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조선목차버튼
바로가기
내 검색어

    조선(朝鮮)

    조선시대사지명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이씨(李氏)가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조선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세종어제훈민정음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지명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이씨(李氏)가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
    영역닫기영역열기개관
    조선 왕조를 이룩한 주도 세력은 신흥사대부 세력과 무장 세력이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안으로는 농장(農莊)의 확대에 따른 사회적 모순의 증대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고,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 민족적 시련이 가중되었다. 이 때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해 등장한 무장 이성계(李成桂)가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신흥사대부 세력과 힘을 합해 조선 왕조를 세웠다. 이에 앞서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뒤, 전제 개혁으로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 재정과 신흥사대부의 경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이들 신진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고 신흥사대부가 수용한 성리학을 사회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조선 왕조의 정치 체제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였다. 여기서 중앙집권제라는 것은 고려시대에 비해 중앙집권 체제가 보다 강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예컨대 군현제가 일원화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였다. 이에 따라 속군·속현을 없애고 중앙에서 수령을 모든 군현에 직접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소·부곡 등 특수 행정구역도 제도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양반관료제는 단순히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던 고려시대의 양반제도와는 달리, 조선시대에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층, 곧 사대부 계층이 따로 생겼음을 의미한다. 특히 관료 임용에서도 고려시대에는 과거보다 음서(蔭敍)의 비중이 컸으나, 조선에서는 과거를 훨씬 중시하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형식상 문반·무반으로 양립되기는 했으나 문반 위주로 운영되었다. 즉,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와 행정권을 가진 육조,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언론 기관인 삼사 등 중앙 정부의 중요기관은 거의 문반에 속해 있었다. 이에 비해 중추부와 오위도총부 등 일부만이 무반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의 권력 구조는 왕권의 강약에 따라 사대부의 의견이 반영되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되기도 하고, 왕이 의정부를 소외시키고 직접 육조를 통해 왕권을 집행하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되기도 하였다. 세종 때 승정원을 6승지제로 고친 것은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임금과 신하와의 권력 균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론과 문필을 맡은 삼사는 왕의 전제와 행정의 전천(專擅)주 01)을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무반의 최고관부는 중추부지만 실권 없는 기관이었고 오위도총부가 실질적인 최고관부였다. 그러나 그 수장인 도총관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사실상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초기의 중앙권력 구조는 왕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의정부의 의결권, 육조의 행정권, 언론 기관인 삼사 등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구조는 중기에 이르면서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전랑(吏曹銓郎)의 자대제(自代制)로 그 운영 방식이 달라졌다. 비변사는 중종 때부터 국방 문제를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방 문제만이 아니라 의정부 기능인 일반 정무까지도 합좌의결 형식으로 관장하게 되었다. 이조전랑의 자대제란 전랑의 후임 선정에 있어 왕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해 임명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는 사림의 공론을 대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또, 이조전랑의 삼사 임원 임명권은 삼사가 비변사에 위축되어 그 임무를 저버리게 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견제의 권력 구조는 18세기 초에 탕평책의 일환으로 이조전랑의 자대제가 폐지되고, 이에 따라 삼사의 견제 기능도 없어지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더욱이 비변사 대신(大臣)을 중심으로 벌열정치화(閥閱政治化)되면서 왕권마저 약화, 마침내 세도정치가 행해졌다.
    조선 초기 양반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고 있던 것은 과전법(科田法)이라는 토지제도였다. 고려 말기 전제 개혁의 목적은 농장의 발달에 따라 문란해진 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고, 위로는 신진 관료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며,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전법의 실시로 권문세족의 탈세지였던 농장·토지는 모두 과세지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신진 관료에게는 사전(私田)이 분배되었으며, 농민에게는 소경전(所耕田)의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과전법은 세조 때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고, 성종 때에는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었다. 이는 건국 초 이래의 사전억압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직전제마저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의 토지제도는 뚜렷한 개편은 없었지만, 여러 양상으로 변모해갔다. 궁방전(宮房田)의 설정, 관둔전(官屯田)의 확장, 민전(民田)의 탈입(奪入)과 투탁(投托), 은결(隱結)의 격증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토지소유 관계에 대한 학계의 동향은 종래 토지국유제론이 지배적이었으나 1960년대부터 토지사유제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즉, 그동안의 연구에 힘입어 공전·사전·민전에 대한 복합적인 개념이 정립되었고, 민전은 민유지로서 상속과 매매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산업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업이었다. 조선 초기 농업에서 주목되는 것은 개간의 확대와 농업 기술의 발달이다. 개간 사업은 주로 연해 지방과 후진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농업 기술로는 시비(施肥) 방법의 발달에 따라 농지를 휴한(休閑)시키지 않고 연작하는 방법이 보급된 것을 들 수 있다. 또, 논농사에서는 건경법(乾耕法)이 개발되고, 밭농사에서는 윤작법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고려 말기이래 신흥사대부에 의해 중국의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수용된 데 연유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논농사는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밭농사는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畎種法)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노동력을 절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여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농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지주제에 변동을 가져오게 되어, 농민 중에서 광작(廣作)하거나 상업적 영농으로 부농이 되기도 하고 서민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서민 지주의 등장은 지주제·전호제(佃戶制)에 있어 신분적 예속성의 약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지주제의 변동은 지대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이에 따라 종래의 타조제(打租制) 외에 도조제(賭租制)나 금납제가 행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농민은 신분상 상민층과 천민층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다수가 상민층에 속하였다. 상민층 농민으로서 자작농은 국가에 대해 전세 외에 지방 특산물인 공물(貢物), 군역과 요역(徭役) 등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소작 농민인 전호(佃戶)는 전세 대신 전조(田租)를 지주에게 바쳤다. 농민의 토지소유 상태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토지소유 농민이 7할이던 것이 후기에는 토지를 가지지 않는 농민이 7할로 반전되었다. 후기에는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 재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 등을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상업 활동은 서울의 난전(亂廛), 지방의 장시(場市), 그리고 경향의 도고(都賈)들이 중심이었다. 서울의 상업은 전기에는 어용 상점인 시전(市廛)이 독점했으나 후기에는 이에 맞선 난전 세력이 등장하였다. 지방의 장시는 16세기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소나 개설되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공인(貢人)이 상업자본을 형성, 도고상인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경강상인(京江商人)과 송상(松商)은 전국적 규모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의 공업은 모두 수공업이었다. 초기의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은 16세기 초부터 무너지고, 후기에는 특수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공업이 사장제(私匠制)로 바뀌었다. 특히, 대동법 실시 후로 수공업계는 전반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로 17세기 말에는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사회적 신분 질서가 엄격하였다. 15세기에는 양반·상민·천인으로 구분되었으나, 16세기 초에 중인층이 형성되면서 양반·중인·상민·천인의 네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양반은 고려시대에는 문반과 무반을 함께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 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사대부란 “독서인은 사(士)요, 종정(從政)은 대부(大夫)라.”한 것처럼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 정치에 참여하던 계층이었다. 중인은 좁은 뜻으로는 서울의 기술관을 가리켰으나, 넓은 뜻으로는 서울과 지방의 경아전(京衙前)·아전·군교(軍校) 및 서얼(庶孽)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상민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군역·요역 및 공물 등을 바치는 의무가 지워졌다. 원래 농민은 상민과 천인으로 구별되었는데, 이는 법제상으로도 분명히 구분되었다. 또, 상민과 천인의 중간에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상민이면서도 직업이나 주어진 임무가 천한 계층으로서, 조선 초기에 양인확대 시책의 일환으로 창출된 것이었다. 천인은 그 대부분이 노비로 이루어졌다. 전기의 노비는 대다수가 농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다만 봉건적 예속민으로 신분적 지위가 다소 향상되어갔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경제의 변화에 따라 농민층이 내재적으로 성장한 데다가 구조적 모순으로 지배층이 흔들리면서 신분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양반은 벌열·향반·잔반(殘班) 등으로 세분되었고, 중인도 전문적 직업성이나 행정 능력 등 여러 요인으로 신분적 지위가 달라졌다. 상민도 지주·부농·빈민·전호 등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져, 평민 중에는 족보를 위조하거나 호적에 양반으로 위장해 양반 노릇을 하는 자의 수가 늘어갔다. 이에 따라 상민과 천인의 신분적 장벽도 서서히 무너져갔다.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公奴婢)를 해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변동은 신분 구조를 크게 바꾸어, 17세기 말에는 전체 인구의 1할에 불과했던 양반의 구성 비율이 19세기 중엽에는 7할까지 뛰어올랐다.
    조선시대의 문화 현상 중 가장 뚜렷한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을, 그 서문에서는 민족적 자각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으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훈민정책의 일환이었다. 즉, 조선 왕조는 농업 기술의 지도·보급과 유교 윤리의 권장에 중점을 두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세종은 농민 교화의 방법으로써 훈민정음을 창제할 필요를 절감한 것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우리 글자를 가지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민족 문화의 터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 전기 과학기술면에서는 인쇄술의 발달, 측우기의 발명, 『동의보감』의 저술 등 수준 높은 업적을 들 수 있다. 인쇄술에서는 1234년(고종 21)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1403년(태종 3)의 계미자(癸未字)도 서양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종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은 1442년(세종 24)이었다. 이는 서양의 그것보다 약 1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 선조 때 허준(許浚)이 지은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동양의 한의학 및 본초학상 특기할만한 쾌사로 꼽힌다.
    조선시대 철학적 지도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16세기 이후 유교적인 교화 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이룬 학문으로서 우주의 근원, 사물의 법칙, 인간의 본질 및 윤리 문제 등을 체계화하여 크게 발달하였다. 후기에는 실학사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내재적인 자각과 비판 및 서양의 과학적·합리적 사상이 결합되어 이룩된 것이었다. 이 시기 실학사상의 특징은 민족 의식과 근대지향 의식이 바탕을 이룬 점이었다. 즉,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 의식을 자각하게 되었고, 실학자들이 주장한 토지제도의 개혁, 상공업의 진흥, 대외 무역의 권장, 중세적 계급성의 타파 등은 근대를 지향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실학사상은 뒤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서는 근대화를 전제로 한 민족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서민적이면서 한국적인 특색이 나타났다. 문학 면에서는 시조·가사·소설 등 한글 작품이 쏟아져 나왔고, 광대들은 극가(劇歌) 형식의 판소리를 즐겨 불러 대중적 놀이마당으로 등장하였다. 한문학도 종래 유교적 사대부 문학에서 서민적 취향으로 변해갔다. 박지원(朴趾源)의 자유분방한 문체, 가식적인 양반풍자 소설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서당이 보급되어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면서 양반 아닌 학자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림에서도 한국적 산수화와 풍경화가 나타났고, 서민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풍속화가 많이 그려져서 양반 문화 일변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가 전파되고, 이에 대립적인 동학이 일어나 평등사상을 기초로 한 서민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정치
    영역닫기영역열기1. 중앙의 정치 기구
    영역닫기영역열기1.1.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절대왕권과 양반관료 사이의 권력 조화가 배려된 구조였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정립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의 80여 관아 중 대부분이 그 직능에 따라 육조에 소속된 속아문이었다. 그 밖의 관아로는 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를 비롯해 육조, 승정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 중추부, 오위도총부 등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기관으로 의금부·한성부·개성부·겸사복(兼司僕)·내금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왕족, 왕의 외척과 공신에 대한 예우기관인 종친부·충훈부·의빈부(儀賓府)·돈녕부 등이 있었다.
    의정부는 백관과 서정(庶政)을 총리(總理)하는 동반의 최고 관부로서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이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찬성(左贊成)·우찬성(右贊成), 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이 보좌하며, 그들의 합의로 중요 국사를 의결하였다. 의정부 아래에 각 부의 행정을 관할하는 육조가 있었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 호조는 호구와 조세, 예조는 의식·외교·학교·과거, 병조는 국방·무관의 인사, 형조는 법률·소송 및 노비 문제, 공조는 토목·영선(營繕)·공장(工匠) 등의 사무를 각각 분장하였다.
    육조에는 각각 판서·참판·참의의 삼당상(三堂上)이 있고, 그 밑에 정랑(正郎)·좌랑(佐郎)의 두 낭관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이에 권한 변동이 생김에 따라 의정부서사제 또는 육조직계제가 반복되었다. 사대부의 의견이 의정부의 의결권을 통해 반영되던 의정부서사제, 의정부를 소외시키고 육조가 모든 정무를 왕에게 직접 고하고 왕명을 직접 집행하던 육조직계제가 그것이다. 태조 때는 의정부서사제의 대표적 시기였고, 태종·세조 때는 육조직계제의 대표적 시기였다.
    세종은 전반기에는 육조직계제, 후기에는 의정부서사제를 택하였다. 세종 때 승정원에 6승지제도를 마련한 것은 의정부와 육조의 권력 균형을 위해 제도화된 것이다.
    6승지제란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 6인의 승지를 두어 육조와 각각 연결시킨 것이었다. 즉,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사무를 각각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정치는 국왕의 학문기관인 경연(經筵)에서 많이 논의되었다. 직제상 승지는 모두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했고, 이 밖에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였다. 또 도승지는 따로 예문관직제학과 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임하여 승지는 자연히 국정의 중요 사무에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언론기관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있었다. 사헌부는 관료의 부정과 실정을 규찰하는 기관이고, 사간원은 국왕에 대해 간쟁하고 논박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기관을 통칭해 대간(臺諫) 또는 양사(兩司)라 하였다. 대간은 따로 서경(署經)이라는 권한도 행사하였다. 이는 당하관 이하의 관리 임용에 있어서의 인준권, 입법에 있어서의 동의권을 말하는 것이다. 중대한 국사에 대해 왕의 뜻을 움직이려 할 때는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홍문관까지 합세시켜 삼사합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홍문관은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기관인데, 이 삼사는 언론과 문필의 자유가 보장된 기관으로서 왕권의 전제와 관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있었다. 의금부는 국왕의 직속 사법기관으로 왕명에 따라 왕족의 범죄, 국사범이나 반란·역모 등 중대 옥사,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강상(綱常)의 죄, 중외에서 장기간 처리하지 못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이 밖에 왕의 교서 등을 짓는 예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승문원, 시정을 기록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경적(經籍)의 출판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 등의 4관(四館)이 있었다.
    한편, 중추부와 오위도총부는 서반 최고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기관이었다. 이 중에서 중추부는 군사상의 기밀을 관장하는 최고 관부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다. 따라서 서반의 실질적인 최고 관부는 오위도총부였다. 그러나 그 장관인 도총관(都摠管)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무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 정치 권력은 국왕을 정점으로, 의정부와 육조와 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국왕은 전제적 왕권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 합의제에 의한 의결권이나 대간의 간쟁·서경 등의 견제를 받았다. 반면, 의정부는 의결권을 행사하면서도 왕권의 견제를 받았으며, 육조는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대간의 감찰권이 이를 견제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1.2. 비변사와 이조전랑 자대제
    조선 초기의 정치 권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권·의정부·육조·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전랑 자대제의 실시로 중앙의 권력운영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비변사는 1517년(중종 12)에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 침입에 대비해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가 1522년에 이르러 상설기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래 비변사는 문무 고관의 합의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 정무까지도 간여하게 되었다.
    비변사의 임원은 도제조(都提調)·제조·부제조·낭청(郎廳)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도제조는 전임 또는 시임(時任)의 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2품 이상의 국방에 밝은 재상과 이조·호조·예조·병조의 판서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부제조는 정3품의 문신 중에서 임명되었다.
    도제조·제조·부제조는 모두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이었으므로 이를 통칭해 ‘비변사당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국방 문제에 밝은 3인을 뽑아서 상임위원격인 유사당상(有司堂上)을 삼아 비변사에서 군사 기밀을 처리하게 하였다.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한 낭청은 12인의 당하관이었다.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자 자연히 의정부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비변사의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변사에 의한 문무 고관의 합의제는 고종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 최고기관으로서의 의정부의 권위는 형식상으로나마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묘당(廟堂)이라는 이름으로 의정부와 비변사가 합칭되었다.
    비변사는 의정부의 3정승과 육조의 6판서 등이 합좌해 모든 정사를 의결, 처리하였다. 그리고 삼사는 비변사에 대한 견제 기능을 계속 가졌다. 삼사 관원의 임명권은 이조전랑에게 부여했는데, 이는 삼사가 비변사의 권능에 위축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전랑의 경질은 왕권의 제약도 없이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는 자대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기에 발달한 서원(書院) 중심으로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반영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변사의 합의제와 이조전랑 자대제에 의한 상호 견제의 권력 구조도 영조 때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이조전랑 자대제가 혁파되면서 삼사의 견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중앙의 권력운영 방식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사의 견제 기능이 없어지자 비변사의 대신중심정치는 자연히 벌열정치의 성향을 띠게 되고, 이를 견제하던 왕권마저 약화되자 마침내 파행적인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지방의 통치 조직
    영역닫기영역열기2.1. 관찰사와 수령
    지방 통치를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300여 고을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군·현을 두어, 각각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각 도에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 하는 방백(方伯)을 파견하였다. 또 각 고을에는 부윤·대도후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의 수령을 파견해 다스렸다.
    각 고을의 차등은 취락의 대소, 인구의 다과, 전결(田結)의 광협 등을 고려해 결정되었다. 고려시대까지 있어온 속현, 천민 집단인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의 특수 구역은 태종 때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제도로서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실제 고을의 관할 구역 중 비지(飛地, 또는 越境地)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의 상당수는 향·소·부곡의 유흔이었다.
    개성부는 유수(留守)라는 경관직이 다스린 중앙직할 지구였다. 후기에는 광주(廣州)·강화·수원에도 유수를 두어, 개성과 함께 4도(四都)라 하였다. 관찰사는 도내의 각 수령을 감독할 임무를 띠고 행정·사법뿐만 아니라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도 겸했으므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관찰사는 출신지에 임명하지 않았고, 임기도 1년으로 짧게 제한, 그 지방에 세력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본래 관찰사의 주임무는 관내의 각 고을을 순회, 감독하는 일이었으므로 순찰사(巡察使)까지 겸하였다.
    관찰사의 보좌관에는 도사(都事)·판관(判官) 등이 있었다. 도사는 관할 수령의 부정 규찰 및 과시(科試)를 관장했고, 판관은 관찰사가 겸직하는 주·부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은 고을의 차등에 따라 종2품에서 종6품까지 위계차가 있었는데, 모두 행정권·사법권 이외에 첨절제사(僉節制使) 이하의 군사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수령의 임기는 3년이고, 역시 출신지에는 임명되지 않았다. 수령의 임무는 대개 농업의 장려, 호구의 확보, 교육의 진흥, 군정(軍政)의 수비(修備), 부역, 사송(詞訟) 및 향리의 지휘·감독 등으로 요약된다.
    수령에 대한 관찰사의 근무 평정은 4등급으로 중앙에 보고되었다. 이를 전최(殿最)라 하는데, 그 성적은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상관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수령을 역임해야 했으므로 수령의 근무 평정은 당상관 진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관찰사나 수령의 부정, 토호의 불법, 민생의 상황 등을 살피기 위해 중앙에서 행대감찰(行臺監察)을 지방에 파견하는 일이 많았다. 이른바 암행어사는 뒤에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2.2. 향리(鄕吏)와 토관(土官)
    관찰사와 수령 밑에는 중앙의 육조체제를 본떠 육방(六房)을 두고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이 향리이다.
    향리는 아전(衙前)이라고도 하였다.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수령과 백성의 중간에 위치해 그 세력은 대단하였다. 지방의 중요 사무는 호장(戶長)과 이방·형방이 관장했으며, 이들을 일명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기강이 엄해 향리의 부정 부패가 적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향리가 수령과 결탁, 마음대로 사욕을 채웠다. 사실상 토지나 녹봉을 주지 않은 제도상의 결함이 부정 부패의 요인이었다.
    게다가 수령들은 대개 사무에 어둡고 임기가 짧았으므로 고정직인 향리가 지방 행정의 실권을 쥐고 튼튼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러한 수령과 향리와의 관계를 ‘강류부전석(江流不轉石)’이라고 비유하였다. ‘수령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데 향리는 구르지 않는 돌과 같다.’는 뜻이다.
    수령은 행정 이외에 군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행정적 속료(屬僚)인 이서(吏胥) 외에 군사 속료인 군교(軍校)·사령(使令) 등이 있었다.
