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소리의 높낮이·장단·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하여 목소리나 악기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예술이다. 음악의 세 가지 요소로 선율·장단·화성을 드는데, 화성을 제외하기도 한다. 우리 전통 음악도 선율과 장단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악의 전통 속에 통일신라 시기에 당악을 수용했고, 고려시대에는 송의 국가 제사용 아악과 연향용 속악을 수용하여 향악과 함께 사용했다. 조선 전기에는 예악이 숭상됨에 따라 아악이 크게 일신되었고, 후기 서민층에서 판소리와 기악독주곡 형식의 가야금 산조가 출현했다. 말엽에는 서양음악이 유입되었다.
음악은 소리의 높낮이 · 장단 · 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예술과 구별되며, 또한 시간예술이라는 점에서 공간예술과 구분된다.
소리는 대체로 악음(樂音)과 소음(騷音)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음악은 악음을 소재로 삼고 소음은 제외시킨다. 물론 악음과 소음의 개념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비록 소음으로 규정된 소리라 하더라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악음의 구실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서양음악에 기초한 개념정의에서는 음악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 선율(멜로디) · 장단(리듬) · 화성(하모니)이 언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는 서양의 특정시대에 정의된 것일 뿐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는 음악의 3대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음악을 이루는 요소는 세계적으로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선율과 장단(리듬), 두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포괄적인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괄적인 개념설명으로 음악이 무엇인가를 논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음악이란 개념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정의될 수 있으며, 또한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일은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작업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느 특정한 시대의 좁은 음악세계에 바탕을 둔 개념정의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음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두루 포괄하는 범세계적인 관점에서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음악이라는 용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이름으로 일컬어져 왔고, 그 의미도 나라마다 서로 달랐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을 한데 아울러 ‘히(hy)’라 불렀는데, ‘히’라는 말은 본래 즐거움을 뜻하였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는 ‘hy’를 ‘꽃을 피운 향기로운 연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시케(mousike)’라는 용어로 음악예술과 시(詩)예술 및 학문까지 두루 포괄한 바 있으며, 후대에는 이 말이 오직 음악예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이 밖에 고대 인도에서는 성악 · 기악 · 무용 등을 아울러 ‘삼기타(samgita)’라 하였고, 고대 중국에서는 ‘악(樂)’이라는 용어가 음악의 넓은 의미로 쓰여 왔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악(樂) · 가(歌) · 무(舞)의 총체적인 개념이 음악의 일반적인 형태로 인식되어 왔는데, 여기에서 악이란 기악음악을, 가는 성악을, 무는 춤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는 음악이라는 용어는 서양의 music(영어), Musica(독일어), musique (프랑스어)의 번역어로서 성악과 기악을 모두 포함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음악은 한국민족의 음악이다. 즉, 우리말과 글을 쓰면서 민족문화의 기본적인 동질성(identity)을 함께 누려 온 한국사람의 음악인 것이다. 따라서 외국음악이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한국화된 음악은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즉,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나라와 밀접한 문화교류를 가졌던 중국음악이나 그 밖의 외래음악들이 오늘날 한국음악의 범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그 음악들이 우리 나라에 수용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국음악화(韓國音樂化)’라는 여과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900년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양악(洋樂)도 언젠가는 마땅히 한국음악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한국사람이 서양의 양식을 빌려 창작한 음악을 한국음악의 범주에 포괄하기에는 해결하여야 할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이 경우는 한국사람이 외국어로 쓴 작품을 한국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음악양식의 개념정립이라는 문제와 함께 오늘날 우리 음악계가 당면한 난제이기도 하다.
한국음악은 오늘날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음악인 국악(國樂)과 서양음악인 양악이다. 여기에서 국악이란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며, 더 넓게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과거의 음악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앞으로 전개되어야 할 민족의 음악을 가리킨다.
먼저 전통음악인 국악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그 갈래를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국악의 갈래는 음악의 성격과 특징을 나타내는 규범으로서 작용하여 왔기 때문에, 어느 한 갈래의 음악은 다른 갈래의 음악과 구분된다. 그러므로 국악의 갈래는 전통음악의 역사적 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국악의 갈래에 대한 논의는 그 동안 한국음악학계에서 자주 거론되어 왔다.
대표적인 구분으로서는 역사적 유래에 따른 아악 · 당악 · 향악의 분류, 음악의 생성배경에 따른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의 분류, 음악의 기능에 따른 분류, 아악 · 정악 · 범패 · 무악 · 산조 · 판소리 · 잡가 · 민요 · 농악 등 장르에 따른 분류, 이 밖에 음악의 연주형태에 따른 기악 · 성악의 분류, 악기 편성법에 따른 합주 · 독주 · 세악 등의 분류가 사용되어 있다.
이상의 분류기준들을 토대로 하고 궁중의식과 관련된 의식음악, 역사적으로 오래된 종교음악, 조선시대 중인층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온 정악,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전승된 민속음악, 근대 이후에 새로운 작곡개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창작음악 등 몇 가지의 상위개념을 설정하여 오늘날의 전통음악을 분류하여 보면 [그림]과 같다.
한국음악의 특질은 우선 음악의 구성요소에 잘 나타난다. 오늘날 서양음악에서 음악의 세 가지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선율(멜로디) · 장단(리듬) · 화성(하모니) 중 한국음악은 선율과 장단은 갖추었으나, 화성에 해당하는 요소가 빠져 있다는 점이 서양음악에 비하여 특징적이다.
또한 한국음악은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과 교류하여 왔고, 중국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흔히(특히,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중국음악과 거의 비슷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으나, 사실상 한국음악은 서양음악은 물론 인접한 동양권의 음악과도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국음악의 특징을 다른 나라의 음악과 비교하면서 선율 · 장단 · 형식 · 연주법 등으로 나누어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선율은 소리의 공간성과 시간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즉, 소리의 높고 낮음[高低]이라는 공간성과 소리의 길고 짧음[長短]이라는 시간성에 의하여 선율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음악에 있어서 선율의 특징은 이와같은 보편성 외에 공간성의 기본요소인 음계(scale)와 선법(mode)에서 더욱 선명하게 발견된다.
음계(音階)란 음을 소리의 높이에 따라 단계적으로 8도 안에 배열한 것을 말하며, 여기에 배열된 음의 수에 따라서 3음음계(tritonic) · 4음음계(tetratonic) · 5음음계(pentatonic) · 6음음계(hexatonic) · 7음음계(heptatonic) 등으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현행의 한국음악은 3음음계 · 4음음계로 설명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한국음악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오늘날 3음 또는 4음음계의 근원은 5음음계로서, 특히 반음이 없는 ‘무반음 5음음계(anhemitonic pentatonic)’의 특징을 보여준다.
무반음 5음음계란 5도권의 첫 다섯음(C · D · E · G · A)으로 구성된 음계로, 반음이 있는 유반음 5음음계(hemitonic pentatonic)와도 구별되는데, 이와 같은 한국음악의 선율은 7음음계로 이루어진 중국음악이나 서양음악의 선율과 음조직체계에 있어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한국음악과 같은 무반음 5음음계는 여타의 민족음악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나, 한국음악의 선율상의 특징은 독특한 선법의 운용에 의하여 다르게 나타난다.
선법은 음계를 형성하는 일정한 음조직을 가리키는 말로 음계 구성음 중에서 종지음 (finalis)과 속음(dominant) 등 음의 기능을 고려하여 선율의 음악적 특징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개념 및 용어이다.
중세 서양음악에서 사용된 교회의 8가지 선법이나 자바음악의 파테트(patet), 인도음악의 라가(raga), 아랍음악의 마캄(maqam 또는 makam), 한국음악의 평조(平調) · 계면조(界面調) 등이 모두 선법으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각 나라 음악의 선법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형성되어 그 나라의 음악적 특징에 영향을 미치는데, 한국음악의 평조 · 계면조 선법 역시 선법이 가지는 일반적인 보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나라 음악의 선법과 다른 특수성을 보여준다.
음계 및 선법에 있어서 한국음악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는 음악 요소로는 농현(弄絃)을 들 수 있다. 농현이란 거문고나 가얏고 등 현악기의 선율 진행에서 음을 흔들어 장식하는 연주기법을 가리키는데, 더 넓게는 성악이나 여타의 기악곡에서도 두루 나타나는 매우 특별하고 중시되는 장식기법이다.
이와 같은 농현기법은 한국음악의 선율의 중심음과 선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서양음악의 화성기능과 비교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화성은 주선율 아래 다른 음들을 종적으로 배열하여 독특한 음색과 음악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비하여, 한국음악에서의 농현은 선율을 횡적으로 꾸밈으로써 한국음악의 특징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음악에서 농현을 배제한 선율의 흐름은 흔히 생명력 없는 나뭇가지에 비유되는 것이 보통이며, 어떤 농현을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농현의 내용에 따라서 그 음악적 의미가 달라짐은 물론, 연주자의 연주기량도 농현의 쓰임새에서 판가름될 정도이다. 따라서 한국음악의 음계 · 선법 · 농현이라는 세 가지 음악요소 중에서 한국음악을 다른 나라의 음악과 구분짓게 하는 데에는 농현의 기능이 크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장단이란 서양음악의 리듬(rhythm)에 해당하는 음악용어로 시간 안에서 질서 있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운동을 뜻한다. 즉, 장단이란 시간예술로서의 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음악요소인 것이다.
한국음악의 장단은 서양과 여타의 민족음악에서 통용되는 개념에서와 같이 시간의 기본단위인 박자(meter)로 구성된 점, 일정한 속도를 의미하는 템포(tempo)로 구성된 점, 일정한 박자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점 등에서 세계음악으로서의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음악의 장단은 대체로 2박자 계통의 장단이 드문 반면, 3박자 계통의 리듬이 많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즉, 기층음악인 민요에서부터 예술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음악 장르에서 3박자 계통의 장단이 많이 발견되는데, 특히 8분의 12박자인 타령장단이나 굿거리장단 · 중모리 · 중중모리 등이 복합 3박자의 대표적인 예에 든다. 이와 같은 점은 아시아 음악 중에서 2박자나 4박자 계열로 구성된 일본음악 · 중국음악과 비교하여 구분되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한편, 한국음악의 장단 골격은 시간의 기본단위인 박자와 속도라는 두 가지 요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박자는 한 장단 안에서 강약의 차이에 의하여 작은 시간단위를 구성하는데, 이 작은 시간단위들은 대체로 음악의 ‘맺고(긴장) 푸는(이완)’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즉 8분의 12박자의 음악을 예로 들어 보면, 3박자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작은 시간단위들이 ‘밀고’ · ‘달고’ · ‘맺고’ · ‘푸는’ 기승전결의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한국음악의 장단은 강박이 음악의 첫머리에 나온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타악기 반주에서뿐만 아니라 선율악기 연주에서 첫음을 강하게 내는 것이라든지, 성악곡에서 첫머리를 강하게 소리내는 것과 상통하는 연주기법으로 대개 약박으로 시작하는 서양음악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 점은 우리말의 구조가 서양어의 구조와 다르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시간 안에서 규칙적인 운동의 질서로 규정된 리듬은 타악기 반주에서뿐만 아니라 선율의 진행에서도 나타난다. ‘선율리듬(melodic rhythm)’이라고 하는 이러한 특징은 특히 산조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한국음악의 장단이 가지는 특징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상이다.
그리고 자진모리장단이나 휘모리장단 등에서 보이는 ‘ 도섭대목’은 장단을 던져놓고 자유리듬(free rhythm)으로 연주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서양음악의 루바토(rubato)와도 또 다른 한국 리듬의 특징으로 꼽힌다.
한편, 한국음악에서 장단은 음악의 속도를 나타내는 특별한 명칭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장단의 속도개념은 장단명칭 속에 막연히 내포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속도를 지시하는 용어가 장단명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굿거리장단은 점4분음표를 기준으로 하여 메트로놈 60∼70의 빠르기로 연주한다는 잠정적인 속도개념이 관습적으로 통용되고는 있으나, 연주자나 연주상황에 따라서 그 속도는 다분히 유동적인 것이다. 이처럼 장단의 속도가 때와 장소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용된다는 점 역시 한국음악이 지니고 있는 색다른 요소이다.
음악의 구조적 형태를 가리키는 악식(musical form)을 한국음악에서는 ‘틀’ 혹은 형식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음악의 형식은 크게 음악의 특정 부분이 반복되는 ‘ 도드리형식’, 성악곡이나 기악곡에서 흔히 발견되는 ‘한배에 따른 형식’, 성악곡의 가사에 따른 ‘확대형식’, 연주형태에 따른 ‘메기고 받는 형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 도드리형식은 서양음악의 반복형식에서 비슷한 점이 발견되며, 확대형식은 서양 성악곡의 통절형식(through composed form)에 견줄 수 있다. 또한, 메기고 받는 형식은 세계의 여러 민족음악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음악형식이어서, 이와 같은 한국음악의 형식들은 세계공통의 양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한배에 따른 음악형식은 세계음악의 보편적인 양상과 크게 구분되는 독특한 한국음악의 특징으로 꼽힌다. 예를 들면, 가곡에서 느린 악곡으로 시작하여 점차 ‘농(弄)’ · ‘낙(樂)’ · ‘편’ 등의 빠른 악곡으로 이어지는 점이라든지, 산조에서 진양조의 느린 장단으로 시작하여 점점 빠른 장단의 장으로 이어지는 점, 민요에서 느린 노래와 빠른 노래가 하나의 짝을 이루어 구성되는 점 등이다.
이와 같은 한배에 따른 음악형식은 서양음악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며, 몇몇 동양권 음악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인도음악 라가(raga)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서양음악의 경우에는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행위와 연주하는 연주행위의 기능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작곡과 연주개념은 오늘날 일반화되어 있는 음악상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전통음악의 경우는 여타의 종족음악들과 마찬가지로 작곡자와 연주자가 뚜렷이 분리되지 않은 채 거의 연주전통 · 연주관습에 의하여 음악이 생성되고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서 서양음악과 매우 다르다.
물론, 이러한 음악전통은 음악의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한국음악을 다른 나라의 음악과 다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나타난 음악특징은 오랜 연주관습에서 형성된 즉흥연주의 전통 및 즉흥연주 결과로 빚어진 악곡의 파생이다.
즉, 한국음악에서 비슷한 음악내용을 가진 파생곡 · 변주곡이 많다는 점이라든지, 판소리에서 본래의 소리 바탕에다 자신의 소리를 더 짜넣어 소리를 확대 · 변형시키는 ‘ 더늠’, 산조 연주자들이 스승의 가락에 자신의 가락을 첨가하고 새로운 음악으로 다듬어 자신의 유파를 형성하는 전통이 바로 즉흥연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즉흥연주란 음악연주중에 순간적으로 창출해 내는 1회적인 즉흥연주 형태라기보다는 오랜 연주관습을 통하여 그 음악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그 즉흥연주의 결과가 하나의 악곡, 또는 하나의 음악양식으로 정착된 결과론적인 즉흥연주를 뜻한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많은 악곡들이 대체로 이와 같은 연주전통에 의하여 파생된 곡임을 고려하여 볼 때, 한국음악에 있어서 즉흥연주의 전통이란 매우 중요한 음악적 특징으로 설명된다.
상고시대는 북쪽의 부여(夫餘) · 옥저(沃沮) · 예(濊)와 남쪽의 마한 · 진한 · 변한이 병존하였던 이른바 삼한시대로, 대략 3세기 이전을 가리킨다.
중국의 문헌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이 시대의 음악 관련기록에 의하면, 마한에서는 늦어도 285년 이전에 5월 하종(下種) 후에 농사의 풍작을 빌고, 10월 추수 끝에 풍작을 감사하는 굿을 벌였다.
