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고려를 건국한 주역은 지방 호족세력이다. 태조 왕건도 개성 출신의 호족세력이다. 고려는 건국 후 호족세력을 지배질서에 편입시켜 왕조체제를 안정시키고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고려적인 지배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50여 년간의 후삼국 전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왕조 건국에 협조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시행하였다. 고려 정부는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어 왕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어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한편으로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인(其人) 제도와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시행하였다. 민생을 위한 정책으로 조세 수취를 1/10로 정하여 과도한 수취를 금지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같이 고려 정부는 지방사회와 왕조체제의 안정을 위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편으로 호족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타협하고 공존하는 통합정책을 펼쳤다.
다음으로 중국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하였다. 새로운 인재를 충원할 수 있는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지배세력의 교체를 꾀하였다. 또한 중국의 관료제도를 수용하여 관료조직을 정비하는 등 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혜종(재위: 943945), 정종(재위: 945949), 광종(재위: 949975), 경종(재위: 975981) 대에는 이러한 정책에 반발한 호족과 공신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정치적 격변을 치르기도 하였다. 성공적으로 지방을 지배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한 국왕과 관료집단이 점차 정치를 주도하였다.
고려 전기 사회는 중앙이 지방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중앙과 지방이 공존하였다. 사상과 문화에서도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려는 화풍(華風)과 고려의 전통과 풍속을 유지하려는 국풍(國風) 사조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였다.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사상도 큰 충돌 없이 공존하였다.
현종(재위: 10091031) 대를 거쳐 문종(재위: 10461083) 대에 고려적인 지배질서가 완성되었다. 숙종(재위: 10951105)은 송나라 신법을 수용하여 화폐 주조와 유통, 남경천도, 여진정벌 등 부국강병책을 시도하였다. 예종(재위: 11051122)은 즉위 후 주민들의 유망(流亡)이 심해지고 2차 여진정벌이 실패하자, 부왕 숙종의 신법정책을 포기하고 송나라와 관계를 개선하여 유교 등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인종(재위: 1122~1146)은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어 대외관계를 안정시켰지만, 이자겸(李資謙)의 난(1126년)과 묘청(妙淸)의 난(1135년)으로 왕실과 왕권의 위상과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거기에다 민의 유망과 동요로 인해 사회 전반에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위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의종(재위: 11461170)은 끝내 무신 권력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1173년). 무신정변 이후 100년 간 무신정권 시대(11701270년)가 전개되었다. 이 기간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이, 임연 등 무신 권력자들은 인사 · 경제 ·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무신들에게 임명된 5명의 국왕(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1231년(고종 18)에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였다. 무신정권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몽항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258년(고종 45)에 항전을 주도한 최씨 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최의가 피살되어 최씨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듬해인 1259년(고종 46)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강화(講和)를 맺었다. 1270년(원종 11)에 개경 환도와 이에 반발한 삼별초 항쟁이 1273년(원종 14)에 진압되면서 무신정권은 끝이 났다.
몽골과 강화를 주도한 세력은 국왕과 문신 관료집단이었다. 당시 세자인 원종(재위: 12591274)은 강화를 하기 위해 직접 쿠빌라이〔뒤에 원 세조〕와 만나 원나라에 복속하는 대신 고려의 고유한 제도와 풍속은 유지하는 약속을 받아내어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충렬왕(재위: 12741308)은 원나라 황실의 부마가 되었으며, 원나라 요청에 따라 두 차례 일본정벌에 고려 군사를 동원하였다. 고려는 약 80년 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고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즉위하였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였다.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원나라가 쇠퇴할 조짐을 보이자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원나라가 지배한 동북 지역을 회복하였다. 공민왕은 성균관을 재건하여 성리학을 연구, 토론하게 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익히고 관료로 진출한 사대부들은 점차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388년(우왕14)에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등 무장세력은 요동정벌을 주도한 우왕(재위: 13741388)과 최영을 제거하였다. 이들은 사대부 세력과 결합하여 사전(私田)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개혁에 반대한 창왕(재위: 13881389)과 이색, 이림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1392년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한반도에서 약 500년간 존속한 왕조이다. 신라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한국사에서 고려왕조 건국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고려는 신라의 지배층을 전면적으로 교체하고 옛 삼국의 인적 · 문화적 자원을 통합하여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신라의 경우 기존 지배층인 진골귀족이 통일 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역은 고려 후기 지배층인 무신 집단과 사대부 세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통일신라와 같이 지배층의 교체가 없는 수평적 권력 교체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고려는 신라 말 지방에서 새롭게 대두한 촌주(村主) · 성주(城主) · 장군(將軍)으로 불리는 호족세력이 진골 중심의 골품체제를 무너뜨린, 지배층의 전면 교체라는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건국되었다. 고려는 후삼국 통합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지역과 계층의 통합을 이루어 진정한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둘째, 옛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통합하고 포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 불과하였다. 고려 태조(재위: 918~943)는 「 훈요십조」에서 불교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간신과 승려가 결탁하여 사원을 빼앗거나 함부로 사원을 짓는 등 장차 불교가 낳을 수 있는 폐단을 경계하였다. 나아가 풍수지리와 제천행사를 강조하고,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제도의 확립을 당부하였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국왕, 왕실 및 관청이 주관한 각종 의례와 행사에 불교는 물론 도교 · 유교 · 제천 의식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함께 시행되었다. 이같이 고려는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흡수하여 서로 공존하는 통합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고려 건국의 또 다른 의미는 여기에 있다.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는 대내적으로 중앙과 지방이 타협하고 공존하는 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추진하였고, 주변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러한 정책으로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여 새로운 도약을 꾀하였다.
먼저, 고려는 반세기 동안의 통합전쟁으로 빚어진 지역과 계층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호족세력을 포용하려는 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이 본관제(本貫制)이다. 태조 때부터 각지의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지방사회에서 호족세력의 지배권과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율성을 보장하려 하였다.
각각의 본관을 다시 정치 ‧ 경제 ‧ 군사 ‧ 교통의 중요성에 따라 경 ‧ 목 ‧ 도호부 등의 주현으로 편제하고, 주변의 영세한 군현을 속현으로 묶어 주현에 예속시켜 군현영역으로 편제하였다. 또한, 국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고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향 ‧ 소 ‧ 부곡 등의 부곡영역으로 편제하였다. 중앙정부는 이렇게 포섭한 호족들의 협조를 얻어 영역 내 주민들의 유망을 방지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개간하여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는 한편, 조세와 역역(力役)을 안정적으로 수취하게 하여 왕조의 재정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같이 고려 정부는 건국 후 중앙과 지방의 안정, 나아가 왕조의 안정을 위하여 호족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타협하고 공존하는 통합정책을 펼쳤다. 이는 중앙이 권력을 독식하지 않고 지방세력과 공존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개방정책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고려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동아시아 여러 왕조와 활발히 문물을 교류하여 외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한 것은 물론 외국 출신의 문사(文士)와 기술자를 받아들여 왕조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과거제와 관료제 등 중국의 선진적인 제도를 수용하여 집권체제의 기초를 다졌으며, 필요한 인재는 국적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관료로 등용하였다.
송나라와 국교가 단절된 1022년(현종 13)에서 1071년(문종 25)까지의 50년 동안에도 송나라의 상인 · 승려 · 학자 · 기술자 등을 통한 민간 차원의 교류로 불경과 유교 경전, 인쇄기술과 종이 제조기술, 도자기 제작 등 각종 문화와 사상, 제조기술의 수용과 전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주변국의 선진문화와 문명을 수용하면서 보편적 문화(문화 보편성)의 실체를 인식하는 한편으로 고려문화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국의 선진문물인 화풍(華風)과 고려 전통문화인 토풍(土風)의 조화와 균형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 되면서, 고려인들은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광종은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양인을 원래의 신분으로 회복시켰으며, 노비 소유주인 호족과 공신들의 경제기반을 약화시켰다. 이어서 958년(광종 9)에 처음으로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제로 호족과 공신 세력을 대신하여 실력과 능력을 가진 인재가 새로운 지배층으로 충원되었다. 성종(재위: 981~997)은 중국에서 유교를 받아들여 교육기관 국자감을 세우고 종묘와 사직을 정하였다. 또한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3성 6부의 정치제도와 2군 6위의 군사제도를 도입하여 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현종(재위: 10091031)은 태조와 성종 때 시행된 지방제도를 종합하고 1018년(현종 9) 전국에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을 설치하여 고려의 지방제도를 완성하였다. 문종(재위: 10461083)은 각 관청별 관직의 관품과 정원 등을 제정하여 관료제도를 완성하였다. 또한 양반전시과와 양반공음(兩班功蔭)전시법, 녹봉제도를 완비하여 관리와 공신들의 경제기반을 마련하였다. 전품(田品)과 양전(量田) 규정, 재면법(災免法) 등을 제정하고, 공정한 수취제도를 완비하여 국가재정이 풍족하게 되고 민생이 안정되어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문종 대에 이르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과거제도가 실시된 광종 대 이후 과거시험을 거쳐 진출한 관료집단은 국왕을 보좌하며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점차 정치운영의 주체가 되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가운데 특정 가문 출신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학문적 능력이나 과거를 통해 지배층으로 많이 진출하였다. 대표적으로 경주 김씨와 해주 최씨 가문이 고위 관료를 많이 배출하여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1052년(문종 6)에 문종은 인주(仁州) 이씨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후 인주 이씨는 인종 때까지 7명의 국왕 가운데 5명의 국왕과 혼인관계를 지속하였다. 이로 인해 왕실 외척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왕실 외척 출신과 학문적 능력이나 과거를 통해 진출하여 고위 관료를 여러 대에 걸쳐 배출한 가문 출신의 정치세력은 관료집단의 정상에서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고려의 전성기에 정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세력을 문벌(門閥)귀족이라 한다.
문종 때 정치세력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문벌귀족의 핵심은 왕실의 외척세력이다. 국왕과 왕실은 왕권과 왕실을 보호할 든든한 후원자를 만들기 위하여 유력한 가문과 혼인할 필요가 있었다. 유력가문 또한 왕실과의 혼인이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왕실과 유력가문이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왕실 외척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 외척 이자겸이 제거된 후에도 고려왕실은 다시 정안(定安: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 임씨 가문을 새로운 왕실 외척으로 받아들였다. 이같이 외척을 포함한 문벌귀족 세력은 왕권과 왕실을 위협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도 하였다. 문종 이후 국왕과 문벌귀족(왕실 외척 포함)으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의 두 정치세력은 서로 대립과 견제 혹은 조화와 균형을 통해 정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고려 전성기의 정치를 주도하였다.
숙종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조카 헌종(재위: 1094~1095)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숙종은 문종 이후 보수화된 왕실 외척 등 문벌귀족 중심의 정치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시행하였다. 신법(新法)이라 불린 이 정책은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과감한 재정개혁을 통해 국가의 부를 확대하려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을 모델로 삼았다. 윤관(尹瓘, ?1111년)과 숙종의 동생이자 승려인 의천(義天, 10551101년)이 숙종을 보좌한 측근이었다.
숙종의 주요한 정책은 수도 천도, 화폐 유통, 여진 정벌이다. 먼저, 1096년(숙종 1)에 풍수지리에 밝은 김위제(金謂磾)가 숙종에게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도읍할 것을 건의하자, 숙종은 1099년(숙종 4) 윤관 등을 남경에 파견하여 그곳에 궁궐을 짓고 천도하려 하였다. 이 시도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숙종은 천도를 통해 개경에 뿌리를 내린 문벌귀족의 정치적 ·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다음해인 1097년(숙종 2)에 동생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 주조와 유통책을 실시하였다.
화폐 유통을 위하여 개경과 서경에 상점을 설치하고 상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교통과 상거래의 요충지에서 상세(商稅)를 거두어 국가의 재원으로 삼았다.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유통과정에서 권세가나 대상인들이 주민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졌다. 그러자 여진족은 주변의 고려와 거란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여진족의 강성함에 위기의식을 느낀 숙종은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1104년(숙종 9)에 1차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여진의 완강한 저항으로 정벌에 실패했지만, 이를 계기로 숙종은 새로운 군사조직인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였다. 과거 응시자를 제외한 20세 이상의 남자와 유민(流民), 승려를 별무반에 편성시켰다. 별무반 조직은 군역자원은 물론 지방사회를 국가가 직접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종 사후 예종(재위: 1105~1122)은 부왕의 뜻을 이어 1107년(예종 2)에 2차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으며, 여진을 정벌한 후 9개 성을 설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고려는 곧바로 여진족의 반격을 받아 1109년(예종 4)에 9개 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면서 여진족과 화평조약을 체결하였다. 두 차례의 여진정벌은 실패하였지만 정벌을 계기로 정국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신흥하는 여진족을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115년(예종 10)에 금나라가 건국되고 거란이 쇠퇴하는 등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격하게 변동하기 시작하였다. 금나라는 1125년에 거란을, 1127년에 북송을 각각 멸망시켰다. 금나라의 강성함에 위기의식을 느낀 예종은 송나라와 관계를 개선하여 금나라의 위협에 대처하려 하였다.
송나라 역시 금나라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려와 연합할 필요가 있었다. 송나라 휘종(徽宗) 때 고려 사신의 격을 국신사(國信使)로 높여 서하(西夏)보다 높은 예우를 하였으며, 거란의 사신과 같이 추밀원이 고려 사신을 영접하였다. 또한 사신을 맡은 관원인 인반(引伴) 압반관(押伴官)을 고쳐서 접송(接送) 관반(館伴)으로 이름을 높여 불렀다.
인종(재위: 1122~1146) 역시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금나라와 화친정책을 맺어 금나라의 위협을 제거하여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예종과 인종 때 송나라와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두 나라 사이 문물교류의 상징적인 모습의 하나는 궁중음악 수용이다. 고려는 1116년(예종 11)에 송나라 궁중음악인 대성악(大晟樂)을 수용하였다. 우리나라 궁중음악은 이때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1110년에 김단(金端), 견유저(甄惟底) 등 5명의 학생을 송나라 국자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다. 송나라 휘종은 이들을 직접 시험을 보게 하고 관직을 내려 주었다.