    한편, 특정 지역에 토관의 제도가 있었다. 토관을 둔 곳은 평양과 영흥을 비롯, 육진(六鎭)과 경성·영변·의주·강계 등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였다. 그 밖의 지역으로는 제주도가 있는 정도였다. 토관은 그 지방의 토착인 중에서 군사적·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제도는 중앙 정부가 그 지방의 유력자를 포섭, 안으로는 지방 행정의 효율화와 군사적 방어 조직의 강화 등 변진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밖으로는 야인(野人)과의 연결을 방지하려는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세조 때에는 경주·전주·개성 등 후방 내륙에도 토관을 둔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토관직은 특별직으로서 동반과 서반으로 나누어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제도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고 토관직이 없었던 다른 6도와 같이 향리로 대체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3. 면리제(面里制)
    조선시대에 나타난 지방사회 구성의 새로운 모습은 면리제의 확립이었다. 즉, 군·현 밑에 면 또는 사(社, 함경도에 많음)·방(坊, 평안도에 많음)이 있고, 면 아래에 이·촌이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은 군·현에 그치므로 면 이하는 지방자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측과 지방자치측과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었다. 즉, 정부가 수령을 통해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려한 데 비해, 지방의 사족(士族)은 자치적 재량을 요망한 것이다. 고려 말기 이래로 지방 사족들이 각 지방에 유향소(留鄕所)를 둔 것은 그러한 요구의 발로였다.
    초기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강해 유향소가 두 차례나 혁파되었다가 복립되기도 하였다. 즉, 1410년(태종 10)에 혁파된 유향소는 1428년(세종 10)에 복구되었으나,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전국적으로 모두 폐지되었고, 그 이후 1471년(성종 2)에 다시 복구되었다.
    유향소의 후신인 향소는 향청(鄕廳)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지방 양반 중에서 덕망 있는 자를 뽑아 좌수(座首)라 하고, 그 밑에 여러 명의 별감(別監)을 두었는데,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향소 역시 육방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방과 병방을 맡고, 좌별감이 호방과 예방을, 우별감이 형방과 공방을 각각 분담하는 것이 통례였다.
    향소의 기능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 제도가 가장 발달한 곳은 영남이었다. 그 중에서도 안동은 중앙의 요직을 역임한 자가 향임을 맡는 풍속이 있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현직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경재소(京在所) 제도를 활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경재소는 경향간의 연락으로 지방 일을 주선하는 동시에 향소와 함께 수령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경재소에는 서울에 있는 그 지방 출신의 현직 관료가 배속되었으나, 뒤에는 그 지방과 연고를 가진 서울의 유력자가 맡기도 하였다.
    이 밖에 향리 한 사람을 서울에 상주시켜 지방 관아의 일을 맡게 했는데, 이를 경저리(京邸吏, 혹은 京主人)라고 하였다. 경재소가 품관(品官)에 의해 운영된 데 비해 경저리는 향리였으므로 신분상 큰 차이가 있었다.
    경저리의 주요 임무는 그 지방의 공물 상납과 지방의 노비를 가려 뽑아 중앙 관아에 바치는 선상노(選上奴)의 충립(充立) 등이었다. 경저리에 대해서 감영에 파견된 고을의 향리를 영저리(營邸吏, 혹은 營主人)라고 하였다.
    한편, 유향소가 부활해 제도로서 공인된 임무는 풍속의 규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현 안의 각종 징세인 조(租)·용(庸)·조(調)의 배정과 주관 등의 일에 수령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따라서 초기이래 면·이(里)까지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원래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향소의 기능을 뒷받침해주는 지방 자치규율로 향약(鄕約)있었다. 향약의 기원은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인데, 주자(朱子)의 증손남전여씨향약(增損藍田呂氏鄕約)이 들어와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 그 뒤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 이이(李珥)의 서원(西原) 및 해주(海州) 향약 등이 행해지면서 전국에 파급되었다.
    향약의 4대 강령인 이른바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규제하며(過失相規), 예속은 서로 교환하며(禮俗相交), 어려움은 서로 돕자(患難相恤)는 것은 유교의 도덕규범을 지방 자치규범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향약은 고을 단위로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범위를 좁혀 동계(洞契)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경재소가 혁파되면서 지방 사회의 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이 조처는 중앙 관료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 사림이 지방자치권을 장악하자 향소와 서원 사이에 향권을 다투는 이른바 향전(鄕戰)이 벌어져 마침내 서원이 사림의 구심기관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면리제는 방위면제(方位面制)였고, 후기에 이르러 보다 정비, 발달되었다. 면에는 면장이 있어 행정을 집행했는데, 면임(面任)·풍헌(風憲)·약정(約正)·방수(坊首)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면 밑에는 이·초·동이 있는데, 그 장도 이정(里正)·동수(洞首)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었다. 또, 이 이하에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조직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양반관료제
    영역닫기영역열기3.1. 유품(流品)
    조선시대의 관료 조직은 문반과 무반의 양반 체제로 이루어졌고 상하 계급이 엄격하였다. 관료의 등급은 품(品) 또는 유품이라 하여 크게 9품이 있었다. 각 품에는 정(正)과 종(從)의 구별이 있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었다.
    다시 정1품에서 종6품까지는 상하의 계(階)가 있었으므로 관료의 등급은 모두 30품계로 구분되었다. 문관 4품 이상은 대부(大夫), 5품 이하는 낭(郎)이다. 무관 2품 이상은 문관이 겸직하고, 3·4품은 장군, 5·6품은 교위(校尉), 7품 이하는 부위(副尉)라 하였다.
    한편, 모든 관직을 크게 4등급으로 가르기도 하는데, 당상관과 당하관, 참상관(參上官)과 참하관이 그것이다. 당상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의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고급 관료이다.
    당하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훈대부(通訓大夫), 무관의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의 관료를 말한다. 그리고 정5품∼종6품을 참상관, 정7품 이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참하에서 참상으로 오르는 것을 승륙(陞六)이라 하여 승진의 한 관문이 되었다.
    당상관은 고급 관료로서 인사권·포폄권(褒貶權)·군사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중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였다.
    고려 귀족사회가 불과 10여 인의 재추(宰樞)에 의해 국정이 의결된 데 비해 조선의 양반 관료는 많은 당상관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 참상 이상이라야 지방 수령이 될 수 있었고, 수령의 역임은 당상관 승진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였다.
    관직의 명칭은 계(階)·사(司)·직(職)의 순으로 나타냈다. 관직에는 정해진 품계가 있지만, 품계와 직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를 위해 행수법(行守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즉, 품계가 높고 직임이 낮으면(階高職卑) 행(行),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직임이 높으면(階卑職高) 수(守)라 하였다.
    문관의 인사는 이조에서, 무관의 인사는 병조에서 맡았으므로 이조와 병조를 합해 전조(銓曹)라 하였다. 관료의 근무 평정에 따라 승진·전보·퇴임 등 인사 행정을 했는데, 이를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하며 매년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두 전조에서는 후보자 3인씩을 전형해 국왕에게 천거하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 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그 중에서 적격자를 결정하는 것을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라고 하였다.
    관료의 임명에는 이 밖에도 서경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즉, 전조에서 해당자의 친족·외족·처족 등 3족의 부·조·증조·외조 등 4조(四祖)를 대간(臺諫)에게 보내어 3족의 4조에 하자가 없음을 확인받은 후에야 직첩이 발급되는 절차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3.2. 양반관료제의 특징
    조선시대 양반관료제의 몇 가지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인재 등용에서의 과거 중시, 엄격한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 문관 우위, 당상관의 겸직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특권 부여, 관직 구조의 다양성 등이다.
    그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과거의 중시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음서가 줄어든 대신, 과거제가 강화되었다. 이것은 소수 문벌의 귀족 관료사회가 아니라 폭넓은 양반층의 관료사회를 지향했음을 뜻한다.
    둘째, 신분에 따른 한품서용의 제도이다. 양반은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기술관과 서얼은 당하관까지, 향리와 토관은 참상관까지, 그리고 잡직은 참하관까지 밖에는 더 승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첩자손에 대한 한품서용 규제가 엄격하였다. 문·무 2품 이상의 양첩(良妾)자손은 정3품까지, 천첩자손은 정5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6품 이상의 양첩자손은 정4품까지, 천첩자손은 정6품까지, 그리고 7품 이하와 무관직자의 양첩자손은 정5품까지, 천첩자손 및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자는 정7품까지, 양첩자의 천첩자손은 정8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셋째, 명목상 양반제였으면서도 문관 우위를 취한 것은 문치주의라는 유교 정치의 방향에 따른 것이다. 무관직도 고위직은 문관이 겸직하였다.
    군령(軍令)의 최고 관부인 병조가 동반직이었음은 물론, 서반의 최고 관부인 오위도총부의 도총관도 문관이 겸임하였다. 지방에서도 각 도의 관찰사가 그 도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또 수령도 해당 고을의 병력을 지휘하는 무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넷째, 조선시대 관료제의 또 한 특징은 광범한 겸임제이다. 당상관은 중요 관부의 요직을 맡는 한편, 도제조·제조 등의 직함으로 여러 속아문(屬衙門)의 장을 겸임하였다. 이러한 겸임제는 여러 관부 간의 직무상 연계성과 함께 인건비의 절감이라는 실리도 있었으나 정치 권력의 소수 집중이라는 결과도 가져왔다.
    이 밖에 고급 관료에게 내린 사후의 시호(諡號)와 증직이 있다. 시호는 종친과 실직 2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주었다. 증직은 명유(名儒)·절신(節臣)과 왕실의 사친(私親)에게 품직을 추증하고, 종친과 2품관 이상은 3대를 추증하되 부모는 기신(己身)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각 1등씩 낮추어 추증하였다.
    다섯째, 조선시대의 관직 구조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즉 관직에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이 있고, 실직에는 다시 녹관(祿官)과 무록관이 있으며, 녹관에는 다시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이 있었다. 체아직이란 정해진 녹봉이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 서로 높고 낮음을 바꾸어가며 녹봉을 주는 관직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동반에는 1,779직과(職窠)가 있고 서반에는 3, 826직과가 있어 모두 5, 605직과였다. 이를 다시 분류해보면, 동반에는 정직이 1, 579, 무록관이 95, 체아직이 105직과였고, 서반에는 정직이 821, 체아직이 3, 005직과였다.
    동반의 정직과 무록관은 양반 신분, 체아직은 기술관과 환관이 임명되었다. 서반의 정직은 양반 신분, 체아직은 그 직과의 7할이 군병(軍兵)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 공신적장(功臣嫡長)·습독관(習讀官)·의원(醫員) 등 다양한 대상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서반 체아직은 중기 이후 점차 양반관료층의 대기 발령 또는 예비 관직과 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잡직이 있었다. 동반 잡직 144인은 공장(工匠)·마원(馬員)·악사(樂師)·액례(掖隷)·화원(畵員) 등 거의 천류에게 주어졌다. 서반 잡직 1,607인도 팽배(彭排)·대졸(隊卒)·파진군(破陣軍) 등 천인화한 사람으로 구성된 병종(兵種)의 군사에게 주어졌다.
    이를 종합해볼 때, 조선시대의 관직 구조는 동반직과 서반직의 양반 위주이기는 하나, 중인과 양인까지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잡직에는 양인과 천인이, 토관직에는 평안도·함경도의 토착유력자까지 관직을 받을 수 있는 다양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과거제와 학제
    영역닫기영역열기4.1. 과거제
    양반관료의 등용에는 과거제가 매우 중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에 소과(小科)와 대과(혹은 문과), 무관에 무과, 기술관에 잡과가 있었다.
    먼저 소과에는 유교의 경전을 시험보는 생원과(生員科)와 시(詩)·부(賦)·송(頌)·책(策) 등을 시험보는 진사과(進士科)가 있었는데, 이를 통틀어 생진과 또는 사마시(司馬試)라 하였다.
    소과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또는 會試)가 있었다. 초시는 한성부와 각 도의 감영에서 주관하였다. 소과초시에 대행되는 것으로 서울에 승보시(陞補試)와 각 도에 공도회(公都會)가 있었다. 이들 시험에 합격한 자는 복시를 치르는데, 각 과에 100인씩 모두 200인이 뽑혔다.
    합격자는 백패(白牌)라는 합격 증서를 받고, 생원·진사의 칭호와 함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와 동시에 하급 관료가 되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 및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대과에는 생원·진사와 하급 관료가 응시하였다. 시험 과목은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 및 사장(詞章)이었다.
    대과 역시 초시는 한성부와 각 도 감영에서 시행되고, 이에 대행되는 것으로 통독(通讀)이 있었다. 대과복시에서 33인이 선발되고, 다시 전시(殿試)에서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등급이 결정되었다.
    대과 급제자에게는 홍패(紅牌)가 하사되었다. 갑과의 장원은 종6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종9품으로 등용되었다. 기성 관료로서 장원한 자는 4등급, 을과는 2등급, 병과는 1등급씩 승진되었다.
    무과에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었다.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시행하였다. 복시는 서울에서 28인을 뽑고, 전시에서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등급이 결정되었다.
    무과의 시험 과목은 궁술·창술·격구 등의 무예와 병서 및 유교 경전이 부과되었다. 무과 합격자는 선달(先達)이라 하고, 등용되는 품계는 문과의 경우와 같았다.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 등 4과가 있었다. 잡과 합격자는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觀象監) 및 형조 등의 종7품 이하 기술관으로 채용되는데 모두 동반 체아직에 속하였다.
    과거 중 매3년마다 자(子)·묘(卯)·오(午)·유(酉)의 해에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을 식년시(式年試)라 하였다. 임시로 시행하는 과거로는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는 증광시(增廣試), 임금이 친림하는 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절일에 시행되는 절일제(節日製) 등이 있었는데 선발 인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실제 문과 응시는 양반 자제에게만 허락되었고, 무과는 천인만을 제외하고 응시의 문을 넓혔다. 현직 관료의 문과 응시는 대과는 당하관 이하, 소과는 5품관 이하만 응시할 수 있고, 수령의 소과 응시는 금지되었다.
    향리억압책으로 향리의 과거 응시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또 서얼이나 재가녀(再嫁女) 자손은 소과·대과의 응시가 허용되지 않았다. 양인의 응시를 제약하는 규정은 따로 없었으나 경제 사정이나 교육 여건, 그리고 신원보증서에 해당하는 보단자(保單子)의 제출 등으로 실제 응시는 어려웠다.
    과거제도와는 별도로 특정직임에의 임용 또는 승진을 위한 취재(取才)가 있었다. 문관으로는 수령의 선임, 경아전인 녹사(錄事)·서리(書吏)의 임용을 위한 취재가 있었다. 무관의 경우는 시취(試取, 역시 취재라고도 함.)는 무과 응시자격의 부여, 무과 합격자의 임관, 해직자의 재임용, 무록군관의 급여 등을 위한 시험이었다.
    이 밖에 공신이나 당상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등용하는 음서(南行이라고도 함.)의 제도도 있었다. 음서에는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 임용되는 추천(推薦)과 유공자의 자손이나 궁정의 친척 등에게 관직이 주어지는 문음(門蔭)이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2. 학제
    양반관료제 하의 학문과 교육은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관료를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때문에 학교는 과거 준비기관이나 다름이 없었고, 따라서 교과 내용도 유학과 한문학이었다.
    양반 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한자와 습자를 배우고, 15∼16세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사학(四學), 지방에서는 향교(鄕校)로 진학하였다. 사학과 향교에서 수년간 수학한 자는 소과에 응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최고 학부인 성균관은 대과의 준비기관이었다. 사학이나 향교를 거쳐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서 다시 수학해 대과를 치러 고위 관직에 나가는 것이 정규 과정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성균관에는 생원·진사가 많았지만, 사학의 생도나 공신·훈신의 자제로서 입학 시험에 합격한 자, 현직 관료 중의 지망자들도 함께 수용, 문과 응시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봉사하는 문묘(文廟),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생도의 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과거장인 비천당(丕闡堂) 등이 있어 성현에 대한 경모와 강학의 기능을 겸하였다.
    지방의 향교도 문묘·명륜당·재 등이 있어 성균관을 축소한 형태였다. 사학과 향교는 시대에 따라 쇠미해지고 사숙(私塾)인 서당 이외에 서원이 성해졌으나 성균관은 후기까지 국립의 최고 학부로서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서원은 성현을 봉사하는 사(祠)와 후학을 교육하는 재의 기능을 갖춘 점에서 향교와 그 기능이 비슷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명유 안향(安珦)의 고향인 영주 순흥(順興)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 서원은 뒤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의 건의로 1550년(명종 5)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조정에서 칙액(勅額)과 함께 서적·노비·토지 등이 하사된 서원을 말한다.
    그 뒤 서원은 각지에 설립되어 선조 때에 124개소이던 것이 숙종 때에는 한 도에만 80∼90개소나 되는 곳도 있었다. 그리하여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림의 근거지로 화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과 계통의 교육은 유교 경전과 병서 등 학술 이외에 무예를 닦아야 하는데도 특별한 교육기관이 따로 없었다. 훈련원에서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연마, 병서의 습득을 실시하기는 했으나 곧 과거와 직결되는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잡과계의 교육은 각기 그것을 담당하는 관서에서 맡아 가르쳤다. 즉, 역학(譯學)은 사역원, 의학은 전의감, 천문·지리·명과(命課, 또는 占卜)는 관상감, 산학(算學)은 호조, 화학(畵學)은 도화서, 도학은 소격서(昭格署) 등에서 담당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5. 군사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5.1. 중앙의 군사 조직
    조선 초기의 군령기관(軍令機關)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다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로 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오위도총부가 되어 일단 정비되었다. 부대 조직도 처음의 10위(衛)에서 10사(司)로, 다시 12사로 바뀌고, 문종 때 5사가 되었다가 1457년에 오위제도가 정비되었다.
    군사 기구 중 군령 계통은 중추부 계열, 오위도총부 계열, 병조 계열 등의 사이에 변동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1464년에 이르러 오위도총부가 병조의 지휘 밑에 들어가면서 병조가 군령의 최고 기관이 되고, 중추부는 실권 없는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서반으로 볼 때는 오위도총부가 실질적인 최고 관부가 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오위의 편제는 대체로 병종(兵種)과 지방 분담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을 이루는 병종의 편제는 의흥위(義興衛)에 갑사(甲士)와 보충대(補充隊), 용양위(龍驤衛)에 별시위(別侍衛)와 대졸(隊卒), 호분위(虎賁衛)에 족친위(族親衛)·친군위(親軍衛)·팽배(彭湃), 충좌위(忠佐衛)에 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파적위(破敵衛), 충무위(忠武衛)에 충순위(忠順衛)·정병(正兵)·장용대(壯勇隊) 등이 소속되어 입직(入直)과 시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오위는 각기 지방의 병력을 분담, 관할하였다. 의흥위는 서울의 중부와 개성부 및 경기·강원·충청·황해도의 병력을 관할하고, 용양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를, 호분위는 서울의 서부와 평안도를, 충좌위는 서울의 남부와 전라도,충무위는 서울의 북부와 함경도의 병력을 각각 관할하였다.
    또한, 오위의 각 위는 중·좌·우·전·후의 5부(部)로 나누어 전국의 진관(鎭管)을 망라한 지방 군사를 소속시켰다. 따라서 오위체제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중앙군을 망라한 구체적 부대 조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을 망라한 대열(大閱) 등 훈련 체제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오위의 군계급과 정원 및 품계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오늘날의 계급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즉, 상호군(上護軍, 정3품) 9인, 대호군(종3품) 14인, 호군(정4품) 12인, 부호군(종4품) 54인, 사직(司直, 정5품) 14인, 부사직(종5품) 123인, 사과(司果, 종6품) 15인, 부장(部將, 종6품) 25인, 부사과 (종6품) 176인, 사정(司正, 정7품) 5인, 부사정(종7품) 309인, 사맹(司猛, 정8품) 18인, 부사맹(종8품) 483인, 사용(司勇, 정9품) 42인, 부사용(종9품) 1,939인 등이 그것이다.
    서반의 군직은 거의 서반 체아직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갑사(甲士)·별시위·족친위·친군위·충의위·충찬위 등의 병종에만 주고, 충순위·정병·파적위·보충대 등의 병종에는 주지 않았다. 팽배·대졸·장용위 등의 병종에는 서반 잡직 체아직을 주었다.
    한편, 서반 체아직은 오위의 병종이 아닌 선전관·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취라치(吹螺赤)·태평소(太平簫)·파진군 등의 병종과 군병이 아닌 여러 잡직에도 주었다. 오위의 상하 조직과 각 지휘관은, 위(衛, 衛將)―부(部, 부장)―통(統, 통장)―여(旅, 旅帥)―대(隊, 隊正)―오(伍, 伍長)―졸(卒) 등과 같았다.