마한 사람들은 이 굿 동안 밤낮으로 가무(歌舞)를 계속하였는데, 그 절주(節奏)가 중국의 탁무(鐸舞)와 같았다는 기록에 비추어 춤의 반주에 금속 타악기가 사용된 듯하다. 이와 유사한 점으로 오늘날의 시골 도당굿 또는 별신굿에도 징과 북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가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처럼 소란한 마한의 야외음악이 한국전통음악의 일면이라 하겠다.
한편, 변진에는 중국의 슬(瑟)처럼 옆으로 뉘어 타는 현악기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축(筑)과 같았다고 한다. 이 고대 현악기는 그 뒤에 생긴 가야국의 가얏고와 고구려의 거문고 등 뉘어 타는 현악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고’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고’에 해당될지 모른다.
이 변진 고유의 현악기는 가무음주(歌舞飮酒)에 사용되었는데, 술자리에서 가무에 반주를 한 현악기의 조용한 방중악(房中樂)은 후일 가야국의 우륵이 지은 가야금 곡에 비추어 지방의 민요곡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상고시대에는 외국사신을 위한 연향이라든지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행렬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르는 외국음악 및 의장(儀仗) · 고취(鼓吹) 등이 없었을 것이며, 이와 같은 점은 상고시대 음악사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안악 제3호분(357년)의 주악도(奏樂圖)는 예외이지만, 서술의 편의상 상고시대항에 포함시켰다. 안악 제3호분의 전실(前室)과 후실(後室) 회랑 벽에는 다양한 음악연주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들은 한(漢)나라 계열의 외래음악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즉, 의장(儀仗) 및 3인의 주악상[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2인은 각각 입고(立鼓)와 소(簫)를 연주하고 1인은 노래를 하고 있다]과 씨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전실의 그림은 의장을 갖추고 전정(殿庭)에서 연주하는 한(漢)나라 계통의 황문고취(黃門鼓吹) 주악과 각저희(角抵戱)를 나타낸 것이며, 회랑의 행렬도[말을 탄 4인의 악대가 각각 북과 소 · 각(角) · 요(鐃)를 연주하면서 행진하고 있다]도 역시 한나라 계통의 단소요가(短簫鐃歌)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실의 주악도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거문고 모양의 현악기와 완함(玩咸), 세로로 부는 장적(長笛)을 연주하고 있는 3인의 주악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후전(後殿)에서 벌어지는 사연(私宴)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안악 제3호분의 벽화는 외래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동수(冬壽)라는 기록과 더불어 조의(朝儀) · 행렬에 따르는 한나라 음악이 나타나 있어 당시의 외래음악 수용과정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또한 이 벽화의 내용에서는 중국계 음악만 보일 뿐 오현비파나 피리와 같은 서역 계통의 악기가 보이지 않는 점도 크게 주목된다.
삼국시대란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뜻하며,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될 음악사의 연대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370년에서 668년까지이다.
삼국시대 음악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은 금(琴)과 쟁(箏) 등의 외래악기를 개조하여 각각 거문고와 가얏고라는 고유의 현악기를 창제(創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국의 음악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과,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중국의 북조와 남조의 악기를 받아들이고 이 외래악기를 사용한 자국의 음악으로 국제음악 활동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삼국의 음악은 일본 궁중에 전해져 삼국악(三國樂)이라고 불렸으며, 중국 북조의 악기를 수용한 고구려의 음악은 수(隋)나라 궁중의 7부기 · 9부기 등에 참가하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는 거문고이다. 『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개조하여 만든 현악기가 거문고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악 제3호분의 후실 벽화에서 보이는 현악기가 분명히 거문고라면, 고구려에는 이미 357년 무렵[東晉時代]에 거문고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통구에 있는 무용총벽화에는 한 연주자가 17개의 괘 위에 4현이 걸려 있는 현악기를 술대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악기가 바로 16괘 6현으로 된 현행 거문고의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고구려의 거문고는 궁꼬(ꜭ篌)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전하여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궁꼬는 횡적(橫笛)과 마꾸모(莫目:미상의 관악기)와 함께 춤을 반주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음악의 악기편성은 일본에 전해진 백제악의 편성과 비슷한 것으로 백제악이 풍속무(風俗舞)였던 예에 비추어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악의 내용도 역시 민속춤임이 분명하고, 그에 따른 반주음악도 역시 관현합주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민속음악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예를 들면, 『 고려사』 악지에 고구려의 속악이라고 기록된 「내원성」 · 「연양」 · 「명주」 등과 같은 지방의 민속음악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본다.
이 밖에 『수서(隋書)』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국내에서는 오현금 · 쟁 · 횡취(橫吹) · 소(簫) · 고(鼓) 등이 연주되었다. 이 6종의 악기 중 오현금(또는 오현비파)과 피리는 서역악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까닭은 서역음악은 중국의 북조, 특히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에서 성행하였던 음악으로서 이와 같은 서역음악이 고구려에 채용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와 중국 북조와의 교류관계를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언급된 6종의 악기편성에서는 고구려 전기에 보였던 현악기 완함이 제외되고, 대신 오현비파가 수용됨으로써 고구려 음악이 ‘완함시대’에서 ‘오현비파시대’로 새롭게 전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들 6종의 악기가 합주에 사용된 것이라면, 이 편성은 고구려가 일본에 전하여 준 궁꼬 · 마꾸모 · 횡적 등 세 가지 본토(本土) 악기에 의한 편성보다 수량면에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기의 내용도 외래악기임을 알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수의 9부기에 참가한 고구려악과 비교하여 보면 수량면에서는 9부기의 고려악의 14종보다 적고 악기의 내용면에서는 대부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현비파와 피리를 포함한 여섯 가지 악기에 의한 고구려 국내의 음악은 거문고를 포함한 3종의 악기에 의한 민속음악과는 다르고, 수의 9부기에 참가하였던 14종의 악기에 의한 고려기(高麗伎)보다 제대로 갖추지 못한[未具]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 6종에 의한 음악의 쓰임새는 중국 9부기에 참가하였던 고려기의 음악이 중국의 황제를 위한 것이었음에 비추어, 외래악기 편성에 의한 고구려 음악 역시 궁중에서 외국사신을 위한 연향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의 7부기와 9부기에 포함되었던 고려기의 악기는 앞서 살핀 6종의 악기에 수공후 · 비파 같은 새로운 서역악기가 추가되었고, 여기에 오직 고려기와 서량기(西凉伎)에만 쓰였던 제고와 담고 등의 타악기가 추가되었다. 이 14종의 악기편성에서 주목되는 점은 도피피리를 제외한 13종의 악기가 서량기의 악기편성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서량기에는 이 밖에도 종 · 경 · 국쟁 · 수(竪)공후 · 소(小)피리 등 5종이 더 있다].
이것은 고려기에 사용된 악기가 모두 외래악기에 의한 음악이며, 특히 서량과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삼국 중 고구려만이 당시 북조에서 성행하였던 서역음악의 수용에 힘입어 중국 조정(朝庭)의 7부기 · 9부기 · 10부기 등에 참가할 수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후기』에 전하는 백제음악의 내용은 궁꼬 · 마꾸모 · 횡적 등의 편성으로 춤을 반주하는 고구려의 음악과 대개 같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동일악기의 편성으로 음악을 연주하였던 점은 양국이 부여족(夫餘族)이라는 동일민족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양국이 거문고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문고가 신라에 수용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반드시 재고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궁중에 전하여진 백제악은 백제국의 풍속무로 이에 따른 반주음악 역시 관련합주의 백제 민속음악이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여 주는 증거로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백제 음악조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사』 악지에는 「 선운산」 · 「 무등산」 · 「 정읍」 등의 곡명이 전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정읍」은 거문고를 포함한 향악기로 반주하는 향당(鄕黨)의 음악, 즉 민간음악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수서』의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 · 각(角) · 공후 · 쟁 · 우(竽) · 지(箎) · 적(笛) 등 일곱 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 중 지는 훈(塤)과 함께 오직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에만 사용된 악기이고, 나머지 고와 각을 제외한 4종의 악기도 모두 청악의 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백제악에 사용된 이들 악기는 모두 중국 남조에서 수용된 외래악기로서, 고구려가 중국 북조와 교류하였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5종의 악기에 의한 백제음악은 일본에 전한 ‘백제악 풍속무’에 따른 악기편성보다 수량면에서도 늘어난 것이고 악기의 내용도 다르다. 이 음악의 쓰임새는 고구려 음악의 경우와 같이 외국사신을 위한 연향악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외래음악을 받아들여 중국의 7부기 등에 참가하였던 고려기와는 달리, 백제 음악은 중국의 남송(南宋)과 북위(北魏) 등에 소개되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음악으로 평가받았을 뿐이다.
그 까닭은 백제가 중국 북조와의 수교를 끊고 남조와 교류하는 동안, 북조에서 새로 일어난 서역음악을 수용하지 못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예전 중국의 청악을 받아들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밖에 백제가 중국 남조의 음악을 수용하였던 예는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남조에 속하는 오(吳)나라의 기악무(伎樂舞)를 배워 일본에 전하였던 것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나라의 기악무를 배운 바 있는 백제인 미마지는 612년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의 사찰을 중심으로 기악무를 가르쳤다고 한다.
기악무는 교훈적인 불교이야기를 담은 가면무용극으로, 각 장이 독립되어 있는 9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의 「양주산대가면극」에서 기악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가야국은 현재의 경상남도 고령지방에 위치하여 약 6세기까지 존재하였던 부족국가이다. 가야국의 음악은 가야금으로 대표된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정확히 말하자면 수나라)의 악기인 쟁(箏)을 본으로 삼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 진흥왕 12년(551)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금이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가야금의 모양은 오늘날의 풍류가야금과 같이 12줄과 양이두(羊耳頭)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土偶)의 가야금과 일본 나라(奈良) 쇼소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금(新羅琴)의 모양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가야국의 악사 우륵은 가야금을 위하여 12곡의 곡을 만들었다. 이 12곡의 음악 내용은, 첫째 우륵에게 가야금을 위한 곡을 짓도록 명한 가실왕이 각국의 말이 다른 것처럼 가야금을 중국의 쟁과 다르게 만든 점, 둘째 우륵의 12곡을 배운 신라의 제자들이 우륵의 음악을 평하여 “가락이 복잡[繁且淫]하고 아정(雅正)하지 못하다.”라고 한 점, 셋째 12곡의 곡명 중 9곡이 지방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대개 지방의 속악(俗樂)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야금 음악은 가야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던 연향악이었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신라 진흥왕대에 신라의 궁중음악[大樂]으로 채택됨으로써 가야의 멸망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가야금 음악의 맥을 잇게 되었다.
신라는 가야국 멸망 무렵 가야금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 가야금이 신라의 유일한 악기로 신라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악지 정명왕(신문왕) 9년조를 보면, 당시 신라의 연향악으로 쓰인 가야금의 용례를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다(이하 금은 가야금을 가리킴).
① 가무(笳舞):내물왕 때 4세기경 작. 감(監) 6인, 가척(笳尺:가자비) 2인, 무척(舞尺:춤자비) 1인. ② 하신열무(下辛熱舞):유리왕 때 3세기 작. 감 4인, 금(琴)자비 1인, 춤자비 2인, 노래자비 3인. ③ 사내무(思內舞):내해왕 때 3세기초 작. 감 3인, 금자비 1인, 춤자비 2인, 노래자비 2인.
④ 한기무(韓岐舞):연대 미상. 감 3인, 금자비 1인, 춤자비 2인, 노래자비 없음. ⑤ 상신열무(上辛熱舞):유리왕 때 3세기 작. 감 3인, 금자비 1인, 춤자비 2인, 노래자비 2인. ⑥ 소경무(小京舞):연대 미상. 감 3인, 금자비 1인, 춤자비 1인, 노래자비 3인. ⑦ 미지무(美知舞):법흥왕 때 6세기 작. 감 4인, 금자비 1인, 춤자비 2인, 노래자비 없음.
이상 정명왕 9년조의 연주 기록은 비록 통일신라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 음악은 통일 이전의 것을 담고 있어서 신라 음악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신라에서는 거의 금(琴) 하나로 편성된 연향악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금이란 바로 6세기경에 신라의 대악으로 채용된 가야금이다.
단, 위에 열거한 「 신열악」 · 「 사내악」 · 「 미지악」 등은 그 곡명에 있어서 가야금 수용 이전이나 이후에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는 변화가 불가피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가야금 수용 이전의 고악(古樂)을 새로 수용된 가야금으로 연주하게 되고, 이것이 궁중의 대악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아정하게 개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신라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일본 궁중에서의 신라 음악은 809년까지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소규모의 편성이었다. 오직 금 하나만으로 춤과 노래를 반주하는 연향음악이었는데, 이 금은 일본에서는 신라 금으로, 신라 본국에서는 가야금으로 불렸다.
또한 금 하나로 춤과 노래를 반주하는 음악의 형태는 일본 궁중에서 연주되던 신라악과 본국의 음악이 서로 같았고, 중국 쪽에서는 신라 음악의 존재가 극히 미미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 까닭은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중국과의 교류관계에서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음악은 당악(唐樂)의 수용을 그 특징으로 한다. 신라의 당악 수용은 전래음악과 외래음악을 구분하여 향악(鄕樂)과 당악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는 음악사상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새로이 당악을 받아들인 신라는 신라 및 삼국 전래의 음악과 당악 수용 이전에 수용된 서역계 음악을 한데 아울러 향악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향악과 당악의 개념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당악은 문자 그대로 당나라의 음악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나라 현종(742) 이후의 속악을 가리킨다. 문헌기록에는 신라의 당악 수용에 관한 사실이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증자료에 의하여 신라에서의 당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삼국사기』 악지에 신라의 악기로 소개되고 있는 향비파는 그에 대비되는 당비파의 실재를 암시하여 주는 것이며, 또한 비파라는 이름으로 해서 당비파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둘째,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와 같이 ‘향악’이라는 명칭은 그 대칭으로서의 ‘당악’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셋째, 신라에 당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고려시대에 송나라의 음악이 당악이라고 지칭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신라의 향악에는 박(拍)과 대고(大鼓)가 사용되었는데, 이 두 가지 악기는 수(隋)나라의 9부기와 당나라의 10부기에도 없는 것으로 그 이후에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신라에 당악이 수용된 것이 아니라면, 박과 대고가 향악에 함께 편성된 사실이 설명되기 어렵다.
향악에 북과 대고가 채용된 예는 『 악학궤범』 정전예연악공배립(正殿禮宴樂工排立)에도 보이는데, 이때 북과 대고는 좌우의 당악과 향악 사이에 놓여 좌우의 음악에 겸용하도록 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역시 북과 대고가 향악 · 당악에 겸용되었기 때문에 향악에 포함된 것 같다.
다섯째, 신라의 향악기인 대금(大笒) · 중금 · 소금에는 중국의 악조인 ‘황종조(黃鍾調)’ · ‘반섭조(盤涉調)’ · ‘월조(越調)’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악조명은 당나라 천보(天寶) 13년(754) 당시의 조 이름으로서 이 무렵의 음악이 신라에 수용되었음을 반증하여 준다.