고려는 의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하여 송나라에 의사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1118년(예종 13)에 송나라 의사 7명이 고려에 파견되었다. 송나라 의사는 그 이전 문종과 숙종 때에도 파견되었다. 한편 송나라로부터 수용된 문물을 고려에 적용시키려는 목적에서 1113(예종 8)에 예의상정소(禮儀祥定所)를 설치하여 의복제도 및 각종 공문의 서식 등을 정비하게 하였다. 예종 대와 인종 대는 사회와 문화의 측면에서 고려왕조의 또 다른 전성기였다.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려 하였던 예종은 2차 여진정벌에 실패하면서, 관료집단의 완강한 반대로 신법 정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예종은 이자겸의 딸 인주 이씨를 왕비로 맞아 왕권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인종 또한 이자겸의 두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부자(父子) 사이인 예종과 인종의 장인이 된 이자겸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1126년(인종 4) 2월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았다. 반격에 성공한 이자겸이 궁궐을 불태우고 왕권을 유린하였던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그러나 인종은 같은 해 5월 마침내 이자겸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하였다. 문종 이후 약 80년 간 왕실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인주 이씨 가문은 이자겸의 난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왕권과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제2의 수도인 서경을 자주 방문하였다.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새로 짓고 묘청, 정지상 등 서경세력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려 하였다. 묘청 등 서경세력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천도하고 금나라를 정복하여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문벌귀족과 관료집단의 반대로 서경 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한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 13)에 묘청의 난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진압되었다. 이같이 12세기 전반 인종 때 일어난 두 정변은 개경의 문벌귀족 정치에 대한 반발이자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고려 전성기의 정치와 사회가 동요하고 변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세기 전반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으로 빚어진 지배층의 대립과 갈등은 이미 1170년(의종 24)의 무신정변을 잉태하고 있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김부식 등의 문벌귀족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의 추대로 즉위한 의종은 내시, 환관과 술사, 친위 군사들을 측근세력으로 삼아 도리어 문벌귀족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무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정변의 주역인 정중부, 이의방 등도 의종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였다. 이후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로 이어지는 무신 권력자가 정치 · 경제 · 군사권을 장악한 무신정권(1170~1270년)이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 국왕과 관료체제 중심의 정치체제가 무신정권기에도 유지되었지만 유명무실하였다.
무신 권력자들은 대신에 중방(重房) · 정방(政房) · 도방(都房) · 교정도감(敎定都監) 같은 권력기구를 세워 이를 통해 인사권과 군사권 등을 장악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또한 무신 권력자의 사적 무력기반인 사병(私兵)이 등장하고 전시과 제도가 붕괴되었으며 농장 같은 대토지 소유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 ‧ 경제 ‧ 군사 등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사적(私的) 영역이 확장되고 고려 전기 왕정체제 중심의 공적(公的) 영역이 크게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금나라가 쇠망할 기미를 보이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1216년(고종 3) 8월에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거란유종(契丹遺種)〕이 몽골군에 쫓겨 고려를 침입하였다.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과 합진(哈眞)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9년(고종 6) 2월에 거란족을 섬멸한 뒤 두 나라는 형제맹약을 맺었다. 맹약 이후 몽골은 매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12)에 공물을 요구하러 온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환하던 중 국경 근처에서 피살된 것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끝이 났다. 몽골은 1231년(고종 18) 7월에 살리타(撒禮塔)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한 뒤 1259년까지 약 30년 동안 2차(1232년), 3차(12351239년), 4차(12471248년), 5차(12531254년), 6차(12541259년 4월) 등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당시 무신 권력자 최이(崔怡)는 1232년 6월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이곳에서 1258년까지 약 30년간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여 항쟁하였다. 1258년(고종 45)에 최씨 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최의(崔竩)가 제거되고, 국왕과 문신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王政)이 복고되었다. 1259년(고종 46), 무신정권은 개경 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었다. 1270년(원종 11)에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대몽항쟁을 주도한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12세기 전반 시작된 하층민의 유망은 무신정권 이후에는 봉기와 항쟁으로 발전하여 무신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층민의 봉기는 1174년(명종 4)에 서경 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이 봉기는 초기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약 4~5년간 서북 지역 일대에서 조위총의 남은 무리들이 계속 봉기를 일으켜 서북 일대는 한때 고려왕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다.
서북 지역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점차 중부와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176년(명종 6)에 중부 지역인 공주의 명학소(鳴鶴所: 지금의 대전시 탄방동 일대)에 살던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장악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1190년대에는 남부 지역의 경주 일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1193년 운문사(雲門寺: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를 거점으로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에 가담해서 죽은 자가 7,000명일 정도로 당시 봉기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후 약 10년간 옛 신라의 수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삼척 · 강릉 일대의 농민군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신라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1204년(신종 7)에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1217년(고종 4)에 서경과 1235년(고종 22)에 전라도 담양에서 각각 고구려와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무신정권 초기에 일어난 하층민 봉기가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삼국 부흥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같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삼국의 부흥이라는 신국가 건설운동을 지향한 급진적인 성격은 무신정권기 하층민 봉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한편 노비와 속현 · 부곡지역의 하층민이 봉기를 주도하였다는 사실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1258년(고종 45)에 최씨 정권이 붕괴하고 국왕 중심의 왕정은 회복되었지만, 왕정복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준 · 임연 등 무신 권력자들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2월에 임연이 사망하고, 권력을 계승한 아들 임유무도 같은 해 5월에 피살되었다. 이를 계기로 원종은 몽골에서 돌아와 개경 환도를 선언하였다. 이에 삼별초가 반대하자, 원종은 삼별초의 군적(軍籍)을 압수하고 삼별초군을 해산시켰다.
자신들의 명부가 몽골에 보고될까 두려워하던 삼별초는 1270년 6월에 삼별초 항쟁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8월에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성곽과 궁궐을 쌓고 항전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1271년 5월에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점령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1273년(원종 14) 4월에 진압될 때까지 몽골과 고려 정부에 저항하였다. 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삼별초 항쟁은 고려 정부와 몽골 지배층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삼별초 항쟁은 처음에 대몽항쟁을 명분으로 민심을 결집하고, 몽골과 결탁하여 삼별초군을 해산시키고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국왕과 지배층에 반기를 든 반몽골 · 반정부 운동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민들이 삼별초군에게 호응하였다. 삼별초 항쟁은 외세에 쉽게 굴하지 않는 고려인의 자존심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또한, 국왕과 지배층에 반발하여 일으킨 일종의 정치운동의 성격을 지녔지만, 민의 호응을 받아 장차 민의 저항과 봉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한편으로 삼별초는 무신 권력자들의 사병집단으로서 무신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무신정권 수립 후 무신 권력자들은 정치 ·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여 왕정체제를 무력화시켰고,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한 뒤로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다. 그런데 몽골과의 강화와 개경 환도를 계기로 삼별초 군사들은 지위가 불안해지자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하여 항쟁을 일으킨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삼별초 항쟁은 무신정권이 낳은 부정적인 유산이자, 반정부적인 정치운동이기도 하였다.
몽골이 삼별초군을 신속하게 진압한 것은 삼별초 항쟁이 장차 일본-삼별초-송나라로 이어지는 반몽골 국제 전선으로 확장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삼별초 항쟁은 이같이 동아시아를 제패하여 세계제국을 구축하려고 한 몽골의 전략에 일정한 타격을 입혔을 뿐 아니라, 몽골이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나서도록 촉발한 측면이 있다. 이 점에서 삼별초 항쟁은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삼별초 항쟁은 어느 한 측면을 내세워 그 의미를 일방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 이후부터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단행한 1356년(공민왕 5)까지의 약 80년간, 혹은 원나라가 사실상 멸망한 1368년(공민왕 17)까지를 원간섭기라 한다. 이 기간 중에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세계제국 원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원나라 수도 베이징은 동, 서방세계의 문화와 문물이 밀려드는 국제도시였다. 고려는 원나라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접촉하였으며, 한반도가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두드러진 변화는 두 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인적 교류였다. 인적 교류의 통로와 계기는 다양하였다. 1241년(고종 28)에 종실 왕준(王綧, 1223~1283)과 의관 자제 10명이 숙위로 처음 원나라에 파견된 이후 고려의 지배층과 자제들이 원나라 궁정에 숙위로 많이 진출하였다. 또한 원나라가 외국인에게 시행한 과거시험인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원나라의 관리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가장 많이 진출한 사람들은 대몽항쟁과 삼별초 항쟁 과정에서 스스로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1254년(고종 41)에 몽골에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이 약 20만 68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몽골군사의 노비가 되거나 지금의 만주 심양(瀋陽) 등지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원나라는 심양의 고려인 집단 거주지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를 설치하고 심양왕을 임명하여 이들을 특별히 통치하였다.
하층민 가운데 몽골어에 익숙한 역관(譯官), 일본 원정 등에서 공을 세운 군인, 원나라에 있는 고려 국왕과 왕족을 보필한 시종 신료, 원나라에 진출하여 원 황실의 환관이나 공주가 되는 등 고위직에 오른 고려인도 적지 않았다. 불안한 국내 정치상황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원나라로 도망간 유민도 많았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진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1271년(원종 12)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하였다. 몽골군 5,000명과 몽골에 거주한 고려 출신 군인 2,000명이 황주, 봉주, 금주에 주둔하였다. 1270년 평양지역에 동녕부(東寧府)가, 1273년(원종 14) 제주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가 설치되어 많은 원나라 사람이 고려에 진출하였다. 원나라는 1280년(충렬왕 6)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였는데, 1299년(충렬왕 25)에 정동행성에 관리를 두고 행성의 기능을 강화하여 고려 내정을 통제하고 간섭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나라의 관리와 그들의 가족이 고려에 많이 들어왔다. 이 외에도 고려왕과 혼인한 원나라 출신 공주를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고려에 귀화한 사람도 많았다. 원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아 강향사(降香使)를 비롯하여 사경(寫經) 등 각종 불사(佛事) 명목으로 사신과 승려가 고려에 파견되었다. 이러한 여러 경로를 통해 변발, 고고(姑姑), 수라 등 원나라 풍습과 생활 방식이 고려사회에 유행하였으며, 고려의 풍습이 원나라에 전파되기도 하였다.
한편 정치와 경제에서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충선왕은 고려의 전통과 관습에 원제국 정부의 정책과 몽골문화의 요소를 활용하여 개혁정치를 시행하려 노력하였다. 구체적으로 측근과 황제의 결탁을 금지하고 관원을 줄이는 원제국의 정치개혁을 자신의 개혁정치에 접목시켜 정방을 혁파하고 사림원 등에 그 기능을 대신하게 하였다. 재상 숫자를 줄이고 여러 관청을 통폐합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소금 전매제와 토지와 호구의 변동을 고려하여 새로운 세법〔갑인주안(甲寅柱案)〕을 마련하거나 지방과 군사제도 개혁에도 원제국의 정책을 고려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려 하였다. 한편 경제 측면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서역의 회회(回回) 상인들과의 교류와 교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일부 고려 국왕은 회회인을 정부의 관리로 임용하거나 이들을 통한 교역으로 재정수입을 확대하려 하였다. 고려산 모시와 직물, 고려자기는 당시 주요한 교역품목이었다. 모시와 직물에 원나라의 직금(織金)기술을 적용하여 문양을 넣은 제품이 서역과 원제국으로 수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에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틈을 타 본격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기철(奇轍) 일파 등 부원세력을 처단하고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지배한 동북지역(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을 회복하는 등 반원개혁을 단행하였다.
한편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지만, 토지제도 등 내정을 개혁하는 데 실패하였다. 공민왕은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다시 세워 성리학 연구와 교육의 중심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색을 성균관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젊은 학자들을 이곳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 세력이 결집하여 고려 말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점은 개혁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고려 말 정국은 1388년(우왕 14) 6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이성계를 비롯한 무장세력은 요동 정벌을 주도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공민왕 개혁을 계기로 결집한 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사전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권세가들이 토지를 강탈하여도 경작지를 잃은 하층 농민, 과전을 제때 받지 못한 하급 관료층과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많았다.
개혁파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개혁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억누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1389년(창왕 1) 11월에 폐위된 우왕은 최영의 조카인 김저와 최영의 족당인 정득후를 만나 이성계를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사실이 누설되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우왕은 강릉으로 이배(移配)되는 이른바 '우왕복위사건'이 일어났다.
개혁파는 이 사건을 명분으로 사전 개혁에 반대한 세력을 처벌하였다. 1391년(창왕 1) 9월에 명나라 예부는 황제의 명령이 담긴 문서인 예부 자문(咨文)을 고려에 보냈다.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개혁파의 주장에 따르면, 황제는 우왕과 창왕은 신씨(신돈)의 자식이라 언급한 사실이 이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9월에 고려에 전달된 예부 자문 내용을 개혁파는 3개월이 지난 12월에서야 근거로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의 혈통 문제를 제기하였다. 곧 가짜 왕씨인 창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씨를 세우자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제기한 것이다.
개혁파는 이 주장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하였다. 폐위된 창왕은 곧바로 우왕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어서 공양왕(재위: 1389~1392)이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왕과 창왕을 지지하고 사전 개혁에 반대한 세력이 많이 제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5월에 고려인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고 그에 반대한 이색, 이림, 권근 등을 살해하거나 유배하였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무고한 이른바 윤이 ‧ 이초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희생된 사람은 대부분 사전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전 개혁을 비롯하여 개혁파의 정책에 반대한 세력은 거의 제거되었다. 이듬해인 1391년(공양왕 3) 5월에 과전법이 공포되어 관료들에게 과전이 지급되면서 고려 말 개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와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개혁은 당시 하층민, 관료와 군인들의 지지를 받은 우리 역사에서 성공한 개혁 가운데 하나이다. 그 결과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
건국 직후에는 궁예의 태봉 제도를 계승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광평성(廣評省), 집행기관인 내봉성(內奉省), 국왕을 보좌하고 조칙을 작성한 내의성(內議省) 등과 같은 관부를 설치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당나라 3성(省) 6부(部)제를 수용하였다. 문종 때에는 3성 6부를 비롯한 중앙 관제의 관직 · 관원의 정원 · 관품 등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진 중서문하성이 최고 정무기관이 되어 상서성과 함께 2성제로 운영되었다. 최근에는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이 각각 독자의 기구로 운영되었다는 3성제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이에 따르면, 고려 초의 광평성, 내의성, 내봉성은 각각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으로 정비되었으며, 중서문하성은 3성의 재신들이 모여 국정을 의논한 정사당(政事堂)으로 이해하였다.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이자 수상이다.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정책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2품 이상의 재신(宰臣: 宰相)이 소속되어 있어 중서문하성은 재부(宰府)라고 불렸다. 중서문하성의 관원은 2품 이상의 재신과 3품 이하 6품 이상의 낭사(郎舍)로 구성되었다. 낭사는 국왕의 잘못을 간언하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동의권을 가졌다.