    위는 5부, 부는 4통, 통은 약간의 여, 여는 5대, 대는 5오, 오는 5졸과 같이 대체로 다섯씩을 묶어 올라가는 편제로서, 이것은 진법(陣法)을 바탕으로 하는 군사 조직이었다. 그러나 오위제도는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해이해져서 정작 왜군이 침입했을 때는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때문에 왜란 중에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 등 삼수병(三手兵)이라는 특수 부대를 훈련, 양성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신설되었다. 이것은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기효신서 紀效新書』라는 병서에서, 왜구 방어를 위해 절강군(浙江軍)의 병술로 개발한 것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 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서울과 경기 지방의 경비 강화를 위해 총융청(摠戎廳)을 두어 남양·수원·장단 등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고, 경기 안의 속오군(束伍軍) 중 용맹한 자를 뽑아 이 군영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인조 초에 남한산성을 쌓고 1626년(인조 4) 그 안에 수어청(守禦廳)을 신설, 광주(廣州)와 그 인근의 여러 진을 경비하게 하였다.
    1652년(효종 3)에는 어영청(禦營廳)을 신설, 총포병과 기병(騎兵)을 주로 하는 부대를 편성하였다. 또, 1682년(숙종 8)에는 도성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금위영(禁衛營)을 신설하였다.
    이상의 훈련도감을 비롯해 총융청·수어청·어영청·금위영을 5군영(五軍營)이라 하고, 주로 서울과 경기 지방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즉, 중앙의 오위군제가 후기에 이르러 오군영제로 바뀐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5.2. 지방의 군사 조직
    지방의 군제는 진관체제(鎭官體制)였다. 즉,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있는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고, 그 아래에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절제사 및 첨절제사를 두어 각각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거진 아래의 제진(諸鎭)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萬戶)·절제도위(節制都尉)가 이를 관장하였다.
    병마절도사는 약칭으로 병사(兵使)라 하며, 경기도·강원도에는 각 1인을 두어 관찰사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충청도·전라도·황해도·평안도에는 각 2인을 두어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또 하나는 전임의 병사를 두었다. 경상도·함경도에는 각 3인을 두어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 2인은 전임 병사를 두었다.
    수군절도사는 약칭으로 수사(水使)라 하며, 강원도와 황해도에 각 1인을 두어 관찰사에게 겸임시켰다. 평안도에는 2인, 함경도에는 3인의 수사를 두었는데,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는 병사가 겸임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에는 각 2인,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 3인의 수사를 두었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는 전임 수사를 두었다.
    관찰사가 겸임한 병사를 겸병사(兼兵使)라 하였다. 관찰사와 병사와의 관계는 직품이 함께 종2품이었으나, 관찰사는 행정권·사법권을 가지고 있으며, 흔히 직품 이상의 고관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연히 겸병사는 단병사보다 우위였다.
    수사의 경우는, 수사의 직품이 정3품으로 관찰사보다 낮았으므로 관찰사가 겸임하는 수사에 비해 단수사의 지위는 더욱 낮았다. 거진의 절제사·첨절제사나 제진의 동첨절제사·만호·절제도위 등은 거의 각 지방 수령이 겸임하였다.
    중종 때 이래로 해이된 진관체제를 보강하는 방안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분군법(分軍法)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 지역으로 가서 싸우는 제도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5.3. 군역제도
    조선시대의 병종은 특권층 자제에게 특전을 주어 편성된 병종, 무예의 시취(試取)로 선발된 직업 군인, 양인의 의무 병역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특권층 자제의 병종은 왕실의 먼 친척, 대신의 자제, 공신의 자손 등으로 구성된 족친위·충의위·충찬위·충순위 등으로서 처음부터 군사력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예시취로 뽑은 갑사·별시위 등의 병종은 최고 정예군으로서 서울의 시위와 평안도·함경도의 변경 수비를 담당하는 기간 병력이었다.
    여기에는 무예에 뛰어난 양반 자제도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 팽배·대졸·장용위 등도 시취로 뽑힌 병종이지만, 처음에는 양인층의 병종이다가 나중에는 천인층의 병종으로 변하였다.
    양인의 의무 병역에는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 있었고 전체 병력의 8할을 차지하였다. 양인의 의무 병역은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정남(丁男)이 그 대상인데, 직접 병역 의무를 지는 자를 호수(戶首) 또는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그리고 호수가 군역을 수행하는 데 경비를 뒷바라지하는 자를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이라 하였다.
    당시 군역에 필요한 재정 부담은 군역자 각자가 자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족제는 고려의 양호제(養戶制)를 계승한 것으로,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었다. 봉족제에서 호(戶) 단위이던 것이 보법에서는 인정(人丁) 단위로 개편되어 2인의 정남, 즉 2정이 1보(保)로서 군호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봉족제는 호 단위였으므로 유력자는 한 가호 안에 수십 명의 솔정(率丁)을 가지는 폐단이 있었다. 보법으로의 개편은 이러한 은익솔정을 추쇄(推刷)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각 호의 솔정을 모두 군역 대상으로 편성하고 말았다.
    또, 보법의 시행으로 노자(奴子)도 반정(半丁)으로 치고, 보인의 보포(保布)는 매월 포 1필 이하로 규제하였다. 그러나 보법은 호와 유리된 것이어서 뒷날 군역제도 붕괴의 요인이 되었고, 보포도 규제 이상으로 수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보인으로 정군을 대립(代立)시키는 경우도 많아, 부강한 호수 대신 빈약한 보인만이 군역을 담당하게 되어 군역제도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원래 군역의 부과는 요역과는 별도였다. 그러나 성종 이후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나고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성행하면서 군역제도가 더욱 문란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의무병역 제도가 무너져 점차 모병제(募兵制)로 바뀌어졌고, 지방에서는 사노비까지 징발해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6. 사법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6.1. 사법기관과 형벌
    조선시대는 행정과 사법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아 관제 상 그 한계가 모호하였다. 중앙에서는 형조·의금부·한성부·사헌부·장례원(掌隷院) 등이 각각 사법권을 행사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그 관할 구역 안의 사법권을 가졌다. 그러나 본연의 의미로의 사법기관은 형조와 의금부뿐이었다.
    형조는 사법의 감독기관인 동시에 복심(覆審)의 재판기관이기도 하였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특수 범죄를 다루는 특별 재판기관으로서, 왕족의 범죄, 국사범·반역·모역 등 큰 옥사, 강상(綱常)의 죄, 오래 판결하지 못한 사건,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일반 행정과 함께 경찰 업무를 맡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토지·가옥·묘지 등의 소송을 담당하였다. 형조·의금부·한성부를 통틀어 삼법사(三法司)라 하였다. 사헌부는 규찰과 탄핵 등 감찰 업무를 맡았고, 장례원은 노비에 관한 문서와 소송을 맡았다.
    감옥으로는 전옥서(典獄署)가 있고, 경찰로는 중앙에 포도청(捕盜廳), 지방에 진영장(鎭營將)이 겸하는 토포사(討捕使)가 있었다. 그리고 위법자를 직접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기관을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 하였다.
    즉, 병조·형조·한성부·사헌부·승정원·장례원·종부시(宗簿寺)·관찰사·수령은 피의자를 직수할 수 있고, 그 밖의 각 사(司)나 각 군문(軍門)은 형조에 통고한 뒤에 구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형벌은 『대명률 大明律』에 따라 사(死)·유(流)·도(徒)·장(杖)·태(笞) 등의 5종이 있었다. 사형에는 교(絞)와 참(斬) 외에 사약(賜藥)이라는 독살, 육시(戮屍)·능지(凌遲)라는 사체 절단 등 극히 잔인한 방법도 있었다.
    유형은 유배지의 원근으로 형의 경중을 구분하는데 정치범에 많이 적용하였다. 유형에는 배(配)·찬(竄)·적(謫)·유(流)·방(放)·천(遷)·사(徙) 등 용어가 있어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유배지로는 육지에서 먼 섬이나 북경(北境)·남해안 등이 보통인데 때로는 경기 등 가까운 곳으로 정해지기도 하였다.
    도형(徒刑)은 먼 곳에 있는 염장(鹽場)·철소(鐵所) 등에 보내 중노동에 복역시키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별로 많지 않았던 듯하다. 장형에는 60도(度)부터 70·80·90·100도의 구분이 있고, 태형에는 10도부터 20·30·40·50도까지 있어 정해진 도수를 때린 뒤 방면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6.2. 법률과 소송
    형벌은 『경국대전』 형전조(刑典條)에 따랐으나, 이는 『대명률』을 참고해 제정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대명률』의 내용과 대동소이하였다.
    형사 소송에 있어 각 아문은 태 이하의 죄를 직결할 수 있고, 형조와 관찰사는 유 이하의 죄를 직단(直斷)할 수 있되 그 이상의 중죄는 각각 상급기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였다. 사형은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의정부에 보고해 형조가 재심한 뒤 다시 국왕에게 보고하고, 의금부에서 3심(三審)하는 절차를 밟았다.
    재판에 불복이 있을 때, 절박한 사건이면 즉시 다른 기관에 갱소(更訴)할 수 있었다. 일반 사건은 그 재판을 담당한 관리가 바뀐 뒤 2년 이내에 갱소할 수 있었다. 이 갱소는 중앙은 주장관(主掌官)에게, 지방은 관찰사에게 상소하였다. 만일 거기서도 불복이 있으면 의금부의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국왕에게 직소할 수 있었다.
    장(杖) 이상의 범죄는 수금(囚禁)주 02)하되 신분에 따라 구속 절차에 경중이 있었다. 단죄(斷罪)의 증거로는 피의자의 자백을 가장 중시하였다. 자백을 받기 위해서는 신체적 고문이 공인되었다. 서민 및 도죄(盜罪) 이외의 고문은 상사의 지휘를 받아서 하였다. 살인사건은 『무원록 無寃錄』을 전거로 검시(檢屍)하였다.
    범죄 심리에는 죄질의 경중에 따라 결옥일한(決獄日限)이라는 기한의 제한이 있었다. 즉, 사형 등 대사에는 30일, 도(徒)나 유(流) 등 중사에는 20일, 장(杖)이나 태(笞) 등 소사에는 10일을 일한으로 하였다.
    민사는 일정한 성문 규정이 드물었으므로 대개 관습에 따랐고, 분규의 해결도 대개 행정관의 재량에 맡기는 일이 많았다. 친족 등 가족제도에 관한 일은 유교의 예법이 그 기초가 되었다. 상속은 봉사(奉祀)의 계승을 중시해 ‘입후(立後)’의 관습과 법규가 발달하였다.
    물건의 등기, 토지·가사(家舍) 및 노비의 매매는 100일 이내, 상속은 1년 이내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사의 소송은 원고와 피고가 각각 증빙문서를 제출하고, 쌍방이 재판정에 함께 출두해 구두로 변론하되 그 기한을 정하였다.
    판결의 확정 과정에서 동일 사건을 다른 기관으로 옮기면서 세 차례까지 소(訴)를 올릴 수 있으나, 송사(訟事) 중 2차 패소한 것은 다시 소를 올릴 수 없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경제
    영역닫기영역열기1. 토지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1.1. 과전법
    조선시대 토지제도는 고려 말기의 전제 개혁인 과전법이 그 근간이 되었다. 고려 말기의 전제 개혁은 농장(農莊)의 발달에 따라 문란해진 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하고, 위로는 신진 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며,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의 권문세족의 농장은 불수조(不輸租)라는 불법적 특권으로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장주는 농장의 전호를 혹사하고 그 대신 국가에 져야 할 의무를 면제시켜주었다.
    이와 같이 농장의 면세·면역 특권은 국가 재정을 위태롭게 하여 관료나 군사에게 땅을 나눠줄 수도 없고, 심지어 녹봉조차 제대로 줄 수가 없는 형편에 이르게 만들었다.
    과전법의 시행은 이러한 농장의 탈세지를 모두 국가의 과세지로 재편성, 수조(收租)를 가능하게 하였다. 과전법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주요 대상은 왕실을 비롯, 국가기관·지방 관부·공공기관·관료·한량관·향리 등이었다.
    왕실에는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이 분급되고, 국가기관에는 군자전(軍資田)·녹봉전(祿俸田)·경중각사(京中各司)의 위전(位田)이, 지방 관부에는 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외역전(外役田)이, 관료에게는 과전·공신전이, 한량과 이(吏)에게는 군전(軍田)이 분급되고, 일반 농민과 천인은 토지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과전법에서 사전(私田) 재분배의 중심이 된 것은 관료에게 분급하는 과전으로서, 이는 신진사대부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준 것이었다. 과전법으로 권문세가에게 빼앗긴 농민의 토지는 되돌려주고, 전호의 소유권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농지 1결(結)마다 10분의 1조(租)인 30두(斗)의 전조(田租)를 물리게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당시 병작반수(竝作半收)가 일반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10분의 1조로 규정한 것은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현직·산직(散職)을 막론하고 모든 관료에게 18등급에 따라 150결에서 15결까지 과전이 분급되었다. 과전과 공신전은 모두 경기도 안으로 제한해 지방 토호화(土豪化)를 막는 동시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으로 분급된 과전·공신전은 그 자손에게 전수되었다.
    과전의 분급은 원칙적으로 1대에 한하지만, 관료의 사망 후 그 처가 재가(再嫁)하지 않는 경우에는 수신전(守信田)으로, 또 관료 부부가 구몰하고 유약한 자녀만이 남는 경우에는 휼양전(恤養田)으로 과전의 전수가 허용되었다. 이에 반해 공신전은 애초부터 세전이 인정되었다.
    과전·공신전의 세습화에 따라 경기도 안의 분급 토지가 절대 부족해지자, 1417년(태종 17) 기내 사전의 3분의 1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하삼도(下三道)에 이급하였다. 이것은 과전 분급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전주의 토지 소유를 분산시키며, 국가 재정상의 필요로 군자전을 경기도 내에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처로 지방에서 사전주의 횡렴(橫斂)이 일어나고, 서울로의 쌀공급이 순조롭지 않는 폐단이 생겨났다. 때문에 1431년(세종 13) 신급전법(新給田法)에 따라 하삼도 이급 사전을 기내로 환급하였다.
    이 때의 신급전법은 국왕의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주요 골자로 한 것으로, 이로써 관료들은 과전을 균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비해 과전의 총면적이 1만 5000결이나 감소되었으니 일종의 사전억제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전 억제는 직전법으로 계승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2. 직전법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전제가 바뀐 것은 조선 건국 후 70여 년이 지난 1466년(세조 12)의 일이었다. 과전법에서 산직자까지 분급하던 토지를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분급하였다. 또 과전법에서 관료의 미망인이나 자녀 등 유족에게 주던 토지도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토지 분급의 결수도 과전법에서 150결 내지 15결이던 것을 직전법에서는 최고 110결, 최하 10결로 줄였다. 그 결과, 관료들은 퇴직 또는 사망 후의 생활 안정을 위해 직전세의 수렴을 가혹히 하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에 대처해 1470년(성종 1)에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국가가 전주를 대신해 전호로부터 조세를 직접 거두어 전주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직전세의 관수관급제로 전주의 직전에서의 토지 지배는 불가능해졌다. 또한 대표적 사전이라 할 직전까지도 수조(收租) 관계가 공전과 같게 되었으므로 공전·사전의 구별도 없어졌다. 그리고 명종 때에는 이 직전제마저 사실상 폐지되고 말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1.3. 농장
    농장은 건국 초 한때 억제되었으나, 세종·세조 때에 점차 발달하다가 성종 때부터는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 말기의 농장은 권력형 농장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전기의 농장은 국가에 공조(公租)·공과(公課)를 부담하는 법질서 속의 토지지배 형태로 전환되었다.
    농장의 성립은 국가에서 내린 사전(賜田)을 비롯, 황무지의 개간·기증·강점 또는 투탁(投托)·매득(買得)·묘위전(墓位田)의 확대 및 장리(長利) 등을 통해서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매득과 개간이었다.
    농장의 기능은 문화적으로는 별장(別莊)·사당(祠堂)·서당(書堂)의 구실을, 경제적으로는 장리와 창고의 구실을 들 수 있다. 농장의 관리는 지주가 직접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관리자를 따로 두고 있었다.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호·고공(雇工)·노비 등이었는데, 전호는 인신적 예속성이 약화되고 병작이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 나라 농장은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각지에 산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농장은 일본의 장원(莊園) 같이 불수조(不輸租) 특권이 일반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다. 더욱이 서구의 장원과 같이 독립된 통치 단위로서 영주(領主)에게 영유된 것도 아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4. 후기 토지제도의 변모와 지주제의 변동
    『경국대전』에 정해진 토지제도 자체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그 실상은 여러 가지로 변모되었다. 즉, 직전(職田)의 소멸, 궁방전(宮房田)의 설정, 관둔전(官屯田)의 확장, 민전(民田)의 탈입·투탁의 경향, 은결(隱結)의 급격한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직전제의 소멸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명종 때 실질적으로 폐지되고 말았다. 다음 궁방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설정된 것으로 1사(司)·7궁(宮)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1사는 내수사, 7궁은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육상궁(毓祥宮)·용동궁(龍洞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등을 일컫는다.
    이 궁방전은 갈수록 확대되었는데, 처음 절급(折給)된 토지, 궁방에서 사들인 토지, 공부세(貢賦稅)를 이부(移付)시킨 토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운영상 혼란이 많았다. 때문에 『속대전』에서는 관할권과 수조권을 함께 가지는 유토면세(有土免稅)와 수조권만 가지는 무토면세의 토지로 정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군영의 둔전을 비롯, 중앙 각 사(司)와 지방 관아의 관둔전이 날로 확대되었다. 관둔전도 처음에는 절수(折受)로 설치되었으나, 숙종 때 절수의 형식에서 민전을 뽑아들이는(募入民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토지를 사들이는(給價買土) 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억지로 사들이는 폐단이 따르기도 하였다. 특히 역둔토(驛屯土)는 사유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민전의 탈입·투탁의 경향은 특히 궁방전과 관둔전에서 많이 행해졌다. 이 현상은 국고수입원인 원결(元結)을 감소시키고 면세지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서 빼내는 은결이 급격히 증가되어갔다. 은결의 방법으로는 개량(改量)할 때 관원과 결탁해 토지 면적의 일부 혹은 전부를 빼내거나, 개간지를 황무지로 보고하거나, 신전(新田)을 보고하지 않는 것 등이었다. 후기의 토지 결수가 세종 때의 160만여 결보다 항상 밑돈 원인은 은결이 증가한 때문이었다.
    후기의 토지소유 상태를 양안분석 연구에서 살펴보면, 약 10% 내외의 부농이 전체 농지의 43%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후기에 농업이 발달하면서 광작하는 부농과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이농민으로 농민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서민 지주가 등장했는데, 이로 인해 지주·전호제에서의 신분적 예속성이 약화되었다.
    지주제의 변동은 지대(地代)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지대 형태이던 분반타작(分半打作)의 정률지대(定率地代)인 타조법(打租法) 외에 정액지대(定額地代)인 도조법(賭租法)이 보급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금납제도 나타났다. 타조법에서는 지주의 감독권이 영농에 작용했으나 도조법에서는 이것이 사라졌고, 금납제에 이르러서는 화폐 거래만으로 단순화한 경제 관계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5. 토지소유 관계
    종래 토지제도 연구에서 토지국유제론과 토지사유제론이 맞서 있었다. 토지국유제론은 일제강점기 이래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어왔으나, 1960년대부터 토지사유제론이 대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당초 토지국유제론이 제기된 것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 토지제도의 기본을 토지국유제로 못박아 근대 국유지와 연결시켰다.
    토지국유제론의 이론적 기반은 고려 말기 전제 개혁에서의 공전 의식과 과전법의 공전 및 사전의 개념에 있었다. 즉, 토지국유제 아래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수조권이 국가에게 있는 것은 공전, 개인에게 있는 것은 사전이라 주장한 것이었다.
    이 이론을 다시 윤색한 것이 아른바 로마법적 해석을 도입한 토지 지배의 삼양식(三樣式)이었다. 즉, 국가의 처분관리권과 전주의 수조권, 그리고 전객(佃客)의 경작권이 각각 토지 소유로 관념되나, 그 중에서 국가의 처분·관리권이 보다 상위의 소유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이론의 개요였다.
    이 토지국유제론은 유물사관론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그들은 ‘국가는 최고의 지주다.’라는 마르크스(Marx, K.)의 동양사회이론을 바탕으로 토지국유제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근래 토지국유제는 하나의 표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토지사유제임이 밝혀지고 있다.
    토지사유제론을 주장하는 근거는 먼저, 토지지배 관계의 형태론적 연구로서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에 대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지배 관계의 실태로서 민전에 대한 규명을 들 수 있다. 공전과 사전의 개념은 토지국유제론자가 말하는 대로 수조 관계로서의 개념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이 밖에 소유 관계로서의 개념도 들어 있는 것이다.