여섯째, 신라와 당나라 양국의 조정 사이에는 빈번한 사신왕래가 있었는데, 진덕왕 때부터는 조하(朝賀)의 예를, 혜공왕 때부터는 종묘(宗廟)와 오묘(五廟)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선덕왕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건립하여 여러 가지 중국의 의식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때마다 중국사신을 위한 사신연(使臣宴)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사신을 위한 연회가 있었다면 중국어 통역과 함께 당악 연주는 필수불가결의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신라에서의 당악이 방향과 공후를 함께 편성하고 있었는지 확인하여 볼 수는 없지만,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癸酉銘阿彌陀三尊佛四面石像) · 지증대사적조탑신(智證大師寂照塔身) 및 『고려사』 악지의 당악조를 종합하면 통일신라의 당악은 일본의 당악같이 방향 · 비파 · 쟁 · 공후 · 생 · 소 · 척팔(尺八) · 피리 · 당적 · 고(鼓)를 사용하였을 것 같다.
향악이란 당악의 대칭어로서 향당(鄕黨) 또는 향토의 음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라에서의 향악이란 당악 수용 이후, 즉 통일신라 후기의 향악을 말한다. 『삼국사기』 악지에서 언급한 향악은 거문고 · 가얏고 · 향비파 · 대금 · 중금 · 소금 · 박 · 대고 등 8종의 악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향악편성은 가야금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음악에 비하여 매우 확대된 것으로 여기에는 고구려의 악기 거문고와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과 대고 등이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처럼 향악의 내용이 확대된 까닭은 그 대비가 되는 당악의 악기편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편, 『고려사』 악지에는 삼국의 음악이라 하여 「 동경(東京)」 등의 신라악 3곡 외에 「정읍」 등 백제악 5곡, 「명주(溟州)」등 고구려악 3곡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삼국의 음악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승되었을 것이므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의 거문고 등의 악기뿐만 아니라, 삼국의 여러 가지 음악이 함께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신라의 민간음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사뇌(詞腦)란 ‘ 시나위’의 옛말이며, 중국 시송(詩頌)의 대칭어인 향가(鄕歌)와 동의어이다. 사뇌는 ‘아야(후세 노래의 ‘아으’에 해당)’라는 차사(嗟辭)를 가진 ‘차사사뇌’와 동요와 풍요(風謠)와 같이 단순한 ‘차사 없는 사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차사사뇌는 전체가 5구(句)로 되어 있는데, 대개 문장의 종지에 의하여 2구, 2구(‘아야’로 끝난다), 후구의 5구로 구분된다.
사뇌의 음악은 기존의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넣어 부르는 형태로 조선시대의 시조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예는 『삼국유사』의 「 혜성가(彗星歌)」에서와 같이 즉석에서 새로운 사뇌를 지어 불렀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며, 기악반주나 춤을 동반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음악이나 현전하는 사뇌의 수를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더 많고, 고려 초까지 사뇌의 전통은 이어졌다. 890년에는 사뇌 모음집인 『 삼대목』이 편찬되어 조선시대 후기에 우리말 시를 모은 『 청구영언』을 상기시켜 준다.
금가(琴歌)란 거문고 반주에 의한 노래, 또는 거문고 독주를 뜻한다. 일종의 방중악(房中樂)에 해당하며 조정교묘(朝廷郊廟)의 음악과는 다르다. 통일신라의 금가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귀족 출신의 음악가 옥보고(玉寶高)와 그가 만들어 후세에 전한 음악이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옥보고는 8세기 중엽 신라의 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로 가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50년 동안이나 거문고를 익혀 30여 곡의 거문고곡을 지은 인물이다.
그의 음악을 보면 「 춘조곡(春朝曲)」 · 「 추석곡(秋夕曲)」 · 「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등 한문으로 된 곡명을 가지고 있어, 우륵이 지은 가야금곡이나 우리말 가사를 가진 사뇌와 구분된다.
특히 「춘조곡」 · 「추석곡」은 『통전(通典)』에 전하는 청악(淸樂)의 곡명과 유사하며 고려시대의 금가인 「 풍입송」과 비슷하여, 우리말 토를 단 한시(漢詩)를 금가의 가사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옥보고의 음악은 신라의 선율에 한시를 담은 곡이었음이 분명하다.
옥보고의 거문고 음악은 속명득(續命得)을 거쳐 귀금선생(貴金先生)에 전하여 이후 몇 번의 단절위기를 거쳐 안장(安長)과 그의 아들로 전해진 다음부터는 금으로 업을 삼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 귀금과 그의 계승자들 역시 금가를 남겼으며, 이와 같은 통일신라의 금가 유산이 고려시대의 「풍입송」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상층 인사들 사이에 수용되었던 금가는 중국의 칠현금에 의한 금가에 상응하여, 거문고가 후세에 다른 악기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음악이다. 음악적으로는 자유 리듬에 무반주 형태이며, 가사는 한문으로 된 5언 1구 넷으로 이루어진 것[云何於此經偈]과 6언 또는 7언으로 된 것[處世界如虛堂偈] 등이 있다.
신라의 범패는 흔히 진감선사(眞鑑禪師)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유사』의 월명사조(月明師條)에 보면, 월명사가 자기는 국선(國仙)이어서 범패를 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 범패의 존재가 이미 760년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진감선사는 830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경상남도 하동의 쌍계사에서 범패를 가르쳐 신라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 원인자각대사(圓仁慈覺大師)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중국 산동반도 등주(登州)에 있는 신라인의 절 적산원(赤山院)에서 거행된 강경의식을 보고, 여기에서 불린 범패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있는데, 그의 보고에 의하면 ‘운하어차경’은 당풍(唐風)이고 ‘처세계여허당’의 음성(音聲)은 일본의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원인자각대사가 일본의 성음과 비슷하다고 한 범패는 당시에 새롭게 퍼진 당풍의 범패라기보다 당풍 전래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범패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9세기 전반의 신라에는 새로운 당풍의 범패와 그 이전부터 전승된 범패 두 가지가 있었으며, 진감선사는 새로운 당풍의 범패를 신라에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당풍의 범패 수용은 신라에서의 당악 수용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신라에는 전문 범패승에 의한 불교음악 외에 민간 포교를 위한 불교음악이 있었다. 즉, ‘ 무애(無㝵)’와 ‘거사(居士)소리’이다.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元曉)가 자신을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며 불가의 말에 우리말이 섞인 노래를 지어부르면서 포교를 위하여 촌락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이때 그가 손에 들고 춤을 춘 호리병을 ‘무애’라고 하였는데 무애란 바로 원효의 춤을 ‘무애’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무애무는 뒤에 고려왕조의 궁중정재로 채택되어 노래와 관현반주를 곁들인 2인무로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의 서동생인 차득공(車得公)이 거사의 차림으로 비파를 연주하며 지방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차득공이 불경 이야기를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며 동냥을 구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후세에 꽹과리를 손에 들고 『 부모은중경』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며 동냥을 구한 소리 「 회심곡」과 한 계통의 서사가라고 할 수 있다.
「 금환(金丸)」 · 「 산예(狻猊)」 · 「 월전(月顚)」 · 「 속독(束毒)」 · 「 대면(大面)」등 다섯 수로 되어 있는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금환」은 도칠환(跳七丸)이라하는 공놀이이다. 약 7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이 놀이는 백제와 고구려에는 물론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이고, 「산예」 또는 「 사자기(獅子伎)」는 서량의 춤이며, 「월전」은 여러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우전(于闐, kothan)지방의 놀이이다.
또한 「대면」은 일종의 가면무로서 채찍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북제의 대면(代面)임이 분명하다. 「속독」은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악(舞樂) 「슈쿠토꾸[宿德]」에 해당하며, 가면을 쓴 사람들이 주무(走舞)하는 속특(粟特, sogdiana)지방의 춤이다.
이와 같이,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는 모두 외래의 놀이를 주제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향악’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신라에 당악이 수용되면서 전래의 향악은 물론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외래음악까지를 한데 아울러 향악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는 20세기에 서양음악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뒤 국악과 양악이라는 대칭개념이 생겨나자, 우리 나라 전통음악은 물론, 중국 음악까지를 국악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다.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 말년(1170)을 분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고려시대의 그러한 시대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고려 전기는 신라의 사뇌와 화랑신분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후기와 구분된다. 전기의 음악적 특색은 한국음악사에서는 최초로 송나라의 국가 제사용 아악(雅樂)이 수용된 점과, 송나라로부터 연향용 속악이 새로이 채용되며 당나라의 속악이 폐용된 점이다.
아악은 종묘 ·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이다. 아악은 금석팔음(金石八音) 중 편종 · 편경 · 금(琴) · 슬(瑟) · 축(祝) · 어(敔) 등이 포함된 특별한 악기편성과, 당상악(堂上樂:登歌) · 당하악(堂下樂: 軒架)의 악기배치 및 등가 · 헌가의 교대연주(迭奏) 등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아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 예종 11년(1116)의 일로서, 예종이 송나라의 휘종에게 주청하여 실현되었다.
송나라에서 보내온 아악은 숭녕(崇寧) 4년(1105)에 황종의 음높이를 새로 결정하고, 편경과 관악기에 각각 정성(正聲)과 정성보다 1율(一律)이 높은 중성(中聲)이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악장(樂章)에도 정성과 중성의 구분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금의 종류에 1현금 · 3현금 · 5현금 · 7현금 · 9현금의 5등금(五等琴)제도가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아악기는 중성 · 정성의 편종과 편경, 5등금과 슬 및 중성 · 정성의 지(箎) · 적(笛) · 소(簫) · 소생(巢笙) · 화생(和笙) · 우생(竽笙) · 훈(塤) · 박부(搏拊) · 진고(晉鼓) · 입고(立鼓:일명 建鼓. 건고와 비고, 응고 셋이 한 틀을 이룸) · 축 · 어의 20종에 달하고, 수량으로 말하면 등가악기 30점, 헌가악기 374점, 합계 422점으로, 560개의 편종 · 편경의 무게만 하여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아악기가 수용된 것은 한국음악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송나라에 아악을 청하러 간 고려 사절단은 단지 아악기만을 받아 온 것이 아니라, 송나라에 머물면서 아악을 교습받고, 대성부(大晟府)에서 펴낸 악보를 받아 옴으로써 고려에서의 아악연주 전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당악은 엄밀히 말하여 당나라의 음악이 아니고 송나라의 음악이다. 11세기에는 문종의 주청으로 송나라의 악공이 고려에 파견되어 고려 음악인들에게 송나라의 음악을 가르쳤고, 예종대에는 예종의 주청으로 1114년 송나라의 연향악인 「대성신악(大晟新樂)」이 들어왔다.
이 밖에 12세기 초에는 고려의 여자가 송나라의 명주(明州)에 가서 대무(隊舞)를 배워 귀국함으로써 송나라의 춤이 고려에 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1, 12세기에는 송나라의 속악이 고려에 수용됨으로써, 이전에 연행되던 당나라의 속악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송나라의 악무(樂舞)가 고려에 소개되어 연행된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073년 연등회에서는 교방여제자 13인이 추는 「 답사행가무」가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같은 해 팔관회에서는 「 포구락」과 「 구장기별기」가, 1077년에는 궁중의 연향에서 「 왕모대가무」가 각각 선보였다. 이 춤들은 대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열을 지어 추는 대무의 성격을 띤 것들이다.
이 밖에 예종대에는 「 연화대」가, 의종대에는 「 헌선도」가 연행되었다. 당무(唐舞) 또는 당악정재는 방향 · 비파 · 생 · 당적 · 피리 · 장구 · 박 등의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
송사의 형태는 「 청평악」과 같은 사(詞) 음악합주로 춤을 반주하는 것, 춤을 추는 중간에 춤동작을 멈추고 서서 「 헌천수」와 같은 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 「 보허자」처럼 무반주로 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춤의 절차에 있어서는 입장과 퇴장시에 죽간자(竹竿子)를 든 2인의 여기가 한문으로 된 진구호(進口號)와 퇴구호(退口號)를 읊으며 무인(舞人)을 인도하는 것이 향악정재에 비하여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당무는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좌방악이라 하여 서쪽에 배치되었고 이와 상반되는 향무(鄕舞), 즉 향악기 반주에 우리말 노래를 수반하는 향악정재는 우방악이라 하여 동쪽에 배치되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 억취소(憶吹簫)」 이하 40수의 사가 실려 있다. 이 중에서 「 낙양춘(洛陽春)」은 구양수(歐陽脩)의 작품이고, 「 하운봉(夏雲峯)」 외 7곡은 유영(柳永)의 작품임이 확인되어, 이하 40여 수의 사가 송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사는 가사의 자수에 따라 영(令)과 만(慢)으로 구분된다. 즉, 영은 전체 가사의 자수가 58자 이내로 된 짧은 노래이며, 만은 91자 이상의 가사를 가진 긴 노래이다.
사의 형식은 미전사(尾前詞, 또는 前段)와 미후사(尾後詞, 또는 後段)로 되어 있으며, 각 단은 길이가 불규칙한 4개의 구(句)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낙양춘」의 전단은 7 · 5 · 7 · 6자의 길고 짧은 4구로, 「억취소」의 전단은 14 · 10 · 13 · 11자의 길고 짧은 4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의 길이가 길고 짧은 사는 일명 장단시(長短詩)라고 불린다.
한편, 사의 음악도 그 가사의 형식과 같이 미전사와 미후사 2단이 각각 4개의 악구를 가지고 있는데, 사의 구 길이가 불규칙하였던 것과는 달리, 각 악구의 길이는 규칙적이다. 즉, 「낙양춘」의 예에서와 같이 영의 음악은 모두 8소절(또는 8박자) 8구로 되어 있어, 제4소절과 제8소절에 박이 한번씩 들어가며, 만의 음악은 모두 16소절(16박)의 8악구로 되어 있어, 제8소절과 제16소절에 박이 한번씩 들어간다.
여기에서 4소절 · 8소절에 박이 들어가는 영은 4균박(四均拍)에 해당하고, 8소절과 16소절에 박이 들어가는 만은 8균박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불규칙한 길이를 가진 가사를 규칙적인 길이의 악구에 붙이는 것은 『 대악후보』와 『 속악원보』의 「낙양춘」 정간보에 의하여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핀 고려시대의 당악 중에서 「포구락」과 같은 당악정재 및 「낙양춘」 · 「보허자」와 같은 사의 음악은 비록 여러 차례의 변모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그 밖의 당악은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고취악(鼓吹樂)은 거둥 때 임금이 탄 수레[大駕]의 앞과 뒤에서 의장과 함께 행진하며 고취(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이다. 여러 관련기록에서 “고취를 진설(陳設)”하고 “고취악을 시작(始作) · 종지(終止)한다.”라고 쓴 용례로 보아, 고취와 고취악(음악)은 구별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취가 동반하는 취각군사(吹角軍士)와 취라군사(吹螺軍士)는 그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 ‘고취’와 다르다. 즉, 각(角)이나 나(螺)가 내는 단일음의 군호(軍號)는 여러 음으로 된 음악인 고취악과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고취는 임금이 태묘 · 원구 등의 제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에 태악령(太樂令)에 의하여 진설되고 대기된다. 고취를 일명 악부(樂部)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고취음악은 당악기로 구성된 교방악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그 연주인의 수는 100인을 정수(定數)로 한다. 고취악은 행진곡이라기보다는 여러 의장과 함께 성대한 위의를 보이는 행렬음악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고취악은 『고려사』 악지의 「환궁악」과 『시용향악보』에 보이는 「생가요량」의 예에서와 같이, 송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고취악제도는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임금이 종묘제향을 마치고 환궁할 때 전악이 대기시켰던 악부에 의하여 연주되었고, 그 악부는 전부고취 50인과 후부고취 50인의 모두 100인으로 편성되었다.
전기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 · 삼국악 · 양부악(兩部樂)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고려 향악에 사용된 악기를 보면 신라의 향악과 같이 거문고 · 가야금 · 향비파 · 대금 · 중금 · 소금 · 대고 · 박의 편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밖에 당악연주에 사용된 장구가 새로이 곁들여졌다.