중서문하성은 원나라 간섭기에 상서도성과 합쳐져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다. 첨의부는 이후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문하부(門下府)로 명칭이 바뀌었다.
상서성은 6부를 관장하면서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사항을 이부(吏部) · 병부(兵部) · 호부 · 형부(刑部) · 예부(禮部) · 공부(工部) 등 6부를 통해 집행하였다. 6부의 장관은 정3품의 상서(尙書)이지만, 재신이 6부의 판사를 겸직하였다. 원간섭기에 6부는 전리사(典理司) · 군부사(軍簿司) · 판도사(版圖司) · 전법사(典法司)의 4사로 축소되었다.
중추원은 왕명 출납과 숙위, 중요한 군사문제 등을 담당하였는데, 2품 이상의 관원인 추신(樞臣)이 소속되어 있어 추부(樞府)라 불렸다. 중서문하성의 재부와 함께 재추(宰樞) 혹은 양부(兩府)라 불렸을 정도로 중요한 권력기구였다. 중추원의 관원도 2품 이상의 추신과 왕명을 출납하는 3품의 승선(承宣)으로 구성되었다. 중추원은 송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설치한 기구였으며, 원간섭기에 밀직사(密直司)로 바뀌었다.
삼사(三司)는 조세 징수 · 운반 · 저장, 세입과 세출의 회계업무, 예산의 수립과 집행을 담당한 기구였다. 송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설치되었다.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양부 재추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합좌기구가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이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 · 군사 관계를 관장하였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 문제를 결정하였다. 모두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였다. 도병마사는 원간섭기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명칭이 바뀌었다.
또한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어사대(御史臺)가 있었다.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불렸으며, 언론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중앙 정치제도는 이같이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3성 6부, 송나라 제도를 수용한 중추원과 삼사, 고려 자체의 필요에 의해 설치된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으로 구성되었다.
신라의 지방제도를 계승한 고려는 태조 때부터 지배할 수 있는 지역에 군현을 신설하고 내속(來屬) 조치를 하거나 군현 명칭을 개정하는 등 지방사회를 장악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995년(성종 14)에 중국 제도를 도입하여10도제(道制)를 시행하고 12주에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12주 절도사를 혁파하고 5도호(都護) 75도 안무사(安撫使) 체제로 바꾸었다. 1018년(현종 9)에 4도호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설치하면서 고려 지방제도가 완성되었다. 이후 5도 양계가 정해졌다.
전국을 경기(京畿), 양계(兩界: 동계와 북계), 5도(양광 · 경상 · 전라 · 교주 · 서해도) 등 크게 3개의 행정조직으로 나누었다. 그 아래 모두 약 520개의 군현이 소속되었다. 고려는 수령을 파견하여 중앙정부의 명령을 군현에 전달하고 조세와 노동력을 수취하였다. 약 520개 군현 가운데 수령이 파견된 주현(主縣)이 130개이며, 나머지 390개는 수령이 없는 속현(屬縣)이었다. 속현은 주현에 파견된 수령의 행정 지배를 받았다. 또한 향(鄕) · 부곡(部曲) · 소(所) · 처(處) · 장(莊) 등 약 9백 개의 특수 행정구역이 있었다.
군현지역은 국가에 조(租) · 용(庸) · 조(調)의 3세를 부담하는 일반 농민층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부곡지역의 주민은 군현의 일반 농민층과 다르게 조 · 용 · 조의 3세 외에 국가 토지를 경작하거나 각종 수공업 및 농수산 제품을 생산하는 특정의 역을 추가적으로 부담하였다. 이같이 주현을 중심으로 여기에 소속된 여러 개의 속현과 부곡 집단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군현 구성과 차별적인 역 부과는 고려 지방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고려 정부는 주현과 속현, 부곡 등으로 구성된 광역(廣域)의 행정 단위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행정 책임자인 수령과 함께 수령을 보좌하는 속관(屬官)을 파견하였다. 속관으로는 판관(判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장서기(掌書記), 법조(法曹), 문사(文師), 의사(醫師) 등이 있었다. 속관은 경(京) 단위에는 모두 파견되었으나, 나머지 주현은 행정 단위의 격에 따라 일부만 파견되었다.
또한 경 · 목 · 도호부 등 규모가 크고 중요한 상급 주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지정하여 주변의 여러 주현을 행정적으로 지배하였다. 계수관은 도제(道制)가 도입되기 이전 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중간기구였다. 촌락은 군현의 기초 단위이며, 수령의 지시를 받아 촌락의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촌장(村長)과 촌전(村典)이 있었다.
한편 지방세력을 통제하고 지방 지배를 보완하기 위해 사심관(事審官)과 기인(其人)제도를 시행하였다. 태조 때부터 중앙 관인과 공신들에게 출신 지역의 행정을 관장하고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사심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지방세력(향리)의 자제를 기인으로 삼아 중앙으로 불러와 머물게 하여 지방세력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무신정권 이후 과도한 조세 수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도망하여 유명무실한 군현이 많아져 국가재정이 크게 줄어들었다. 중앙정부는 그 원인을 군현 숫자는 많으나 도망으로 주민이 감소한 ‘관다민소(官多民小)’ 현상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14세기 이후 군현 개편이 본격화되었다. 주민의 이탈이 심했던 속현과 부곡지역을 축소하여 주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는 군현 병합정책을 시행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시행된 군현 병합정책으로 390여 개의 속현은 『여지승람』이 편찬된 16세기 전반에는 60여 개로 축소되었다. 900여 개의 부곡집단은 15세기 전반 약 100개로 축소되었으며, 16세기 전반에 부곡은 거의 소멸되었다. 고려 말에 시행된 군현 개편은 고려의 지방제도가 크게 변동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제도는 군사를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는 조직이자 왕조의 안정과 질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제도이다. 건국 직후 군사조직은 태조 왕건이 지휘하는 군사와 호족세력의 군사(사병)로 구성되었으며, 이 조직으로 후삼국 통합전쟁을 수행하였다. 후삼국 통합 후 두 계통의 군사조직은 고려의 공식적인 군사제도로 편제되었다.
구체적으로 중앙에는 2군(軍) 6위(衛), 지방의 5도 지역에 주현군(州縣軍)과 양계 지역에 주진군(州鎭軍)이 각각 편제되어 있었다.
경군인 2군 6위는 각각 3영(領)과 42영 등 모두 45영으로 편성되었다. 1영은 1,000명으로, 중앙군의 전체 병력숫자는 4만 5000명이다. 현종 때 설치된 2군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 구성되었는데, 국왕의 의장과 호위를 담당하였다.
성종 때 설치된 6위는 좌우위(左右衛) · 신호위(神虎衛) · 흥위위(興威衛) · 금오위(金吾衛) · 천우위(千牛衛) · 감문위(監門衛)이다. 좌우위 · 신호위 · 흥위위는 개경과 국경을 방어하는 경군의 주력부대이다. 금오위는 개경의 치안과 경찰을, 천우위는 국왕의 신변 보호와 의장을, 감문위는 궁성과 도성의 문을 지키는 일을 각각 맡았다. 6위의 각 부대는 보승(保勝) · 정용(精勇) · 역령(役領) · 상령(常領) · 해령(海領)의 병과로 구분되었다.
보승과 정용은 각각 보병과 기병이며, 나머지 병과는 특수 임무를 맡은 부대이다. 2군 6위의 각 부대는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과 부지휘관인 대장군(大將軍: 종3품), 그 아래 장군(將軍: 정4품), 중랑장(中郎將: 정5품), 낭장(郎將: 정6품), 별장(別將: 정7품), 산원(散員: 정8품), 교위(校尉: 정9품), 대정(隊正: 종9품) 등이 있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인 상장군과 대장군은 합좌기구인 중방(重房)에서 군사업무를 논의하고, 서열이 가장 높은 응양군의 상장군이 의장인 반주(班主)가 되었다.
5도 지역의 주현군은 정용과 보승, 일품군(一品軍)으로 모두 군역을 지는 일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주현군은 지역의 치안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교대로 앙계 지역에 나가 국경을 지켰다. 일품군은 주로 공역(工役)에 동원된 노동부대였다. 국경지대인 양계에 주둔한 주진군은 초군(抄軍) · 좌군(左軍) · 우군(右軍)을 중심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병과로 구성되었고, 예비부대인 주현군과 다르게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을 방어하는 상비군이었다.
무신정권이 등장하면서 2군 6위 조직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무신 권력자들의 사병(私兵)이 실제 공병(公兵)의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군사제도는 원나라에 철저하게 장악되었다. 원나라 군사조직인 만호부(萬戶府)가 조직되어 개경에 순군만호부, 지방에 진변만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만호부 아래 천호소 및 백호소가 있어, 만호의 지휘를 받았다. 만호는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다. 공민왕은 반원개혁을 실시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진변만호부를 폐지하고 도순문사(都巡撫使)가 각도의 군사 책임자로 하는 진수군(鎭守軍)을 설치하였다. 양계에는 새로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각 지역 토호나 유력가들을 천호나 백호에 임명하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둔전군 성격의 전투부대인 익군(翼軍)을 설치하였다.
법률제도는 성종 때 3성 6부 제도가 수용되면서, 당나라 법률 제도인 당률(唐律)도 함께 수용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당률의 오형(五刑)〔태(笞) · 장(杖) · 도(徒) · 유(流) · 사(死)〕 제도를 수용하였다.
태형과 장형은 몸에 매질을 하는 신체형(身體刑)이다. 태형은 죄질에 따라 10대에서 50대까지 매질을 하며, 장형은 이보다 무겁게 죄질에 따라 60대에서 100대까지 매질을 하였다.
도형〔징역형〕과 유형〔유배형〕는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자유형이다. 도형은 죄질에 따라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간 감옥에 구금되어 노역을 지게 하였다. 유형은 추방형으로 죄질에 따라 각각 2,000리 · 2,500리 · 3,000리로 유배시켰다.
사(死)는 죄질에 따라 목을 베는 참형(斬刑)과 목을 매다는 교형(絞刑)의 2종류가 있는데, 모두 생명을 빼앗는 생명형이다.
또한 속형(贖刑)〔수속법(收贖法)〕과 관당법(官當法)도 당률을 수용한 것이다. 속형은 죄질에 따라 일정한 재산을 관청에 내고 오형을 면제받는 제도인데, 고려에서는 속동(贖銅)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태형 10대는 속동 1근, 도형 1년은 속동 20근, 유형 2,000리는 속동 80근을 내고 각각 형을 감면받았다. 관당법(官當法)은 관료가 법을 어기고 장물을 취득한 범죄에 대하여 죄질에 따라 관품을 낮추거나 재물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제받는 법이다.
한편 현종 때 군사제도 정비와 군인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송나라 법률 제도인 절장법(折杖法)이 수용되었다. 가혹한 형벌을 경감하기 위해 제정된 절장법은 신체형〔태형과 장형〕과 자유형〔도형과 유형〕의 경우 장형(杖刑)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예를 들면 태형 50대는 절장 10대, 도형 1년은 절장 13대, 유형 2천리는 절장 18대와 배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원간섭기에는 원나라의 법제를 수용하였다. 1323년(충숙왕 10)에 제정된 『대원통제(大元通制)』와 1346년(충목왕 2)에 제정된 『지정조격(至正條格)』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민왕 이후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하여, 원나라 법전을 중국어로 편찬한 『의형이람(議刑易覽)』과 함께 고려의 현실에 맞춰 법을 적용하였다. 또한 법 행정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원나라 및 명나라와 고려의 법령을 참작해서 『신정률(新定律)』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전통적인 형벌도 있었다. 귀향형(歸鄕刑)은 관리, 관리의 가족, 승려, 군인 등이 죄를 지었을 때 본관으로 돌려보내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빼앗는 형벌이다. 충상호형(充常戶刑)은 귀향형보다 더 높은 형벌로, 지배층을 서인으로 만들어 관리가 될 수 없도록 하는 형벌이다. 고려는 독자의 법률 체계인 고려율(高麗律)도 있었는데, 『 고려사』 형법지에 구체적인 연기(年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채 수록된 71조가 바로 그것이다.
고려율은 대체로 성종 때 관제, 복식과 공문 제도가 제정될 때 처음 제정되기 시작하여 이후 여러 제도를 보완, 재편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명령인 판(判) · 제(制) · 교(敎) 등으로 꾸준하게 보완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당률은 모두 502조나 되지만 고려율은 71조에 불과하다. 따라서 형법지에 수록된 고려율은 특정 시기에 수집된 법령일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 사회에서 교육은 백성 교화와 풍속 교정은 물론 통치에 필요한 인재 양성에도 필요하였다. 고려 초 유교 정치이념과 과거제 수용으로 교육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교육 및 과거제도는 이같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광종은 958년(광종 9)에 중국 후주(後周) 출신으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수용하여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은 제술업(製術業)과 명경업(明經業)이다. 제술업은 문장에, 명경업은 경전에 밝은 사람을 각각 선발하였다. 군현에서 뽑는 시험인 향공(鄕貢)〔계수관시(界首官試)〕과 국자감에서 치르는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예비시험을 거쳐 예부에서 주관하는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를 치러 합격자가 선발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 향시(鄕試) · 회시(會試) · 전시(殿試)의 3단계로 바뀌었다.
무신을 뽑는 무과는 1390년(공양왕 2)에 처음 실시되었다. 법관 · 의사 · 풍수지리사 등 기술관을 뽑는 시험이 잡업(雜業)이다. 잡업은 과목에 따라 국자감 · 사천대(司天臺) · 태의감(太醫監) 등에서 예비시험을 치른 후 최종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하였다.
이 외에 부모나 조상의 공〔음덕(蔭德)〕으로 관리가 되는 음서(蔭叙)제도가 있었다. 이는 5품 이상과 공신의 자제 및 왕족의 후손에게 관리가 되는 혜택을 주는 제도이다. 음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국왕 즉위나 왕비 책봉 등 특별한 경우에도 시행되었다. 과거 응시자격은 초기에는 향리 이상으로 제한하였지만, 뒤에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7품 이하의 하급 관리들이 응시할 경우 곧바로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응시자는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된 하급 출신 관리들이 많았다. 음서보다 과거 합격이 관리 생활에 더 유리하고 자부심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잡업은 응시자격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아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에 맺어진 좌주(座主), 문생(門生) 관계는 부모와 자식처럼 밀접한 관계였는데, 이를 통해 학문의 계승은 물론 관직의 승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국자감(國子監)은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오늘의 국립대학과 같았다. 건국 초부터 있었는데 992년(성종11)에 국자감으로 명칭을 고쳤다. 이후 국학(國學)과 성균관(成均館)으로 바뀌었다. 국자감 내에는 유학교육을 전담한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 사문학(四門學)과 기술교육을 전담한 율학(律學) · 서학(書學) · 산학(算學)이 있었다.