    수조 관계로서의 공전과 사전의 개념은 공전이 국가의 수조지이고 사전이 전주의 수조지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소유 관계로 보면, 공전은 국유지 또는 관유지를 뜻하고 사전은 사유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전·사전보다는 민전의 개념과 실태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민전은 수조 관계로서는 국가나 전주의 소유지를 뜻하나, 소유 관계로서는 민유지를 뜻하는 것이다. 민전은 상속·매매할 수 있는 토지이며, 그 속에 토지 사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전은 평민은 물론 양반·중인·노비 등 모든 계층의 민유지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재정제도
    조선 왕조의 국가 재정은 토지를 대상으로 거두어들이는 전세(田稅), 인정(人丁)을 대상으로 동원하는 신역(身役)으로서의 요역과 군역, 그리고 호(戶)를 대상으로 하는 공물이 그 대종을 이루었다. 중기 이후에는 농민의 구호곡이었던 환곡(還穀)이 재정 수입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2.1. 전세제도
    조선 초기의 전세제도는 고려 말기 과전법의 조세 규정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조(租)는 매결(結) 수확량의 10분의 1인 30두였고, 세(稅)는 유세지의 유전자(有田者)로부터 결당 2두씩을 징수하였다. 조세율은 매년 풍·흉에 따라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과전법의 조세 규정은 1444년(세종 26)에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제로 개혁되었다. 이 세제는 처음 일부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실시된 후, 세종 말에 전라도, 세조 때에 경기도·충청도·경상도, 성종 때에 황해도·강원도·평안도·영안도에 각각 시행되었다. 이 공법에서 조세는 매 결에 수확량의 20분의 1인 20두 내지 4두였다.
    조세량을 정하는 기준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랐다. 전자는 전국의 토지를 기름지고 메마름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 때에 결부제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후자는 매년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과전법 당시의 3등전과 공법의 6등전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과전법의 상등전은 1,844평, 중등전은 2,897평, 하등전은 4,184평이고, 공법의 1등전은 2,753평, 2등전은 3,247평, 3등전은 3,932평, 4등전은 4,724평, 5등전은 6,897평, 6등전은 11,036평이었다.
    그리고 연분구등법은 상상년(上上年)부터 하하년(下下年)까지 9등년으로 나누어 20두에서 4두까지로 정하였다. 연분구등의 실시 단위는 읍내와 동서남북 등 5가지 연분으로 조정되었다.
    과전법의 답험손실법은 공법으로 바뀌면서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정액수세법이 되었다. 그리고 조와 세가 통일되었으며, 10분의 1조가 20분의 1세로 반감되었다.
    결부법(結負法)은 토지 면적과 그 토지에서의 수확량을 이중으로 표시하는 독특한 계량법이었다. 벼 한줌을 1파(把)라 하고,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이라 하였다. 따라서, 1결의 면적은 토지의 기름지고 메마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공법으로의 전세 개혁은 경차관(敬差官)의 농간 등 답험손실법의 운영상의 결함을 시정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즉, 조선 초기의 휴한법(休閑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어 농업생산력이 증가, 이로써 정액수세법이 제정된 것이다.
    공법에 따른 20분의 1세의 상상년급 20두는 1결당 생산량을 400두로 보고 산정한 것이다. 또, 1결의 면적도 종전의 3등전에 비해 축소되었으므로 실지로는 하중년급 6두나 하하년급 4두의 적용이 많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4두로 고정되고 말았다.
    1653년(효종 4)에는 종래에 사용하던 수등이척(隨等異尺)주 03)의 법을 폐하고 균일한 양전척(量田尺)을 사용해 환산하는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이 발표되었다.
    이 때의 양전척은 세종 때의 일등전척(一等田尺)을 기준으로 실적(實積)을 역비례로 산출, 1등전은 100부, 2등전은 85부 1파, 3등전은 70부 1속 1파, 4등전은 57부 7파, 5등전은 40부, 6등전은 25부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종래 먼저 토지의 등급을 정한 뒤에 해당한 양전척으로 측량하던 것을, 이제는 모두 1등 양전척만으로 측량해 전제상정소준수조획 준정결부(准定結負)라는 환산표에 따라 각 등전의 결수를 산출해내는 방법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1결당 전세 4두라는 것은 명색일 뿐, 실제로는 갖가지 명목으로 훨씬 많은 양을 징수 당하였다. 훈련도감이 신설된 이후, 삼수병(三手兵)을 양성하는 비용이라는 명목의 삼수미로 2두 2승(升), 공물의 전세화에 따른 대동미로 12두, 균역법의 결작(結作)으로 2두, 이 밖에 전세의 부가세로 가승(加升)·곡상(斛上)·창역가(倉役價)·이가(二價)·작지(作紙)·공인역가미(貢人役價米)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속대전』에 궁방전·아문둔전 등의 면세전에 1결당 수세액을 23두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1결당 수세액은 23두 가량인 것으로 짐작된다.
    정약용(丁若鏞)이 제시한 강진군의 사례를 보면, 세의 종목이 44개에 달하며, 국가에서 거두는 종목이 12개로 23두 내지 24두, 선급(船給)이 3개 종목으로 2두 2승, 읍징(邑徵)이 28개 종목으로 30두 내지 37두로 되어 있어, 1결당의 실제 부담은 55두 내지 63두나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2. 역(役)
    국가가 백성에게 부과하는 역은 일시적인 요역과 항구적인 국역(國役)으로 구분된다. 요역은 지방 관아에서 동원하는 경우와 중앙의 명령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방의 요역은 전결 8결에 1부(夫)씩 1년에 6일 이내를 원칙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복호(復戶)라 하여 요역의 면제를 큰 특전으로 농간을 부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과중한 요역에 시달리다 못해 유리하는 자도 많았다.
    지방의 요역으로 성곽·공해(公廨)·도로·제방 등의 수축·영선(營繕), 공물(公物)의 운반, 그 밖의 잡역에 동원되었다. 중앙의 요역으로는 도성의 축조, 산릉(山陵)의 조영 등에 지방에서 많은 민정(民丁)이 징발되었다. 이와 같은 요역에는 식량이나 기구 등을 자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항구적인 역이라 할 국역은 신역(身役) 혹은 직역(職役)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신분에 따라 양역과 천역의 구별이 있고, 그 역종도 군정(軍丁)·이교(吏校)·노비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공장(工匠)이나 간척(干尺) 등은 그들이 생산하는 물품을 공납하여 국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역과 신분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역은 신분을 규정하고 신분은 곧 역을 규정하였다. 역은 정(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초기에는 호(戶)를 매개로 한 정이라는 관념이 짙었다.
    조선 초기의 편호법(編戶法)은 1392년(태조 1)에 재정한 계정법(計丁法)에 따라 3등호제를 시행하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에 인정(人丁)과 토지를 함께 산정하는 계정계전절충법(計丁計田折衷法)으로 바뀌고, 다시 1435년(세종 17)에는 계전법에 따른 5등호제로 바뀌었다.
    『경국대전』에 전8결 출1부(田八結出一夫)라는 규정은 첫째 전결만을 대상으로 했고, 둘째 1호의 토지가 8결에 미달일 때는 여러 호가 합해서 1부를 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는 호를 매개로 한 정이라 할 수 있다.
    국역의 경우에도 건국 초부터 군역(軍役) 등의 역이 있는 자에게 호 단위로 의무를 지웠고, 군역을 비롯해 천역에 이르기까지 조호(助戶, 봉족)를 공정(公定)하였다. 이러한 법제적인 호는 대개 3정을 1호로 삼았다.
    국역에 당번 의무를 지는 자를 호수(戶首) 또는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호수가 당번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뒷바라지하는 자를 봉족 혹은 보인이라 하는데, 호수와 봉족의 관계는 원래 아들·사위·아우·조카·족친(族親)이나 겨린[切隣]으로 충당, 공동 책임을 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에게 책임을 지우기도 했고, 쇠잔한 가호는 3개의 자연호를 1개의 법제적인 호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봉족제는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었다. 즉, 2정을 1보로 삼고, 봉족 대신 보라는 이름을 쓰고, 호 대신에 정을 기준으로 삼았다. 보법에서는 노복도 조정(助丁)의 반으로 환산했고, 보인의 재정적 부담을 매월 포 1필 이하로 규제하였다. 때문에 양역이나 천역을 막론하고 그 입역(立役) 대신 포로 대납하는 일이 많아졌다.
    양역인 군역에 있어서는 입역자의 비용을 봉족 또는 보인이 부담해 보포(保布)를 냈고, 차츰 입역 의무자조차 군포로 입역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명종 때부터는 군포를 국가 세입으로 수납하였다.
    천역에 있어서도 입역 노비에게 봉족을 정해주고, 외거노비(外居奴婢)는 신공(身貢)을 상전에게 바쳐 독립호를 영위할 수 있었다. 사노비(私奴婢)도 상전에게 역 내지 신공을 바쳤다. 그러나 양반은 원칙적으로 역의 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군대와 양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구분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양반으로 구성된 군대는 거의 없어지고, 양인만이 군포를 바쳤으므로 이를 양역(良役)이라 하였다. 그러나 1년에 군포 2필을 내는 것은 농민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당시 포 2필은 쌀 12두에 해당했고, 풍년에는 20두 값이었다.
    군포의 징수 과정에서 어린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죽은 자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 많은 폐단이 있었다. 그리하여 양인 중 부강한 자는 면역의 길을 찾게 되었고, 빈한한 자는 토호의 양호(養戶)로 투탁하거나 도망하였다.
    숙종 때 이르러 양역의 폐단이 논의되어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이 설치되고, 양역사정절목(良役査正節目)이 제정되기도 했으나 확고한 대책은 없었다. 그 후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종래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여 받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따른 국가 재정의 부족액은 여러 방안으로 보충하였다.
    즉, 종래 궁방이 점유하던 어장세·염세·선박세 등을 정부에 귀속시키고, 새로이 전 1결당 결작(結作)이라는 이름으로 2두씩 징수하게 하였다. 또, 선무군관(選武軍官) 시험의 불합격자에게 군관포를 징수하는 한편, 은결을 적발해 조세를 징수, 균역청 경비로 충당하였다. 그런데 균역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왕실과 양반관료층과의 대립이 있었다.
    그리하여 왕실은 궁방이 독점하던 어장세·염세·선박세 등의 이권을 양보하고, 양반관료층은 결작과 군관포의 신설 등을 양보함으로써 균역법이 성립되었다.
    그렇다고 균역법으로 역이 균등해진 것은 아니었다. 양반은 여전히 군포 징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농민들의 부담이 다소 가벼워진 효과는 거둔 셈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3. 공물
    공물은 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즉, 각 주·현을 단위로 백성이 공납할 토산의 현물을 배정하고, 주·현에서는 배정된 공물을 다시 각 민호에 배정하였다. 공물은 중앙 각 사(司)에서만이 아니라 감영·병영·수영 및 각 주·현에서도 현물을 징수하였다.
    공물의 분정은 대개 지방관에게 맡겨지고, 향리가 그 실무를 맡아보았다. 하지만 종류가 잡다해 분정에 공정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공물은 현물을 민호에게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민정(民丁)을 동원해 요역으로 조달하는 경우도 있고, 현물의 대가로 미(米)·포(布) 등을 부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관아에서 직접 공물을 마련하는 관비(官備) 공물도 있었다.
    공물의 부담은 전세나 역보다도 무거웠고, 또 부과나 징수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일단 배정되면 감면이 어려웠고, 당초에 배정된 토산물이 뒷날에는 생산되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애초부터 실지로는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배정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공물의 종류에는 천연 산물이 있는가 하면 가공품도 있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해마다 내는 상공(常貢) 외에 필요에 따라 수시로 징수하는 별공(別貢)도 허다했고, 공물 외에 토산의 현물을 바치는 진상(進上)이라는 것도 있었다.
    공물은 납세의 일종으로서 주·현 단위로 1년에 한번 내지만, 진상은 납세라기보다 외신(外臣)이 국왕에게 바치는 예물이었다. 즉, 궁중에서 쓰일 물품을 각 도 단위로 감사와 병사·수사가 매달 한번씩 상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물과 마찬가지의 의무적 부담이었고, 각 주·현에 분정되었으므로 민호의 부담이라는 점에서는 공물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실시는 공물의 전세화(田稅化)로서 재정제도의 일대 개혁이었다.
    공물의 수납 과정에서 청납업자들이 모리를 일삼던 방납(防納)과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던 점퇴(點退)의 폐단은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이이(李珥) 등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특히 이이는 그 대안으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실시하기 시작한 뒤 17세기 중에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확대되었고, 1708년(숙종 34)에는 황해도에까지 실시되었다. 이로써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기까지 무려 100년이나 걸렸는데, 이는 이 법의 실시를 극력 반대한 세력 때문이었다.
    한편, 대동법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으며, 대동미라 하여 전 1결당 쌀 12두씩, 혹은 그에 상당하는 포(布)·전(錢)을 바치게 하였다. 대동미는 상납미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누어, 봄에 내는 상납미는 중앙의 재정에, 가을에 내는 유치미는 지방 재정에 충당되었다.
    대동법은 전결을 기준으로 공납을 징수했으므로 농민들의 부담이 그 이전보다 가벼워졌다. 실제로 선혜청이라는 명칭은 농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에게 상업자본을 형성하게 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인의 주문을 받아 상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을 발달시키는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영역닫기영역열기2.4. 환곡
    환곡도 중기 이후에는 국가의 세입 재원이 되었다. 환곡 또는 환상(還上)라는 제도는 본디 춘궁기에 국가가 관곡인 의창곡(義倉穀)을 농민에게 대여했다가 추수 뒤에 회수하는 제도였다. 즉, 진휼(賑恤)과 동시에 관곡을 신곡으로 교체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1423년(세종 5) 1석(石)에 3승의 모곡(耗穀)을 받는 고리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명종 때에는 모곡이 1할에까지 이르고, 회록법(會錄法)이라는 제도로까지 발전하였다. 회록법이란 모곡 1두 5홉 중 10분의 9는 지방 관아의 수입이 되고, 나머지 10분의 1인 1승 5홉은 호조의 장부에 올려 국가의 회계에 넣는 제도인데, 뒤에는 3분모(分耗)회록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환곡은 지방 관아와 중앙 정부의 재원이 되면서부터 굶주린 백성의 구휼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농민을 수탈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조선 후기에 크게 문제가 된 ‘삼정(三政) 문란’이란 곧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 등 국가 재정의 3대시정의 문란을 뜻하는 것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상업과 수공업
    영역닫기영역열기3.1. 상업
    조선시대의 상업 형태는 서울의 시전(市廛)과 난전, 중기 이후 각 지방에 개설된 장시(場市) 및 상설 점포 외에 보부상(褓負商) 등의 행상, 그리고 후기에 등장한 도고(都賈)와 명·청·여진·일본과의 국제 무역 등이었다.
    시전의 설치는 태종 때부터이다. 즉, 정부에서 서울 종로거리에 행랑(行廊)이라는 관설 상가를 만들어 상인에게 점포를 대여하고 그들로부터 행랑세라는 점포세와 좌고세(坐賈稅)라는 상세(商稅)를 징수하였다. 이들 시전은 궁중과 관부의 수요를 조달하는 대신, 상품 독점판매의 특권을 얻은 어용 독점상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7세기 전반기부터 이들 시전 중 수요가 가장 많은 명주·주단·면포·모시 등의 직물과 각종 종이류 및 어물류 등 여섯 가지 품목의 상점이 가장 번창했는데, 이들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상인이 점차 늘어나 시전 상인과는 별도로 관청의 허가 없이 장사하는 난전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응해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모든 시전에게도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주었다. 난전 중에는 보잘것없는 상인이 많았지만, 더러는 시전상인과 맞설만한 부상도 있었다.
    시전상인이 정부와 결탁한 독점상점이라면, 난전은 양반층과 결부된 상업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전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정부는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에 난전을 금하는 특권을 없애버렸다.
    지방에서 발달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 지방의 큰 가뭄이 계기가 되어 시작, 16세기 중반에는 충청도·경상도에까지 전파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정부에서 장시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는데, 18세기 전국의 장시는 약 1,000개소에 달하였다. 장시는 5일마다 정기적으로 서는 5일장이 일반적 형태였고, 지역마다 교역권이 형성되어갔다.
    행상은 대개 소량의 상품을 짊어지고 각지의 장시나 민가를 돌면서 소매하는 보부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다시 상품을 보에 싸서 행상하는 봇짐장수 또는 항아장수라 불린 보상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행상해 등짐장수라 일컬어진 부상으로 구별되었다.
    보부상의 조직은 일종의 협동조합과 같은 것으로 상호간의 규율을 중히 여겼다. 이 보부상은 물론 상인들의 조직이었지만, 비상시에는 정부에서 전령 혹은 치안의 일을 거들게 하기도 하였다.
    후기 상업 활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도고의 활동이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이 없어지자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공인을 통해 조달되었다.
    공인은 주로 시전상인이나 경주인·공장(工匠) 등에서 나왔다. 공인은 자기 자본으로 물품을 사서 납품한 뒤에 대가를 받는 결제 방법으로, 동일 상품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도매상으로 성장하면서 상업자본을 형성해갔다.
    도고 중 경강상인은 경기도·충청도 연안 일대를 활동 무대로 했고, 송상은 거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여각(旅閣) 또는 객주(客主)라는 도매상이 보부상을 상대로 창고업·운수업·숙박업·대부어음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본을 형성해갔다.
    끝으로 국제무역은 중국·여진·일본과의 사이에 행해진 관무역 외에는 사신의 내왕에 따르는 약간의 사무역이 허용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의주·중강(中江)이나 봉황성(鳳凰城)의 개시무역(開市貿易)과 후시무역(後市貿易)이 발달하였다. 일본과도 왜관무역(倭館貿易) 외에 밀무역도 성하였다.
    중국과의 무역에는 의주의 만상(灣商), 평양의 유상(柳商), 개성의 송상 등이 활약하였다. 일본과의 무역에는 동래의 내상(萊商)과 개성의 송상이 활약했는데, 이들 외국무역의 주도권은 송상이 쥐고 있었다.
    무역상들은 많은 자본을 축적하여 거부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역관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국제무역의 주요 상품은 인삼과 은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2. 수공업
    조선시대 수공업은 초기에는 관장제(官匠制)이다가 중기 이후 사장제로 바뀌었다. 관장제란 공장이 관부에 예속되어 물품을 생산하는 제도를 말한다. 즉, 중앙의 공조와 그 밖의 여러 관아에 소속된 장인을 경공장, 지방의 도와 군현에 소속된 장인을 외공장이라 하였다.
    공장의 신분은 양인과 공천(公賤)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소속기관에 정원수대로 등록되어 물품 생산에 종사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에는 30개의 관아에 2,800여 명의 공장이 예속되어 129종의 물품을 만들었고, 지방에는 3, 500여 명의 공장이 27종의 물품을 만들어냈다.
    경공장 중에는 사기·철물·무기·직물 등의 장인이 가장 많았고, 외공장 중에는 지물·돗자리·궁시(弓矢)·목기·칠기 등의 장인이 가장 많았다. 장인들은 작업장에서 관의 수요에 따라 각기 책임량을 생산해야 했고, 품질과 규격에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장인이 작업에 응하는 것은 공역(公役)에 속하는 것이므로 대개는 무상이었다. 공장 중 일반 공장을 감독하는 극히 소수의 인원에게는 잡직인 체아직이 주어졌다. 공장이 공역 이외에 사적으로 영위한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세금을 내야 하였다.
    공장들은 예속된 관아나 세력자들로부터 책임량 이상의 제품을 강요당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자유로운 수공업 발달의 저해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인들이 관공장을 피해 도망하게 되어 16세기 초부터 관공장제 수공업은 쇠퇴하고 그 대신 사장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7,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관아의 재정 부족으로 관장제 수공업제는 거의 없어지고, 다만 자기·제지·화폐·주조·무기 제조 등 특수 분야에서만 관장제가 지속되었다.
    후기에도 관장과 사장의 구분은 있었으나, 이 때는 관장도 임금기술자가 되었고, 사장은 임금기술자가 되거나 다른 장인을 고용, 직접 제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수공업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 수공업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장의 일부는 아직도 관아에 예속된 임금기술자로 남아 있기도 했으나, 그 대다수는 자유수공자가 되어 상업자본가에게 임금기술자로 고용되거나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기와 칠기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3.3. 화폐
    조선 전기에는 화폐 유통이 저조해 교역의 매개에는 주로 미·포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401년(태종 1) 사섬시(司贍寺)를 두어 저화(楮貨)의 유통을 꾀했고, 세종 때에는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을 주조, 저화와 병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화폐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포는 여전히 유력한 유통 수단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면포가 가장 대표적인 유통 수단이 되었으며, 저화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화폐가 필요하게 되고, 정부에서도 경제정책상 화폐가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이 발행되면서 17세기말 경에는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화폐의 유통은 전국 각지의 물산을 상품화시켜 상거래를 촉진시켰다. 따라서 이후 상품의 매매나 임금의 지불, 각종 납세 등에도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교통과 통신
    영역닫기영역열기4.1. 교통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 교통에는 보행 아니면 고작 기마나 가마가 사용되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관용교통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驛)이었다. 주요 도로에는 대개 30리 정도의 거리마다 역을 두고 역마를 배치, 공문을 전송하였다. 그리고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를 제공하며, 그 밖에 진상이나 공납의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 41개도(道)의 도로에 540여 개의 역이 있었다. 각 도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역에는 역장·역리(驛吏)·역졸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驛)을 담당시켰다. 역은 삼남 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었는데, 대개는 각 읍 인근에 소재하였다.