즉, 장구를 제외한 고려 전기의 향악은 신라의 향악과 같았는데, 장구가 고려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당악과 향악 연주에 다같이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백제악 5곡, 신라악 5곡, 고구려악 5곡 등 삼국악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전하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밖에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당악과 향악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전통도 역시 통일신라로부터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 전기까지 계승된 신라 사뇌의 전통이다. 균여대사(均如大師)의 「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가사의 전구(前句)와 후구(後句) 사이에 ‘아야’라는 차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불교 포교를 위하여 직접 만들어지고 노래로 불린 사뇌가 차사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의 민간에서는 10세기 중엽까지도 신라의 차사사뇌 양식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뇌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고려 중엽에는 「정과정(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한다. 「정과정」은 정서(鄭敘)의 작품으로,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곡인데,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에 의하여 칠언절구의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우리말 가사를 가진 「진작(眞勺)」의 전반부와 같아서 「정과정」의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여기에서는 「진작」의 대엽 이전 부분을 「정과정」의 가사로 간주하여, 「정과정」의 음악형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악학궤범』의 「진작」 전반 가사는 전강 · 중강 · 후강 · 부엽으로 구분되었고, 『대악후보』에서는 일 · 이 · 삼 · 부(一 · 二 · 三 · 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삼(三)의 끝에 달린 ‘아으’라는 차사에서의 완전종지와 부엽 끝에서의 완전종지에 의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음악형식을 종합하면, 「정과정」은 차사사뇌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신라 사뇌의 양식과 같고, 전체가 3구와 부엽으로 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체가 4구와 후구(後句)로 된 사뇌와 다르다. 즉, 「정과정」은 사뇌의 감소형(减少形)으로서 그 변모과정을 보이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정과정」은 고려에서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 전하였고, 『 양금신보』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만대엽」 · 「중대엽」 · 「삭대엽」이 모두 「정과정」 삼기(三機)에서 나왔다.
고려 후기는 신라의 차사사뇌와 화랑 신분이 거의 사라진 명종대(1171)에서 고려 말(1392)까지의 약 200년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의 음악적인 특징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하여 궁중의 의식음악이 위축되고 민간음악이 확장되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궁중의 의식음악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38년(1232∼1270) 동안이나 조정이 수도를 떠나 있었고, 얼마 뒤에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강화로 조정을 옮기는 등 몇 차례의 병란을 겪으면서, 악공(樂工)이 이산(離散)되고 음악이 폐실될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궁중의 제향의식 및 정조(正朝)와 동짓날의 하표(賀表)에 따르는 음악, 행행(行幸) 때의 법가위장과 고취 및 팔관회 · 연등회 등이 미미하게 전승되거나 거의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1292년 강화도에서 환도한 이후 병화(兵火)가 없던 70년 동안, 충렬왕은 당나라 현종의 예를 따라서 야연(夜宴)을 즐기고, 가무를 잘 하는 성중(城中)의 관비(官婢)와 무당을 뽑아 궁중에 둠으로써, 민간의 속악이 궁중에까지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말기의 속악은 조선시대 초기에 남녀의 사랑을 담은 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음란한 소리(洼淫之聲)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궁중과 민간을 막론하고 널리 유행하였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고려의 속악은 곡명만 전하는 것과 그 음악이 조선시대까지 전하여 악보로 전하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에서 백제악의 「 방등산」과 연대미상의 곡 「 금강성」, 이제현의 한시 번역을 가진 「정과정」 · 「 오관산」 · 「 거사련」 등은 비록 악보로 전하지는 않지만, 그 음악이 조선 태종, 혹은 세종 때까지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악보로 알 수 있는 고려 후기의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 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형식의 장가(長歌)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속요는 「 만전춘」 · 「 이상곡」 등의 곡처럼, ‘아소 님하’라는 짧은 결구를 끝에 단 긴 노래[長歌]이다.
이 밖에 고려의 속요 중 독특하고도 이색적인 곡은 「 쌍화점」이다. 『대악후보』의 「쌍화점」은 ‘쌍화점’ · ‘삼장사’ · ‘드레우물[蛇龍]’의 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삼장」과 「사룡」은 충렬왕 때인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곡임이 『고려사』 악지에 밝혀져 있어 고려 후기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쌍화점」은, 첫째 초장에 서역인을 뜻하는 ‘휘휘(回回) 아비’라는 가사를 가졌고, 둘째 향악의 대부분이 5박과 3박의 결합인 8박인 점에 비하여, 「쌍화점」만이 특별히 그 5박과 3박의 각 끝음을 꾹꾹 눌러서 ({{IMG}})라고 표현하는 도약적 효과를 가지며, 셋째로 그 5박과 3박 중 3박의 매(每)박에 장구점이 들어가({{IMG}}) 빠른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렇게 특이한 「쌍화점」이 향악인지 또는 호악(胡樂)인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살핀 「 서경별곡」 · 「 만전춘」 · 「 이상곡」 · 「쌍화점」 등의 속악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되어 그 음악적 내용을 전하였다. 즉, 「서경별곡」은 「 정대업」의 「 화태」에, 「만전춘」은 「정대업」의 「 순응」에, 「쌍화점」은 「 보태평」의 「 정명」에 각각 차용되었음이 악보 분석 결과 밝혀졌다.
한편, 고려 후기의 음악이 남녀상열지사의 속악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은 그런 남녀의 사랑 노래인 「서경별곡」 · 「만전춘」 · 「이상곡」 같은 장가가 고려 후기의 새로운 음악이라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가, 즉 유절형식의 별곡과 ‘아소 님하’라는 결구를 가진 음악이 고려 후기 음악의 특징이라 하겠다.
고려 전기에 들어온 당악, 정확히 말해서 송악(宋樂)은 여러 차례의 외침(外侵)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연향에서 향악과 대비를 이루며 좌방악 · 우방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송나라의 교방여악인 「 헌선도」 · 「 수연장」 · 「 오양선」 · 「 포구락」 · 「 연화대」가 『고려사』 악지에 서술되어 있어 고려 후기에 존속하였음이 분명하다.
또 한편, 「태평년」 · 「수룡음」 · 「 억취소」와 같은 산사(散詞)가 제향음악에 채용됨에 따라 변화를 보았다. 즉, 장단시로 되었던 이 음악들은 공민왕 16년(1367)에 공주의 혼전(魂殿)에서 제향의 초헌악 · 아헌악 · 종헌악으로 사용되면서 4언 1구의 신찬(新撰) 가사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의 당악은 악기편성에 있어서도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즉, 고려 전기의 당악에서 사용된 쟁이 대쟁과 아쟁으로 바뀌었고, 대고 대신 교방고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퉁소가 새로이 채용되었다.
몽고(元)는 100여 년간 고려를 지배하였지만 몽고음악 또는 호악은 그 기록을 남길 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몽고음악이 고려에서 연주되었으리라는 가능성은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고려의 공민왕 때 몽고의 음악인인 양제(梁濟)와 그 일행이 도당(都堂)에서 몽고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고, 또한 조선 태종 11년(1411)에는 중국과의 교린을 위하여 사역원(司譯院)에서는 몽고어를 가르치고 또 관습도감에서 사라져 가려는 몽고음악을 연습하게 하여 달라는 계(啓)를 올린 바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몽고 또는 조선 악공이 연주하는 몽고음악이 몽고인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몽고음악은 끝내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려 후기의 아악은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하여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악공들이 다른 관서로 도망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말미암아 악공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악기가 손실되는 등 그 전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금 · 슬 · 훈의 악기가 아악편성에서 빠졌고, 결국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명나라에서 편종 · 편경 · 생 · 소 · 금 · 슬 · 배소를 들여오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또 명종 때부터는 제향의 아헌악과 종헌악에 순전한 아악기 연주 대신 아악기와 향악기의 합주[鄕樂交奏]가 끼여들어 아악의 정통성을 어지럽히게 되었다. 1371년에 아악의 부흥을 위하여 아악 전담부서인 아악서(雅樂署)가 새로 생겼지만, 아헌과 종헌의 향악교주는 교정되지 못한 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순아악으로 개정되었다.
조선 전기는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음악사의 특색은, 첫째 불교억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가 폐지되고, 둘째 숭유(崇儒)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禮樂)이 숭상됨에 따라 아악이 크게 일신되었으며, 셋째 건국대업을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신악(新樂)이 창작되었고, 넷째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성대한 음악제도를 잘 보전하고 이의 결락(缺落)을 방지하기 위하여 『악학궤범』과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아악이 일신되었다 함은 세종 때에 편경 이하 아악기 전반이 새로이 제작된 것, 악기 조율을 위하여 율관이 제작된 것, 와전된 재래 아악곡을 폐기하고 임우(林宇)의 『대성악보(大晟樂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아악곡을 제정한 것 등을 일컫는다.
신악의 창작은 세종 때 「 용비어천가」의 제작과 그 가사를 사용한 「 여민락」 · 「 치화평」 · 「 취풍형」의 작곡, 그리고 「 보태평」 · 「 정대업」의 작곡을 말하며, 이러한 조선시대의 신곡을 후세에까지 전하기 위하여 창안된 정간보(井間譜)의 발명을 포함한다. 다음은 아악기의 제작 및 아악곡의 제정, 신악의 음악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전기의 아악기 제작사업은 세종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즉, 고려로부터 완성하지 못한 제향아악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에는 아악기의 음이 잘 맞지 않고 아악기의 종류가 부족하였으나, 아악의 실제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425년(세종 7)에 기본음 황종율관의 길이(9寸)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거서(한 알이 1分에 해당)가 해주에서 생산되고, 1426년에는 편경의 재료인 경석(磬石)이 남양에서 발견되자 곧 율관과 편경의 제작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율관 제작사업은 몇 번의 시험을 거듭한 끝에 1427년에 완성되었다.
박연(朴堧)이 기장알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완성한 황종율관은 해주에서 생산된 기장알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그 음이 명나라의 편경 황종음보다 높아 곧 폐기되었고, 이와 같은 난점을 보완하고자 다시금 중국의 편경 황종음에 맞추어 율관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427년에는 이 율관의 음에 맞추어 우선 편경 한 틀 12장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 황종음에 맞추어 제작된 황종율관에 만족하지 못한 세종은 거서를 쌓아 율관을 구하는 방법[累奏法] 대신 후기법(候氣法)을 채용하였고, 그 밖에는 대나무 율관 대신 구리 율관을 제작하거나 또는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그 기본음의 높이를 결정하려고 하는 등 여러 모로 애를 썼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생각에 맞는 율관제작법은 성공하지 못한 채 결국 중국 황종음에 맞추어 만든 황종율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율관제작은 악기의 조율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종률법(鐘律法)의 연구를 유발시켰다. 그리고 율관 및 편경의 제작과 함께 편종 · 금 · 슬 · 생 · 소 등 조선 전기 아악기의 제작은 태종 6년(1406)의 경우에서 보듯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 초기의 아악은 대개 고려시대의 아악을 답습하였지만, 1427년(세종 9) 12월에 제향의 아헌 · 종헌 · 송신에 연주되던 향악교주 전통이 폐기되고, 제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아악기 연주로 일관되도록 고쳐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는 재래의 아악곡이 폐지되고 새 아악곡이 제정되어 아악 역사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악 제정작업을 주관하고 있던 박연은 당시 봉상시(奉常寺)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국 악장」의 관보(管譜) 아악곡 중 등가(登歌)의 음악이 음려(陰呂)에 속하는 음을 중심음으로 하지 않고 헌가(軒架)의 음악과 같이 양률(陽律)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국 악장」의 음악내용은 등가와 헌가의 음악이 각각 음려와 양률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는 주례(周禮)의 음양합성(陰陽合聲)제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 출처도 불분명하여 혹 악공이 잘못 베낀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여, 그때까지 사용하던 악보는 마땅히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악보로 원나라 임우의 『대성악보』를 들고, 이 악보에 전하는 아악 16곡 중에서 순수히 궁조(宮調)를 사용한 12곡(盥洗曲 제외)을 각각 12조(調)로 이조(移調)한 144곡의 새로운 제사음악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위로 제정된 새로운 아악은 1430년 윤12월에 발간된 『아악보』에 실렸다.
조선 전기의 신악(新樂)은 세종이 창작한 「봉래의」 · 「발상」 · 「보태평」 · 「정대업」등을 가리킨다. 세종대에 이르러 크게 진작된 신악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조선 초기의 악장인 「 수보록」 · 「 몽금척」 · 「 근천정」 · 「 수명명」 등의 내용이 모두 태조와 태종의 위업만을 담고 있어, 조종(祖宗)의 공덕과 조선건국의 간난을 두루 형용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좀더 포괄적인 조선건국 음악의 필요성이 요구됨에 따라 장대한 신악 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제정된 신악의 음악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가진 「 봉래의」는 「 여민락」 · 「 치화평」 · 「 취풍형」으로 이루어진 춤곡이다. 이 중에서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수장(首章) · 2장 · 3장 · 4장 · 졸장(卒章)의 한문가사를 취하고 그것을 고취악에 붙인 것이며, 「치화평」은 만(慢) · 중(中) · 삭(數)의 3기(三機)로 이루어진 장가형식의 음악이다.
만 · 중 · 삭 3기로 된 「치화평」은 「용비어천가」 전 125장의 내용을 매 기(機)의 가사로 한다. 그러나 실제 연주 때에는 제3기의 수장 이하 16장까지와 졸장만을 사용하며(대악후보에서는 졸장마저 생략되었다), 「치화평」의 수장(海東章)과 2장(불휘장), 졸장(千世章)을 제외한 나머지 14장의 선율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진행되어 「용비어천가」 전 125장의 가사를 노래하는 「치화평」은 장가형식 또는 가사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취풍형」도 「치화평」과 같이 「용비어천가」의 125장을 노래하나, 실제 연주 때에는 수장 이하 8장(太子章)까지와 졸장만을 택한다(대악후보에는 졸장도 생략되었다). 그리고 「취풍형」의 음악은 제3장부터 제8장까지 모두 6장의 음악이 반복되는 장가형식인 점에서 「치화평」과 같다. 그러나 「치화평」에 연이어 연주되는 「취풍형」은 그 선행곡보다 빠른 속도를 보인다.
「 발상」은 조선시대 조상이 하늘에서 받았다는 상서(祥瑞)를 노래와 춤으로 나타낸 신악이다. 이 음악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곡의 신악들과 비교된다. 즉, 전체가 11장으로 된 「발상」은 전 125장으로 이루어진 「용비어천가」보다는 짧은 곡이지만, 그 사설의 내용에 있어서는 「용비어천가」와 비슷하다.
또, 「발상」의 가사가 4언 1구의 한시로 이루어진 점에서는 「여민락」과 비교되는데, 「여민락」이 4구 1장인 데 비하여 「발상」은 12구 1장으로 되어 있다. 「발상」은 4구 1장으로 된 「여민락」이 조종의 공덕을 기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12구 1장의 긴 내용으로 보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상」의 음악내용은 「여민락」과 함께 고취악이다.
「정대업」과 함께 「 보태평」은 각각 조종의 무공(武功)과 문덕(文德)을 기린 음악으로 「정대업」은 15곡, 「보태평」은 11곡으로 되어 있다. 이는 「봉래의」의 곡 구성과는 달리, 모음곡과 유사하다.