국자감의 교육 연한은 교육과정에 따라 짧게는 3년, 길게는 9년이었다. 인종 때 제정된 국자감 운영규정에 따르면, 국자학은 3품 이상 관료의 아들과 손자, 태학은 5품 이상 관료의 아들과 손자, 사문학은 7품 이상 관료의 아들과 손자에게 각각 입학을 허용하였다. 기술 교육기관은 8품 이하 관료의 아들 및 서인(庶人)이 입학할 수 있었다.
예종은 1109년(예종 4) 7월에 관학을 부흥하기 위해 국자감에 유교경전을 교육하는 6개 과정의 유학재와 무학(武學)을 공부하는 무학재로 구성된 7재(齋)를 설치하였다.
1367년(공민왕 16)에 공민왕은 성균관을 재건하여 유교 전문 교육기관으로 전환시켰다. 당시 최고의 유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년)을 성균관의 책임자로,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을 교수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은 이들을 통해 성리학을 보급하고 성리학에 밝은 인재를 육성하려 하였다. 이때 배출된 인재들은 성리학 보급과 조선왕조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 교육기관으로 향교(鄕校)가 있었다. 향교는 공자 등 중국과 고려의 훌륭한 유학자들을 제사하고, 자제들을 교육시켜 유교와 유학을 보급할 목적으로 지방의 군현에 설치된 학교이다.
11세기 후반 문벌귀족이 대두하고 유학이 발달하면서 유학자들이 학당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는, 지금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사학(私學)이 발달하였다. 최초 사학은 최충(崔冲, 984~1068년)이 1055년(문종 9)에 설립한 9재(九齋)학당이다. 이후 숙종 초까지 12개의 사학〔사학 12도(徒)〕이 설립되었다.
토지제도는 전시과(田柴科) 제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전시과 제도는 문무백관에서 부병 · 한인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갖거나 각종 역을 지는 사람들에게 지위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차등있게 나누어 준 국가적인 토지 분급제도이다. 전시과 제도는 관료와 관청에 토지를 지급하여 관료제 운영의 경제적인 토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왕조 자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시행된 역분전(役分田) 제도를 기초로 해서 976년(경종 1)의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998년(목종 1)의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를 거쳐 1076년(문종 30)에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 혹은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로 완비되었다. 문종 때 확정된 전시과 제도는 전체를 18과로 나누어 관품과 관직에 따라 최고 150결(전지 100결, 시지 50결)에서 최하 17결을 지급하였다.
또한 각 관청이나 개인에게 토지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전시과 토지의 종류는 다양하였다. 관료들에게 지급된 양반전(혹은 과전), 공신들에게 지급된 양반공음전, 군인들에게 지급된 군인전, 향리들에게 지급된 향리전, 관청에 지급된 공해전(公廨田), 군사기관에 지급된 둔전(屯田), 향교 · 국자감 등 학교기관에 지급된 학전(學田), 왕실과 사원에 지급된 장처전(莊處田), 각종 교통기관에 지급된 역진전(驛津田), 이 외에 칼이나 종이 등을 제작하는 수공업자에게 지급된 도위전(刀位田)과 지위전(紙位田) 등 각종 위전(位田)도 있었다. 그 밖에 과거 합격자에게 등과전(登科田)이 지급되었고, 관리의 유가족이나 미성년자에게 한인전(閑人田), 왕실에 내장전(內莊田) 및 적전(籍田) 등이 각각 지급되었다.
무신정권 이후 대토지 소유와 토지 겸병, 농장 확대 등으로 전시과 제도는 기능을 상실하여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어 1271년(원종 12)에 경기 8현에 있는 토지를 문무 관료들에게 녹과전(祿科田)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권세가들의 토지 탈점과 대토지 소유는 시정되지 않아 나라 재정을 확보하고 민생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토지제도 개혁이 필요하였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파 사대부들은 사전 개혁을 단행하였다.
마침내 1391년(공양왕 3)에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였다. 과전법은 1품에서 9품까지 정직은 물론 산직(散職)까지 18과로 나누어 1과 150결에서 18과 10결까지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다. 사전 경기(京畿)의 원칙에 따라 관리들에게 경기도 지역의 토지에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공사전의 전조는 논은 1 결에 미(米) 30두, 밭은 1결에 잡곡 30두로 정하였다. 토지 소유주는 논 1결에 백미 2두, 밭은 1결에 황두 2두로 정하였다.
조세제도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재화를 백성에게서 거두는 제도이다. 조세 수취의 기본 단위는 군현이었다. 따라서 조세제도는 군현제도가 정비되어 군현별로 조세 액수가 정해지면서 시행될 수 있었다. 고려 전기에는 민호의 토지 경작을 전제로 조(租) · 포(布) · 역(役)의 3세를 부과하였다. 3세는 군현을 단위로 전세(田稅) · 공물(貢物) · 요역(徭役)의 형태로 수취하였다.
전세는 주로 쌀 혹은 벼로 징수하였다. 공물은 포 등 직물을 징수하였지만, 국가가 필요로 하는 현물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요역은 궁궐 · 성곽 · 사원 및 수리시설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위 세 가지 세목 외에 상요(常徭)와 잡공(雜貢) 등의 잡세가 추가되었다. 또한 공물을 비롯한 현물세의 대납(代納)이 일반화되었다.
강과 바다를 잇는 조운로(漕運路)와 내륙을 잇는 역로(驛路)는 지방 통치의 실핏줄이자 집권체제의 토대를 구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은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국내외 사신과 수령에게 숙식을 지원하고, 물자를 원활히 수송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교통 ‧ 통신 시설이었다.
역과 역을 이어주는 길인 역로는 오늘날 국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개경과 지방을 잇는 교통로에 역을 설치하고, 지역 단위로 역과 역을 연결하는 역도(驛道)를 편성하였다. 성종 때는 역에서 근무하는 역정호(驛丁戶) 다과에 따라 역을 대로역(大路驛) · 중로역 · 소로역의 3등급으로 나누어, 역 운영에 필요한 토지를 각각 지급하였다.
역에는 역장, 행정을 전담하는 역리(驛吏), 각종 실무에 종사하는 역정(驛丁)이 있었다. 성종 후반과 현종 전반 무렵에는 전국의 역 149곳을 중요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6과(科) 제도를 실시하였다. 문종 때는 전국 525개 역을 22개 역도로 구역을 나누어 운영하였다. 당시 역을 순찰하는 관원을 관역사(館驛使)라 했으며, 공역서(供譯署)라는 기관이 전국의 역을 관장하였다.
삼국에서 고려 전기까지 한반도 중서부의 핵심 교통로는 임진강 장단나루에서 견주(見州)와 양주를 거쳐 한강 광진나루로 연결되는 장단나룻길이었다. 11세기 후반 문종 때 남경 건설이 추진되면서 임진나루에서 남경을 거쳐 한강 사평나루로 이어지는 임진나룻길이 더 중시되었다.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면서 역 제도도 크게 변화하였다. 제주도와 압록강 사이에 수역(水驛)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 중국의 강남과 고려, 요양 지방을 연결하는 곡물의 해상 수송을 꾀하기도 하였다.
조운로는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세곡을 배(조운선)에 실어 개경으로 운반하는 뱃길로서, 경제와 재정 운영에서 실핏줄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조운제를 운영하였다. 각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를 해안에 설치한 조창(漕倉)에 모은 후, 조운선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조운제의 시행은 한반도에서 바다와 강을 이용하여 물자를 운반하는 물류 시스템의 완비와 함께 이를 이용하여 중앙정부가 조세를 직접 거두어 집권체제를 확립한 데 의미가 있었다. 고려 초기에는 전국의 60개 포구에 세곡을 모았다가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현종 때 12개 조창에서 개경으로 운반하는 방식의 12조창제로 바뀌었다.
문종 때 서해도 장연현에 안란창(安瀾倉)이 새로 설치되어 13조창제가 운영되었다. 흥원창(興元倉)과 덕흥창(德興倉)은 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하였고, 서해안과 남해안에 설치된 나머지 11개 창은 해운(海運)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각 조창의 책임자는 판관이었다. 매년 추수 후 거두어들인 세곡은 판관의 책임 아래 이듬해 2월부터 시작하여 먼 지역은 5월까지 개경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1376년(우왕 2)에 왜구의 침탈로 조운이 중단되어 육로를 이용한 육운(陸運)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고려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성된 양천(良賤) 신분제도를 운영하였다. 양인과 천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국가에 대한 권리와 의무이다. 양인은 국가에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는 의무와 함께 권리로서 관리가 되거나 토지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천인은 국가에 대해 의무와 권리가 없었다. 양천 신분제도는 양인과 천인을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조세와 재정 확보를 위해 양인을 많이 확보하려 하였다. 한편으로 천인에게 엄격한 규제를 가하였다. 천인은 관리가 될 수 없고, 양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천인이면 자식은 천인이 되었다. 후손이 없이 죽은 주인의 노비는 친척에게 소속시켜 천인 신분을 유지하게 하였다.
양인은 크게 3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상층은 관료집단이다. 중간층은 군인 가운데 군역을 대대로 세습한 전문적인 군인집단인 군반씨족(軍班氏族)과 향리층이다. 하층은 군현 등에 거주하는 일반 농민층, 향 · 부곡 · 소 등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는 주민, 교통기관인 역과 진(津)에 거주하는 주민 및 수공업자인 공장(工匠)과 상인 등이다. 부곡과 진역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특정의 역을 추가적으로 부담하여 일반 농민층에 비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최하층 양인이었다. 공장과 상인 역시 같은 처지였다.
천인은 노비였다. 노비는 인격의 주체가 아니라 재산의 일부였다. 노비는 다양한 경로와 형태를 통해 발생되었다. 재산의 일부로서 대대로 자손에게 상속된 전래(상속)노비, 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노비와 경제적 이해관계로 발생한 매매노비 등이 있었다.
또한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의 가사를 돕거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는 등 주인에게 예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사노비는 거주 형태에 따라 주인과 함께 거주하면서 가사를 돕는 솔거노비와 주인의 집 밖에서 거주하면서 주인의 땅을 경작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공노비는 궁궐, 중앙과 지방의 관청, 학교에 소속되어 각종 역을 부담하는 노비이다. 공노비는 주로 전쟁 포로와 반역 등 중대한 범죄자로 충당되었다. 공노비는 관청에서 각종 잡일에 종사하는 공역(供役)노비와 관청 밖에서 거주하면서 국유지 등을 경작하는 외거노비로 구분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신분의 이동과 변동이 활발하였다.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소외받은 군인은 물론 이의민과 같은 천민 출신이 지배층으로 진출하면서 신분제도는 크게 동요되고 변동되었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는 하층민이 지배층으로 진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 일본 원정 등에 공을 세운 군인, 원에서 환관과 공주가 된 집안의 사람이나 부곡인 출신 등 하층민이 대거 지배층으로 진출하면서 신분제도는 크게 동요되었다.
고려 말 과중한 역 부담에 시달린 농민층은 스스로 권세가의 노비가 되어 역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투탁(投託) 현상이 일어났다. 대토지 소유자인 권세가들은 토지 경작자를 확보하기 위해 양인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압량위천(壓良爲賤) 현상도 나타났다. 이같이 양인 농민층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 현상도 신분제를 변동시킨 또 다른 원인이었다.
고려 정부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질병, 전쟁 등으로 백성의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각종 진휼(賑恤)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였다. 구체적으로 곡식 · 식량 · 의복 등의 물자를 공급하거나〔진급(賑給)〕, 곡식 등 물자를 빌려주고 원금만 돌려받는 제도〔진대(賑貸)〕가 있었다. 또한 농업생산의 40% 이상 손실이면 조(租)를, 60% 이상 손실이면 조와 포(布)를, 70% 이상의 손실이면 조 · 포 · 역(役) 등의 3세를 모두 면제해주었다. 이 외에도 죄수의 형을 감하거나 면제하는 사면조치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백성들의 삶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고려 정부가 제도로서 운영한 사회복지 제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사회 구제제도로 태조 때 흑창(黑倉)을 설치하였다. 평상시 곡식을 저장했다가 수재와 한재 등으로 빈민이 발생하면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가을에 돌려받았다. 성종은 986년(성종 5)에 저장 곡식 1만 석을 증가시켜 의창(義倉)으로 이름을 고치고, 군현에도 의창을 설치하였다. 1023년(현종 14)에는 의창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의창수렴법(義倉收斂法)을 제정하였다.
993년(성종 12)에 설치된 상평창(常平倉)은 물가, 특히 곡물가격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는 기구이다. 곡물 시세가 낮을 때 약간 높은 가격으로 구입해서, 시세가 급등하면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내다 팔아 가격을 조절하였다.
사원에도 구제기구가 있었다. 보(寶)는 원래 사원에 시납된 전곡(錢穀)을 기본재산으로 하였다. 이를 대여하여 얻은 이자로 각종 불교 행사 비용, 빈민과 질병 구제 등 사회사업을 한 재단이다. 보는 고려 때 가장 성행했으며, 점차 공공기관과 민간기관의 사업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설치하여 이용하였다.
보건의료 제도 역시 태조 때부터 시행되었다. 태조는 서경의 학교에 의과(醫科)와 복과(卜科)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게 하였다. 광종은 과거시험에 의술에 밝은 사람을 뽑는 의과를 두어 이들을 관리로 선발하였다. 성종은 12목에 경학박사와 함께 의학박사를 각 1명씩 두어 의학을 교육하게 하였다. 성종은 989년(성종 8)에 왕실 의료기관으로 시의(侍醫)와 상약국(尙藥局)을, 관청 의료기관으로 태의감(太醫監)을 각각 설치하였다.
일반 백성을 위한 의료기관은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설치된 대비원(大悲院)이 있었다. 이를 합쳐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라 하였다. 광종 때 각종 재난으로 어려운 처지의 백성을 구제하는 제위보(濟危寶)가 설치되었다.