    역마 이용자에게는 그것을 인가하는 증표로 마패(馬牌)를 발급하였다. 관료의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마패에 동원할 수 있는 마필수를 새겼다. 마패 발급은 중앙에서는 상서원(尙瑞院), 지방에서는 감사와 병사가 하였다.
    고관이나 공무 여행자의 숙식에 대비, 지방 관아에는 관(館) 또는 객사(客舍)라는 숙소를 두었고, 요로마다 원(院)이라는 일종의 관영 여숙을 설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극히 제한된 까닭에 점차 퇴폐해간 것이 많았다. 사용으로 여행하는 민간인은 점(店) 또는 주막이라는 사설 여숙을 이용하였다.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송하는 데는 조운(漕運)이라는 수상 운송수단을 이용하였다. 이를 위해 조운 수로의 요지에 조창(漕倉)을 두어 인근의 세미를 집결시켰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미는 국경의 군량 보급과 사신의 접대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 그 도에 보관하고, 나머지 전국의 세미는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조운의 운영은 조선 초기에는 관영이던 것이 중기 이후로는 민영으로 바뀌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2. 통신
    조선시대 대표적인 통신 수단은 봉수(烽燧)였다. 이는 변방의 긴급한 사항을 중앙이나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적 목적의 통신망이었다. 대략 수 십리 간격으로 마주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를 잇는 봉수대 또는 연대(烟臺)에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주요 봉수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등 다섯 곳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목멱산(木覓山)주 04)을 종점으로 연결되었다.
    중앙에 보고된 신호는 병조가 이를 주관해 승정원에 보고하는 체계였다. 위의 다섯 간선 외에도 보조선이 조직되어 있었고, 국경 지대에는 각 초소로부터 본진으로 연결된 것도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사회
    영역닫기영역열기1. 호구
    조선시대 호구 파악은 국가운영상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즉, 인구보다도 역(役)의 부담자를 알아내려는 목적이 앞섰으므로 항상 정(丁)의 조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호구 파악은 매 3년마다 하는 호적 정비를 통해 실시하였다. 호적에 기재되는 사항은 주소, 본인의 관직·성명·연령·4조(四祖), 처의 성씨와 연령, 솔거 자녀의 성명과 연령, 노비 및 고공의 성명과 연령 등이었다.
    호란 오늘날 가구의 뜻인 가호를 이르기도 했고, 법제상으로는 3가(家) 외에 3정(丁)을 호로 편성했는데 신분의 고하와 역의 경중에 따라서도 달랐다. 또, 호의 등급도 인정·전결, 또는 가택의 간가수(間架數) 등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였다. 호가 군역과 결부될 때는 정규병을 뜻하고, 호와 봉족을 아울러 이를 때는 호보(戶保)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한편, 구(口)는 당시 호구 통계자료에 따라 남정을 뜻하기도 하고, 남·여 정(丁)을 뜻하기도 하였다. 또, 호구는 호와 구, 또는 호구수라는 뜻 말고도 호적이나 호적단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법제상 호의 등급은, 그 호의 정수(丁數)·가산(家産) 또는 가옥 간가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가르는 것이 고려 말 이래 통례였다. 이후 조선 건국 초에 계정법(計丁法)에 따라 정해진 3등호제 계정계전절충법을 거쳐 계전법으로 바뀌면서 호의 등급도 대·중·소·잔(殘)·잔잔(殘殘)의 5등호제가 되었다.
    한편, 자연호의 경우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수십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있는가 하면, 불과 서너 명의 소가족도 있었다. 호적 정리와 함께 5가작통법이라는 겨린[切隣]의 공동책임제와 호패라는 신분 증명의 패용을 아울러 실시하게 한 것도 호구 파악을 위한 제도였다. 조선의 역대 호구의 추세와 호구 자료를 통해 추정한 조선시대의 인구 규모는 위의 [표 1] 과 같다.
    [표 1] 조선시대 호구수와 추정인구
    연대추정인구
    태종 6180,246370,3655,869,000
    세종 때220,375801,8476,512,000
    인조 26441,3211,531,36510,860,000
    효종 8658,7712,290,08311,226,000
    현종 101,313,4535,018,64413,192,000
    숙종 431,560,5616,846,56816,347,000
    영조 291,772,7497,298,73118,656,000
    순조 71,764,5047,561,40318,619,000
    철종 31,588,8756,810,20616,625,000
    광무 81,419,8995,928,80217,219,000
    주 : 태종 6년의 호수는 수도 제외, 세종 때 추정인구는 세종 14년의 것임.
    영역닫기영역열기2. 신분제도
    조선시대 신분 계층은 학자에 따라 달리 분류될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15세기에는 양반·상민·천인의 3계층으로, 16세기 이후에는 중인층의 형성으로 양반·중인·상민·천인의 4계층으로 대별된다.
    15세기는 사회 신분층이 크게 개편된 시기로, 양인의 확대와 함께 지배층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었다. 양인층의 확대 시책으로는 노비의 변정(辨正),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의 설정, 신백정(新白丁)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집권 사대부들은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이 관료로 진출하는 길을 크게 제약하였다. 그 중 주요한 것으로는 향리의 과거응시 자격의 대폭 제한, 원악향리(元惡鄕吏)의 처벌, 군현 개편에 따른 향리의 대폭적인 이동, 그리고 한품서용제 등을 들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1. 양반
    양반이란 고려시대에는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회 지배층인 사대부 계층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사대부의 법제상 개념은 5품 이하의 관료인 사(士)와 4품 이상의 관료인 대부(大夫)의 통칭으로서 품계가 있는 관료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이 “독서인을 사라 하고, 벼슬한 사람[從政人]을 대부라 한다.”고 했듯이 글공부를 하여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장차 벼슬길로 나갈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반층은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에 비해 그 저변이 많이 넓어졌다.
    양반 가문이 증가함에 따라 관료 진출에 과거가 중시된 반면, 가문을 보아 등용하던 음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양반 자제는 출세하려면 과거를 치러야 했고, 과거를 치르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유교적 교양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교육기관에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학문을 열심히 닦았고, 양반이란 곧 관료로 출세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계층을 뜻하였다. 관료가 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녹봉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었고, 부역의 의무를 지는 괴로움도 겪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양반이라도 문관이 요직을 독점했으므로 문관이 무관보다 지체가 높았다. 또 양반 자손이라도 서얼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서얼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조차 주지 않았고, 관료가 되어도 당상관에 승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 번 세 번 시집간 여자의 자손은 벼슬할 수도 없었다. 지역적 차별도 있어 평안도·함경도 출신은 약간의 예외를 제하고는 높은 지위에 등용하지 않았다.
    서울 양반들은 북촌과 남촌에 모여 살았다. 그 중 북촌은 득세한 양반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남촌은 세도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지방 양반들은 흔히 동족 촌락을 이루며 각기 그 지방에서 토호 노릇을 하였다.
    양반들이 사는 마을을 반촌(班村)이라 하고, 상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민촌(民村)이라 하였다. 조선 전기의 양반은 대체로 지주이자 지식층으로서 관료층을 이루었다.
    설사 벼슬하지 못했을지라도 학덕을 쌓아 선비로서의 품위를 갖추면 사회 지도층으로 존경을 받았다. 반면 양반으로 태어났어도 상민이나 다름없이 산 사람도 있고, 정국(政局) 변동으로 양반 계층에서 탈락하는 자도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2. 중인
    조선 건국 초부터 집권 지배층의 자기도태 시책으로 16세기이래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의 신분이 격하, 중인이라는 새 계층이 형성되었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으로, 좁게는 서울의 기술관을 뜻했으나, 넓게는 서울과 지방의 하급 관리인 아전·군교, 서얼 등의 계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중인인 서울의 기술관은 의관·역관·율관(律官)·산원(算員)·관상감원·사자원(寫字員)·화원(畵員) 등인데, 중인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서울의 중부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서리는 경아전, 지방의 서리는 향리이다. 경아전에는 녹사(錄事)·서리(書吏)가 있었다. 녹사는 종6품까지, 서리는 종7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조선 초기 녹사에게는 퇴직 후 수령의 자격 시험에, 서리에게는 역승(驛丞)·도승(渡丞)의 자격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져 그들 중 상당수는 수령이나 역승·도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그 길이 막히고 중인은 중인 계층의 신분으로 굳어졌다.
    지방 관아의 서리는 향리 또는 외아전이라 하고, 국역(國役)의 특수 형태인 향역을 부담하는 유역인(有役人)으로 파악되었다. 세종 말에는 인리위전(人吏位田)을 폐해 향리에게 토지 분급이 중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초부터 녹봉이 지급되지 않아 지방 관아에서 일정한 삭료(朔料)가 지급될 뿐이었다.
    일률적으로 향리라 해도 그 내부에는 신분적 차등이 있었다. 즉 호장층·육방층·색리층이 있어, 호장층은 지방 행정의 고문역을 맡고, 육방층은 지방 행정의 실무, 색리층은 향역 중 천역을 맡았다.
    군교는 중앙에서는 궁중의 사역을 맡는 액례(掖隷)와 각 군영의 ‘군영소속’이 있고, 지방에는 군교라는 직역이 있었다. 군교는 향리와 함께 이교(吏校)라고 합칭되기도 하지만, 향리는 군교보다 그 지체가 조금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中庶)라고 합칭되었다.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동반직 등용을 금했고, 간혹 서방직에 등용되어도 한품서용의 규제를 받았다.
    중인은 대개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으므로 실속이 있고 나름대로의 행세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역관이 사신을 수행해 무역의 이득을 본다든지, 지방 향리가 수령을 조종해 세도를 부린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한편, 중인의 기술 교육은 그 업무를 관장하는 관서에서 맡아 하였다. 이들 중 과거의 잡과에 합격되면 체아직으로서 관직에 나갔으나, 한품서용으로 당하관에 그쳤다.
    영역닫기영역열기2.3. 상민
    상민은 농민의 상층부와 약간의 상공인이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상민은 백성·양인(良人)·평민·서인(庶人)·상인(常人) 등 여러 이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상민과 천인의 구별이 뚜렷해, 전기에는 상민에게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천인에게는 그 의무가 없었다.
    상민은 법제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며, 의복·가옥·일상 거동 등에서 관직이 없는 양반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상민에게 과거 응시의 길이 열려 있다고는 하나, 경제적·사회적 여건으로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농민의 신분 구성은 크게 상민층과 천민층으로 이루어졌다. 농민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도 있고, 자작 겸 소작농도 있으며, 전호라는 단순 소작농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7할이었으나 후기에는 토지 없는 농민이 7할로 역전되었다. 자작 농민은 국가에 전세를 물고, 소작농인 전호는 전주에게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에 따라 수확량의 2분의 1을 전조(田租)로 바쳤다. 상민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는 정남(丁男)이라 하여 요역과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토목 공사나 잡역에 동원되는 요역은 법으로 1년에 6일간이었지만, 사실상 수시로 징발되었다. 군역은 상민의 의무 병역으로서 입속하던 병종은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었다. 복무 형태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정군으로 당번 입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족(奉足)으로서 정군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농민에게는 또 공물이라 하는 지방 토산물의 공납 의무가 있었다. 농민에게 있어서 공납은 전세보다 무거운 부담이었다. 지방 장관이 국왕에게 바치던 진상도 결국은 농민들의 부담이었다.
    양인과 천인 사이에 신량역천의 계층이 있었다. 초기에는 양인확대 시책에 따라 종래 천인으로 간주되어왔지만, 양·천이 불분명했던 간·척, 양반의 비첩산(婢妾産), 천남(賤男)과 양녀(良女) 사이의 소생, 고려의 판단백성(判斷百姓) 등이 신량역천으로 설정되었다.
    후기에는 조례(早隷)·일수(日守)·나장(羅將)·조군(漕軍)·수군·봉수군·역보(驛保) 등을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 하였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면서 직업이나 부과된 역이 천역인 계층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2.4. 천인
    사회 계층 중 최하층인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상전이 누구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별되었다. 공노비는 공천이라고도 하여 왕실이나 국가기관에 예속된 노비를 이르고, 사천이라고도 하는 사노비는 개인 노비였다. 같은 노비라도 사노비는 공노비보다 더 천시되었다.
    노비는 다시 독립된 가호를 가지고 따로 살림을 하는 외거노비와 상전의 집안에서 기거하는 솔거노비로 구분되었다. 외거노비는 솔거노비보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공노비는 또 의무 부담의 내용에 따라, 서울이나 지방 관아에 일정 기간 입역(立役)하는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노비 신공(身貢)으로 신포(身布)를 사섬시에 바치는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납공노비는 선상노비에 비해 의무 부담이 조금 가벼운 편이었다. 사노비도 그들의 상전에게 노역을 제공하거나 신공을 바쳤다.
    노비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고려시대 이래 적용되어온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상전 소유의 노비가 되었다. 다만 종친의 2품 이상의 첩자손이나 적자손이 없는 양반의 첩자손 승중자(承重者)에게는 종부법(從父法)을 적용하였다. 때문에 노비 신분이 상승하는 길은 거의 막혀 있는 실정이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토지나 가옥처럼 매매, 증여, 상속되었다. 상전은 노비를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관아의 허가를 얻으면 죽일 수도 있었다.
    노비는 모반죄를 제외한 상전의 어떤 범죄도 관아에 고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면 강상을 어긴 것으로 인정되어 교살죄(絞殺罪)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토지나 가옥뿐만 아니라 다른 노비까지 소유한 자도 있었는데, 이는 법률로도 인정되었다. 특히 농장(農莊)을 관리하는 간복(幹僕)은 대단한 재산과 권세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비 중에는 공장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비는 마치 서구 농노처럼 상전의 토지에 묶여 그것을 경작함으로써 연명하였다.
    천민에는 노비 말고도 재인(才人)·백정·무당·창기(娼妓)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백정이 가장 천시되었다.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화척(禾尺)이라 하여 극도로 천대받다가 세종 초에 백정이라 개칭되고 사회적 대우도 다소 개선되었다. 재인·백정은 원래 이민족(異民族)으로 특수 집단을 이루고 유기(柳器)제조나 가축 도살 등 특수 직종에 종사하였다.
    그들이 전통적인 유목 생활의 유습에서 농경민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다. 재인은 광대라고도 하여 음악을 직업으로 하였다. 그 계보는 백정과 구별이 있었던 것 같으나, 조선시대에는 동일시되었다. 단골은 남자는 박수, 여자는 무당이라 하여 민속 신앙에 종사했으며, 재인과 혼인하는 일이 많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2.5. 후기 신분제의 변동
    조선 중기에 이르러 양반중심 사회에 신분제의 변동이 일어났다. 즉,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인 벌열과 정권에서 소외되어 지방에 토착 기반을 가진 향반(鄕班), 향반 중에서도 가세가 몰락한 잔반(殘班) 등으로 양반층이 분화되었다. 이 중 향반은 벌열에 비해 지위가 떨어졌으며, 잔반은 대부분 소작농이 되었는데 그 수는 점차 늘어갔다.
    한편, 중인 계층에도 신분상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적서 차별도 조금은 개선되어 규장각(奎章閣)의 요직인 검서관(檢書官)에 서얼 출신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관들은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견문도 넓히고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의관은 전문적 기능으로, 서리들은 행정 능력이나 문학적 소양으로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주장해갔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도 계층 분화가 일어났다. 농민 중의 일부는 농업 기술의 발달, 농업경영 방법의 개선, 상업 농업의 발전 등으로 부농이 되거나 서민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또, 납속책(納粟策)으로 공명첩(空名帖)을 사서 신분을 높여 군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노비제도도 무너졌다. 임진왜란 때 노비문서가 불타버린 데다 국가에서 군사적·재정적 이유로 신분상의 제약을 점차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속오군(束伍軍) 등 군에 편성한 후 무술 시험을 통해 양인이 되기도 하고, 2대 이상 양역(良役)에 종사했다 하여 양인 신분을 얻기도 하였다. 또, 전란 때 군공을 세우거나 혹은 납속으로 양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1801년(순조 1) 공노비를 해방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관노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사노비는 그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노비제도 자체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후 이것이 완전히 혁파된 것은 갑오경장 때 이르러서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으로 양반호가 현저히 증가한 반면, 노비호는 격감되었다. 노비에서 상민으로, 상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한 방법으로는 납속책·신분모칭(身分冒稱)·대구속신(代口贖身)·노비종모법 등이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가족제도
    조선시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었다. 가장은 대내적으로 가족공동체를 지휘, 통솔하고 대외적으로 가족을 대표하였다. 가족 집단은 가부장의 권위로 유지되었으므로, 민간에서의 계약은 가장의 의지로 행해졌고, 관청에서 내리는 명령도 가장을 상대로 하였다.
    또, 조상의 제사를 주재하는 일, 가정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 자녀의 교육과 혼인에 관한 일 등이 모두 가장권으로 집약되었다.
    가장과 가족 성원과의 관계는 효도와 정렬 등 유교적 윤리 덕목으로 맺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친족의 단위는 가(家)만이 아니라 그보다 큰 문중(門中)이었다. 문중이란 부계의 일족 분파로서 이를 종족(宗族)이라 하고, 종족 집단에서의 통제 규범을 종법(宗法)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 주자의 『가례』가 유행되면서 의식도 유교식으로 정착되어갔다. 이에 따라 종족 집단이 점차 조직화해 종중에는 종회가 생기고, 종중 재산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종족의 공동 이익이나 상호 부조를 위한 종계(宗契)가 운영되었다.
    16세기부터 족보가 널리 유행, 종족 관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또, 가족제도와 지연을 결부시킨 집단으로 동족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친족 집단은 종족에 비해 그 범위가 좁아 4대조를 공동 조상으로 삼는 동고조(同高祖) 8촌의 집단이었다.
    그것은 종족 안의 한 분파를 뜻하는 것으로, 제사에서도 4대봉사가 통례화하고, 복상(服喪)의 한계도 남자의 경우 8촌친까지였으며, 족징(族徵)의 한계도 8촌의 범위였다. 따라서, 친족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인 가족이 확대된 것이고, 또 종족은 친족 집단의 연장으로서 각기 사회 구성의 단위가 되었다.
    가족제도와 관련된 예법으로 혼인·상장(喪葬)·제사가 있다. 이러한 예법은 양반가에서 엄격히 준행되었고, 서민 사회에서는 훨씬 가볍게 다루어졌다. 혼인에 있어서는 고려 말기 이래 금해오던 동성혼이 더욱 엄격히 금지되었고, 외척과의 혼인도 6촌 이상으로 정해졌다.
    혼인 연령은 『경국대전』에 남자 15세 이상, 여자 14세 이상이라 하였다. 재혼은 남자의 경우 처가 사망한 뒤 3년이 넘어야 했고, 여자의 재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태종 때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이 제정되어 적·서 차별이 심하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 여자의 지위는 남자보다 낮아서, 사회적 활동은 제한되고, 법률적 행위는 반드시 남편이나 가장의 허락이 있어야 하였다. 여필종부라 하여 순종은 여성의 미덕으로 삼았고, 정절은 부녀의 생명보다도 중히 여겼다.
    상장은, 상복의 양태에 따라 참최(斬衰)·제최(齊衰)·대공(大功)·소공·시마(緦麻)의 오복제도(五服制度)였다. 복상 기간은 3년(27개월)·기년(12개월)·대공(9개월)·소공(6개월)·시마(3개월)로 구분되었다.
    남자는 본종의 8촌친까지, 외친은 4촌친까지, 처친은 처부모와 여서(女婿) 및 2촌친의 외손까지를 한계로 하였다. 여자는 부족(夫族)에 7촌친까지, 친가의 5촌친까지를 한계로 하였다.