「정대업」과 「보태평」의 음악은 기존의 고취악과 고려 향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중 많은 곡이 고려 향악에서 파생되었으니, 「정대업」 중의 「 휴명」은 「 청산별곡」에서, 「 순응」은 「 만전춘」에서, 「 화태」는 「 서경별곡」에서 각각 선율을 채용하였으며, 「보태평」 중에서는 「 형광」이 「 가시리」(귀호곡)에서, 「 융화」는 「 풍입송」에서, 「 정명」은 「 쌍화점」에서 파생되었다. 특히, 「보태평」 중의 「 계우」는 고취악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한편, 「정대업」과 「보태평」의 가사는 무공을 형용한 「정대업」의 경우 3언 1구(예:濯靈), 4언 1구(예:休命), 5언 1구(예:昭武)로 된 한시로 되어 있으며, 문덕을 형용한 「보태평」은 4언 1구와 5언 1구의 한시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신악은 일종의 창작작업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신악 제정은 기존 음악에 바탕을 두고 새로이 요구되는 음악형태로 재구성된 것이고, 이 같은 재구성의 과정은 곧 일종의 창작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곡이 완성되기까지 사용된 창작작업의 예를 보면, 기존곡에 새로운 선율을 첨가시키거나(휴명―청산별곡, 화태―서경별곡, 형광―가시리의 관계), 기존곡의 선율 일부를 떼어내어 새 음악의 짧은 가사에 맞도록 압축시키는 형태(순응―만전춘, 융화―풍입송의 관계)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청산별곡」과 「휴명」의 관계에서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향악의 첫 시작음을 궁(宮) 또는 하오(下五), 즉 중심음으로 고침으로써 본래 향악이었던 곡을 중국음악의 기조필곡(起調畢曲)의 체제로 만들었는가 하면, 「쌍화점」과 「정명」의 관계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불규칙한 길이로 된 향악의 길고 짧은 음을 중국음악과 같이 규칙적 길이의 음으로 고친 예를 볼 수 있다.
한편, 세종 때의 신악인 「보태평」과 「정대업」은 여타의 곡과는 달리 특별한 변화를 겪는다. 본래 연향악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용을 곁들여 연행되어 온 이 음악은 세조 때인 1464년 종묘제향악으로 채택됨에 따라 제향음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대업」 15곡은 「보태평」과 같이 11곡으로 감소되었다. 둘째, 선율의 길이도 연향음악으로서의 「정대업」 · 「보태평」보다 짧아졌다. 셋째, 임종궁이었던 「보태평」과 남려궁이었던 「정대업」의 음악이 모두 청황종궁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음악들은 모두 기존의 향당악 편성에 편종 · 편경 · 축 · 어의 아악편성이 첨가되었다.
정간보(井間譜)는 『세종실록』 악보에서와 같이 1행 32정간, 또는 『세조실록』 악보에서와 같이 1행 16정간으로 되었으며, 매 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정간보에서 나타내는 음의 길이는 음이 쓰여진 정간 다음에 이어 나오는 빈 정간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그 음이 길고 짧다.
정간보에 의한 기보법(記譜法)은 등시가(等時價)의 4음 1구로 된 아악의 기보에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며, 실제로 『세종실록』 아악보에서는 정간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 반하여 음의 길고 짧음을 나타낼 수 있는 정간보는 불규칙적인 시가를 가진 향악 기보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세종 당시에 제정된 「정대업」 · 「보태평」 · 「치화평」 · 「취풍형」 등의 신악이 바로 이 기보법에 의하여 악보화되었다.
이와 같은 향악의 기보를 위한 세종의 정간보 발명은 우리말의 기록을 위한 세종의 한글창제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정간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종실록』 악보는 우리 나라의 현전하는 악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서도 음악사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창제 당시 1행 32정간으로 만들어진 정간보는 세조에 의하여 1행이 16정간씩 둘로 나뉘었고, 그 16정간은 3 · 2 · 3 · 3 · 2 · 3정간의 6대강으로 구분되어 악보를 읽는 데 편리하게 되었다(『세조실록』 권48 악보 참조).
1행 16정간 6대강으로 된 세조 때의 정간보는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 시용향악보』와 세조 때의 향악을 수록하고 있는 『대악후보』에 사용되었는데, 마침 이 악보들은 고려시대 향악의 장단을 명시하고 있어 음악사의 귀중한 단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 정간보는 『금합자보』와 같이 합자보(合字譜)의 기보방법을 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합자보』의 「여민락」과 「보허자」에서는 6대강 대신 4대강보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4대강보는 조선 후기에 나온 『 이수삼산재본금보』 · 『 증보고금보』 · 『 신증금보』 등의 금보(琴譜)에서도 발견된다.
조선 전기의 악서찬집(樂書撰集) 사업은 일찍이 세종 7년에 박연에 의하여 건의된 바 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고, 성종 24년에 이르러서야 『 악학궤범』 9권 3책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악학궤범』은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오래되어 파손되었거나 비록 잘 보존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소략하고 틀린 점이 많아 이의 증보 교정이 필요하다는 성종의 명으로 장악원제조 유자광(柳子光), 예조판서 성현(成俔), 장악원주부 신말평(申末平), 전악 박곤(朴棍)과 김복근(金福根)이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악학궤범』은 『 시악화성(詩樂和聲)』의 ‘악제원류(樂制原流)’나 『증보고금보』의 ‘역대악제(歷代樂制)’와 같은 음악역사 서술을 일체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있는 그대로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와 같은 『악학궤범』의 기술목적은 비록 악제와 악기가 소실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상대로 재현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실제로 광해군 때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악기와 악제가 모두 흩어지고 결락된 것을 『악학궤범』에 의하여 일무와 종묘악을 복구하는 데 공헌한 바 있으며, 이후로도 고악의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몇 권을 제외하고 산실된 『악학궤범』은 1610년(광해군 2)에 복간되었고, 병자호란(1636) 후로는 1655년(효종 6)에, 그리고 아악 중수사업의 일환으로 1743년(영조 19)에 각각 복각되어 오늘날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이 밖에 조선 전기에는 세종대의 율관제작에 따른 악리(樂理) 연구, 세종의 정간보 창제와 세조의 개량, 『악학궤범』의 간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악학(樂學)의 발달을 보여준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당악, 즉 송악(宋樂)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의 「헌선도」 · 「수연장」 · 「오양선」 · 「포구락」 · 「연화대」는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계승되었고, 그 밖에 조선 전기에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서 창작된 「금척」 · 「 수보록」 · 「 근천정」 · 「 수명명」 · 「 하황은」 · 「 하성명」 · 「 성택」 등의 정재가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첨가되었다.
새로이 창작된 춤은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금척」을 제외하고 새로 지은 가사를 송악에 얹어 부름으로써 송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수보록」과 「수명명」에는 「보허자」가, 「하황은」에는 「금전악」이, 「하성명」과 「성택」에는 「하성조」가 각각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송악은 원가사 대신 본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태종 · 중종 때에는 『시경(詩經)』의 가사를 송악의 선율에 얹어 연향악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녹명(鹿鳴)」의 가사를 「중강조」에, 「사모(四牡)」를 「금전악」에, 「황황자화(皇皇者華)」를 「전화지조」에 붙여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송사(宋詞)의 원가사를 사용하지 않고 송악의 선율에 다른 가사를 담았던 이유는 『 성호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송사의 내용 중 ‘풍정(風情)’ · ‘비단옷(綺羅)’ · ‘분단장한 얼굴[粉面]’ · ‘푸른 눈썹[翠黛]’과 같은 표현들이 아악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고취악은 조종의 공덕을 칭송한 「수보록」 · 「몽금척」 · 「근천정」 · 「수명명」을 포함하지만 그 악보가 전래되지 않는다. 단지 세종 때에 제정된 신악(新樂) 중에서 「정대업」 중 「독경」, 「보태평」 중 「계우」, 「발상」, 「봉래의」 중 「여민락」 등의 고취악은 악보로 전하고 있어, 이로써 고취악의 음악내용을 알 수 있다.
고취악의 가사는 4언 1구의 한시로 되었고(몽금척은 예외), 그 음악은 1자 2 · 3음(一字 二音 또는 三音)의 체제를 가졌다. 그리고 고취악은 4언 1구의 끝에 박이 한번씩 들어가며, 박 넷이 모여 장구형 하나를 이루는데, 장구형 하나의 음악은 곧 4구 1장의 가사에 해당된다.
또, 가사 1구 끝자에 붙는 음의 시가는 선행자(字)에 붙는 음의 시가와 같다. 이 점은 가사 1구의 끝이 2배로 늘어나는 송사와 다르며 오히려 아악과 유사하다. 다만 아악에서와 같이 엄격히 1자 1음식이 아니고, 1자 수음(數音)인 점에서는 아악과 다르다.
조선 전기의 향악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향악을 계승하였고, 『대악후보』 · 『시용향악보』 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다. 조선 전기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이다.
「 만대엽」은 고려시대 음악에는 보이지 않고 『금합자보』에 처음 나타나는 음악으로서, 이 음악의 형성시기는 대략 조선시대 전기 말로 추측된다(세조 때의 음악을 실었다는 대악후보에도 만대엽이 포함되었지만, 그 만대엽은 금합자보에 비추어 가사가 없고, 음악이 6대강의 제4대강에서 시작하는 것은 다른 데에 그 예가 없는 점으로 비추어 세조대의 음악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평조만대엽이 고려시대의 향악이 거의 다 사라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평조 · 우조 · 평조계면조 · 우조계면조의 「 중대엽」과 「 삭대엽」을 파생시켰고, 평조만대엽은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 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으로 조선시대의 신곡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는 광해군대로부터 고종 말(1910)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 음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조선 후기는 외래음악 수용이 거의 없이 전통음악이 창작,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다음은 음악의 갈래별로 조선 후기 음악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 후기 아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단절과 복구의 격동을 겪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 전기의 아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병자호란(1636)에서 인조 25년(1647)까지 약 1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사직(社稷) · 문묘(文廟) 등의 제향아악은 매우 축소된 규모로 복구되어 그 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복구된 아악의 규모는 『악학궤범』에 62인으로 규정되어 있는 등가 악생의 수가 20인으로, 헌가의 경우는 124인에서 22인으로 감소되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등가에서 악장을 부르는 가자(歌者)의 수가 『악학궤범』의 24인에서 4인으로 격감된 점이다.
「 종묘제례악」도 아악의 경우와 같이 병자호란 후 10년 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그 맥을 이었다. 연주 규모는 감소되어 『악학궤범』에서 36인이었던 등가의 악공은 20인으로, 72인이었던 헌가의 악공은 22인으로,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던 가자의 수는 인조 때의 6인에서 2인으로 각각 감소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종묘제례악」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 결과 「종묘제례악」은 향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였다.
즉, 조선 전기의 「종묘제례악」은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 · 가야금 · 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함께 편성되었으나, 이 향악기들은 숙종대 이후에 일차 헌가에서 빠졌고, 그 뒤로는 헌가에서마저 생략되어 악기편성의 면에서 향악의 요소가 거의 배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길고 짧은 음의 결합으로 연주되던 「종묘제례악」이 거의 등시가의 음길이로 변함으로써 향악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전정헌가(殿庭軒架)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9인이 연주하던 전정헌가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증보문헌비고』 · 『춘관통고』).
그리고 인조 이후의 전정헌가는 『악학궤범』의 거문고 · 가야금 · 향비파 · 월금 · 대쟁 · 아쟁 등의 많은 현악기를 편성에서 제외시키고 관악기의 연주를 부상시켰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전정헌가에서 연주된 음악은 고취악 「여민락령」(朝賀 및 임금의 출입 때)과 당악 「낙양춘」(군신배례 때)이다. 이 곡들은 조선 초기에는 16정간 1행의 악보에서 4행마다 박이 들어가는 규칙적인 리듬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종묘제례악」과 같이 박자가 없는 음악으로 변하였다.
전정고취(殿庭鼓吹)는 전정헌가에서 편종 · 편경 · 삭고 · 응고 · 건고 · 축 · 어 등의 악기를 뺀 작은 규모의 연주편성이다. 전정고취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0인이 연주하던 전정고취 악공의 수가 26인으로 줄었다.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와 같이 고취악 「여민락령」과 당악 「낙양춘」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순조 기축년(己丑年, 1829) 『 진찬의궤』에 의하면, 전정고취가 왕세자의 입전(入殿) 때에 「정읍 만기」를 연주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본래 「정읍」은 「무고」의 반주에 사용된 음악으로 장단이 있는 음악이었으나, 이 음악이 전정고취에 연주됨에 따라 현행 「정읍」과 같이 장단이 없는 위엄 있는 곡으로 변하였다.
임금의 행악(行樂)으로 연주된 전후부고취(前後部鼓吹)의 음악은 『악학궤범』에 당시 50인의 악공이 맡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 그 악기편성에 있어서는 전정고취와 거의 다르지 않다. 전후부고취에서는 「여민락령」을 연주하였는데 이 음악은 현행 「해령」과 같이 박자 없는 화려한 관악으로 현악 「여민락」과 다른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 연향악(宴享樂)의 변천과정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향악과 당악이 좌우로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연주전통이 지켜졌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악기와 향악기가 한데 섞여 연주[鄕唐交奏]하게 됨으로써,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없어졌다.
둘째, 외진연(外進宴)과 내진연(內進宴)에 사용되는 춤의 내용이 각각 구별되어 고정되었다. 영조 19년(1743)에는 외진연 정재에서 무동(舞童)이 춤을 추고 제1작(酌) 초무(初舞)에 「보허자령」, 제2작 「아박」에 「정읍」, 제3작 「향발무」에 「보허자령」, 제4작 「무고」에 「향당교주」, 제5작 「광수무」에 「향당교주」를 쓰기로 정하였다.
내진연 정재에서는 여기(女妓)가 춤을 추고 「헌선도」 · 「수연장」 · 「포구락」 · 「오양선」 · 「연화대」 등의 당악정재와 「아박무」 · 「향발무」 · 「무고」 등의 향악정재를 쓰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 춤은 모두 향당교주로 반주하였다.
이로써 조선 후기에는 여기에 의한 송나라의 대무(隊舞)가 외진연에서 사라졌고 내진연에서만 연행되었으며, 이때 연주되는 음악은 『악학궤범』 당시까지의 송악(宋樂)이 아닌 「향당교주」로 단일화되었다.
셋째, 향악정재 중 「아박」과 「무고」에 수반된 우리말 창사가 각각 칠언절구 및 오언율시의 한시로 바뀌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 후기의 연향악, 특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는 조선 전기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던 구별이 거의 없어짐에 따라 『악학궤범』 소재의 향악 · 당악정재와는 매우 다르게 변화하였다.
정악(正樂)이라는 용어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정악은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박하고 복잡하지 않은 음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악은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琴歌)’와 통하는 점이 있다.
한편, 정악의 또 다른 뜻은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산회상」 · 「여민락」 · 「보허자」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여기에서는 정악이라는 용어를 금가가 아닌 음률이라는 뜻으로 한정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여민락」은 「영산회상」에 비하여 금보에 기록된 것이 적다.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여민락」을 수록한 『신증금보』는 가사까지 병기(倂記)한 「여민락」의 전 10장의 음악을 완전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 어은보』 이래로 「여민락」은 가사 없이 제1장부터 제7장까지만 연주하도록 되어 있으며(어은보에서 처음으로 장별 구분을 하였다), 『 삼죽금보』에서는 「여민락」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20박 한 장단의 음악형식을 지키고 있으나 4장 이하에서는 10박 한 장단으로 변화하였다.
「보허자」 또는 「보허사」(이 명칭은 어은보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수삼산재본금보』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이 악보에서는 미후사의 제1구, 즉 환두(換頭) 부분까지 싣고 있으며, 그 가사도 병기하였다.