1109년(예종 4)에 구제도감(救濟都監)이, 1112년(예종 7)에 혜민국(惠民局)이 설치되었다. 혜민국은 백성들에게 약품을 공급하는 기구이다. 공양왕 때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또한 충목왕 때 진제도감이, 우왕 때 진제색(賑濟色)이 각각 설치되었다. 모두 질병 치료와 빈민 구제를 위한 기구이다.
고려시대 가족은 부부와 3~4명의 자녀로 구성된 단혼(單婚) 소가족 형태였다. 이는 고려의 혼인 풍습과도 관련이 있다. 근친혼이 성행한 왕실과 달리 일반인의 혼인 풍습은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었다. 이는 혼인 후 남편은 태어난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부인의 집에서 거주하는 혼인 풍습이다. 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한다는 뜻에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도 하였다. 일부일처제가 오랜 관행이었다.
당시 상속제도는 노비뿐만 아니라 토지도 자녀에게 균등하게 상속된 자녀균분(子女均分) 상속이었다. 자녀 모두 부모의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아 각자 독립된 가계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여자도 재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서 남자가 혼인 후 부인의 집에 머무는 서류부가의 혼인 풍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상속제도는 제사 풍습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상에 대한 제사도 아들과 딸이 번갈아 가며 지내는 윤행봉사(輪行奉祀)였다. 자녀균분 상속이 서류부가의 혼인 풍습과 윤행봉사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또한 일부일처의 단혼 소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류부가혼과 윤행봉사는 대체로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려시대 호적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호적 작성을 위한 기초자료로 개별 가호 단위로 호구 상황을 작성해서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가 몇 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호주의 직역과 가계, 배우자의 가계 및 소생 자녀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성이 호주로 기록된 호구단자도 있다. 또한 호구단자에는 노비의 소유주를 어머니 쪽과 아버지 쪽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여성도 남자 형제와 다름없이 부모로부터 균등하게 노비 등의 재산을 상속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속받은 노비는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시댁에 귀속되지 않고 본인의 재산으로 유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런 사실은 족보에도 반영되어 딸과 아들 구분 없이 출생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고위 관료나 공이 있는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 진출의 특혜를 베푸는 음서제도에도 아들이 없는 관료의 경우 딸의 자손에게도 음직(蔭職)이 계승되었다. 여성이 재산 상속 · 호주 · 제사의 주체가 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는 1234년(고종 21)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인쇄하였다. 이 책은 전해지지 않으나 1377년(우왕 3)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하권)은 현재 전해지는 금속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한편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간행된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목판으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간행물이다. 이어 고려 때 초조대장경(1087년)과 재조대장경(1251년)을 완성할 정도로 목판인쇄 기술이 발달하였다.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도 목판인쇄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선(高麗船)은 고려가 독자적인 조선기술로 만든 선박이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선이 동원되었다. 저비용으로 단시간에 제작되었지만 중국의 전선(戰船)보다 단단하고 견고했을 정도로 고려는 훌륭한 선박 제조기술을 보유하였다. 고려선은 판자를 쓰지 않고 통나무를 가공하여 제작했으므로 외판(배 옆면)은 두껍고, 저판(배 밑면)은 무겁고 둔중하여 속도가 느려 위기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선체가 무거워 바람이나 파도에 쉽게 전복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선은 전함이나 물자와 식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적합하였다. 고려의 군선(軍船)은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 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과선(戈船)이라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는 검선(劒船)이라 불렸으며, 이러한 기술이 이어져 임진왜란 때 귀선(龜船: 거북선)을 제작하게 되었다.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삼베에서 따뜻하고 신축성이 있는 목면으로 의복을 제조하여 의류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다.
공민왕 때 최무선은 중국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배워 고려에 도입하였다. 고려는 1377년(우왕 3)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이를 전함에 설치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380년(우왕 6)에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00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 불태우자,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는 지리산 인근의 황산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고려는 기술 개발과 발달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당시 국자감에 설치된 교육과목과 과거시험 과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국자감에서는 율학(律學) · 서학 · 산학(算學) 등의 기술과목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의(醫) · 복(卜) · 지리(地理) · 율 · 서 · 산 등의 잡과를 실시하여 기술 관련 인재를 선발하였다. 고려는 12목의 학교에 의학박사를 두었다. 또한 경 · 목 · 도호부 등 대읍에 속관으로 의사(醫師)를 두어 의료와 제약 업무를 맡게 하였다.
과거에서 의과가 설치되어 의학 관료를 선발하면서 의학은 발달하게 되었다. 의학과 관련된 기구로 광종 때 상의원(尙醫院), 성종 때 태의감과 상약국(尙藥局)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에서 수입한 의학서적을 통해 의술을 배웠다.
문종과 예종 때는 송나라에서 의관을 초빙하여 그들로부터 직접 의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같이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과 의술을 개발하여 의학을 발전시켰다. 의종 때 김영석(金永錫)의 『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이, 1226년(고종 13)에 최종준(崔宗峻)의 『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이 편찬되었고, 1236년(고종 23)에 『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 편찬되었다.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으로 독자적인 의학연구의 계기가 되었다.
기술을 담당한 기관으로 서운관(書雲觀)과 태의감(太醫監) 등이 있었다. 고려는 하늘과 산천, 바다와 인간사회의 변화를 자세하게 관찰하였다. 당시 성행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각종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간 행동의 경계와 교훈을 얻기 위해 천문현상을 관측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 고려사』 천문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 역법(曆法) 질서 속에 있어서 중국 역법의 수용은 불가피하였다. 고려는 통일신라에서 사용한 당나라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하다가 충선왕 때 원나라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천문 관측과 역법을 관장하는 기구로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이 있었다. 태복감은 1023년(현종 14)에 사천대(司天臺)로 바뀌었다. 이들 기구는 천문〔점성(占星)〕 · 역수(曆數) · 측후(測候) · 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하여 천문 관측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서운관(書雲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고려 독자의 기술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미술과 공예 분야에 많이 나타났다. 미술과 공예 분야에 나타난 개방성과 국제성은 수준 높은 예술품을 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고려를 동아시아 문화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고려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에 고온에서 흙과 유약을 섞어 비취색이 감도는 특유의 비색청자를 생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을 낼 수 있는 가마시설을 제작하는 기술이 필요하였다. 고려는 중국의 제작기술을 수용하여 고려의 현실에 맞는 가마시설로 발전시켰다.
또한 특유의 비취 색깔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이어 12세기 중반부터 기술적으로 더 진보한 상감기법으로 제작한 상감청자를 생산하였다. 상감은 반건조된 자기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흰색과 붉은색 흙을 발라 초벌구이를 한 뒤 유약을 바르고 다시 한번 구워내어 만들었다.
고려의 독창적인 청자 제작기술인 상감기법은 나전칠기(螺鈿漆器)와 금속공예에서 사용된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즉, 금과 은을 잘게 잘라 가는 선으로 꼬아 문양의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는 입사(入絲)기법을 수용하여 상감기법으로 발전시켰다.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는 이같이 고려의 독자 기술로 제작되었다.
고려지(高麗紙)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잘 자라며 구하기도 쉬운 닥나무〔저(楮)〕를 주재료로 제작되었다. 도침법(搗砧法)은 종이 표면을 두드려 먹의 번짐을 막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 때문에 고려지는 종이 종주국인 중국에서 호평을 받을 정도로 경쟁력 있는 제품이 되었다. 나전칠기는 나전 기술과 칠공예(漆工藝) 기술이 결합된 제품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나전 기술을 "세밀하여 귀하다〔세밀가귀(細密可貴)〕"며 높이 평가하였다.
나전칠기는 제작 기법상 3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개껍데기를 1㎝ 이내로 가늘게 잘라서 하나하나 이어 붙여서 끊음질무늬〔절문(截文)〕 기법, 바다거북의 등딱지〔대모(玳瑁)〕의 뒷면에 색을 칠하여 나전과 함께 옻칠을 한 그릇의 표면에 무늬로 박아 넣는 기법, 꽃이나 넝쿨무늬 등 문양 주변에 철사처럼 가늘게 자른 금 · 은 · 동을 꼬아 넣어 식물의 줄기나 덩굴을 선명하게 표현한 입사(入絲)기법이다. 입사기법은 금속공예와 청자의 상감기법에도 적용되었다.
고려 불화는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된 그림이며, 벽에 걸어 실내에 봉안하거나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두는 괘불(掛佛)로 사용되었다. 현재 전하는 고려 불화는 대부분 원간섭기인 14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제작된 것이다.
고려 불화는 비단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顔料)를 사용하여 채색하였다. 고려 불화는 바탕천의 뒷면에 색을 칠하는 배채법(背彩法) 혹은 복채법(伏彩法)이라 불리는 채색 기법을 사용하였다. 뒷면에 색을 칠하여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한 후 앞면에서 다시 채색하여 음영을 보강하는 기법으로, 빛깔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 동시에 변색을 지연시키며, 두텁게 칠해진 안료가 바탕천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 배채법 덕분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이 오랫동안 간직될 수 있었다.
고려청자 · 고려지 · 나전칠기 등 수준 높은 미술 공예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소(所) 생산체제라는 사회적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특수 행정구역인 소에서 수공업 제품인 자기 ‧ (나전)칠기 ‧ 종이 ‧ 기와 ‧ 먹 등을 각 제품의 전문 기술자인 장인과 잡역을 담당한 소민(所民)이 함께 생산하였다. 이러한 소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호평을 받는 미술 공예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고려대장경은 인쇄기술과 종이 제조기술, 불교 관련 학문에 대한 높은 이해, 몽골에 대한 저항의식 등 기술과 지식, 사상이 만나 융합된 문화유산이다. 고려대장경은 두 차례 제작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고려는 대장경 제작에 착수하였다. 991년에 입수한 송나라 대장경을 토대로 내용을 추가하고 보완하는 등의 작업을 통한 대장경 조판은 마침내 1087년(선종 4)에 완성되었다. 이를 처음 경전을 새겼다는 뜻에서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에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졌다.
고려는 대장경 조판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민심을 결집하여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 하였다. 고려는 1236년(고종 23)에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1243년(고종 30)에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분사대장도감을 각각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대장경 조판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251년(고종 38)에 완성하였다. 이때 완성된 것을 재조(再彫)대장경이라 한다.
재조대장경을 이같이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장경을 제작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조대장경 저본(底本: 바탕이 된 경전)의 60%가 초조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으나 종이에 인쇄한 인본(印本)이 많이 남아 있어 제작에 도움이 되었다.
둘째, 아시아 최고의 지식체계인 불교 경전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재조대장경의 나머지 40% 저본은 초조대장경 완성 이후 송나라와 거란에서 새로 수집한 경전이다. 1087년(선종 4)에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뒤 1236년에 재조대장경 제작에 착수할 때까지 약 150년 동안 동아시아에 유통된 수많은 불교 경전을 꾸준히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1085년(선종 2)부터 이듬해까지 송나라를 방문하여 불교경전을 수집하고 저명한 승려를 만나 최신의 불교사상을 연구하였다. 귀국 때 그는 불교와 유교 경전 1,000권을 가져왔으며, 상인을 통해 수시로 송나라와 거란에서 경전을 사들여 경전 4,00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의천은 왕실의 지원을 받아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 ‧ 거란 ‧ 일본 등의 많은 승려와 교류하면서 수많은 불교경전을 구입하여 연구하였으며 필요한 경전은 간행하는 등 동아시아 불교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재조대장경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당시 고려의 인쇄술은 금속활자를 제작할 정도의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통일신라 이래 인쇄기술의 축적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장경 제작은 이러한 인쇄기술의 발달에 힘입었다. 고려대장경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기술과 지식이 결합되어 인간의 정신과 가치를 전달하려 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이 속에는 고려의 기술과 지식, 문화 수준이 집약되어 있다.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국교에 버금갈 정도로 다른 사상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불교와 승려를 위한 공식적인 제도와 기구가 존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僧科)가 있었다. 여기에 합격해야 대덕(大德)이라는 법계(法階)를 받았으며, 이후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의 법계는 교종 승려는 수좌(首座) · 승통(僧統)까지, 선종 승려는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까지 오를 수 있었다. 승과에 합격하여 법계를 받아야 불교계의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승진은 승록사(僧錄司)라는 중앙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었다. 대선사 이하 모든 법계는 상서성에서 제수하였으며, 삼중대사 이상의 법계는 국왕의 재가가 필요하였다.
주요 사원의 주지도 국왕이 임명하였다. 불교계에서 덕이 높은 자를 왕사(王師)로, 그보다 덕이 높은 자를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왕사나 국사는 교권과 왕권의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하였다. 관료들과 종단의 의견을 참고하나 왕사와 국사의 임명에는 왕실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왕사나 국사가 임명되면 국왕은 그들에게 9번 절을 해 제자의 예를 취하였는데, 당시 불교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연등회 · 팔관회, 국왕의 생일이나 선왕(先王)의 기일(忌日) 등 국왕과 왕실의 중요한 행사도 불교 사원에서 거행하였다. 고려 때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보다 주도적인 지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상의 예에서 알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선종 · 화엄종(華嚴宗) · 법상종(法相宗) 등 3대 종단이, 중기에는 여기에 천태종(天台宗)이 추가되어 4대 종단이 중심이 되어 불교사상을 전개하였다.
선종은 후삼국 통합전쟁 중 고려 태조가 호족세력과 연계된 선종 승려와 관계를 맺으면서 발달하였다. 화엄종은 광종 때 왕권 강화와 함께 크게 부상하였다. 광종은 귀법사를 창건하고 균여(均如)를 주지로 삼아 화엄종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법상종까지 융화하는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표방하였다. 광종은 선종인 법안종도 후원하였다.
교선일치를 주장한 법안종은 화엄종의 성상융회 사상과 함께 정치적 대립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광종의 정치이념과 연결되었다. 현종의 즉위를 도운 법상종단은 현종이 부모를 위해 세운 현화사를 중심으로 문종 때까지 크게 발전하였다.
문종 때는 화엄종단이 국왕과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흥왕사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법상종단과 대립하였다. 당시 법상종단은 이자연의 아들인 소현(韶顯)이, 화엄종단은 문종의 넷째아들 의천(義天)이 중심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문벌과 왕실을 대표한 인물로서, 두 교단 역시 각각의 집단을 대변하였다.