    부모상은 3년상이지만 이것은 사대부의 경우고, 일반 서민은 100일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반상의 구분 없이 3년상이 되어버렸다. 제사도 원래 6품 이상의 관료는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 1대에 한했으나 뒤에는 상하 없이 4대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제사는 적장자가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나, 적장자에 후사가 없으면 차자가 받들고, 차자도 무후하면 양첩자(良妾子), 그도 후사가 없으면 입후(立後)라 하여 종족 안에서 양자를 들여 봉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서자도 무시하고 적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곧바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가계와 혈통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므로 봉사와 입후 또한 중히 여겼다. 재산 상속은 종법에 따라 자녀에게 고루 분배했으나, 제사 주재자의 계승이라는 의미에서 적장자에게 분배된 비율이 높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향촌
    조선시대 지방 사회의 구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면리제(面里制)의 확립이었다. 고려시대에서 이(里)란 개경(開京)의 하부 편제의 단위 이름이다가,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자연촌도 이(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이장·이정의 제도가 행정 체제의 말단을 이루게 되었다. 자연촌이 이로 체계화한 배경은 자연촌의 규모가 커진 자체적 성장, 그 상부 구조의 약화, 집약 농업으로 농업 기술이 발달한 데 따른 공동체적 질서의 변모 등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을 수령이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적당히 통괄한 구획이 면이었다. 조선시대 면리제의 운영에는 상반된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중앙집권적 측면으로, 수령이 이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면 단위로 지방의 유력층인 유향품관(留鄕品官)을 권농관·군적감고(軍籍監考) 등으로 삼아 수령의 행정을 협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지적(在地的) 성향을 가지고 면 혹은 군현 단위의 자치를 요구한 것인데, 각 지방에 유향소(留鄕所)가 세워진 것은 그 까닭이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지방의 유력자인 중소지주층이 그 고장의 자치권을 누려 중앙집권과의 마찰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소지주층이 대개 관료신분층으로 전환,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재지 세력에 의한 자치라는 양면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힘이 우위였다. 따라서 자의적으로 세워진 유향소가 혁파되기도 하고, 복설되어 제도로 공인되던 단계에서는 수령의 보조 임무만이 부여되었다. 또, 중앙의 현직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경재소제도가 생기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명목상 임무는 향풍(鄕風)의 규제 등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현 안의 전세·역·공물 등을 배정, 주관하는 일에 수령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유향소가 지방 행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里)의 직접적인 지배를 추구하던 중앙집권적인 의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향촌은 중국 송·명 때 자연촌을 직접 지배하던 보갑제(保甲制)나 이갑제(里甲制)와는 달랐다. 도리어 중기 이후에는 유향소의 후신인 향소 내지 향청의 향임(鄕任) 주도 아래 면에는 면임, 이에는 이임이 두어지면서 향임이 대표가 되어 수령의 관권과 접합하는 체제로 정착되어갔다.
    지방 통제의 구조에서 수령과 향청과 경재소 등이 서로 얽혀진 것은 세 계열이 모두 양반 신분으로서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권이 분배되고 분산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수령과 유향소와의 결탁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중앙의 권신(權臣)들은 경재소를 이용, 사적으로 특정 지방을 직접 장악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때문에 지방 사회의 질서 확립을 위한 수단으로서 향약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향약 보급은 사림파 계열에서 주장된 것이었다. 15세기 말부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대두한 사림파는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 계열과는 달리, 대개 지방에 생활 기반을 가진 계열들로서 새로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추구했는데, 그 한 방법으로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되자 1603년(선조 36)에 경재소제도는 혁파되고 말았다. 이로써 중앙의 현직 관료가 지방 사회를 지배하던 구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사림은 서원을 중심으로 향권을 주도하는 한편, 자연촌에 향약을 실시해 지방의 지배 질서를 확립해갔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사회적·경제적 변동으로 지방 사회의 구조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6, 17세기는 사족(士族)의 향촌자치제였으나 18세기에는 사족 외에 소농민 경제의 발전으로 신향(新鄕)이 등장했으며, 이들 신향이 18세기 후반부터 향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사족의 향촌지배력이 상실되고 국가가 농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강화하면서 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지방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해해야 할 것으로 촌락제(村落祭)와 동족 촌락의 문제가 있다. 촌락제는 이(里)로 된 자연촌의 질서를 위해 행해진 행사로, 고려 때의 향도(香徒)에서 유래된 것이다. 향도는 고려 중기까지는 군·현 단위의 불교적 행사였으나, 고려 말기에는 규모가 이 단위로 축소되고, 신앙 대상도 자연촌의 수호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16, 17세기 향약의 실시는 이가 그 단위로서 촌락제의 대상만을 유교적인 것으로 교체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자연촌 내부에 동성동본의 동족 촌락이 이루어지기 시작, 부계 중심의 혈연 의식이 고착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문화
    영역닫기영역열기1. 한글 창제
    우리 민족 문화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훈민정음, 즉 한글 창제이다. 그런데 사실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부르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국자(國字)인 한글이 생기기 전에는 한자만이 사용되었으므로 대단히 불편하였다.
    비록,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吏讀)나, 한자 자획 일부를 뗀 구결(口訣)로 한문에 토를 달아 읽기도 했지만, 워낙 어려워 일부 양반만이 배우고 썼지, 일반 백성은 문맹자로 살았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 창제의 취지를 민족 의식과 애민 정신으로 밝혔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의 보다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훈민 정책에 있었다.
    고려 말기에 신흥사족(新興士族)이 권문세족과 싸워 이긴 것도 당시 농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과전법에는 소유권 보장 및 10분의 1조 등의 규정으로 농민의 권익을 보장해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고, 지위를 향상시켰다.
    조선 왕조는 이러한 농민의 기반 위에 세워졌으므로 그들의 생활 안정과 함께 교화하는 정책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농민을 교화하는 데 두 가지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 하나는 농업 기술의 지도 보급이요, 다른 하나는 유교 윤리인 삼강오륜의 실천·권장이었다.
    농업 기술의 지도를 위해 태종은 이두로 토를 단 농업기술서를 간행했고, 세종은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엮어 농민에게 보급하였다.
    한편, 삼강오륜의 권장을 통해 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함께 전주(田主)에 대한 전호의 의무까지 하나의 윤리 질서 속에 묶었다. 세종 때 『삼강행실 三綱行實』을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치고, 그 뒤에도 이와 비슷한 책들이 잇따라 나온 것은 모두 농민교화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기술서나 윤리교본 등이 모두 한문으로 되었으므로 무식한 농민을 교화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세종은 쉬운 국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세종의 뛰어난 생각과 꾸준한 집념, 그리고 집현전(集賢殿) 소장 학자들의 우수한 두뇌가 어울려 훌륭한 새 글자가 탄생,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세종 28) 반포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당시 양반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양반들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고 훈민정음은 언문(諺文)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된 뒤, 조선 건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비롯, 부처님의 일대기를 적어 그 공덕을 찬양한 「월인석보 月印釋譜」 등이 한글로 지어졌고, 이 밖에 유교·불교의 여러 경전들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모화사상에 찌든 양반들에게 중요한 서책은 여전히 한문으로 기록, 간행되어, 한글이 국자로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글 소설이 나오고 시조 등 한글 시가가 활발히 지어지면서 한글은 자리를 잡아가다가, 한말에 이르러 민족적 자각과 함께 국자로서 우리 문자 생활의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사상·종교
    영역닫기영역열기2.1. 유교
    조선 건국을 추진한 신진사대부의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전래된 주자학(朱子學)으로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心性)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인 유학이었다.
    성리학은 건국 후 국가의 장려 아래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유학의 두 경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문예·사장(詞章)을 주로 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정치·경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학풍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 경전을 통해 유교의 정치 철학을 체득, 이를 정치 현실에 반영시키려는 학풍으로 전자를 관학파(官學派), 후자를 사학파(私學派)라 한다.
    관학파는 철학적인 학문보다 실제적인 법전·전례(典禮)·문예·사장 등에 능통하면서 경세(經世)적 학문에 주력, 기성사류(旣成士類)를 형성하였다. 반면, 사학파는 고려 말기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었으며, 그 일부가 성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 기성 세력과 대립하는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는 계속되는 사화(士禍)로 박해를 받아 관직을 단념하고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때문에 그들의 학풍은 16세기 이후 철학적 경향이 짙어져 갔다.
    한편,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선(善)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유교적인 교화 정치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밝혀내려는 철학적 유학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은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갈라졌는데,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되어 이황(李滉)이 대성하였다. 반면,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李珥)가 대성하였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으나, 그의 이론은 결국 주리적 관점이었다. 주리설에서는 사물의 법칙을 인식하는 것보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생명력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시되었다. 또, 인간의 본질도 실제 행동보다 이념적인 면을 더 추구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인격적 완성을 가장 중시하였다.
    주리파는 이황 이후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 계승되어 이른바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또, 이황의 학문은 일본에 전파되어 퇴계학파를 형성케 하고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이의 주기설은 사물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관점에 서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인 윤리를 더 중요시하였다. 이에 이이는 비단 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경제·국방 등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주기파는 이이 이후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 등에 계승, 이른바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의 유학사상에서 쌍벽을 이루었지만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시대 배경이 그런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황이 살던 때는 사림이 재야의 비판적 처지에 있었고, 이이가 살던 때는 사림이 중앙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기설(理氣說)의 논쟁에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사단이란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을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실마리로 보는 이론이고, 칠정은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주 05)의 감정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 주리설은 주자의 학설과 가까워져서 관념론에 중점을 두었다. 때문에 현실을 관념적인 원리로써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을 띠었다. 이에 비해 주기설은 대체로 실학파 학자에 이어져 현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 개혁에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경향을 띠었다.
    주리론은 기정진(奇正鎭)·이진상(李震相) 등에 의해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발전해 뒤에 척사위정사상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었다. 한편, 주기론은 임성주(任聖周)와 정약용을 거쳐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러 서양의 경험론과 결합해 발달하다가 그 뒤 개화사상과 연결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적·경제적 여러 변화와 함께 실학사상이 발달하였다. 당시의 학풍은 성리학의 이기설이나 예론(禮論)에 사로잡혀 붕괴되어 가는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무력하였다.
    따라서, 유교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현실적으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실학의 발생 원인은 임진왜란 이후 자아(自我)에 대한 반성과 서양 사상 및 과학적 지식이 시야를 넓혀준 데 있었다. 실학자의 연구 대상은 여러 분야에 걸쳤으나, 공통 기반은 현실적·실증적·독창적·민족적인 것이었다.
    실학자들이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제시한 개혁안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중농적(重農的) 제도개편론을 편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이고, 또 하나는 중상론(重商論)과 기술도입론을 편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였다.
    경세치용학파는 전제(田制)를 비롯, 행정 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그에 속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영농 육성을 주장하고, 농민에게도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어 능력에 따라 관료로 등용하는 농업 중심의 이상적 국가 건설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을 일으키고 기술을 도입하며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을 흔히 북학파(北學派)라 한 것은 청나라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에 속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유수원(柳壽垣)·박지원·박제가(朴齊家)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북학파의 사상은 뒷날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현실 개혁을 위해 청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수용하자는 입론은 개화사상에서 자본주의 선진제국의 장점을 수용하자는 입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북학파가 국내 산업과 대외무역을 일으키자는 주장은 개화파가 통상무역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 조선에서 산업이 뒤지고 백성이 가난한 원인은 놀고 먹는 양반들 때문이라고 지적한 북학파의 주장은 개화기의 민권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2. 불교
    조선 왕조는 건국과 함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다. 태조가 신봉한 종교는 불교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유교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는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지정된 절과 승 100인 이상이 상주하는 절 외에는 토지를 몰수했고, 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였다.
    태종도 22사(寺)만 사격(寺格)을 인정하고 나머지 사사(寺社)는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였다. 태종 때 몰수된 사사의 노비는 8만여 구였고, 사사전(寺社田)도 전국에 1만 1000결만 남기고 몰수된 것이 5만∼6만 결로 추산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재기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세종은 불교의 7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절도 36본산(本山)에만 사격을 인정하고 본산에 7, 950결의 토지만을 보유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월인석보」를 간행하게 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법회(法會)를 행하는 등 불교를 독신하였다.
    세조도 건국이래 불교억압책을 늦추어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많은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성종·연산군·중종은 잇달아 다시 불교억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선종·교종 양종의 중앙 기관이 없어지고, 고려 이래의 승과(僧科)와 승계(僧階)도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하면서 중 보우(普雨)를 중용하고 불교를 비호, 일시 활기를 띠었다. 이 때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봉선사(奉先寺)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고, 승과도 부활시켰으나 문정왕후 사후에 불교는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 승려의 법맥은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 고려 말기의 양대 법문인 나옹(懶翁)과 보우(普愚)의 법맥이 그것이다. 나옹의 법사(法嗣)는 무학(無學)·기화(己和) 등으로 처음에는 세력이 컸으나 그 뒤 법맥이 끊어졌다. 보우의 법맥은 지엄(智儼)·휴정(休靜)으로 이어져 조선 불교의 정통이 되었다.
    휴정은 임란 때 왕의 부름을 받고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문하에서 준수한 제자들이 배출, 조선 불교는 거의 휴정의 종문을 따랐다. 그의 좌선견성(坐禪見性)이라는 교의(敎義)는 불교를 선·교 양종에서 조계종(曹溪宗)으로 일원화하였다.
    그는 염불을 선(禪)과 동일시,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고 이로부터 염불을 중요한 수행의 방법으로 삼게 되었다. 휴정은 선·교·염불의 일원화뿐만 아니라, 유·불·선 3교의 일의(一義)를 제창, 후기 불교의 3교합일론의 기원을 이루었다. 휴정의 문하에서는 유정(惟政)·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이 가장 뛰어나 이들에 의해서 4대 종파가 성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숙종과 정조가 불교를 숭상하였다. 숙종은 진관사(津寬寺)를 재건하고, 정조는 용주사(龍珠寺)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천류로 떨어지고, 불교는 궁중이나 민간에서 부녀자들이나 믿는 종교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3. 서학
    서학은 서양 문물과 함께 명나라를 통해 전해졌다. 서학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실학자들이었다. 광해군 때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소개한 바 있고,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 같은 실학자도 서학에 호기심을 가졌으나 신앙으로서는 비판적이었다.
    18세기 말부터 학문의 대상이 되었던 서학은 남인(南人)학자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 운동으로 번져갔다. 그런데 이 때는 서양 선교사의 전도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자발적으로 신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신자가 된 이벽(李檗)·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 3형제, 권철신(權哲身) 형제 등은 모두 이익의 문인이었다. 당시 천주교 운동은 벌열 중심의 양반 사회와 성리학 지상주의의 사회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천주교의 도전은 유교적 의식을 거부한 전례문제(典禮問題)로 표면화해 박해가 시작되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에서 윤지충(尹持忠) 등이 처형당한 것을 필두로, 1801년(순조 1)에는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신유사옥은 대왕대비 김씨와 연결된 노론의 벽파(僻派)가 남인의 시파(時派)를 타도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행한 것인데, 이 때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일어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1831년(순조 31)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했고, 서양인 신부가 들어와 선교에 힘썼다. 1839년(헌종 5) 기해사옥으로 천주교는 또 큰 탄압을 받았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이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철종 때 천주교에 대한 금압이 다소 느슨해지자 신도가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천주교도는 처음 남인계 양반들이 많았으나, 점차 무식하고 빈천한 사람들과 부녀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지역으로는 서울과 그 인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4. 동학
    동학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종교로 철종 때 최제우(崔濟愚)가 양반 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고, 서양 세력인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힘을 길러야 한다며 창시하였다.
    동학사상은 유·불·선 3교와 무격신앙(巫覡信仰)·음양오행설·정감록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것으로, 그 교리는 『동경대전 東經大典』과 『용담유사 龍潭遺詞』 등에 담겨 있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주 06)이다. 따라서,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히 사회적 신분을 초월,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게 되었다.
    동학이 농민들에게 쉽게 환영받은 까닭은 전통적인 토속 신앙을 수용한 점도 있었지만, 천대받던 농민들까지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학은 단순한 종교 운동에 그치지 않고, 농민을 중심으로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으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사회 운동으로 번져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1863년(철종 14) 교조 최제우를 체포, 처형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농민들에게 양반의 횡포에 저항하고 외국의 침략 세력을 배격하는 운동을 계속하게 하였다. 그것은 동학을 통한 민권 의식과 민족적 국가 의식의 발로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과학 기술
    영역닫기영역열기3.1. 농업 기술
    여말 선초에 걸친 농업 기술상의 두드러진 변화로는 시비법(施肥法)의 개발에 따라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보급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또 논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로서 둑(堤堰)을 쌓는 일 외에 16세기부터는 보(洑)를 막는 것이 개발되었고, 벼농사에는 우리 나라의 강우량에 맞춰 건경법(乾耕法)으로 생산량을 늘렸다.
    또한 한전농업(旱田農業)은 연작에 그치지 않고 기름진 땅에는 윤작법(輪作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고려 말기 이후 신흥사대부들이 중국의 강남농법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농업 기술의 개선을 위해서는 농서(農書)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고려 말 이후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가 간행되기는 했으나,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 때 정초(鄭招)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그 뒤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은 사철의 농작과 그 기술을 개설한 『사시찬요 四時纂要』와 지금의 시흥 지방인 금양(衿陽)을 예로 농경 방법을 수록한 『금양잡록』을 편찬하였다. 중종 때는 『농사직설』의 보급을 위해 김안국(金安國)이 『농사언해 農事諺解』와 『잠서언해 蠶書諺解』를 간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수전(水田)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畎種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은 이미 고려 말기에 삽종(揷種)이라 하여 그 방법이 알려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 경상도 북부 일대와 강원도 남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다가 중기에 호서·호남으로 전파되고, 18세기 전반에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수전의 7, 8할이 이앙법을 택하였다.
    이앙농법에는 수리 시설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1662년(현종 3)에는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었다. 1772년(정조 2)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이 반포되는 등 국가가 수리 시설을 뒷받침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수전이 전체 전결의 3분의 1이었다. 그 중 수리 시설이 된 전결은 약 5분의 1이었으며, 제언의 수는 800개소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초에 이르면, 경상도에 제언이 1,000개소, 보가 1, 000개소나 되었다.
    한편,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 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해졌다. 한전에서도 견종법의 시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고 시비 관리도 잘 되어 수확이 크게 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효종 때 신속(申洬)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냈고, 숙종 때 박세당(朴世堂)은 『색경 穡經』을 간행했는데, 이는 한전농업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홍만선(洪萬選)이 낸 『산림경제』도 넓은 의미의 농서에 해당하고, 헌종 때 서유구(徐有榘)가 낸 『임원경제지』는 후기 농서의 집대성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2. 천문·기상
    천문·기상은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어 일찍부터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1442년(세종 24)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의 강우량을 조사했는데, 이는 서양에서 최초로 발명한 이탈리아카스테리의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종 때는 이 밖에도 천문 관측을 위한 대소의 간의(簡儀), 천체관측기인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만들어졌다. 또,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 역법(曆法)도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을 참조해 우리 실정에 맞는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이 저술되었다.
    18세기에는 천문 관측에 있어 조선 중심의 천문학이 수립되었다. 즉, 종래 연경(燕京) 중심의 관측에 편도시차(偏度時差)를 추가함으로써 조선 중심의 일식(日食)·월식(月食) 시각방위의 관측법이 수립된 것이다.
    또, 서양 역법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와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하게 되었다. 한편, 김석문(金錫文)·홍대용(洪大容) 등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해 종래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영역닫기영역열기3.3. 의학
    고려시대의 약재는 중국산을 들여다 썼으나, 고려 말기부터 국산 약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서 1433년(세종 15)에는 이를 집대성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이 나왔다. 1445년에는 역대 중국의 의서를 널리 수집, 참조해 의학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 醫方類聚』가 편찬되고, 같은 세종 때 일종의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 新註無寃錄』이 간행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의학사상 특기할만한 역저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이 편찬되었다. 또 1798년(정조 22)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 麻科會通』에는 우두(牛痘)의 시술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4. 인쇄술
    우리 나라는 이미 1234년(고종 21)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서양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고, 1403년(태종 3)의 계미자(癸未字)도 서양의 금속활자보다 약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 편찬 사업은 인쇄술을 발달시켰다. 즉, 계미자의 사용은 고려 말기 이래 망각되었던 금속활자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 때의 활자는 동판 위에서 황랍(黃蠟)으로 고정시켰으므로 활자가 움직이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1420년(세종 2) 경자자(庚子字)에 이르러 활자마다 네모의 입방체로 크기를 같이 하여 황랍을 쓰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 인쇄가 편리해졌다.
    1434년에는 활자를 개주하여 자체가 정교하기로 유명한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도 1772년(영조 48) 15만자의 임진자(壬辰字), 정조 때에 8만자의 한구자(韓構字), 1796년(정조 20) 30만자의 정리자(整理字) 등은 좋은 활자로 인정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5. 군사 무기
    고려 말기에 화약의 제조법을 알게 되어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조하였다. 당시 화약은 신무기로서, 이웃 일본이나 여진은 아직 그 제조법을 몰랐다. 때문에 여말 선초에 왜구를 격퇴하고, 세종 때 육진의 개척, 사군(四郡)의 설치에는 화약에 힙입은 바가 컸다.