그러나 『 한금신보』 이후의 악보에서는 가사가 없어지고 장별 구분이 생기게 되는데, 『 유예지』부터는 현행같이 제5장부터 제8장까지의 음악이 20박 1장단에서 10박 1장단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보허자」는 몇 가지의 파생곡을 만들어냈다. 즉, 「보허자」의 환입(換入, 또는 도드리) 부분을 20박에서 6박으로 변형시켜 파생된 곡이 「밑도드리」이며, 거문고 4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밑도드리」를 다시 거문고 7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곡이 「잔도드리」이다.
이 음악들이 처음으로 출현하는 것은 『한금신보』인데, 여기에서는 장별 구분이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기보되어 있다. 또한 『 삼죽금보』 이후에는 「보허사」에서 파생된 또 다른 곡인 「양청도드리」와 「우조가락도드리」가 출현하였다.
「영산회상」은 현행 「상영산」에 해당하는 곡이 『이수삼산재본금보』에 맨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 악보에서는 ‘영산회상불후신’이라는 가사를 병기하였다. 그 뒤 『한금신보』부터 가사가 없어졌고, 『유예지』에 이르러서는 곡 전체가 4장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어은보』 이후로는 「상영산」의 파생곡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행 「중영산」에 해당하는 곡이 『어은보』에서는 ‘영산회상 갑탄’이라는 명칭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은 다시 『유예지』에 이르러 10박 한 장단을 가진 「세영산」 · 「 가락덜이」를 파생함으로써 연곡(連曲)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 『유예지』에서는 오늘날 「영산회상」의 한 곡인 「 삼현도드리」 · 「 하현도드리」 · 「염불」 · 「타령」 · 「군악」 등의 곡이 보이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곡은 서로 독립되어 있었고, 이 곡들이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모음곡으로 형성된 것은 『삼죽금보』 이후의 일이다.
이상에서와 같은 「영산회상」의 변모과정은 단순한 곡의 전승에 그치지 않고 변주, 즉 창작에 의한 전통의 발전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악보를 중심으로 살펴본 「여민락」 · 「보허자」 · 「영산회상」에서 보여주는 공통적인 변천은 『이수삼산재본금보』의 16정간 4대강으로 기보된 음악들이 『신증금보』에서는 20정간 4대강의 음악으로 변하고, 『유예지』에서는 20정간 4대강 한 장단이 두 장단으로 확대되는 변천이다.
즉, 이러한 변천은 음악의 속도가 촉급(促急)하여지는 것을 막고 완서(緩舒)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변천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은 음악의 변화는 정악의 본분을 고수하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가곡은 거문고 반주를 필수로 하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금가는 『양금신보』 시대만 하더라도 「만대엽」 · 「북전」 · 「중대엽」 · 「감군은」 등의 곡이 있었다. 그러나 「감군은」은 『신증금보』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만대엽」은 『어은보』 이후로, 「북전」은 『유예지』 이후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중대엽」은 『삼죽금보』에서 장단이 “의거하기 어렵게” 되어 실제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는 오직 「삭대엽」만이 많은 변천을 거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삭대엽」, 즉 가곡은 「만대엽」 · 「중대엽」과 같이 5장과 중여음(간주곡) · 대여음(후주곡)으로 이루어진 단형의 노래로 거문고에 의하여 반주되는 음악이다.
「삭대엽」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양금신보』에서이다. 『증보고금보』의 「삭대엽」은 우조 · 계면조(우조계면조) · 평조 · 계면조평조(평조계면조) 등 4개의 조를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우조삭대엽」 2곡과 나머지 3조에 속하는 삭대엽이 1곡씩 수록되어 있다.
이후 「삭대엽」은 여러 가지의 파생곡을 갖게 되는데, 『신증금보』에 이르러서는 위의 4조의 「삭대엽」이 각각 일 · 이 · 삼(一 · 二 · 三)의 세 가지 곡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음악은 일(一)에서 이 · 삼(二 · 三)으로 진행됨에 따라 노래의 시작음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예:「우조삭대엽」에서 一은 낙질로 인하여 확인할 수 없고, 二는 유현 7괘의 음, 三은 유현 10괘의 음으로 시작한다). 「삭대엽」 1과 그 변주곡인 2와 3이 그 숫자의 순서대로 연주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한금신보』에 이르러서는 4조의 「삭대엽」 중에서 우조와 우조계면조의 「삭대엽」이 삼(三)에서 사(四)로 늘어난다. 이 음악을 후대의 가곡과 비교, 분석한 결과 「삭대엽」 일(一)은 현행 「초수대엽」에 해당하고, 이(二)는 「두거」에, 삼(三)은 「삼수대엽」에, 대현 5괘음으로 시작하는 그 사(四)는 「이수대엽」에 해당함이 밝혀졌다.
『한금신보』에서 주목되는 점은 「삭대엽」 사(四, 현행 이수대엽)가 오히려 이(二, 현행 두거)의 초장만 변주한 곡이라는 사실이다. 그 뒤 『유예지』에 이르러 「초엽」(초수대엽) · 「이엽」 · 「삼엽」(삼수대엽)에 이어 「농엽(弄葉)」(계면조) · 「우락」 · 「계락」 · 「편수대엽」이 처음으로 추가된다.
그 다음 『삼죽금보』에 이르러서 「이수대엽」과 「삼수대엽」 사이에는 「조림(調臨)」(조은 자진한입, 두거)이 끼어들고 「삼수대엽」 다음에 그보다도 더 높은 음을 내는 「소이(騷耳)」와 「소용(騷聳)」이 추가된다. 그리고 이 곡들이 「우조 소용이」에서 「계면 초수대엽」으로 연속진행할 때 다리구실을 하는 「우롱」 또는 「반엽」이 생겼으며, ‘농’ · ‘락’ · ‘편’을 높이 질러내는 「언농」 · 「언락」 · 「편락」이 더 추가되었다.
한편, 『삼죽금보』에서는 평조와 평조계면조 「삭대엽」은 없어지고 우조와 (우조)계면조만 남았다. 그 뒤 『현금오음통론』에 이르러서는 「이수대엽」 다음에 「중거」와 「평거」가 새로이 추가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대곡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곡의 변천과정은 「영산회상」의 형성과정과 마찬가지로 변주라고 하는 창작활동을 통하여 전통의 발전을 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가사는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가곡이 음악 중심인 데 비하여 가사는 음악보다는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이다.
조선 후기 『삼죽금보』에 이르러 가사는 일반 금보에 실리기 시작하는데, 가사와 금보에 실려 있다고 하여 거문고 반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즉, 가사는 보통 장구와 젓대 반주로 노래하며, 그 반주의 선율은 노래의 가락을 그대로 따르는[隨聲]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가사는 「 죽지사」 · 「 어부사」 · 「 춘면곡」 · 「 상사별곡」 · 「 권주가」 · 「 백구사」 · 「 길군악」 · 「 처사가」 · 「매화가」 · 「 양양가」 · 「 황계사」 · 「 수양산가」 등 12곡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곡수와 가사의 사설을 조선 후기에 간행된 노래모음집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 청구영언』과 현행의 가사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청구영언』에서는 「춘면곡」 · 「권주가」 · 「백구사」 · 「군악」(길군악) · 「관등가」 · 「중양가」 · 「귀거래」 · 「어부사」 · 「환산별곡」 · 「처사가」 · 「낙빈가」 · 「강촌별곡」 · 「관동별곡」 · 「양양가」 · 「매화가」(매화타령) · 「황계가」(황계타령) 등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백구사」와 「양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그 사설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한편, 「상사별곡」과 「춘면곡」은 가사 끝부분의 사설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점은 가사가 유절형식의 음악인지 통절형식의 음악인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 삼죽금보』의 「상사별곡」을 예로 들어 곡의 변화를 살펴보면, 『삼죽금보』의 「상사별곡」은 매 24점이 가사 1곡에 맞아 5박자 1장단(3점)의 8장단(24점)이 1장을 이룬다.
그러나 현행 「상사별곡」 12장 중 8장은 8장단이 아니라 12장단이 1장을 이루고, 특히 종장에서는 8장단이 아닌 6장단이 1장을 이루고 있다. 현행 「상사별곡」은 사설면에서는 『청구영언』과 다르고, 그 음악은 『삼죽금보』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사별곡」은 가사변천의 일면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가사의 사설과 음악의 변화, 그리고 악보의 결핍은 가곡에 비하여 조선 후기 가사의 변천과정을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시조(時調)는 일명 시절가(時節歌)라고도 한다.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는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시조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영조대의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일반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이 무렵부터 시조가 음악으로 널리 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가 처음으로 악보에 기록된 것은 이규경(李圭景)의 『 구라철사금자보』에서이다. 이 악보에서는 시조의 장별 구분이나 장구점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다만 모두 60점이라는 주(註)가 곡의 끝에 붙어 있다. 그 뒤 『 삼죽금보』에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오는데, 이 노래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졌다.
연대 미상의 『 장금신보』에도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온다. 『장금신보』에서도 역시 장별 구분은 5장으로 되어 있고, 시조장단 그림은 1장 · 2장 · 3장을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장구점은 『방산한씨금보』와 비슷하나 여음이 매 장단 끝에 있지 않고 3장 끝에만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한편, 『 서금보』에서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각각 3장으로 나누어졌고 여창의 평시조와 지름시조도 3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방산한씨금보』에서는 시조의 3장형식과 장구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타령’ 또는 ‘잡가’라고 불렸던 판소리는 광대 한 사람이 소리와 말(아니리)로 「 춘향가」와 같은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극음악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 하나인 「춘향가」는 일찍이 18세기 중엽에 한문시로 소개되었다( 유진한의 만화집).
19세기 중엽에는 「춘향가」 · 「 심청가」 · 「 박타령」 · 「토끼타령」 · 「 적벽가」 · 「배비장전」 · 「 강릉매화타령」 · 「옹고집전」 · 「 변강쇠타령」 · 「 장끼타령」 · 「 무숙이타령」 · 「 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곡( 송만재의 관우희)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2마당의 판소리는 점점 후대로 내려오면서 곡의 수는 줄어들고,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온 각 곡의 분량은 확대되면서 오늘과 같은 5마당으로 정착되는데, 간단히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의 『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이르면, 앞서 말한 12마당 중에서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강릉매화타령」 · 「옹고집전」 · 「변강쇠타령」 · 「장끼타령」 · 「무숙이타령」 · 「가짜신선타령」 등이 빠지게 되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집』에서는 이 중에서 「배비장전」과 「장끼타령」을 제외한 6마당만을 실었다.
그리고 1933년 이선유의 판소리를 정리한 『 오가전집』에서는 신재효의 6마당 중 내용이 상스러운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은 5마당의 소리만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판소리의 곡수가 점차 줄어드는 동안 판소리의 사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틀린 이면은 고치고, 판소리의 청중이었던 지식층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틀린 이면을 고쳤다 함은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이별말을 듣고 면경 · 체경을 쳐부셨다 하나 온갖 예의를 아는 춘향으로 그랬을 리도 없으려니와……”라는 아니리가 다른 사설로 고쳐지는 과정을 뜻하며, 유식한 내용이 새로이 첨가되었다 함은 판소리의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시와 고사(故事) 등을 인용한 새로운 대목이 첨가된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경판 춘향전」과 「고대본 춘향전」에는 「적성가」가 없으나 「 열녀춘향수절가」에는 왕발(王勃)의 임고대(臨高臺) 편의 시구를 인용한 「적성가」가 첨가된 경우이다. 따라서 12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의 대본이 유식한 문자를 가장 많이 담고 있어 곡의 분량이 가장 많고, 따라서 이본(異本)도 가장 많다.
「춘향가」의 이본이 많다는 것은 판소리의 사설이 여러 가객의 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판소리의 음악도 역시 사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즉, 판소리의 음악은 여러 명창들이 각기 고유한 더늠(창작)을 첨가해 나감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더늠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박타령」 중 권삼득의 더늠인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과 「춘향가」 중 고수관의 더늠인 ‘사랑가’ 등이다. 판소리의 이러한 더늠 대목은 비록 악보로 기록된 것은 아니나 구전(口傳)에 의하여 그 창작자와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가야금산조는 간단히 말해서 판소리의 기악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음악의 내용이 유사하다. 즉, 산조의 선율은 남도판소리의 선율과 같고, 산조에 사용되는 장단의 종류에 있어서도 판소리와 같다.
그러나 기악독주곡인 산조는 판소리와 달리 느린 템포에서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틀(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일정한 순서)을 가짐으로써, 극적인 내용전개에 따라 다른 장단을 가지는 판소리와는 구분된다.
가야금산조는 19세기 말 전라남도 광주의 아전 김창조(金昌祖)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의 제자 한성기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고 하며, 근세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활발하게 연주되는 곡이다. 뿐만 아니라 가야금으로부터 출발한 산조 양식은 하나의 기악독주곡 양식으로 정착하여 거문고산조 · 대금산조 · 해금산조 등으로 확산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음악사는 여러 차례의 외침과 그에 따른 악기의 파괴, 악보의 산실, 음악인의 사산(死散)에도 굴하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음악사는 마치 우리말과 한문과의 관계와 같이, 전통음악이 외래음악과의 접촉과 그의 섭취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전통의 뿌리를 상실하지 않고 매 시대마다 풍요한 음악을 창작하여 온 음악창작의 역사라 하겠다.
서양음악이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말엽부터이다. 물론 역사 이래로 중국 · 서역 등과 교류하여 오는 동안 서양의 악기나 음악이 유입되어 한국음악으로 수용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엽부터 시작된 서양음악의 수용은 보다 지속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음악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는 한국음악사의 커다란 전환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말엽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서양음악 수용에 주체적 역할을 맡았던 활동 주제를 중심으로 이 시대의 음악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서양음악의 수용은 1885년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하면서 그들이 가르친 찬송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음악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공후(箜篌)라는 악기가 고대 이집트의 악기와 관련있는 것이라든지,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서양악기의 존재가 고려에 알려졌다는 기록이 있어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청나라와의 빈번한 문화교류 및 실학자들의 왕래를 통하여 서양음악과의 접촉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홍대용(洪大容) · 박지원(朴趾源)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그들이 북경(北京)에서 보고 온 오르간 등의 악기를 그들의 저술에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며,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저서인 『 청장관전서』에서 ‘서양음악의 원리약설(原理略說) (1795)’을, 이규경은 『 오주연문장전산고』와 『 구라철사금자보』에서 서양음악의 조와 음계, 음의 고저장단 등을 상술하였다.
특히, 이 무렵에는 양금(洋琴, dulcimer)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전통음악의 편성에 수용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박지원 ·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이덕무 · 이규경 등은 이 악기의 사용법과 악보 등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양악기의 한국적 수용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후기부터 서양악기 및 이론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면서 점차 서양음악에 대한 접촉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885년에는 찬송가를 통한 서양 기독교음악이 들어오게 된다.
감리교 선교사인 미국인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성경과 찬송가로 포교를 하고 이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노래들은 1886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배재학당에서 ‘창가(唱歌)’라는 과목으로 책정되어 교육되었고, 1893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하여 『찬양가』가, 1896년과 1897년에는 감리교회에서 각각 『찬미가』와 『찬송시』가 발행되었다.
당시의 이 출판물들은 악보 없는 가사집의 형태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악보에 의한 찬송가가 출판된 것은 1905년에서 1908년 사이에 제작된 『합동찬송가』였다.