의천은 선종 때 송나라에 가서 송나라의 화엄학과 함께 왕안석의 신법을 수용하고 돌아와 불교계의 통합을 추진하는 한편 문벌귀족을 누르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숙종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려 하였다. 그는 1095년(숙종 1)에 창건된 국청사의 주지가 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수많은 부처의 가르침이 있지만 결국은 ‘깨달음’ 하나로 귀결된다는 천태종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불교계 통합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교단이 정치에 휩쓸리면서 법상종과 선종을 비롯한 각 종단 내부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에 반발하면서 선종이 다시 일어나고, 이자현(李資玄), 윤언이(尹彦頤) 등 정치 현실에 실망한 문벌 세력 일부가 거사(居士)를 표방하면서 선에 탐닉하는 거사불교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무신정권 이후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로 신앙결사운동이 유행하였다. 이 운동은 선종 승려인 지눌(知訥)의 수선사(修禪寺;송광사)와 천태종 승려인 요세(了世)의 백련사(白蓮社)가 주도하였다.
지눌은 불교계의 타락상을 목격하고 1190년(명종 20)에 불교 본연의 수행을 목표로 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표방하며 선과 교를 함께 닦는 ‘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먼저 이치를 깨우치고 번뇌와 나쁜 습관을 차차 제거하여 나간다는 ‘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세웠다. 수선사는 최씨 정권의 지원을 받아 불교 교단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지눌 이후 고려 후기까지 16명의 국사와 왕사를 배출하였다.
요세는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에 실망하여 1216년(고종 3)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지방 토호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다. 요세는 참회와 미타정토를 강조하여, 피지배층 사이에서 지눌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았다. 백련사의 신앙결사운동은 불교의 실천성을 강조하여 불교계의 세속화를 막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 하였다. 무신정권기 결사운동은 불교의 구심점이 중앙의 왕족과 문벌에서 지방의 향리층과 독서층으로 옮아가 이들이 역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간섭기에 충렬왕은 천태 법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왕실 원당으로 묘련사를 창건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이 불교계의 중심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천태종은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을 거치며 점차 권력과 밀착하게 되어 귀족불교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일반 대중의 지원을 받던 천태종계 백련사의 신앙결사운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불교의 귀족화 경향과 함께 지배층의 부원화(附元化) 경향마저 심화되자, 승려 무기(無寄), 체원(體元) 등이 나서서 불교계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으나, 불교계에 실망한 일반 대중은 불교계의 정화 노력조차 지지하지 않았다.
이로써 사상계의 주도권은 점차 성리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무신정권기에 시작된 불교계의 신앙결사운동은 고려 말 성리학이 수용되어 정착하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유교 정치이념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백성을 교화하려 하였다. 신라 말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6두품 유교 지식인들이 고려에 대거 귀화하였다. 이들은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 정치이념은 정치와 사회제도 전반에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유교 정치이념의 인정(仁政)에 기초하여 과도한 수취를 지양하고, 구휼정책을 통해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였으며, 학교를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을 교화하려 하였다.
광종의 과거제 시행은 유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 경전이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유학에 밝은 사람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서 학교가 설립되면서 유학 교육이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성종은 유교 정치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국자감 등 학교제도를 정비하여 유학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 수용되어 유행하였다. 군주는 정치와 도덕의 근원이며, '군주의 행동은 하늘의 뜻과 감응하여 천재지변의 자연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천견론(天譴論)은 군주의 실정을 비판하고 지배층을 각성시켜 훌륭한 정치를 권장하였다. 예종은 송나라에서 유학은 물론 음악과 의학을 수용하고 학생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학습하게 하고 관학을 정비하는 등 유교 문물과 유학을 진흥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1116년(예종 11)에는 궁중에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여 국왕과 유신 관료들이 경전을 읽고 토론하면서 학문연구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경전 강독과 토론의 전통은 인종~의종 때까지 계속되어 유학의 진흥과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고려의 유학 수준은 크게 향상되어, 유학은 국가의 주요한 통치이념의 하나로 뿌리를 내렸다.
성리학은 원나라를 통해 수용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고려 학자와 문인들은 그곳에 있던 남송 출신의 성리학자들과 만나서 교류하는 가운데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권부(權溥) · 안향(安珦) · 백이정(白頤正) 같은 인물들이 성리학을 처음으로 접한 고려 학자들이다.
충선왕이 1314년(충숙왕 1)에 원나라 수도에 세운 학문기관 만권당(萬卷堂)은 성리학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충선왕이 만권당에 조맹부(趙孟頫) · 장양호(張養浩) · 원명선(元明善) · 우집(虞集) 등 남송 출신의 빼어난 성리학자들과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들을 불러들여 학문적인 교류를 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원나라 과거시험도 성리학 수용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는 충선왕의 건의로 1313년부터 과거제를 시행하였는데, 성리학을 완성한 송나라 주희(朱熹)가 주석을 붙인 『 논어』 · 『 맹자』 · 『 중용』 · 『 대학』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고려도 14세기 후반부터 사서집주를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이로써 성리학은 쉽게 수용, 전파될 수 있었다.
성리학이 고려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성리학이 원간섭기 이래 개혁정치의 이념적 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전(私田) 개혁을 비롯하여 고려 말 개혁파가 주도한 일련의 개혁이 성공한 데는 성리학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공민왕 때 면모를 일신한 성균관을 중심으로 이색 · 정몽주 등 유학자들이 결집하여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곳에서 성리학을 익힌 세대들이 과거를 통해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결집하면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개혁이 본격화되었다.
개혁의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교 경전에 밝고 행실이 바른 경명행수(經明行修), 즉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가진 인물을 이상적인 관료로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불법적인 인사의 온상인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문무의 인사권을 이부와 병부에 돌려주어 이상적인 관료를 선발하려 하였다.
다른 하나는 권세가의 탈점으로 형성된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科田)을 복구하여 새로운 관료층의 경제기반을 마련하려 하였다. 이같이 택인재(擇人才) · 복과전(復科田)이라는 성리학적 개혁의 방향과 목표는 정도전 · 조준 등이 주도한 고려 말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들은 1388년(우왕 14)에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와 함께 사전 개혁을 중심으로 정치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추진한 결과 조선을 건국하였다.
태조는 「 훈요십조」에서 풍수지리 사상에 힘입어 고려왕조가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이같이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전파된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 전기에도 성행하였다.
문종은 왕조의 번영을 위해 풍수지리 사상을 신봉하였다. 문종은 후삼국 통합(936년) 120년 후 궁궐을 지으면 왕조가 연장된다고 해서 1056년(문종 10)에 서강(西江)의 병악(餠岳: 현재 개풍군 광적면 일대) 남쪽에 장원정(長源亭)을 지었다. 또한 1067년(문종 21)에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하면 사방에서 조공을 바치고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라 해서 지금의 서울인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그곳에 궁궐을 창건하였다. 장원정과 남경 궁궐은 모두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지어졌다. 숙종 또한 부왕 문종의 뜻을 이어 풍수지리 사상에 근거하여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예종도 풍수지리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1106년(예종 6) 3월 신하들에게 음양과 지리에 관한 여러 서적을 수집하여 내용을 고증하고 첨삭하여 『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예종은 왕조의 운명을 연장하기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지을 것을 지시하여 1116년(예종 11) 4월 서경에 용언궁(龍堰宮)을 완성하였다.
인종 역시 풍수지리설을 신봉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다는 이유로 묘청 등 서경세력과 손을 잡고 서경 천도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것이 실패하자 1135년(인종 13)에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풍수지리 사상은 이같이 왕권을 옹호하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도교는 고려 건국 직후부터 민간에서 널리 유행되었다. 태조 때 구요당(九耀堂)이 설치되어 일월과 하늘의 별들에 제사하는 도교식 제천의례인 초재(醮齋)가 시행되었다. 예종은 도교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진흥시키려 하였다.
예종이 재위하던 당시의 송나라 휘종은 도교 사원을 크게 정비하고 도교 경전을 편찬하는 등 도교를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휘종은 고려에 파견한 사신 편에 도사(道士) 2명을 보내, 고려에 도교를 전파하려 하였다. 예종은 송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용하여, 1115년(예종 10) 무렵 도교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10여 명의 도사를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에 도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도교의 수용은 12세기 초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응하여 민심을 수습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현종 이후 왕실에서 행해진 도교식 종교의례인 초재는 재해를 막고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면서, 이를 주재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다. 또한 도교가 성행한 송나라와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향도신앙(香徒信仰)과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유행하였다. 향도신앙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민간신앙이다. 하층민들은 현실의 위기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향나무를 땅에 묻으면〔매향(埋香)〕 언젠가는 미륵불이 나타나서 고난에 빠진 자신들을 구제해준다고 믿었다. 이처럼 향나무를 묻는 등의 기불(祈佛) 행위를 하는 신앙단체가 향도이다.
향도는 매향 활동뿐만 아니라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는 등 공동 노동행위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키워나가기도 하였다. 현종 때 개심사(開心寺: 경북 예천) 석탑 조성에 향도가 참여하였는데, 연인원이 2만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마을과 공동체를 유지하여 나가려 하였다.
성황신앙은 민간 전래의 고유 신앙이다. 마을이나 공동체를 지켜주는 성황신을 믿고 받드는 행위가 성황신앙이다. 6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성황신앙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신이 전쟁이나 내란 때도 마을을 수호해 준다고 믿고 제사를 지낸 데서 시작되었다. 고려 때도 군현마다 각기 다른 독자의 수호신을 모셨는데, 이곳을 성황당 또는 성황 신사(神祠)라 하였다.
한편 무당을 매개로 하는 무속(巫俗) 신앙 역시 고려 때 주요한 민간신앙의 하나였다. 향도와 성황신앙도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 유교가 점차 확산되면서 이러한 민간신앙 활동은 모두 음사(淫邪) 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하기 시작하였지만,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신앙 활동이 널리 행하여졌다.
팔관회는 원래 불교에서 일상에서 지키기 어려운 여덟 가지 계율을 하루만이라도 엄격히 지키려는 뜻에서 개최한 법회였다.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회를 연 것이 팔관회의 첫 기록이다. 궁예도 900년 양주(서울)와 견주(양주)를 정벌한 뒤 연 팔관회도 불교 행사였다.
고려왕조에서 팔관회는 하늘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로 변화하였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팔관회는 천령(天靈: 하늘신) ‧ 오악(五嶽) ‧ 명산(名山) ‧ 대천(大川) ‧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라 하여, 팔관회를 하늘과 산천에 대한 제사의례로 규정하였다. 또한 팔관회는 각 지방 단위의 성황 · 향도신앙과 민간신앙을 하나의 국가의례로 묶어내는 통합 역할을 하였다.
팔관회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개최하였다. 개경은 11월 15일, 서경은 10월 15일을 전후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개경의 팔관회 의식은 소회(小會)와 대회(大會)로 나뉘어 이틀간 진행되었다.
첫날 행사인 소회에서는 국왕이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에 참배한 뒤 태자를 비롯한 왕족, 중앙 관료와 3경, 동 ‧ 서 병마사, 4도호부, 8목 지방관들의 조하(朝賀)와 헌수(獻壽)를 받았다. 이어 격구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선랑의 무용과 가무,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 등 기악(伎樂) 공연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은 국왕이 내린 술과 음식을 들면서 여러 가지 공연을 관람하였다.
둘째 날 행사인 대회에서도 국왕은 행향(行香)과 작헌(酌獻) 의식 후 송나라 상인들과 여진 ‧ 탐라 ‧ 일본인의 조하를 받았다. 그들은 이때 국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런 후 역시 국왕이 하사한 술과 음식을 들면서 전날의 소회와 같이 여러 가지 공연을 관람하였다.
팔관회는 고려의 천하관이 잘 드러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고려 국왕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포(黃袍)를 입은 채 왕족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료, 외국의 상인과 추장으로부터 헌수와 조하를 받았다. 이들은 제후 자격으로 천자인 국왕에게 헌수와 조하를 올렸다. 팔관회는 고려가 천자국임을 내외에 과시하는 한편, 지역과 계층을 막론한 다양한 인간 집단과 그들의 각기 다른 신앙체계를 국가 질서 속에 흡수하여 왕조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과 계층 및 사상의 통합을 추구한 고려 특유의 의식이었다.
고려의 사상과 신앙의 또 다른 모습은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신격(神格)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제사 체계 속에 넣어 신앙하였다는 사실이다. 고려인들은 하늘을 주재한 천신(天神)인 지고신(至高神: Supreme Being)으로 천황(天皇) ‧ 태일(太一)을 신앙하였다. 천황 ‧ 태일 등의 지고신은 역대 중국의 왕조에서 제사를 올린 하늘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고려인들은 지상의 명산과 대천에도 각각 ‘대왕’과 ‘용왕’으로 불리는 신격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늘의 지고신과 지상의 신격 사이에는 마치 천자-제후의 관계를 연상하게 하는 층위와 서열이 있었다. 지상의 신격 중에는 대왕과 용왕 외에 군현의 치소와 읍성에서 받드는 제신(諸神)과 성황신이 있었다.
고려는 이런 지상의 여러 신격을 대사(大祀) ‧ 중사 ‧ 소사로 서열화하여 국가의 사전(祀典) 체제에 편입시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이 신들에게 작위를 부여하거나 신들을 제사 지내게 하고, 제사를 위한 토지도 지급하였다. 고려왕조는 이렇게 중국의 지고신 개념을 도입하여 각종 의례에서 하늘을 주재하는 절대자로 상징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왕조의 권위 확립과 민심의 통합을 이루어나갔다.
고려는 광종 때 역사 편찬기구인 사관(史館)을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최고 책임자인 감수국사(監修國史)와 그 아래 수국사(修國史), 동수국사, 수찬관(修撰官), 직사관(直史館)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실록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을 하였다. 사관은 충선왕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 예문춘추관 혹은 춘추관 등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유교사관은 물론 신이사관(神異史觀), 불교사관 등 다양한 이념과 사상이 담긴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유교사관은 다른 어느 사관보다 체계적인 서술과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유교사관은 과거 역사를 거울〔감(鑑)〕로 삼아 그 속에서 가르침과 교훈〔훈계(訓戒)〕을 얻는 감계주의(鑑戒主義), 권선징악의 포폄주의(褒貶主義)와 사실에 기초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합리주의를 특징으로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대표적이다.
신이사관은 신화와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역사를 서술하거나 때로는 풍수지리 · 도참사상 등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규보는 고려 초기에 편찬된 『삼국사』를 읽고 1193년(명종 23)에 장편서사시 「 동명왕편」을 지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삼국사』는 신화와 전설 중심의 신이사관에 입각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주몽)의 탄생과 건국 과정이 서술되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는 신이사관이 깃든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동명왕편」 또한 신이사관 계열의 역사서였다.