    1448년(세종 30)에 편찬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에는 화포의 제조법과 사용법이 그림과 함께 한글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문종 때에는 일종의 로케트라 할 수 있는 화차(火車)가 제조되었다. 그 뒤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 완구(碗口)와 소포인 총통(銃筒) 등이 제조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총과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紅夷砲)가 꾸준히 제조되어 무기의 제조 기술이 진보하였다.
    병선(兵船)은 고려 때의 전선(戰船)인 예선(曳船)에 덮개를 씌운 귀선(龜船)이 1403년(태종 3)에 만들어졌다. 이것이 실전에서 크게 전투력을 발휘한 것은 임진왜란 직전에 완성된 이순신(李舜臣)의 거북선이었다.
    이 밖에 정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중 테렝(Terreng.J., 중국명 鄧玉涵)의 『기기도설 奇器圖說』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기중기를 고안, 화성(華城) 축조에 이용하게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예술
    영역닫기영역열기4.1. 문학
    국문학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되어 한글 문학의 문이 열렸다. 시조는 국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서, 고려 중기에 발생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더욱 발전하였다. 시조는 박인로(朴仁老)·신흠(申欽) 등을 거쳐 윤선도(尹善道)에 의해 대성되었다.
    시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양반 문학에서 서민 문학으로 전환되어갔다. 형식면에서는 사설시조라는 장형시조가 발달했고, 표현에서는 사실성을 띠게 되었다. 또한, 작자는 양반뿐만 아니라 서리나 기생 등에 이르기까지 신분계층이 확대되었다.
    김천택(金天澤)은 1728년(영조 3)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은 1763년(영조 39) 『해동가요』라는 시조집을 편찬했는데, 그들은 다같이 서리 출신이었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작품 외에도 하급 신분 작가의 작품이 무명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다. 1876년(고종 13)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고시조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가사(歌辭)가 발달하였다. 가사는 송순(宋純)에 이어 송강가사(松江歌辭)의 저자 정철(鄭澈)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 후기 문학에 나타난 큰 변화로는 한글 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온 점을 들 수 있다.
    광해군 때 허균(許筠)은 「홍길동전」을 지어 국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는 서얼차대와 빈부 문제 등 사회적 모순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고전 국문소설들을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권선징악류에 「장화홍련전」·「심청전」·「흥부전」, 군담류에 「임진록」·「임경업전」, 애정물에 「춘향전」·「옥루몽」·「숙향전」 등이 있다.
    국문학에서 특징 있는 장르의 하나는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 지방에서 발생했으며 19세기에는 여러 명창이 나와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사설의 정리에는 신재효(申在孝)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지어 서민뿐만 아니라 양반층까지 판소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한편, 조선시대 문학의 한 큰 갈래로 한문학이 있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동문선』을 편찬해 신라 이래 조선 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 문인들의 설화문학이 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설화집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초기의 유명한 한문학자인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 등은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의 뒤를 이었는데, 그들은 송·원나라 문단의 영향을 받았다. 중기에는 명나라의 영향으로 고문의 부흥이 유행했는데,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 등이 유명하다.
    종래 전통적인 문체에 구애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 문체를 개발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이었다. 그가 지은 「열하일기」는 참신한 문체와 독보적 내용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박지원의 뒤를 이은 한문학자로는 신파사가(新派四家)라 불리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등이 있다.
    김택영(金澤榮)의 문인 왕성순(王性淳)은 우리 나라의 한문 10대가를 꼽았는데,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과 이제현을 비롯, 조선시대의 장유·이식·김창협(金昌協)·박지원·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이건창(李建昌)·김택영 등이었다.
    후기 한문학의 새로운 변화는 서얼이나 기술관·서리 신분의 문인이 많이 배출되고, 이들에 의해 시가의 수집·편찬이 행해진 점이다.
    즉, 숙종 때 홍규태(洪圭泰)는 항간에 전해오는 서민의 시가를 모아 『해동유주 海東遺珠』를 출간하였다. 영조 때 고시언(高時彦)은 이를 증보해 『소대풍요 昭大風謠』를 간행했으며, 철종 때 유재건(劉在建) 등은 『풍요삼선 風謠三選』을 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2. 그림·글씨·공예
    조선시대의 그림은 주로 신분이 낮은 화원(畵員)들이 그렸으나, 양반 중에도 취미로 그린 사람들이 있었다. 전기의 그림은 초상화가 많았는데, 이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출세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희박하였다.
    양반의 그림은 대부분이 산수화였는데 북종화(北宗畵) 계통의 화풍이었다. 초기의 주요 화가로는 세종 때 안견(安堅)·최경(崔涇)·강희안(姜希顔), 중종 때의 이상좌(李上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정(李楨)·신사임당(申師任堂) 등의 그림에서는 화법이나 의도에 한국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북종화에서 남종화로 바뀌어갔고,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또, 전기의 사실적 화풍에서 운치를 중시하며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 화풍이 널리 유행하였다.
    17세기 이징(李澄)·윤두서(尹斗緖) 등은 보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고, 정선(鄭敾)에 이르러 한국적 독자성이 완전히 정착되었으니, 그의 「금강산도 金剛山圖」는 대표적인 예이다.
    후기 그림 중 또 하나의 특징은 풍속화의 개척이다.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은 풍속화의 쌍벽으로, 서민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그 애환을 소박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해냈다. 19세기 말에 장승업(張承業)이 나와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일컬어졌다.
    서예는 양반들의 필수 교양이어서 누구나 글씨를 썼다. 여말 선초에는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고, 중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송설체, 중종 때의 김구(金絿)는 왕희지체의 명필이었다.
    여기에 초서의 양사언(楊士彦), 해서의 한호(韓濩)를 합해 조선 전기 서예의 4대가라 일컫는다. 후기에 김정희(金正喜)는 중국 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추사체(秋史體)를 개척하였다.
    조선시대 공예품 중 자기에는 분청과 백자가 있었다. 초기의 분청자기는 고려청자가 퇴화한 것인데, 기법의 차이에 따라 상감분청(象嵌粉靑)과 백토분청(白土粉靑)으로 구분된다.
    분청자기에 이어 청화백자(靑華白瓷)가 만들어졌는데, 백자에도 순백·유백·회백 등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백자의 형태는 아래쪽이 펑퍼짐해져서 안정감과 실용성이 더해졌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고려 청자가 귀족적·곡선적인 데 비해 서민적·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대외관계
    영역닫기영역열기1. 명과의 관계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事大)로써 친선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명나라에 사대한다 함은 조선의 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며, 중요한 국정을 보고해 그 의견을 듣는 따위의 일을 말한다.
    고려 말에 있었던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은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대부층의 이익이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신흥사대부층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가 당시 권문세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내세웠던 친명정책은 조선 건국 후에도 필요하였다.
    명나라는 조공(朝貢)이라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명목상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을 얻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정치상 기본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에 따르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선진 문화를 수입했으며,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으나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이는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조선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으로 약 200년을 끈 다음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여진과의 관계
    여진과는 교린(交隣)이라는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여진 추장에게 명예 관직을 주어 형식상 종속 관계를 맺고, 진상과 회사(回賜)라는 관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은 그들의 복종에 만족하고, 여진은 문물 수입으로 만족하는 관계였다.
    조선 초기 여진의 갈래는 흑룡강 유역의 야인(野人),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海西女眞) 등이 있었다.
    명나라는 영락제(永樂帝)주 07) 때 만주 경략을 본격화해 약 180위(衛)를 두어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의 북쪽 경계 밖에는 명나라 지배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 많았다. 조선은 이들을 야인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정복하고 한편으로는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과의 관계를 보면, 태조 때부터 여진 경략에 착수,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에게 종성·온성·회령·부령·경원·경흥 등에 6진을 두게 하고 두만강으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한편, 압록강 방면의 여진은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이천(李蕆) 등에게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4군을 설치하게 하여 압록강 상류 지역까지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6진 설치로 압력을 받은 오도리족은 그 대부분이 압록강 방면 파저강(婆猪江) 부근으로 이주, 그 곳 우량하족의 추장이며 건주본위도독(建州本衛都督)인 이만주(李滿住)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두만강 북안에 잔류한 여진은 기회만 있으면 조선에 침입해 소란을 피웠다.
    그리하여 1460년(세조 6)에는 신숙주(申叔舟)가 강원도·함경도체찰사로 우량하족의 본거지를 무찔렀고, 1491년(성종 22)에는 허종(許琮)이 우디거 여러 촌락을 소탕하였다. 4군이 설치된 지역은 방어하기가 더 어려워서 1458년에는 4군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국방선의 후퇴였다.
    세조 초에 건주여진의 추장에게 주는 관직 문제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명나라가 건주본위를 토벌하고자 조선에 협공을 요청해왔다.
    조선에서는 이에 호응해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압록강을 넘어 건주위의 본거지를 공략, 이만주 부자를 죽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1479년에도 명나라의 요청으로 윤필상(尹弼商)이 압록강 너머 여진 본거지를 토벌하게 했고, 그 뒤 신립(申砬)도 여진의 이탕개(尼湯介)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17세기 초 건주좌위 출신의 누루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해 조선은 호란이라는 대란을 겪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청과의 관계
    건주좌위 출신의 누루하치는 16세기 말경 인근 촌락을 차례로 정복,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광해군 8)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만주 지방의 태반을 통합하였다. 광해군은 양단정책(兩端政策)을 써 명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향명배금정책(向明排金政策)을 뚜렷이 하자 후금이 1627년(인조 5) 우리 나라에 침입하니, 곧 정묘호란이다. 1636년에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하고 다시 조선에 침입, 병자호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경향이 오래 지속되었으나, 표면상의 대청 관계는 사대의 예를 지켜 부연사행(赴燕使行)이 계속되었다. 조공 이외에 사신에게 공인된 사무역이 행해졌고, 또 국경에는 호시(互市)가 시작되어 관허무역인 개시(開市)와 밀무역인 후시(後市)가 있었다.
    효종 때에는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또, 효종 때에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두 차례나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병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유사 이래 러시아와의 첫 대결로서 조선은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문제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는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시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 때 북계의 경계에 대한 우리측 주장과 그들의 주장이 서로 달라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뒤 북계의 국경 분쟁은 고종 때 다시 일어났으며, 1909년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의 부설권을 얻어낸 대가로 간도(間島) 지방을 청나라의 영토로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맺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일본과의 관계
    조선 건국 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뜸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국세가 강해진 것과 신무기인 화약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왜구의 소규모 약탈 행위는 가끔 있었으므로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1443년에는 일본과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웅천의 내이포(乃而浦),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개항하고,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그 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어 일본과의 교역이 중단되었다가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로 세견선과 세사미두의 수량을 반감해 다시 교역을 허락하였다. 1535년 고성(固城) 사량진(蛇梁津)의 난으로 통교가 중단되었다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어 더욱 많은 제약 밑에서 교역하였다.
    16세기 수 차례의 왜변으로 조정에 비변사를 상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오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 국내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豊臣秀吉)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전후 7년 간의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은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납속(納粟)으로 관직을 팔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인구는 줄었으며, 토지는 황폐해져 경작 면적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호적과 토지의 대장이 소실되어 역을 부과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또한, 문화재 손실도 커서 왕궁을 비롯, 유서깊은 시설들과 사고(史庫)의 실록 등 많은 문헌들도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 및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국력을 기울이다가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도자기와 활자 등의 기술을 배워갔으며, 성리학 등 학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서자 일본의 요청으로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를 맺어 통교를 재개하였다.
    기유약조 이래 통신사(通信使) 파견은 모두 12회나 되었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경조(慶吊)의 일이 있을 때마다 에도(江戶)주 08)까지 내왕했는데, 비단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문화 전파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다.
    한편, 왜인들의 내왕을 통제하기 위해 전기와 같이 입국 증명을 꼭 소지하게 하였다. 입국 왜인의 개항장은 부산이었고, 입국 왜선은 세견선(歲遣船)과 임시적인 사송선(使送船)이 있었다.
    사송(使送)을 목적으로 입국하는 차왜(差倭)는 무역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들은 예조판서·동래부사 등에 공식적인 서계(書契)와 예물인 별폭(別幅)을 바치고 회답서계(回答書契)와 회사(回賜) 예물을 받아갔다.
    이후 예물은 점차 증가되어 무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차왜의 종류에는 막부장군(幕府將軍)의 관백승습(關白承襲)을 비롯, 통신사호행(通信使護行)·진하(陳賀) 등 30여 종이나 되었다.
    1811년(순조 11)에는 역지교역(易地交易)이라 하여 조선 통신사를 대마도에서 영접하기 시작하였다. 역지교역이란 일본이 조선 통신사 일행 500여 명 내외가 에도까지 내왕하는 데 드는 접대비가 과다하다는 이유로 대마도에서 외교와 교역 사무를 처리하자고 한 것이다.
    이 역지교역은 일본의 국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이 무례하다 하여 역지교역이 실시된 1811년부터 1876년 병자조약 때까지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5. 유구·남만과의 관계
    유구는 고려 말에 중산(中山)·산남(山南)·산북(山北)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고려 및 명나라와 각각 교섭을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401년(태종 1)에 찰도가 다시 사신을 보내 수호하고, 매년 신하라 칭하며 방물(方物)을 공납해왔다. 그 중에는 조선이 공인하는 세견선으로 내왕하고 관직을 받은 자도 있었다.
    유구는 해외 무역으로 생계를 삼았는데, 토산물과 안남(安南)·샴(暹羅)주 09) 등 남쪽 산물을 중개하였다. 조선과 유구의 교통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표류민을 자주 송환해왔다. 유구에는 조선에 오는 해로를 잘 아는 자가 적었다. 때문에 일본의 승려·상인으로서 유구에 거주하는 자가 사신이 되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유구의 조공물은 남양 산물이 많았으며, 그들과의 통교는 인조 때까지는 아주 끊어지지 않았다. 자바(爪哇)와 샴을 남만이라 불렀는데, 당시 남만의 배는 안남을 지나 마카오·광둥(廣東)·아모이(泉州) 내지 대만·유구·일본의 기타큐슈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조선까지 들어온 것도 있었다.
    샴은 당시 아유티아 왕조로서 태조 때 사절을 보내왔으며, 방물로는 소목(蘇木)·속향(束香) 등이었다. 자바도 태종 때 이래 진언상(陳彦祥)이 여러 번 사절로 왔고, 남양의 여러 토산과 인도 지방에서 생산하는 번포(蕃布) 등을 가져왔다. 이 때의 자바는 마지바히트 왕조로서 국세가 한창 융성하던 시기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구사
    오늘날 조선시대사에 대한 연구와 함께 그 성과도 대단히 많아 논문이 1,000여 편, 저서만도 200권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대체로 광복 이전보다 광복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며, 1960년대부터는 연구가 본궤도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있어서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한국인 학자와 일본인 학자의 업적으로 나뉜다. 당초 한국사를 서양근대사학의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 관인 학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식민주의 사학의 일환이었으며, 주로 당쟁사·대외관계사·토지제도사 그리고 조선 후기 사회의 정체성 등에 힘을 기울였다.
    가와이(河合弘民)·세노(瀨野馬態) 등의 당쟁사 연구는 다분히 한국인이 자치 능력이 없는 민족임을 강조, 일본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카무라(中村榮孝)·아키야마(秋山謙藏)·이케우치(池內宏) 등의 대명·대일관계사와 왜란·호란 등의 연구는 조선 역사를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일본과의 교린, 그리고 끊임없이 외침을 받은 것으로 강조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또한, 와다(和田一郎)·후카다니(深谷敏鐵)·쓰도(周藤吉之) 등의 토지제도사 연구는 토지국유제론을 내세워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토지 약탈을 합리화하고자 한 저의가 숨어 있었다.
    한편, 후쿠다(福田德三)·요모(四方博) 등의 조선 후기 사회 연구는 봉건사회 결여론 내지 미성숙론이라는 정체성론(停滯性論)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은 조선 후기 실학의 발생도 청나라의 외래문화 전래에 의한 자극 정도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나 일본 학자의 연구 중에는 쓰도의 조선 초기 노비 연구나 요모의 조선 후기 신분제 연구, 세키노(關野貞)의 미술사 분야의 업적과 같이 간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한편, 일제 하 한국인 학자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그 인원은 적었지만 나름대로의 연구 성과가 있었다. 즉, 저서로는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 유자후(柳子厚)의 『조선화폐사』, 홍이섭(洪以燮)의 『조선과학사』 등이 나왔다.
    논문으로는 이상백(李相柏)의 전제개혁 운동, 신석호(申奭鎬)의 사화, 유홍렬(柳洪烈)의 서원·향약, 여말 선초의 사학(私學) 및 사묘(祠廟), 김석형(金錫亨)의 조선 초기의 국역 편성(國役編成), 박시형(朴時亨)의 조선 초기의 전세제도, 손진태(孫晉泰)의 감자전파(甘藷傳播), 김두헌(金斗憲)의 가족제도, 이병도(李丙燾)의 서경덕 등에 대한 유학사, 이인영(李仁榮)의 폐사군 문제(廢四郡問題) 등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그리고 1936년 정약용 100주기를 전후해 조선학 운동이 전개되면서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백남운(白南雲) 등이 조선 후기의 실학을 근대사상의 싹으로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 학자의 연구 중에는 일본 학자의 연구 성향에서 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도 없지 않았다.
    조선시대사 연구는 광복과 함께 새로 출발하게 되었지만, 연구 성과의 집적이 쌓이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다. 특히, 6·25를 겪으면서 1950년대까지 연구 성과가 부진하였다.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 이래의 연구를 묶은 것들이 저서로 선보였다.
    이상백의 『한국문화사연구논고』(을유문화사, 1947)·『이조건국의 연구』(을유문화사, 1949), 전석담(全錫淡) 외의 『이조사회경제사』(노농사, 1946), 이북만(李北滿)의 『이조사회경제사연구』 (대성출판사, 1948), 김두헌의 『한국가족제도의 연구』(을유문화사, 1949), 현상윤(玄相允)의 『조선유학사』(민중서관, 1949), 이만규(李萬珪)의 『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7) 등이 출간되었다.
    6·25로 연구 활동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나 1950년대에도 이인영의 『한국만주관계사연구』(을유문화사, 1954), 조선시대에 국한된 것은 아니나 정인보의 『담원국학산고』(문교사, 1955)가 저자들이 납북된 뒤 출간되었고, 홍이섭의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 (한국연구원, 1959), 고승제(高承濟)의 『근대한국산업사연구』(대동문화사, 1959) 등이 출간되었다.
    한편, 195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 왕조실록』(48권, 1953∼1958)·『비변사등록』(28책, 1959∼1960)·『승정원일기』 (1961년부터 등사출판 시작) 등의 원전을 차례로 축소, 영인해 조선시대 연구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에 진단학회(震檀學會)에서 편찬한 『한국사』의 근세전기편(을유문화사, 1961)·근세후기편(을유문화사, 1965)은 조선시대 연구에 길잡이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조선시대사 연구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9∼15권, 탐구당, 1974·1975)는 이러한 활성화된 연구 진척에 따라 새롭게 쓰여진 통사이다.
    1960년대 이래의 연구 성과를 한데 묶어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 관계 등 각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의 정치·제도 관계는 조선의 건국, 정치지배 세력 문제, 공신 문제, 정치 세력간의 대립, 정치 기구, 제반제도, 지방제도, 군제 등에 걸쳐 100여 편의 논문이 나왔다.
    저서로는 송준호(宋俊浩)의 『이조생원진사시의 연구』 (국회도서관, 1970), 최승희(崔承熙)의 『조선초기 언관·언론연구』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6), 이병휴(李秉烋)의 『조선전기 기호사림파연구』(일조각, 1981), 정두희(鄭杜熙)의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일조각, 1983), 이재룡(李載龒)의 『조선초기 사회구조연구』(일조각, 1984) 등이 있다.
    또 이 밖에 육군본부의 『한국군제사』 근세조선전기편(보진재, 1968)·근세조선후기편(천풍인쇄주식회사, 1976), 차문섭(車文燮)의 『조선시대 군제연구』(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등이 출간되었고, 고려와 조선에 걸친 이수건(李樹健)의 『한국중세사회사연구』(일조각, 1985), 김성준(金成俊)의 『한국중세정치법제사연구』(일조각, 1985) 등이 나왔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는 당쟁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룬 김종덕(金鍾德)·이태진(李泰鎭)·정만조(鄭萬祚)·최완기(崔完基)·박광용(朴光用)·오수창(吳洙彰)·이종범(李鍾範)·이은순(李銀順) 등의 연구와 사림정치의 권력 구조를 다룬 송찬식(宋贊植)의 연구가 있다.