이와 같은 찬송가의 출현은 전통적인 노래의 패턴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서, 신학문교육기관의 성장과 함께 점점 그 바탕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후로는 새로운 노래를 위한 가사를 찬송가식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찬송가의 여파는 단순히 기독교 포교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한국의 신음악(新音樂)이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서양음악 수용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또 하나의 주체는 서양식 군악대 창설이다. 1896년 전권특명대사 자격으로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온 민영환(閔泳煥)이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서양식 군악대 창설계획이 수립되자 당시 독일공사 바이파르트(Weipart)는 한국 양악대의 지도자로 그 무렵 일본 해군군악대를 지도하고 있던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를 추천하였고, 1901년 2월 에케르트의 도착과 함께 양악대 창설에 필요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에케르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오보에 연주자로서 독일의 프러시아 왕국의 궁정악장을 역임한 바 있는 드레스덴음악학교 출신의 유능한 음악인이었다. 게다가 에케르트는 이미 일본에서 군악대를 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어,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은 서양식 군악대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들은 군의 의식은 물론 정부의 각종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밖에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파고다공원에서 갖는 등 서양의 군악 및 국가 · 국민가요, 서구의 행진곡 등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약 10여년간 의욕적인 활동을 벌여온 서양식 군악대는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편되었다.
에케르트가 죽은(1916) 뒤 백우용(白禹鏞)이 그 뒤를 이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왕직양악대는 해체되고, 1919년 경성양악대로 계승되었으나 결국 변화를 겪으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들의 활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서양식 양악대의 설립 및 그들의 활동이 초창기 서양음악 수용에 미친 영향은 이를 모체로 한 민간에서의 양악활동이 그 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나라에서 서양의 작곡개념에 의한 창작품이 처음으로 선보였던 것은 독일인 에케르트에 의한 「대한제국애국가」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서양식 군악대를 지도하기 위하여 체류중이던 에케르트는 1902년에 황실로부터 대한제국 국가를 위촉받아 한국의 전통적인 음계를 바탕으로 하고 서양음악의 형식과 화성을 사용한 「대한제국애국가」를 탄생시켰다.
이 음악은 제목상으로는 애국가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공식적인 국가(國歌)였다. 에케르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나라 전통음악의 음계와 장단을 이용, 아악과 민속악의 분위기를 서양기법으로 재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창작정신은 이후의 여러 작품에서도 분명히 반영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실제 그의 음악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에케르트의 작품경향은 그의 뒤를 이어 군악대를 이끌었던 백우용에게 이어졌을 법하나 역시 백우용의 작품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에케르트의 지도 아래 플루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던 정사인(鄭士仁)의 작품경향을 에케르트와 관련지어 생각하여 볼 수 있을 뿐이다.
정사인은 완전한 민요풍의 노래인 「 태평가」 같은 작품과 전통음악의 5음음계를 절충한 작품인 「내고향 이별하고」, 5음음계를 바탕으로 한 「돌진」 · 「추풍」 등의 행진곡 등을 남겼다.
비록 그의 작품연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태평가」는 1916년 그의 군악대 시절 작품이고, 나머지 작품들은 1916년 이후 송도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사인은 10대 후반에 군악대에 입대하여 젊은 시절을 군악대에서 보내다 1926년부터 1940년까지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브라스밴드를 지휘하였으며, 한때는 경성방송관현악단 등에서 플루트 주자로 활동하였고, 경전(京電)철도국 등에서 브라스밴드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양 선교사와 평양 숭실학교에서 코르넷과 바이올린 · 성악 · 풍금 등을 수학한 김인식(金仁湜)은 1905년 「 학도가(學徒歌)」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음악 내용은 5음음계로 된 단순한 동요풍이다. 이후 그는 「표모가」나 「찬송가」의 곡조 등을 남겼으며, 서양음악 수용기에 그가 보여준 창작활동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 1913년 「영산회상」을 오선보로 옮기는 작업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그의 전통음악 체험이 창작품으로 승화되지는 못하였다.
창작활동에서 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이상준(李尙俊)이다. 그는 정사인이나 김인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악풍토에서 배출되었다.
1909년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 전수와 서양음악의 주체적 수용을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의 음악운동이 조양구락부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 운동은 결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동시에 수용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조선정악전습소이며, 이상준은 이 전습소의 1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여 일생을 마치기까지 많은 창가를 작곡하였다. 그는 1918년 『이상준 최신창가집』에 자작곡 「야구가」 · 「효순」 등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이 창가집은 1911년에 낸 그의 『보통창가집』과 함께 중고등학교에 널리 퍼졌다. 그 밖에도 『신유행창가집』 등 10여 종의 노래책을 펴내는 한편, 당시 서양음악 보급에 크게 주력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 출신의 음악가로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홍난파(洪蘭坡)이다. 그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의 음악수업을 끝내고 1918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3 · 1운동 이후 귀국하여 창작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긴 음악가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형준(金亨俊) 작사에 멜로디를 얹은 「 봉선화」이다.
이 작품은 본래 1920년 그의 단편집 『처녀혼』에 「애수」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었으나, 1925년 그가 펴낸 『세계명창가집』에 「봉선화」라는 노래로 다시 소개되었다. 이 노래는 점차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일제의 억압 밑에서 민족의 한을 푸는 노래로 퍼져 나갔으며, 1940년대 이후 애국적인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요조의 2절 음절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노래들에 비하여 이 노래는 짜임새와 음악적 구성을 갖춘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그가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뒤에 발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한편, 윤극영(尹克榮)은 1925년에 동요집 『 반달』을 출간하면서 우리 나라 동요의 패턴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요집 『반달』은 이 분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노래들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결국 이러한 양상은 우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동요를 통하여 서양음악에 대한 귀를 익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같은 동요 분야는 1929년 홍난파의 『 조선동요백곡집』 출간으로 한층 성하여졌다. 박태준(朴泰俊)은 1922년경 대구 · 마산 등지의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동안 「순례자」 · 「사우」 등의 가곡을 작곡하여 보급하였는데, 당시 그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상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1910년에서 1920년대의 창작활동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이상에서 언급되지 못한 음악활동을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교육과정에서의 음악내용이다. 앞서 김인식 · 이상준 등의 음악활동을 살피는 과정에서도 본 바와 같이 당시의 교육과정에서는 거의 창가를 중심으로 한 음악수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창가집 발간 및 창가 작곡 등이 주요한 음악활동으로 등장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창가교과서가 간행된 것은 1910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창가집에는 한국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은 한 곡도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교육과정에 채택됨으로써 우리 나라 학생들의 서양음악에 대한 취향을 결정짓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은 깊은 관찰을 요한다. 이후 창가집은 김인식 · 이상준 등에 의하여 꾸준히 간행되었다.
한편, 1918년경까지만 해도 양악의 보급은 이렇다 할 만한 성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에 주재한 외국인 동호인과 일부 음악 애호가들에 의하여 하이페츠 · 크라이슬러 · 짐바리스트 등의 초청연주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922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음악활동이 장려되어 브라스밴드와 합창활동 등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양악교육의 온상역할을 하였으며, 1925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과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학 수준의 전문교육기관의 효시로서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 영역이 제한되어 있던 무렵이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이 밖에 숭실전문학교의 음악부에서는 1917년경부터 마오리 · 말스베리 등의 선교사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제명(玄濟明) · 박경호(朴慶浩) · 박원정(朴元貞) · 김세형(金世炯) · 박태준 · 김동진(金東振) · 권태호(權泰浩) 등이 모두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김영환(金永煥)의 지도 아래 윤기성(尹基誠) · 이인선(李寅善) 등의 음악가와 그 밖에 음악적 교양을 쌓은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8년부터는 현제명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지도를 하게 되는데, 김성태(金聖泰) · 김생려(金生麗) · 이유선(李宥善) · 문학준(文學準) · 김관(金管) · 최성두(崔聖斗) · 이유성(李有聖) · 이인범(李仁範) · 한인항(韓鱗恒) · 곽정선(郭正善) · 정희석(鄭熙錫) · 배석빈(裵錫彬) 등 이후 한국 양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음악인들이 이 학교에서 대거 배출되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연주단체의 출현이다. 1926년에는 15, 16명으로 구성된 관현악단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가 결성되어 우리 나라에서의 관현악 활동이 펼쳐졌으며, 곧이어 1928년경에는 연전관현악단(延專管絃樂團)과 경성제국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성대교항악단(城大交響樂團)이 활동을 벌임으로써 학교를 중심으로 한 연주단체가 성장하였다.
서양음악의 수용 및 발전단계를 요람기 · 정착기 · 성장기 등으로 명명한다면 1930년대는 성장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외국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고 돌아온 음악가들이 각각 활발한 음악회와 작품집을 출간하는 한편, 그 동안 노래 중심으로 펼쳐지던 양악활동이 관현악 등으로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1927년에 방송을 시작한 중앙경성방송(JODK)이 1933년부터 점차 서양음악방송을 늘려나가기 시작함에 따라 그에 따른 여파는 서양음악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창작가곡집을 출간한 현제명과 홍난파 두 작곡가는 이후 1930년대의 예술가곡의 작곡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은 1933년의 작품발표회에서 「나그네의 마음」이라는 연가곡(連歌曲)풍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2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채동선(蔡東鮮)은 작곡발표회를 통하여 독일 낭만주의 작품의 견실한 발판을 바탕으로 현제명 · 홍난파의 작품경향과는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며 우리 나라의 음악계에 등장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30년대 중반에는 안기영(安基永) · 김동진 · 김세형 · 이흥렬(李興烈) 등이 가곡을 중심으로 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리고 박태준 · 김성태 등의 동요집이 출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한편, 1939년 6월 8일과 9일에는 서울의 부민관에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전조선창작작곡발표회(全朝鮮創作作曲發表會)가 열렸는데, 이 음악회는 위에서 살펴본 1930년대 창작음악계를 총결산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1936년에 김동진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초연되고, 1940년에는 김성태가 전래동화에 바탕을 둔 무용극 음악 「흥부와 놀부」를 발표함으로써 창작음악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는 전망을 보였다.
이 시기의 창작음악 분야는 극심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위축되는 한편, 김동진 · 김성태 · 김순남(金順男) 등 몇몇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새로운 경향이 개척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한국어를 말살시키려는 일본 식민정책의 의도 아래 가사를 중심으로 한 가곡 창작이 제한을 받았으며, 연주 분야에 있어서도 식민정책 수행의 도구로 이용당하였다. 연주가 위주로 활동하던 후생악단(厚生樂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 어두웠던 시절에도 김동진은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서 「 양산가(陽山歌)」 등을 발표하였고, 김성태는 한국적 선율에 의한 「카프리치오」를 작곡, 초연하는 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유럽 국민주의 작곡가들의 영향 아래 우리 나라 민요를 주제로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편, 1943년에는 김순남이 가곡 「탱자」등을 발표하여 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음악적 경향을 보여주었고, 그의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는 견실한 작곡기법을 구사한 창작품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여류작곡가 김순애(金順愛)가 「현악4중주」 · 「바이올린 소나타」 · 「피아노 소나타」 등을 발표하였다.
광복 이후 1950년까지의 서양음악계는 의욕적인 관현악 활동과 1946년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창설되어 서양음악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발전기라고 지칭할 만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감격과 함께 서양음악인들이 결속하여 시작하였던 일은 오케스트라의 조직이었다. 현제명 등의 음악인들은 광복과 함께 서둘러 고려교향악단을 탄생시켰고, 그 해 10월 수도극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으로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매달 두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갖는 등 당시 음악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는데, 1946년 8월에는 채동선의 교성곡 「조선」을 연주하면서 광복1주년의 감격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려교향악단의 의욕적인 활동은 1948년 김생려 등이 민간활동을 표방하며 고려교향악단을 빠져나와 서울교향악단을 창설함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6 · 25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에 해산되었다.
광복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1946년 국립대학교에 음악부가 생기고 이것이 음악대학으로 발전하면서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은 수많은 인재배출은 물론 우리 나라 음악활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후 각 대학교에 음악대학이 설립되면서 양악계의 면모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은 또한 많은 작곡가들이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어 작품다운 작품을 탄생시키지 못한 민족음악의 비극적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1948년에 채동선이 교성곡 「한강」 · 「조국」등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밖에 조두남(趙斗男)이 가곡집 『옛임얘기』를, 윤이상(尹伊桑)이 가곡집 『달무리』 등을 펴내어 이 시기 창작활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 1950년에 들어와서는 현제명이 가극 「춘향전」을 작곡하여 전례 없는 관중 동원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은 1948년 이인선이 중심이 되어 국제오페라단을 설립하고 그 창단공연으로 베르디의 「춘희」를 공연한 2년 뒤의 일이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해군 정훈음악대가 조직되었고, 이를 통하여 음악활동이 유지되었다. 또한 이상근(李相根) · 윤이상 등의 새로운 음악가들이 새로운 경향을 띤 창작활동을 보여준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상근은 부산의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가곡발표회를 가졌고, 윤이상이 「첼로 소타나」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밖에 김대현(金大賢)은 「콩쥐팥쥐」를, 나운영(羅運榮)은 가곡집 「다윗의 노래」(1954) 및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1955) 등을 각각 발표하였다. 특히, 이 곡은 바르토크의 영향 아래서 한국적 소재를 통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또 한규동(韓圭東)이 편찬한 『한국가곡집』(1955)은 그간의 우리 나라 가곡의 성격을 정리한 것으로 의의 있는 작업이었다. 1955년에는 한국작곡가협회가 결성되는데, 이 단체는 나운영 · 윤이상 · 이상근 등 근대적 경향을 띤 작곡가 그룹과, 김대현 · 김동진 · 김세형 · 윤용하(尹龍河) · 이흥렬 등 보수적 경향을 띤 작곡가 그룹으로 양분화되어 당시 창작계의 경향을 대변해 준다.
한편,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는 아세아재단의 지원을 얻어 신작교향곡을 위촉 연주하였다. 이밖에 1957년 한국음악가협회가 제정한 작곡상에서 스트라빈스키류의 작품경향을 도입한 정윤주(鄭潤柱)의 「까치의 죽음」이 당선되었다. 1959년에는 최인찬이 실험적 작품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경향을 띤 서양음악이 계속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1960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현대풍의 작품들이 도입, 정착된다.
이와는 달리 1959년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설립되면서 창작음악계는 또 하나의 흐름을 갖게 된다. 즉, 서울대학교 국악과가 생긴 이후 국악정기연주회에서는 양악작곡가들에게 작품이 위촉되었는데, 이것은 많은 작곡자들에게 국악을 소재로 한 창작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 강석희(姜碩熙)의 「예불」과 같은 작품이 탄생되었다.
이와 같이 국악을 소재로 한 작품의 출현은 서양음악과 한국음악 사이의 다리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창작의 경향은 새 한국음악 창조라는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 나라의 서양음악 수용의 역사는 초창기의 무의식적인 수용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서양음악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일면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편, 1970년대 이후의 한국양악계는 세계적인 연주가 · 작곡가를 배출할 만큼 성장하였고, 연주와 창작 · 평론 분야 등에서 다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국음악계에는 그 간의 서양음악 수용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한국음악의 실현을 위한 ‘한국음악론’ · ‘민족음악론’이 뜨겁게 제기되었다.