신이사관 계열의 또 다른 역사서는 의종 때 김관의(金寬毅)가 편찬한 『 편년통록(編年通錄)』이다.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여기에 실린 고려왕실의 역사는 『고려사』 「세계(世系)」편에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신화와 전설은 물론 산신사상 · 풍수도참사상 · 불교사상 · 무속신앙 등과 결합되어 서술되었다.
다음으로 불교사관에 입각한 역사서이다. 각훈(覺訓)은 왕명을 받아 1215년(고종 2) 무렵 불교와 승려에 관한 역사서인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불교 수용 이후 각훈이 살던 당시까지 약 840년 동안 고승들의 전기를 편찬한 책으로, 이 가운데 「유통(流通)」편의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양(梁) · 당 · 송의 세 나라에서 각각 고승전을 편찬한 적이 있는데, 『해동고승전』은 이러한 책을 참고하여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역사 인식이 담겨 있다.
일연(一然)이 1281년(충렬왕 7)에 편찬한 『 삼국유사』는 왕력(王曆) · 기이(紀異) · 흥법(興法) · 탑상(塔像) · 의해(義解) · 신주(神呪) · 감통(感通) · 피은(避隱) · 효선(孝善)의 9개 편목 아래 민간에서 유행하는 사료를 발굴하여 삼국과 불교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이다. 이 책에서 고조선 이후 삼국시기의 역사가 서술된 「기이(紀異)」편은 비합리적, 초인간적인 사실들이 역사 서술에 반영되어 있다. 나머지 편목의 내용은 불교에 관한 사실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신화와 전설을 역사 서술에 반영한 신이사관과 불교 신앙의 옹호와 전파라는 불교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라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사상이 반영된 다원주의 역사 인식으로 저술된 역사서인데 이승휴(李承休)가 1287년(충렬왕 13)에 편찬한 『 제왕운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승휴는 제왕의 계승과 흥망의 자취를 통해 권선징악의 역사 교훈을 얻기 위해 저술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한 『제왕운기』는 감계주의의 유교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제왕운기』의 하권에서 고려와 관련한 서술에서 신이사관이 반영된 『편년통록』을 인용하였다. 또한 "요동에 또 다른 천지가 있어서,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어 있다."라고 해서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또한 이승휴는 고려가 원의 제후국이 되어 평화를 유지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관료로 활동한 원종 대와 충렬왕 대에 해당하는 원나라의 당대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승휴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해서 불경을 읽고 불교 관련 저술도 하였는데, 『제왕운기』에도 그의 불교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같이 『제왕운기』는 다양한 사상이 녹아들어 있는 다원주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10세기 무렵 만주 대륙에서는 거란(9161125)이 건국되어 926년에 발해를 병합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한반도에서는 936년에 고려가 후삼국의 분열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왕조로 거듭났다. 중국에서도 5대 10국의 뒤를 이어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로써 당나라(618907)가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당시의 국제환경과는 다르게, 10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세계는 고려 · 송 · 거란이 각축을 벌이는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고려가 처한 대외환경을 상징하는 동시에 고려의 발전 과정과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사의 대외관계는 중국과의 일대일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중국 대륙과 국경을 마주하였던 고구려는 한나라 · 수나라 · 당나라와 차례로 관계를 맺으면서 한반도에서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왕조는 대외관계의 중심축이 전기에는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청나라와 일대일 관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는 송나라 · 거란 · 금나라 등 주변 여러 나라와 동시에 관계를 맺은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대외관계의 중심축이었다.
이같이 고려가 존속한 동북아시아는 거란이 멸망하는 12세기 초반까지는 고려와 송 · 거란 3국이, 고려 중기에는 고려와 송 ‧ 금이, 1234년(고종 21)에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려와 송 ‧ 몽골(원나라)이 다원적인 관계를 맺으며 각축을 벌였다.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에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다시 고려와 명, 원이 각축을 벌였다. 대륙의 다른 한편에는 송-거란-서하, 송-서하-토번(혹은 베트남)이 각각 각축을 벌이는 또 다른 형태의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원적 국제질서의 특징은 당 제국 같은 강력한 중심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 간 세력균형과 실리외교가 국제질서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물론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도 중국의 왕조와 주변국 간에 조공체제가 유지되었으나, 주변국 입장에서 왕권의 정통성과 영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형식상의 체제일 뿐 강한 구속력은 없었다. 고려는 다원적 국제질서의 마지막 시기까지 존속한 왕조이자, 이 질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왕조였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영토분쟁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 전기 대외관계 역시 영토분쟁에서 시작되었다. 993년(성종 12)에서 1019년(현종 10)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영토분쟁이 원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중요한 외교 현안은 연운(燕雲) 16주의 반환을 둘러싼 송나라와 거란 간의 영토분쟁이었다. 연운 16주란 지금의 베이징〔연(燕)〕과 다퉁〔운(雲)〕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이남에 있던 16개 주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큰 송과 거란 사이의 접경 지역이었다.
거란은 후진(後晉) 건국에 도움을 준 대가로 936년(태조 19)에 이 지역을 후진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송나라는 건국 후 거란에 이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이 거부하자, 979년(경종 4)에 송 태종은 거란을 정벌하기 위해 북벌(北伐)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983년(성종 2)부터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985년(성종 4)에는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무너뜨렸다.
거란은 993년(성종 12)에 고려를 침공하였다(1차 침입). 고려는 거란과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興化) · 통주(通州) · 용주(龍州) · 철주(鐵州) · 곽주(郭州) · 귀주(龜州) 등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고려와의 화약(和約)을 바탕으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거란은 1004년 송과 전투를 벌여 송나라를 굴복시켰다.
현종 때 시작된 거란의 2차와 3차 침입은 강동 6주 반환을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영토분쟁이었다. 거란은 1010년(현종 1) 11월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위한 강조의 정변(1009년)을 구실로 고려를 침입하였다(2차 침입). 이듬해 1월 개경이 함락당하자 고려는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였고,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이후 고려는 친조를 거부하였다.
강동 6주의 지정학적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함께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은 1014년(현종 5) 6월에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한 후 고려 영내로 들어와 보주성(保州城)을 점령하였다. 고려가 국왕의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부하자, 1018년(현종 9) 12월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였다(3차 침입). 그러나 최고사령관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군사에 패배하면서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끝을 맺었다. 1021년(현종 12)에 고려는 전쟁으로 중단된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면서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거란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고려에 보주성을 반환하지 않았다. 약 100년이 지난 1117년(예종 12)에 되찾을 때까지 보주성 반환문제는 두 나라의 주요한 외교문제가 되었다. 1029년(현종 20)에 발해의 주민이 거란에 반란을 일으키고 흥료국(興遼國)을 건국하자, 거란은 흥료국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요청을 거부하고 도리어 거란이 점령한 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덕종(재위: 1031~1034)이 즉위한 1031년(현종 22) 6월에 고려 침입을 주도한 거란의 국왕 성종(聖宗)이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고려는 거란 성종의 장례식과 흥종(興宗)의 즉위식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주성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이 거부하자, 고려는 거란에 항의하기 위해 새로 즉위한 거란 흥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고려는 1032년(덕종 1) 1월에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1033년(덕종 2)에 압록강 하구에서 함경도 안변까지 천리장성 축조에 착수하였고 1044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두 나라는 1039년(정종 5)에 보주성 반환 대신에 보주성 지역에서 고려인의 농경과 정착을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타협하여 8년간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1054년(문종 8)에 거란은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였으며, 1056년에 보주성 일대에 농경지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고려는 이러한 거란의 도발을 무력화하고 견제하기 위해 1071년(문종 25)에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1021년(현종 12)에 거란과 외교관계 수립 후 단절한 송나라와의 관계를 약 50년 만에 재개하였다. 송나라는 이 무렵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을 견제하려는 이른바 연려제료(聯麗制遼)의 외교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고려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적극적이었다. 고려는 거란의 위협을 견제하고 송나라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외교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마침내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
거란은 1074년(문종 28), 고려 영토 외곽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이듬해 압록강 이동의 영토를 다시 확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고려를 압박하였다. 1086년(선종 3)과 1088년(선종 5)에 거란은 압록강 지역에 무역장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면서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가 여러 차례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문제를 해결한 결과, 거란은 무역장과 군사시설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거란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와 송나라의 연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였다. 여진족은 1115년(예종 10) 1월에 마침내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건국 후 금나라는 먼저 거란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같은 해 8월과 11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금나라의 강성함을 의식하여 거란의 요청을 거부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고, 금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금나라는 1116년(예종 11) 8월에 거란이 점령한 보주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 영토인 보주성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1117년(예종 12) 3월에 고려는 군대를 동원하여 금나라의 공격으로 함락 직전인 보주성을 점령한 후 의주(義州)로 이름으로 고치고 고려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1014년 거란에 점령된 지 약 100년 만에 보주성을 탈환하였다.
고려 건국 후 12세기까지 여진족은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만주지역 일대와 한반도의 압록강〔서여진(西女眞)〕과 함경도〔동여진(東女眞)〕 일대에 부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였다. 이들은 종족의 보존과 생존을 위해 고려에 공물을 바치거나 스스로 고려에 복속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는 천자국으로 자처하고 매년 부족 단위로 고려에 조공하는 여진족을 고려왕조를 받드는 울타리인 번(藩), 즉 제후로 간주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지역의 여진족을 서번(西藩),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동번(東藩)이라 각각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은 점차 강성하여 고려와 거란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여진족의 강성함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고려는 1104년(숙종 9)과 1107년(예종 2)에 두 차례 여진을 정벌하였다. 1차 정벌은 실패하였으나, 2차 정벌 때 여진지역에 9성을 건설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반격으로 1109년(예종 4)에 9성을 여진족에 반환하였다. 6년 후 1115년(예종 10)에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1117년(예종 12)에 금나라는 고려가 금나라의 아우가 되는 형제관계의 조약을 고려에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거절하였다. 이어서 금나라는 1124년(인종 2)에 서하를 정복하고, 거란(1125년)과 북송(1126년)을 차례로 멸망시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중심국가로 등장하였다.
금나라는 다시 고려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논의가 팽팽하게 대립하였지만, 고려는 1126년(인종 4)에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고려는 그 대신 금나라로부터 보주의 영유권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고려는 금나라와 군사대결 대신 화친정책을 펼쳐 왕조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송나라는 1126년(인종 4)에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또한 1128년(인종 6)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포로가 된 두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고려에 금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고려는 이미 1126년에 금나라와 화친정책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송나라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송나라는 1127년(인종 5)에 지금의 항주로 도읍을 옮겨 남송을 건국하였다. 이후 고려는 남송보다는 인접한 금나라와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몽항쟁이 장기화하자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講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몽골은 전쟁 종식을 명분으로 고려에 개경 환도와 국왕 친조(親朝)를 요구하였다. 1258년(고종 45)에 최씨 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최의가 피살되어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리고, 국왕과 문신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王政)이 복고되었다. 1259년(고종 46) 4월에 태자(뒷날 원종)가 몽골에 가서 항복하는 것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약 30년간의 대몽항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원성이 높았고, 더 이상 항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강화는 불가피하였다.
강화는 두 나라 지배층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하였다. 고려의 경우 국왕과 문신 관료집단이 무신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었다. 몽골의 경우 황위(皇位) 계승전에 휩싸였던 쿠빌라이에게 강화는 황제로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또한 동쪽의 고려 전선이 사라져 몽골은 이후 남송 정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쿠빌라이는 강화를 맺으면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불개토풍은 이후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할 때마다 고려가 이를 저지하는 명분이 되었다. 고려인의 끈질긴 대몽항쟁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최씨 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을 복고하면서 강화를 주도한 국왕과 문신 관료집단은 무신들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를 없애고 왕정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몽골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세자와 몽골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하고, 충렬왕이 일본원정을 제안한 것도 그러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고려군과 함께 일본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정벌 중 태풍으로 큰 손실을 입어 군대를 철군해야 하였다.
1280년(충렬왕 6)에 원나라는 2차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이듬해 2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2차 일본정벌은 2만 명의 몽골-고려 연합군 외에 10만 명의 송나라 군대까지 동원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태풍과 일본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일본정벌을 포기한 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속하게 되었다.
일본정벌 이후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중심으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고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즉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를 원나라 황제의 사위 나라라는 뜻으로 부마국(駙馬國)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으로 출생한 왕자는 원나라 황실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원나라의 승인을 받은 후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하였다.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등 국왕이 즉위하였다가 실각하고 뒤에 다시 복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른바 한 국왕이 실각하였다가 거듭 왕위에 오르는 것을 중조(重祚) 현상이라 하는데, 이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국왕 임명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하는 예가 된다.
고려의 군사권 역시 원나라가 철저하게 장악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고려 지배는 국왕 임명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는 데 그쳤으며, 고려사회 전반에까지 관철되지는 않았다. 원나라는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의 세원(稅源)을 파악하려 하였으나,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또한 지배층의 주요한 경제기반인 노비제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따라서 원나라의 고려 지배는 제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퇴하자 1356년(공민왕 5)에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나라가 지배한 고려 영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홍건적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여 수도 개경을 점령하는 등 참혹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1350년(충정왕 2)부터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 말까지 계속 침입하였는데, 공민왕은 왜구 토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368년(공민왕 17)에 명나라가 건국되자, 공민왕은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같은 해 원나라는 명나라에 쫓겨 중원에서 몽골지역으로 옮겨 북원을 세웠으나 결국 1388년(우왕 14)에 멸망하였다.
