禁制)의 항목, 또는 본기(本紀)의 단편적인 기록들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겨울에는 장막을, 여름에는 발을 드리우고 살았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도 볼 수 있다. 고분의 주인공이 생전에 살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 중에 주인공들이 앉아 있는 집의 기둥 간살이에 장막을 늘인 광경이 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수도인 서라벌에 안압지를 파고 주변에 임해전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삼국통일 직후에 경영한 대표적인 궁실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안압지를 발굴하였을 때 임해전 창건 당시에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발을 걸던 쇠걸이들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기둥간격에 발을 늘이고 살았다는 증거가 출현한 셈이다.
기둥 사이에 붙박이 담이 없이 열고 사는 방식은 계속되어서 오늘날의 집에도 이어지고 있다. 살림집의 대청이나 툇마루를 탁 터놓고 사는 것이 그것인데, 전통양식이 얼마나 끈기있게 전래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붙박이담을 설치하자면 수장재가 결구되어야 하는데 이 일은 쉽지 않다.
요즈음도 시골집에서 헛간을 지을 때는 머리 쪽에 고샅이 있는 Y자형의 나무를 구덩이를 파고 박아 기둥으로 세운다. 몇 개의 기둥을 간격에 맞추어 세우고 고샅에 의지하여 도리를 건넨다. 이 도리를 주도리로 삼고 서까래를 걸어 지붕을 완성하게 되는데, 아직 기둥 사이의 벽은 등장하지 않았다.
우선 수장나무를 건너지르고 끝을 잡아매어 고정시키고 그에 의지하여 거적이나 이엉으로 엮어 의지간을 만든다. 여기에 붙박이벽을 만들기 위하여 기둥에 홈을 파고 다듬은 수장재를 끼워 맞추어야 하는데, 그 일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서 옛날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보인다.
수장재를 결구시키려면 자와 먹통과 끌이 있어야 한다. 한쪽 홈은 깊게 파서 밀어넣었다가 되잡아 안정시키고, 쐐기를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급기법에도 익숙해 있어야 하였다.
이 일 중 홈 파는 것과 쌍장부촉을 만들어 내는 일이 매우 어려웠는데, 톱이 있으면 한결 쉬워지게 된다. 톱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수장의 설치가 자유스럽게 되었다. 여기에 쓰이는 톱은 내릴톱으로 내릴톱이 사용되면서 연귀[燕口 : 직교하는 두 재의 나무마구리가 보이지 않게 45°각도로 비스듬히 잘라내는 맞춤] 등의 고급 이음과 짜맞춤법이 출현하게 되었다.
연귀가 아직 없던 시절에는 문짝 만드는 일 또한 매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부석사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는 신방목에 문지도리를 파고 설치하는 널빤지 문이나 살대 박은 광창이 고작이었다.
담으로 기둥 간살을 막고 출입문을 내고 창을 다는 일은 톱이라는 연장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장막을 늘이고 발을 치고 살던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거대한 통나무를 켜서 널빤지로 만들어내는 일은 인거나 기거와 같은 톱이 생겨난뒤에야 가능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도끼별(원목을 산판에서 도기로 제재한 것)로 다듬어야 하였는데, 도끼별로 판자를 만드는 것은 통나무 하나를 깎아 한장을 얻는 것이므로 매우 비경제적이었고 능률이 오르는 일도 아니었다. 톱이 도구로 채택되면서는 이 어려움이 해소되었다.
인거나 기거로 판자를 켜는 일은 따로 훈련된 인거쟁이나 기거쟁이에 의하여 전담되었는데, 두꺼운 판자와 가는 나무오리도 켜냈다. 이러한 일은 아주 숙련되지 않으면 어려운 것으로 이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비로소 문살이나 창살을 구성하는 살대가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기술은 중기 이후에서나 가능하게 된 것이므로 그 이전에는 문짝에 살대를 써서 무늬를 형성하거나 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와 같은 작업이 미진하던 시기의 집은 두꺼운 판자의 문짝이 볕이나 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밝지 못하였다. 따라서, 빛을 받기 위해 문짝의 널빤지를 투각(透刻)하게 되었으며, 무늬에 따라 투각해낸 문짝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때의 문짝은 새겨낸 무늬가 견디어낼만한 통나무 널빤지가 가장 적합하였는데, 마땅한 통나무를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살대의 문짝이 등장하자마자 그것이 곧 일반화되었다.
창의 살대로 무늬를 구성하는 방식은 봉창에서처럼 빗살로 성글게 구성하는 것이었다. 봉창은 대나무 같은 가는 오릿대로 빗살이 되도록 살대를 만들고 거기에 종이를 바르는 것이다.