이는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고,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서양음악의 올바른 수용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심층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국음악론에 입각한 창작품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어, 민족음악의 새로운 국면을 다지는 모색기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한편, 1981년 국립교향악단이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KBS교향악단으로 재출범을 하였다. 많은 국민적 관심 속에서 ‘세계 속의 교향악단’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출발을 하였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1985년에는 9월 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서 남북한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공연이 서울의 국립중앙극장과 평양의 평양대극장에서 개최되었다. 분단 후 처음 실시된 교환 방문 공연이라 기대도 컸고, 또 문화적 충격도 컸다. 이후 남북한은 모두 문화 예술을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갖게 되었고 ‘통일음악론’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예술의 전당이 개관을 하였다. 전문 음악회장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후 중요 연주회는 대부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1988년 10월 27일에는 월북음악가들의 작품규제 해제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동안 들을 수도 부를 수 없었던 김순남(金順男), 이건우(李建雨), 안기영(安基永) 등 월북작곡가의 작품이 해금되어 자유롭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분단이 낳은 비극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조치였는데, 당초 예상과는 달리 김순남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구소련를 비롯하여 동구권의 음악단체와 음악인 대거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음악도 많이 유입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의 음악을 제외하고는 그 동안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금지가 되었던 공산권과 동구권의 음악도 수용을 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993년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개교를 하였다. 국내 최초로 국립으로 설립된 음악 실기 전문교육기관으로, 이로 인하여 국내의 음악교육은 음악대학 시스템과 음악원 시스템으로 나뉘게 되었다. 1995년에는 광복50주년을 축하하는 축전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이란 이름으로, 세계를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통일과 미래를 향한 힘찬 새출발을 상징하는 음악제로, 지휘자 정명훈씨를 비롯하여, 피아니스트 한동일, 신수정, 이경숙, 김혜정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김남윤, 김영욱, 강동석, 장영주 첼리스트 장명화, 조영창 소프라노 홍혜경, 김영미, 신영옥, 조수미 등 국내외에서 활동중인 정상급 음악가 20명이 출연을 하였다.
다른 음악제와는 달리 우리 나라의 음악 수준이 서양음악을 수용하고 발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역수출을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상징적인 음악제였다. 이 음악제가 상징하듯 21세를 맞이한 한국음악계는 통일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를 거쳐온 ‘오늘’과 동시대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경우, 광복 이후 시대 · 남북분단시대 · 대한민국시대로 불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가 현대사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음악이라는 보편성 속에 존재하는 한국음악의 특수성이라는 점에 기초하여야 한다. 그러한 특수성은 바로 한국음악의 역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40년의 한국음악을 말할 때 우리들은 흔히 전통문화 파괴와 대중문화의 혼란이라는 말을 자주 접한다.
광복 후 4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음악을 논하려면, 광복 이전 40년의 음악상황을 꿰뚫어보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한국 전통음악의 계획적인 파괴와 말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광복 후의 우리 음악의 변천을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40년간의 한국사회에서의 지도력 발휘는 주로 일제 치하에서 성장한 지도층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일군의 지도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사회 각계의 지도층은 일제하에서 세뇌된 계층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광복 후 상당한 기간을 두고서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래문화의 수용에만 급급하였으니, 광복 후 40년의 음악계도 바로 그러한 우리 사회 · 문화의 맥락 속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전통적으로 이어왔던 우리의 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보다는 예술음악이라는 배경 아래 서양음악을 일방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고, 그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한국에서의 음악교육은 여타 한국어나 한국사의 교육에 비하여 그 시발단계에서부터 서양음악 위주로 구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한국음악교육의 기현상을 부채질하고 가속화한 것은 6 · 25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서구사회와의 상봉이다.
6 · 25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5 · 16군사정변 이후 경제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서양세계의 본질적 사상과 행동을 서양군대식의 훈련을 통하여 익혔다. 이와 같은 일부 외래문화 지향층에 의하여 일제하에서부터 유행되었던 저속한 유행가가 대중문화의 일부로 대두되었다.
또한 상업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외래문화를 완숙하게 익히는 경제입국 · 현실입국 등을 지향하면서 6 · 25전쟁과 동시에 유입되었던 미국의 G.I. 문화의 하나인 경음악과 구미의 유행음악과 함께 서양예술음악 등이 만연되기에 이름으로써 전통적인 음악문화와 정면으로 대립되기 시작하였다.
눈을 감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청각문화를 파악한다면 거리에서, 버스 속에서, 다방에서, 그리고 연주회장과 심지어 학교교육 현장에서까지도 들려오는 음악은 거의 외래음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적인 외래편향적(外來偏向的)인 음악풍토 속에서도 한국의 음악전통은 몇 겹으로 쌓인 외래음악의 지층 속으로 그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 196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즉, 서구음악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지만, 이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을 꾀한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밑거름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음악을 정립하려는 역사적인 움직임이 일부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음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며 민족적인 주체성이나 자주성의 확립과도 일맥상통한다.
전래되어 온 한국의 전통음악은 지금까지 정악과 민속악, 또는 아악과 민속악 등으로 이분(二分)되어 분립되어 온 것이 관례였다. 여기에서 정악이란 말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풍류방(風流房)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쓰여오던 용어로, 그 대상은 주로 시조나 가곡 같은 성악곡(聲樂曲)과 「영산회상」과 같은 기악곡(器樂曲)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악이라는 말의 역사적 용례에만 그 의미개념을 국한시키고 본다면, 여기서처럼 민속악의 대칭이 되는 여타의 음악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어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음악사에서 많이 쓰였던 아악이라는 용어만 보더라도 시대마다 각기 그 포괄범위를 달리하며 변천하여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정악이라는 말을 어제의 의미를 초월하여 오늘의 용례대로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민속악에 있어서는 그 개념의 사용에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민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여러 가지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데다가 확대 해석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앞의 이분적인 분류방법에 있어서도 이러한 민속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민속 또는 민속문화는 조선시대의 상민(常民)이나 오늘의 민중이 주로 전승하고 향유해 온 그 사회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뜻하며, 여기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오늘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문화는 고급문화 또는 상층문화로 볼 수 있다.
양반과 상민이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던 봉건사회의 계급개념이라면, 엘리트와 민중은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무너진 근대사회의 계층개념이다.
고급문화의 담당층인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오늘의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는 역량이 있되, 외국문화를 서둘러 받아들이고 익힘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 계층이었다면, 민속문화의 담당층인 상민과 민중은 선조의 문화를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받으면서 생활상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재창조한 계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발달에 따른 대중문화의 형성에 따라 대중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게 되는데 주로 도시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필요로 등장하여 새로운 문화권, 즉 통속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이것은 1960년 이후 정부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가속되었다).
이러한 민속문화권은 대개 상업주의에 의하여 주도되는데 원각사(圓覺社)나 협률사와 같은 극장의 등장이나 1930년을 전후하여 번창하기 시작한 레코드 산업 등이 이러한 통속문화의 번창을 부채질하였다.
전통음악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민중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잉태되고 육성된 민속음악이 그들의 손을 떠나 상업적인 흥행성에 바탕을 둔 특정 전문음악인들에 의하여 변질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도 한몫 하였다고 보겠다. 즉, 고유의 민속이며 놀이가 전근대적이니 봉건적이니 미신이니 하여 배척당하였고, 이러한 와중에서 민속음악 역시 그 뿌리를 잘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현재의 민속악은 그 대부분이 민속악 본래의 속성을 떠난 통속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현재 전래되는 한국의 민속음악을 정악과 민속악으로 이분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조선시대의 양반층에서 즐겼던 상층문화의 음악을 정악이라고 한다면, 상민 등 하층에서 즐겼던 기층문화의 음악을 진정한 민속악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 뒤 민중의 생활현장을 떠난 특정 전문음악인에 의하여 불려진 노래나 기악곡 등은 통속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악을 제외한 음악을 굳이 민속악과 통속음악으로 나누는 것은 민속악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민속악의 연구와 진작은 민속문화의 발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그것은 민족음악의 수립에 있어 특정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진정한 민속악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 사회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층문화가 거의 단절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창조는 그 민족 고유의 기층문화에 바탕을 두고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의 유입 이래 지금까지 민족음악 수립에 대한 수많은 노력들이 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층문화권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서양음악의 수용이 오랫동안 주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그것이 기층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외래음악의 수용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접촉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 문화를 앎으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함께 우리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긍지를 지닐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외래문화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거나 흔들어 놓는 것은 경계해야 것이 마땅하다.
외국문화는 보다 가치 있고 발전된 것이며, 우리 문화는 뒤떨어져 있고 그래서 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고이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 위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당연히 우리의 기층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기층’의 의미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밑바탕’을 뜻하며,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원초적인 것’을 뜻한다. 한편, 공시적(共時的)인 관점에서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하며, 통시적(通時的)인 관점에서는 ‘전통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의 기층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적인 고유문화를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기존문화 일반의 형성과 발전 및 변모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모태(母胎)이자 생성기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래문화의 수용이나 민족문화의 창조 역시 이러한 민족의 기층문화에 바탕하여야 하며, 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구분에 있어서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를 주대상으로 하되 이를 1945∼1960년과 1961년부터 현재로 이분하여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이 두 시기가 여러 가지 면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며, 이 두 시기의 음악사적 특징을 좀더 뚜렷이 부각시켜 보려 하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덧붙여 광복 이전의 음악현황을 간략히 기술하겠다.
상층문화권의 음악은 주로 궁정이나 양반 · 사대부집 등에서 연주되던 음악으로 각종 제례와 연향(宴享) · 조회(朝會) 등의 제반 의식음악과 가곡 · 시조 같은 성악곡, 「영산회상」 등의 기악곡을 지칭하는 정악 계통의 음악을 말한다. 이러한 음악들이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어왔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1910년의 경술국치 이래 1945년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전통음악의 수난시대로 불러 마땅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마자 각종 국가의식에 사용되는 음악들이 대폭 축소되는 상황을 맞았고, 이에 따라 국가 음악기관의 규모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1897년 장악원이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되고, 1907년에는 다시 장악과(掌樂課)로 개칭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1911년에는 장악과를 아악대(雅樂隊)라 개칭하고 모든 악사들을 용원(庸員)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직제도 국악사장(國樂師長)을 아악사장으로 고치고, 악공 81명을 해산하여 총 189명으로 축소시켰다. 1913년에는 아악사장만을 겨우 용원으로 만든 뒤 악공 84명을 다시 해고시켜 105명의 정원으로 축소시켰다. 1915년에는 아악사장 이하 48명을 또 다시 해고시켜 57명의 정원이 남게 되었다.
1920년에는 다시 직제를 개편하여 아악사장은 주임대우(奏任待遇), 아악사(雅樂師) 및 아악수장(雅樂手長)은 판임대우(判任待遇), 아악수(雅樂手)는 용원, 그 밑에 아악수보(雅樂手補)를 하나 더 두고 용원으로 대우하였다. 1922년에는 아악대를 아악부로 개칭하고 21명을 해고시켜 결국 40명의 정원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광복 직전까지 30여 명의 악사와 25명의 아악생이 남아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멀리 성종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정통 음악기관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던 장악원이라는 이름은 20세기초의 전환기를 전후하여 교방사 · 장악사로, 장악과 · 아악대에서 다시 아악부로 전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아악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다나베(田邊尙雄)의 공적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학기사(理學技士)이자 음향학자(音響學者)로서 신 · 구음악에 정통한 당시 일본 음악계의 권위자였다. 일본 궁내성(宮內省) 아악부 부속의 아악대연습소(雅樂隊練習所)에서 강사로 있었으며, 1920년 한국의 아악을 조사연구할 목적으로 내한하였다.
이때 그는 우리 아악의 진가를 체험하게 되었고, 귀국 후에 기울어가는 조선 아악대의 재건을 일본정부에 적극 건의하였다. 존폐의 위기에 처하여 있던 아악대는 다나베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 형세가 나아지게 되었으니, 1922년에는 관제의 개정으로 악원의 처우가 개선되었고, 1925년에는 종로구 당주동 소재 봉상사 건물 한 귀퉁이에 우거하다가 운니동에 새로 건축된 독립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명칭 또한 아악대에서 아악부로 개칭되었다.
한 나라의 음악기관의 존폐가 외국의 음악학자에게 달려 있었던 당시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하겠다. 어쨌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그 치욕적인 명칭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역경과 시대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수백 년 이래의 한국 전통음악의 뼈대를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여 온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왕직아악부에서 전승한 음악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제례악(祭禮樂) · 연례악(宴禮樂) · 군악(軍樂)과 같은 전통적인 국가의식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가곡 · 시조와 같은 상층문화의 음악이었다.
① 제례악은 원구(圜丘) · 사직(社稷) · 풍운뇌우(風雲雷雨) · 일월성신(日月星辰) · 선농(先農) · 선잠(先蠶) · 우사(雩祀) · 종묘(宗廟) · 문선왕묘(文宣王廟) · 경모궁(景慕宮) · 관왕묘(關王廟) 등 제례의식에 관련된 음악으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말엽을 전후하여 악원의 제도가 축소되면서 제례행사의 종류와 규모가 대폭 축소됨에 따라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만이 남게 되고, 여타의 음악은 악보로만 전하여질 뿐이다. 이것을 협의의 아악이라고 한다.
② 연례악은 궁중의 잔치에 사용되던 음악이다. 이들 연례악도 이왕직아악부에 의하여 관장되어 온 것으로 당시에 연주되던 음악으로는 당악계(唐樂系)의 「보허자」와 「낙양춘」, 그리고 「여민락」과 같은 고취악이 있었다. 향악으로는 「관악영산회상(管樂靈山會相)」과 평조영산회상(平調靈山會相)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로 변개(變改)된 음악이 있었다.
또한 빗가락정읍[壽齊天]과 세가락정읍[動動], 현악보허사(絃樂步虛詞)와 그 변개곡인 「밑도드리」 · 「웃도드리」 · 「양청도드리」 · 「우조가락도드리」와 이들 여러 곡들이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혼합되어 연주되던 별곡, 「여민락」 및 각국 행악 등이 전승되었다.
또한, 가곡의 기악화된 사관풍류와 각종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된 각종 악곡들이 있었다. 그 밖에 군악으로 대취타(大吹打)와 그 변개곡인 취타(吹打)가 전수되었다.
③ 정악은 사대부 계층의 풍류방[律房]을 중심으로 생산, 수용되던 「현악영산회상」과 「여민락」 등의 기악과 가곡 · 가사 · 사조 등의 성악이 두루 포함된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왕직아악부의 악사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1945년 이후 일제 때의 이왕직아악부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여 온 전통음악도 재건의 몸부림을 쳤으나, 그 명칭이 구황궁아악부로 개칭되었다가 1951년 현재의 명칭인 국립국악원이 되었고, 1955년에는 국악사 양성소를 부설하였다.
당시의 열악한 재정형편 때문에 구황궁아악부 악사들의 처우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아악생의 양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아악부 자체도 해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였다.
이에 아악부는 자구책으로 경향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주여행을 다니는 한편, 라디오방송을 통한 해설을 곁들인 음악방송과 각종 국악 실기지도 등을 통하여 악사들의 생계를 근근히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해 11월에 아악부의 국영화(國營化) 등에 관한 안건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950년 1월에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었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개원이 지연되다가 1951년 부산피난시절에 정식으로 개원되어 초대 원장에 이주환(李珠煥)이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국립국악원이 개칭되고 안정되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후진양성의 뜻을 세우고 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중학교과정 3년과 고등학교과정 3년 등 모두 6년제 과정의 전문연주자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현재 국립국악원 연주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 국립국악원과 부설 국악사 양성소는 전통음악 전승을 위한 제도적 · 교육적인 면에서 한국전통음악의 발전을 위한 틀을 잡아가며 사회적인 공감대를 넓혀가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고,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자각심과 자부심은 민족적 자각과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재인식 내지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에 기여한 바 크다고 하겠다.
한편 국립국악원의 연주곡목도 기존의 아악과 정악 중심에서 탈피하여 판소리 및 산조 등의 통속악이 포함되게 되었으며, 신작국악도 발표하는 등 연주회용 음악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는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이 우리 음악의 새 장을 열었으며, 1980년대에는 민중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민중음악 · 민족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특히 ‘사물놀이’는 국내에서보다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음악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 서편제」를 비롯한 국내영화에서 우리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영화 및 음악의 새로운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현재 방송매체 등에서 공연 및 국악이론을 포함한 다양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통음악의 재정립 및 활성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