1388년(우왕 14) 2월에 명나라는 요동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과거 원나라 영토이기 때문에 요동지역에 귀속시킨다는 방침을 고려에 통보하였다. 이는 고려의 영토와 백성을 빼앗는 일방적인 조치였다. 고려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 지역은 1258년(고종 45)에 조휘 등의 반란으로 한때 원나라에 편입된 적은 있으나 원래부터 고려 영토임을 밝히고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1388년 3월에 명나라는 이를 묵살하고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보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조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요동정벌 사령관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군대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즉위시키고 최영을 유배시키면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명나라는 위화도 회군 직후인 6월에 귀국하는 고려 사신 박의중에게 철령 이북 지역의 영토 귀속문제는 양국의 입장이 다르니 좀 더 지켜보자는 답변을 보냈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요동정벌을 포기하자, 명나라는 이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고려사회의 전체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일종의 사회론에 해당하는 논의들이 근대 역사학이 성립된 초기부터 제기되었다. 여기에서는 시기의 순서에 따라 제기된 여러 논의의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봉건제 사회론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체계화하려는 연구자들이 1930년대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대토지 소유제가 발달하여 생산력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종식으로 노예공급이 중단되어 노동방식이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재편되었다. 신라 하대 지방세력이 대두하면서 농노제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제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고려왕조는 봉건적 지방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대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역분전과 공훈전 형식의 봉건적 분봉(分封)을 통해 이들 간에 상호 보험적인 집권적 봉건제 사회가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인 고려사 연구자들도 1950년대 이후 봉건제 사회론을 제기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노예제와 봉건제는 직접 생산자의 존재가 노예적인가 농노적인가에 따라 결정되는데, 고려는 무신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노예제에서 봉건제 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신정권 이후 토지 국유제인 공전제의 붕괴, 장원의 발전, 노예 신분의 동요, 부병제의 붕괴와 무사집단의 대두로 인해 봉건제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무신정권 이전의 고려 전기 사회는 중앙정부가 혈연 공동체 수장의 현실적인 크기에 따라 대 족단은 대읍(大邑)으로, 중소 족단은 소읍(小邑)으로, 천민집단은 향 · 부곡으로 각각 신분적으로 편제되었다. 토지 소유형태는 사적인 토지소유가 실현되지 않은 단체적, 집단적 소유형태의 노예제 사회였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국내 연구자들은 통일신라기 이후 토지가 사유화된 사실에 근거하여, 통일신라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집권체제의 강화에 의해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가 실현되면서 중세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고려사회는 사적인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한 생산관계, 즉 지주전호 관계에 입각한 사회가 된다.
귀족제 사회론은 작위의 세습, 토지의 무기영대적(無期永代的)인 소유, 폐쇄적인 통혼권의 형성을 제도적 특징으로 한 서양의 귀족(Aristocracy) 개념을 원용하여 고려시대 지배세력의 실체를 귀족적인 존재로 보았다. 구체적으로 음서제와 공음전을 정치 · 경제 기반으로 하여 왕실이나 유력 가문과 폐쇄적 통혼권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가문을 유지시키고자 한 문벌귀족이라 하였다.
또한 5품 이상의 관료가 3대 이상 배출된 가문이 문벌귀족 가문이며, 이들이 고려사회를 주도하였다고 보았다. 문벌귀족은 고려의 관료체계상 재상(宰相)에 해당되는데, 중서문화성과 중추원에 소속된 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들은 이(吏) · 호(戶) · 예(禮) · 병(兵) · 형(刑) · 공(工) 6부의 장관직과 국왕에 대한 간쟁과 관리의 비행, 관리의 임면(任免), 풍속의 교정을 관장하는 대간의 장관직을 겸임했을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나아가 문벌귀족이 합좌한 재추회의에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결정된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라 하였다.
관료제 사회론은 1930년대 이래 통설의 지위에 있던 귀족제 사회론의 주요한 근거인 음서제(蔭敍制)와 양반공음전시(兩班功蔭田柴)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1970년대 초반 제기되었다. 먼저 음서제는 국가에 공을 세운 관료의 자손에 대해 국가적 보은(報恩)의 의미로서 단순히 초직(初職)만 준 것에 불과하며, 서양의 귀족제와 같이 여러 대에 걸쳐 관직을 승계하는 제도가 아니라 하였다.
다음으로 양반공음전시(혹은 공음전)의 지급 범위인 1품에서 5품까지의 품(品)은 관품(官品)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훈(功勳) 내용에 따른 단계, 등급을 뜻하며, 5품 이상이 아니라 국가에 공훈이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지급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 열전 650명의 인물 가운데 340명이 과거 출신자로서 음서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자는 4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당시 관리 선발의 정도(正道)는 과거제이며, 음서제는 부차적 종속적 관계였다고 하였다. 고려사회는 이같이 관리 등용에서 과거의 가치체계가 전 국가, 전 역사적으로 확립된 관료제 사회였다고 한다.
문벌사회론은 귀족제 사회론을 비판하면서 1990년대에 제기되었다. ‘법제적 특권의 향유’와 ‘지위의 세습’을 지표로 하는 귀족은 고려 때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제도장치로 간주하였던 음서제는 새로운 지배체제에 적합한 관료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국왕 주도의 시책으로서, 반 귀족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문벌가문은 몇 대 지나지 않아 곧 소멸되었으며, 특유의 문벌의식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지배세력만 두고 볼 때 고려사회를 문벌사회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였다. 문벌사회론은 개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배경이 중시되어 교육, 관리임용, 권력구조 등에서 상류층에 대한 우대책이 입안되고 실시되던 사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대책이 귀족제를 유지할 정도의 법제적인 장치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나아가 귀족제 사회론은 골품제 사회를 극복한 고려사회의 발전상을 퇴색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다원사회론에서 본다면, 고려왕조는 다양한 질서와 원리로 운영된 다원사회의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다원사회의 특성은 먼저, 문화와 사상에서 나타난 다원성과 통합성이다. 사상에서 불교 · 유교 · 도교 · 풍수지리 · 민간신앙 등 서로 이질적이면서 다양한 사상이 큰 충돌 없이 공존하였다. 문화에서 나전칠기 · 불화 · 상감청자 등 문벌귀족의 세련된 중앙문화와 철불 · 석불 등 호족세력의 투박하고 역동적인 지방문화가 공존하였다.
다음으로, 사회와 경제의 개방성과 역동성이다. 고려는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필요한 인재는 국적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는 개방정책을 펼쳤다. 우리 역사에서 하층민의 신분상승과 정치진출이 가장 활발하였을 정도로 고려사회는 역동성을 지녔다.
다원사회의 형성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려왕조의 등장은 진골귀족에서 호족으로 지배세력의 혁명적 교체와 함께 경주 중심의 귀족불교 해체와 선종 대두로 신앙 주체와 불교 종단이 다변화되었다. 6두품 세력이 유교 정치이념을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여 사상과 정치세력의 다원화를 열었다. 또한 호족세력과 옛 삼국의 다양한 인적 · 문화적 자원은 물론 귀화한 주변국의 종족과 주민을 고려의 신민(臣民)과 울타리로 삼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개방정책도 다원사회 형성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
여기에서는 개별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방식은 지양하고, 쟁점이 되었거나 연구방법과 내용에서 연구사적 의미가 있는 성과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 한국 연구자들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비판하였다. 정체성론은 19세기 말 조선사회는 봉건제가 성립되지 못한 노예제 말기 단계의 정체된 사회라 하였다. 1930년대 백남운을 비롯한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고려 역사에서 봉건제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고려왕조를 집권적인 봉건사회라 하였다(백남운, 1933 · 1937).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자주적인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 운동이 사대적인 김부식 일파에 진압되어 한국사는 사대와 보수적인 유가사상에 정복되어 발전이 없었다고 하여, 역사에서 자주적인 모습을 찾는 것을 역사 연구의 본질로 이해하였다( 신채호, 1930). 1930년대 조선학 운동과 맞물려 고려 역사에서 삼별초 항쟁과 대외관계( 김상기, 1938), 위화도 회군과 전제개혁( 이상백, 1936 · 1949), 풍수지리와 도참사상( 이병도, 1948) 등의 연구성과로 이어졌다.
1950년대 연구는 일본인 고려사 연구자들이 주도하였다. 그들은 한국사의 중세는 무신정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무신정권 등장을 계기로 공전제(公田制) 붕괴와 장원의 발생, 노예신분의 동요, 부병제의 붕괴와 무사집단의 등장 등으로 노예상태의 직접 생산자가 농노(전호)적인 경영으로 전환되면서 중세 봉건제가 성립된다고 하였다(前田直典, 1957). 이 주장은 무신정권 이전 고려 전기 사회에서 고대 노예적 요소를 찾는 논의로 발전하였다.
먼저, 토지의 적장자 단독상속론이다. 고려 전기 사회는 적장자에게 토지가 단독으로 상속되어,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계층이 미분화된 집단적 · 혈연적인 고대사회라 하였다. 다음, 군현제의 신분적 편성론이다. 군현의 행정 단위는 촌락의 혈연적인 결합관계를 기초로 족단세력(호족)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려 전기에는 주 · 부 · 군 · 현은 양인집단, 향 · 부곡 · 소는 천민집단으로 신분적으로 편성된 고대사회라 하였다(旗田巍, 1957 · 1972).
식민지 시기 이래 토지 국유론이 대세였다. 국유론은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와 상속을 부정하고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1960년대 토지 사유론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사유론은 왕토사상은 관념에 불과하며, 통일신라기 토지매매의 사례를 통해 국유론을 부정하였다. 전시과 토지는 납공토지와 전체토지로 구성되었는데, 전체토지에서 사적 토지소유의 실체를 밝혔다(이우성, 1965).
1960년대 연구에서 특기할 것은 병제사 연구이다. 군인 가운데 경군과 주현군은 각각 다른 충원 방식과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론이 군반제(軍班制)론이다. 군반제론에 따르면, 경군은 군반씨족이라는 전문적인 군인층에 의해 충원되었으며, 이들은 향리 · 서리 등과 같이 전시과를 지급받은 중간 신분층으로 일반 농민으로 구성된 주현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고 한다(이기백, 1968).
부병제론은 고려시대 군인은 기본적으로 농민이며, 이들의 번상 시위에 의해 경군으로 충원되어 경군과 주현군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경군은 전시과를 지급받은 중간 신분층이라는 군반론을 부정하였다( 강진철, 1963 · 1980). 이후 경군 가운데 2군은 군반씨족제, 6위는 부병제의 원리가 작용한 2원적 구성설이 제기되었다(홍원기, 1990). 이 논쟁은 군역의 내용, 군인의 성격과 구성, 군인전의 실체를 둘러싸고 수준 높은 논쟁으로 사회경제사 연구를 촉발시켜 고려사 연구 수준을 향상시켰다.
또한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시대구분론이 제기되었다. 중세 기점 문제는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지방세력과 선종의 대두, 6두품 유교지식인의 진출 등으로 고려왕조 성립을 중세의 시작으로 본 견해( 김철준, 1968 · 1970)와 토지에 기초한 지배로 인해 농민이 농노적인 존재로 전환된 무신정권 이후를 중세의 시작으로 본 견해(강진철, 1970)가 제기되었다.
이와 함께 친족공동체(김철준, 1968), 6두품과 유교이념(이기백, 1969), 선종교단(최병헌, 1972 · 1975), 사대부와 권문세족(이우성, 1964; 민현구, 1974) 연구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고려시대 개설서 『한국사-중세편』(진단학회, 1960)과 『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0)가 발간된 것도 고려사 연구가 1960년대 본격화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는 지배층 및 정치제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3성 6부, 대간제도 등 중앙 정치제도와 문반 · 무반에 관한 실증적 연구는 정치제도사 연구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이태진, 1972; 변태섭, 1975; 박용운, 1980). 한편 지배세력의 성격을 둘러싼 귀족제(변태섭, 1975; 이기백, 1975)와 관료제(박창희, 1973) 사회론이 제기되었다(고려 항목의 “고려사회의 성격” 참고). 이를 계기로 사회론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음서제, 양반공음전 및 과거제 연구가 본격화되어 1980년대에 연구성과(허흥식, 1981; 박용운, 1990; 김용선, 1991)로 구체화된 것은 사회론의 긍정적인 성과이다.
1980년대 연구에서 주목되는 성과는 그동안 고려사 연구를 주도하였던 일본인 고려사 연구자의 고려 전기 고대사회론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남녀 균분상속론(최재석, 1981; 이희권, 1983)이 제기되면서 적장자 단독상속론이 부정되었다. 이는 가족과 혼인(허흥식, 1981; 최재석, 1982 · 1984), 친족과 상속제도(노명호, 1981 · 1988; 최재석, 1982) 등의 연구성과에 힘입은 것이다.
적장자 단독상속론은 당률이나 조선 후기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구조에서 유추된 것에 불과하였다. 또한 조세와 역역 수취를 위한 행정촌제(박종기, 1987)와 토성분정(土姓分定)과 본관제(채웅석, 1986) 연구 등으로 혈연 공동체에 기초한 신분적 편성론은 부정되었다.
1980년대에는 토지 사유론에 관한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 공전과 사전의 개념과 1/10 세제 시행을 밝힌 연구(이성무, 1980; 박종진, 1984), 수조권에 입각한 국가적인 토지분급제 연구(김용섭, 1981) 등은 전시과 토지인 사전은 1/2조, 농민의 보유지인 공전은 1/4조라는 고율의 지대가 부과되어 고려 전기 농민은 자립이 불가능한 고대적인 존재로 간주한 고려 전기 고대사회론의 한 축인 차율수조론(差率收租論)(강진철, 1980; 浜中昇, 1984)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또한 사회사 연구가 활성화되고 연구 분야가 확장되었다. 부곡민(김용덕, 1980; 이우성, 1983; 박종기, 1990), 노비(홍승기, 1983), 촌락(박종기, 1987), 민의 저항운동(윤용혁, 1986; 박종기, 1990; 채웅석, 1990), 가족제도(노명호, 1988) 연구 등이 새로운 연구 분야로 주목받았다.
불교와 유교 등 사상사 연구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고려 중기 법상종 · 화엄종 · 천태종과 선종 연구(최병헌, 1980 · 1981 · 1983; 허흥식, 1986; 한기문, 1990), 고려 후기 신앙결사운동과 불교계 재편 연구(고익진, 1983; 진성규, 1984; 허흥식, 1986; 최병헌, 1987; 채상식, 1991), 유교의 역할과 기능(이희덕, 1984), 성리학 수용 연구(정옥자, 1981; 이태진, 1986)는 유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단서를 열었다.
1990년대 이후에 주목되는 연구 활동은 1970년대 정치제도사에 국한되었던 연구가 정치운영과 정치세력 연구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제설이 정설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다. 1990년대 후반부터 3성제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중서성 · 문하성 · 상서성은 각각 독자의 기구로 운영되었다. 고려 초의 광평성 · 내의성 · 내봉성은 각각 중서성 · 문하성 · 상서성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중서문하성은 3성의 재신들이 모여 국정을 의논한 정사당(政事堂)으로 이해하였다(최정환, 2006; 이정훈, 2007).
한편 고려 중기와 후기가 각각 시작되는 12세기와 14세기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최근에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외교의례, 가족제도, 원간섭기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연구는 1980년대 연구를 계승하거나 그것을 체계화하는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연구방법과 내용에서 뚜렷한 성과와 쟁점은 제기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참신한 문제의식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고려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연구성과가 속출하여 현재 침체에 빠져있는 고려사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