구멍만 뻥 뚫은 창으로는 느닷없이 짐승이나 파충류가 침범하는 수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살대를 빗살로 꽂아 막게 되었다. 통풍과 채광이 겸비된 것이었으나 겨울에는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하여 창호지를 발랐다.
창과 문짝에 살대를 만들기 위하여는 문짝의 울거미가 든든하여야 했다. 반듯하게 짜서 만들되 뒤틀리거나 어그러지면 안 되었으므로 짜맞추는 기법이 응용되어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탕이라는 대패의 이용은 큰 성과를 얻었다.
문 울거미는 굵기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 굵기의 나무를 수직되게 다듬어 방정하게 해야 했다. 따라서, 대패로 밀어내야 하는데 밀대패에는 수직의 기준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변탕은 기준이 되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어서 먼저 이로써 나무를 수직되게 바로잡고, 그에 의거하여 대패질을 하면 나무는 비로소 사면이 방정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이 나무를 길고 짧게 잘라 장방형의 울거미를 만드는데, 짠 그대로만 그냥 두어서는 밋밋하여 보기에 흉하므로, 개탕대패로 개탕을 치고 쌍사대패로 쌍사를 쳐서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이 방식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문짝이나 창을 달기 위해서는 배목과 문고리 등의 쇠장석이 필요했으므로, 거멀쇠 같은 보강용의 쇠장석도 사용되었다. 쇠를 다루는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쇠장석도 크게 진척되었고, 아울러 쇠못을 쳐서 만드는 기술도 늘어 장식쇠못까지 생산되었다. 큰집을 짓는 일터에 대장간이 차려지는 일이 보편화되었으며, 쇠장석의 발전은 결구와 이음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건축기술의 발달은 목조건물의 조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벽돌을 만들거나 블럭(block)을 만들어 쌓는 능력도 대단하였는데, 그 제작은 흙을 빚어 기와를 구워 만드는 능력에서 배양된 것이다.
백제시대 초기에는 날디새를 만들어 볕에 말려 쓰기도 하였던 모양이나, 차차 가마에 넣고 높은 화도로 구워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궁실이 더욱 장려해지고 불교가 도입되면서 건축물의 양과 질이 전에 없이 증가됨에 따라 기와지붕의 치장도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치미·취두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장식품들이 채택되었고, 기왓골 끝에는 암막새·수막새가 설치되었는데 이 일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었다. 전문인들 중에서 최고의 능력자를 와박사(瓦博士)로 삼았고, 이에 따라 전돌의 제작도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석총(石塚) 등 삼국시대 초기에 건립된 건축물에서 수습된 명문(銘文) 있는 전돌들이 휘어지고 일그러진 것인 데 비하여, 삼국시대의 중기 이후가 되면 무늬가 아름다운 놀라운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웅진시대에 축조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연꽃무늬의 반전(半塼)들이 제작되었다.
부여 도읍 시기에는 절을 짓는데 산경문(山景文)·귀문(鬼文)·연화무늬 등 여섯가지 색색의 무늬를 조각한 방전(方塼)을 만들어 썼으며, 또 블럭을 만들어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쌓아 벽체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쌓는 기술은 석탑 조영에 채택되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같은 형상으로 정리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전돌 제작기술은 한층 더 난숙해져서 사천왕사나 안압지 주변의 임해전터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완벽한 제품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백제·신라의 뛰어난 기술인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통일을 계기로 이룩된 수많은 건축물의 구조에서 그 성공적인 취합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토함산의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난숙해진 건축기술은 이웃나라에 전해져 그 나라의 건축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려에도 계승되나 몽고의 침입 등으로 경제적인 고난을 겪으면서 건축기술이 침체되었다.
그러나 견실한 법식과 기법이 조선시대로 계승되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그 맥이 꺾이고 말았다. 즉, 임진왜란 7년 동안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뒤이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국면으로까지 쇠락하여 버렸다.
전란 후에 복구해야 할 건축물이 허다하였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렀으며, 건축계에는 치명적이 되어서 축적된 지식과 법식과 기능은 탕진되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태에서 크게 회복하지 못한 채로 경복궁의 경영이라는 대사업에 봉착한다.
대규모의 국력을 기울인 건축활동이기는 하였지만, 건축기술의 측면에서는 저조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준비 없는 사업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의 건축술은 모두가 수공업에 바탕을 두고 이룩되었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계문명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수공업의 건축기술은 퇴보를 거듭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부여
주02
남대문
주03
수원성곽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정기|윤일주|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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