    저서로는 당쟁을 비양반층의 움직임과 결부시킨 정석종(鄭奭鍾)의 『조선후기 사회변동연구』 (일조각, 1983)가 있으며, 정치 권력의 향촌 일선기관인 향청(鄕廳)의 구조를 밝힌 김용덕(金龍德)의 『향청연구』(한국연구원, 1978)가 출간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정치·제도 연구에는 정치학·행정학·법학 계통의 학자들인 강주진(姜周鎭)·이종항(李鍾恒)·김운태(金雲泰)·박동서(朴東緖)·강길수(康吉秀)·윤갑식(尹甲植)·이재철(李載喆) 등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법제사의 연구도 약간의 논문이 있고, 저서로 서일교(徐壹敎)의 『조선 왕조 형사제도의 연구』(한국법령편찬회, 1968), 박병호(朴秉濠)의 『한국법제사 특수연구』(한국연구원, 1960)·『전통적 법체계와 법의식』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2) 등이 있다. 이 밖에 구병삭(丘秉朔)·이종하(李鍾河) 등의 저서가 있다.
    조선 전기의 경제사 관계 연구는 토지제도·농업 기술·재정·상업·화폐·수공업·기타 산업 등을 다루어, 논문이 거의 200편이나 되고 저서도 20여 권에 달한다. 토지제도사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중반부터 종래의 토지국유제론이 배격되고 토지사유제론이 대두되어 공명을 받게 되었다.
    농업 기술·상업·화폐 연구는 15세기에 연작법의 보급과 수전 농업으로의 전환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16세기 초에는 장시(場市)가 서고 면포(綿布)가 화폐 기능을 가지고 상품 유통이 발달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수공업 연구에서는 15세기의 관장제(官匠制)가 16세기에 무너지고 사장제(私匠制)로 전환되었음이 실증되었다. 이러한 성과로 16세기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움직임이 완연히 나타났다.
    경제사 관계의 저서로는 천관우(千寬宇)의 『한국토지제도사 하』(한국문화사대계 Ⅱ―정치·경제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김태영(金泰永)의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지식산업사, 1983), 이경식(李景植)의 『조선전기 토지제도연구』(일조각, 1986), 이광린(李光麟)의 『이조수리사연구』(한국연구원, 1961), 이춘녕(李春寧)의 『이조농업 기술사』(한국연구원, 1964), 이태진의 『한국 사회사연구』(지식산업사, 1986), 이호철(李鎬澈)의 『조선전기 농업경제사』(한길사, 1986), 김갑주(金甲周)의 『조선시대 사원경제연구』(동화사, 1983), 김옥근(金玉根)의 『조선왕조 재정사연구』(일조각, 1984), 박원선(朴元善)의 『보부상』(한국연구원, 1965) 등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경제사 분야에서는 1960년대부터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론이 지닌 허구성을 뒤집고 내재적으로 경제가 성장된 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게 되었다.
    한편, 농업사 분야에서는 김용섭(金容燮)의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농촌경제·사회변동―』(일조각, 1970)·『조선후기 농업사연구―농업변동·농학사상―』(일조각, 1971)·『한국근대농업사연구』(일조각, 1975)가 있다.
    상공업 분야에는 유원동(劉元東)의 『조선후기 상공업사연구』(한국연구원, 1968), 강만길(姜萬吉)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송찬식의 『조선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3), 유승주(柳承宙)의 『조선후기 수공업의 경영형태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4), 화폐 문제에 관한 저서로는 원유한(元裕漢)의 『조선후기 화폐사연구』 (한국연구원, 1975) 등이 나왔다.
    조선 전기 사회사 관계의 연구는 신분제, 사림 세력과 향약, 사회 정책, 호구 문제, 가족제도 등을 대상으로 하여 논문이 170여 편, 저서도 10편에 가깝다. 특히, 조선 전기 신분제 연구에는 논쟁이 활발해, 양반층 아래 양인과 천인이 있었다는 양반사족론에 대한 이론(異論)으로 적어도 15세기는 양인과 천인의 2대 신분만이 있었다는 양천제설(良賤制說)이 나와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조선 전기 사회사 관계의 저서로는 이성무(李成茂)의 『조선초기 양반연구』(일조각, 1980), 한영우(韓永愚)의 『조선전기 사회경제연구』(을유문화사, 1983), 이수건의 『영남사림파의 형성』(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최익한(崔益翰)의 『조선사회정책사』(박문서관, 1974), 최영희(崔永禧)의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 (한국연구원, 1975), 김홍식(金鴻植)의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기본구조』(박영사, 1981), 손보기의 『Social history of the early Yi Dynasty 1392∼1592』 (California Berkeley Univ., 1963) 등이 나왔다.
    조선 후기 사회사 관계는 주로 신분제의 변동과 사회적 변동에 대한 연구가 많다. 신분제 변동에 대한 연구 방법으로 대구·울산·산음·단성 등의 호적대장을 분석한 것들이 많이 나왔고, 향리와 노비 문제를 다룬 것도 많다.
    사회적 변동에 대한 연구로는 서원, 향약과 향청, 그리고 향권의 추이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사회사 관련 연구는 활발해졌으나 저서 출간은 아직 적은 편이다. 즉, 당쟁을 비양반층의 움직임과 결부시키면서 사회신분제의 변화를 다룬 정석종의 『조선후기 사회변동연구』, 히라키(平木實)의 『조선후기 노비제연구』(지식산업사, 1982) 정도가 있다.
    문화면으로는 사상·종교·교육·과학·사학사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사상사의 중심이 된 것은 유학·성리학이었으므로, 이 방면에 논문이 200여 편, 저서도 20여 권이 나와 있다.
    유학관계 저서로는 배종호(裵宗鎬)의 『한국유학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74)를 비롯, 김경탁(金敬琢)·윤사순(尹絲淳)·김길환(金吉煥) 등의 저서가 있고, 유학자에 대한 저서로 전두하(全斗河)·윤사순·정순목(丁淳睦) 등의 퇴계(退溪) 연구, 이준호(李俊浩)·손인수(孫仁銖) 등의 율곡(栗谷) 연구, 서수생(徐首生)의 길재(吉再) 연구가 있다. 양명학(陽明學)에는 윤남한(尹南漢)의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집문당, 1982)를 비롯, 김길환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사회·정치사상 관계로는 한영우의 『정도전사상의 연구』(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3)·『조선전기 사회사상연구』(지식산업사, 1983), 김용덕의 『조선후기 사상사연구』(을유문화사, 1977), 유홍렬의 『한국 사회사상사논고』(일조각, 1980), 이원순(李元淳)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1986)·『조선서학사연구』(일지사, 1986), 박충석(朴忠錫)의 『정치사상사』, 김병하(金柄夏)의 『경제사상사』 등이 나왔다.
    조선 후기 사상사로는 1950년대부터 실학 연구가 한국 근대화의 정신적인 배경으로 추구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사상은 마침내 근대지향 의식과 민족 의식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실학 연구에 대한 저서로는 앞에서 예거한 홍이섭의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를 비롯, 한우근(韓㳓劤)의 『이조후기의 사회와 사상』(을유문화사, 1961)·『성호이익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천관우의 『한국실학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김용덕의 『정유박제가연구』(중앙대학교출판부, 1970) 등이 출간되었다.
    교육사 분야는 교육학 계통에서 주영하(朱永夏)·한기언(韓基彦)·정순목·안상원(安商元) 등의 저서가 출간되고 있다. 과학사 분야는 도량형 관계에 박흥수(朴興秀)의 『도량형과 국악논총』(대방문화사, 1980), 화기 관계에 허선도(許善道)의 『한국화기발달사』(일조각, 1969)를 비롯, 이강칠(李康七)·채연석(蔡連錫)의 저서가 있다.
    이 밖에, 선박 분야로는 김재근(金在瑾)의 『조선왕조 군선연구』(일조각, 1977), 활자·인쇄 관계의 것으로 윤병태(尹炳泰)의 『조선조 고활자고』(연세대학교, 1976), 정형우(鄭亨愚)의 『조선시대 서지사 연구』(한국연구원, 1983) 등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사학사 관계로 한영우의 『조선전기 사학사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1)가 나왔다. 대외관계 분야는 대명 교섭과 무역, 대일 교섭과 무역, 대여진 교섭과 무역, 동남아시아 관계 등이 다루어졌다.
    저서로는 이현종(李鉉淙)의 『조선전기 대일교섭사 연구』(한국연구원, 1964), 김병하의 『조선전기 대일무역연구』(한국연구원, 1969), 서병국(徐炳國)의 『조선시대 여진교섭사연구』(교문사, 1970), 박수이(朴壽伊)의 『이조무역정책논고』(민중서관, 1974) 등이 출간되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기인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여 년 동안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양적으로 보아 저서 100여 권, 논문 2,000여 편이나 발표되었다. 이 10년 동안의 연구 분량은 1986년 이전까지의 연구 분량 보다도 더 많아 바야흐로 한국사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른 것으로 생각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최근 조선시대사 연구 동향
    조선시대사 연구는 1960년대 이래 일제 관인학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내재적 발전론이 제시되었다.
    이에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연구로 농업·상업·수공업 등의 분야와 내재적 발전론의 사상적 근거로 실학사상 연구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실학사상은 근대지향 의식과 민족 의식으로 집약되는 사상으로 추구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 추세에 따라 자연히 성리학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성리학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 성리학의 터전에서 활동했던 사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정치사에서 대간제도·사림정치·붕당정치, 사회사에서 향촌 사회, 사상사에서 성리학의 성격 및 의례·예론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치사 관계 분야에서는 정치제도에서 비변사·승정원·대간제·과거제와 문음, 관료제·지방제도·군사제도에 있어서 면리제가 초기에 정비되고 후기에 발달하게 된 점이 규명되었다.
    정치제도에 관한 저서로는 지두환(池斗煥)의 『조선전기 의례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정두희(鄭杜熙)의 『조선시대 대간연구』(일조각, 1994), 이재호(李載浩)의 『조선정치제도사연구』(일조각, 1995), 조좌호(曺佐鎬)의 『한국과거제도연구』(범우사, 1996), 이성무(李成茂)의 『한국의 과거제도』(집문당, 1994), 박홍갑(朴洪甲)의 『조선시대 문음제도』(탐구당, 1994), 이수건(李樹健)의 『조선시대 지방행정사』(민음사, 1989), 이존희(李存熙)의 『조선시대 지방행정사연구』(일지사, 1990), 원영환(元永煥)의 『조선시대 한성부연구』(강원대학교출판부, 1990), 차문섭(車文燮)의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방상현(方相鉉)의 『조선초기 수군제도』(민족문화사, 1991), 최효식(崔孝軾)의 『조선후기 군제사』(신서원, 1995) 등이 있다.
    사림정치 내지 붕당정치에 대해서는 붕당정치의 배경, 향촌 지주층의 대두, 그리고 언관권(言官權)과 낭관권(郎官權)의 확립이 붕당정치가 전개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음이 밝혀져 있다.
    붕당정치의 주요 안건의 하나인 예송(禮訟)에 대해서도 사회 발전상 이념 논쟁으로 해석, 호포법(戶布法),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궁방전, 북벌 문제, 문묘이정(文廟釐正)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저서로는 최이돈(崔異敦)의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일조각, 1994), 이태진(李泰鎭)의 『조선유교사회사론』(지식산업사, 1989), 이수건의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일조각, 1995), 이은순(李銀順)의 『조선후기 당쟁사연구』(일조각, 1988), 허권수(許捲洙)의 『서인과 남인의 학문적 대립』(범인문화사, 1993)이 있고, 세도정치에 대한 저서로는 한국역사연구회의 『조선정치사 1800∼1863, 상·하』(1990)가 있다.
    경제사 관계 분야에서는 수취제도에서 전세 문제로 도결(都結), 작부제(作夫制)·양호(養戶)·공동납·금납제 등이, 군역 문제로는 균역법·호포론(戶布論)이, 공물제도로는 대동법 8결, 작부제, 환곡 문제로는 환모(還耗)의 부세화, 지방 재정의 민고(民庫) 등이 다루어졌다.
    19세기 부세의 도결화 문제를 다루어 봉건적 수취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민란을 야기하게 하고, 봉건적 수취 체제를 해체시켰음을 추구하였다. 즉, 농민들은 피역, 항조(抗租)·항세(抗稅)·민란 등을 통해 국가의 수취 체제에 항거함이 추구되었으며, 18세기 전후부터 새로운 수취 구조이던 환곡제가 다루어졌다.
    이 밖에 수취 체제의 모순에 대해 식리 활동, 민간 포흠(逋欠)·도량형·호포제론 등이 다루어졌다. 저서로는 김옥근(金玉根)의 『조선 왕조 재정사 Ⅱ』(일조각, 1987)와 『조선 왕조 재정사 Ⅲ』(일조각, 1988)가 있다.
    근래 국가적 토지소유론을 주장해 토지소유 구조는 국가 - 지주 - 소작의 구조로서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지주제가 지배적인 생산 양식으로 발전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영훈(李榮薰)의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이 중층적 토지소유론에 대해서는 궁방전의 특수 형태를 모든 토지에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반론이 있다.
    농업 기술에서 종래 조선 후기에는 논농사에서의 직파법이 이앙법으로, 밭농사에서의 농종법(壟種法)이 견종법(畎種法)으로 발전되었다고 이해되었다.(金容燮). 그러나 밭농사에서의 견종법은 15세기부터 일반화되었으며, 농촌 사회의 변화는 16세기 후반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민성기(閔成基)의 『조선 농업사연구』, 일조각, 1988). 이 주장에 대해 김용섭은 조선 후기 견종법 보급을 재차 주장하였다.(『증보 조선후기 농업사연구 Ⅱ』(일조각, 1988).
    상업 분야는 조선 전기 행상(行商)과 지방 교역을 통한 상업의 발달, 16세기 부상대고(富商大賈)의 성장 등이 연구되었다. 조선 후기는 종래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유통 경제의 변화에 주목, 상업자본의 축적과 도고(都賈)의 성장을 이루게 된 것으로 추구되어 왔으나, 근래 후기 상업계는 사상(私商)층에 의해 재편 주도되어 갔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오성(吳星)의 『조선후기 상인연구』, 일조각, 1989).
    공인(貢人) 연구로 김동철(金東哲)의 『조선후기 공인연구』(한국연구원, 1993)가 있고, 유통 관계에서는 장시의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 최완기(崔完基)의 『조선후기 선운업사연구』(일조각, 1989)가 있다.
    이 밖에 이태진의 『조선유교사회론』이 있으며, 광업 경영에 유승주(柳承宙)의 『조선시대 광업사연구』(고려대출판부, 1994)가 있다.
    그리고 상업 발달의 원인으로 16세기 중엽 장시 경제의 발달과 인구 증가를 주목하는 견해가 나오고, 16세기 국내 경제의 발달로 대외 무역이 활성화되고 17·18세기 전반까지 중개 무역이 발달하며, 19세기 중반에 인삼으로 상업자본주의적 경영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정해 농촌 공업의 미약성, 소농의 양극 분해가 아닌 소농 사회의 성숙, 시장 경제에 있어서 자율적 성장의 미진 등을 지적하는 견해가 나왔다.(이영훈). 이 주장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도전으로서 앞으로의 논쟁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사회사 관계 연구에서는 신분제와 향촌 사회 등이 많이 다루어졌다. 신분제는 조선 초기 양인의 제일성(齊一性)에 의한 양천제(良賤制)를 주장한 유승원(劉承源)의 『조선초기 신분제연구』(을유문화사, 1987)가 있고, 중인층은 18세기에 양천제가 무너지고 반상제(班常制)가 확립된 시기에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래 양반은 특수 계층으로 존재했다는 양반론이 대립되고 있다.(송준호(宋俊浩)의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1987). 조선 후기에 중인 신분층이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등장하고, 그 중에서 향리 주도가계가 향리직을 독점 운영하게 되었다는 이훈상(李勛相)의 『조선후기 향리연구』(일조각, 1990)도 있다.
    조선 전기 노비 문제에 박한갑(朴漢甲)의 『조선전기 노비신분연구』(일조각, 1995)가 있고, 양천교혼(良賤交婚)으로 임란 이전에 신분 변동이 있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형택(全炯澤)의 『조선후기 노비신분연구』(일조각, 1989)에서 노비제의 폐지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중세 봉건사회의 해체를 의미한 것이라 해명하고 있다.
    또한 종래 외거노비=농노설을 부정하고 외거노비의 공납(貢納)을 주장하는 노비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밖에 조선 후기의 신분 변동에 관한 저서로는 이준구(李俊九)의 『조선후기 신분직역연구』(일조각, 1995)가 있다.
    향촌 사회의 구조와 변동에 대한 연구는 자못 활발하였다. 향소(鄕所)·향약(鄕約)·향안(鄕案)·향회(鄕會)·동계(洞契)·향교·서원·사마소(司馬所)·양사재(養士齋)·향도(香徒)·두례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대체로 16·17세기에 재지사족(在地士族)은 상하합계(上下合契)의 동계로서 농민에 대한 신분제적 지배를 이루어 교화권(敎化權)과 부세 부과권을 누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분동(分洞)·분계(分契)하고 면리제(面里制)의 강화와 소농민 경제의 성장으로 부농층이 향임(鄕任)을 맡아 향권(鄕權)을 장악,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질서가 동요되고, 19세기에는 국가에서 관주도의 공동납제(共同納制)로서 향촌통제책을 강화했으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연구가 추구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에 소농민의 성장으로 종래의 향도는 자율적 노동조직인 두레로 구성되어 촌계와 함께 주목하게 되었으며, 19세기에 요호(饒戶)의 향회 참여 역할이 주장되고 있다.
    저서로는 향촌사회사연구회의 『조선후기 향약연구』(민음사, 1990), 이성무의 『조선양반사회의 연구』(일조각, 1995), 이우성(李佑成)의 『한국 중세사회』(일조각, 1991), 이태진의 『한국 사회발전사론』(일조각, 1992), 윤희면(尹熙勉)의 『조선중기 향교연구』(일조각, 1990), 이해준(李海濬)의 『조선시기 촌락사회사』(민족문화사, 1996) 등이 있다.
    그리고 상속 관계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이 재산 상속 대상에서 배제되고 17세기 중엽 이후 균분상속에서 적자위주불균등상속(嫡子爲主不均等相續)으로 이행되었다고 추구되었다.
    문화면으로는 사상·종교·과학·사학사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사상에는 유학사상과 실학사상의 연구가 대종을 이루며, 그 중에서도 인물을 택한 연구가 대단히 많다.
    유학사상사의 저서로 이병도(李丙燾)의 『한국유학사』(아세아문화사, 1987), 최영성(崔英成)의 『한국유학사상사』(아세아문화사, 1994·95), 유명종(劉明鍾)의 『한국유학연구』(이문출판사, 1988), 최완기(崔完基)의 『한국성리학의 맥』(느티나무, 1989), 최근덕(崔根德)의 『한국유학사상사연구』(철학과 현실사, 1992) 등이 있다.
    이 밖에 사상사 분야에 관련해 예학에 대한 고영진(高英津)의 『조선중기 예학사상연구』(한길사, 1995)가 있고, 정치사상으로 권인호의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한길사, 1995), 이이화(李離和)의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정석종(鄭奭鍾)의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한길사, 1994)이 있다.
    실학·동학사상에 대한 한우근(韓㳓劤)의 『조선시대 사상사연구론고』(일조각, 1996)가 있다. 실학사상 연구에는 실학자의 농업론·상업론·광업론 등이 다루어지고, 특히 북학파 사상 연구가 주목된다. 19세기 중인층의 활동 및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서의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정옥자(鄭玉子)의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일조각, 1988).
    또 북학파 연구로 유봉학의 『18·19세기 연암일파의 북학사상연구』(일지사, 1995), 그리고 인물연구 저서로는 정약용을 다룬 것이 4권, 이황·이이를 다룬 것이 각각 3권씩으로 가장 많고, 신숙주·김종직·임성주 등을 다룬 저서도 있다.
    양명학으로 김교인의 『양명학자 정제두의 철학사상』(한길사, 1995)이 있고, 정양완(鄭良婉)과 심경호(沈慶昊)의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2·3』(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이 있다.
    과학사 연구에는 화기(火器)에 허선도(許善道)의 『조선시대 화약병기사연구』(일조각, 1994)가 있고, 활자에 윤병태(尹炳泰)의 『조선후기의 활자와 책』(범우사, 1992), 천혜봉(千惠鳳)의 『한국서지학』(민음사, 1991)이 있다.
    사학사에 한영우(韓永愚)의 『조선후기 사학사연구』(일지사, 1989)는 17∼19세기의 사서 10여 권을 분석, 중세사학에서 근대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서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강세구(姜世求)의 『동사강목연구』(민족문화사, 1994)가 있으며, 지리 분야에 한원학(韓元學)의 『택리지연구』(신양사, 1993)가 있다.
    한편, 미술에 김영원(金英媛)의 『조선전기 도자(陶磁)연구』(학연문화사, 1995)가 있고, 복식에 이상은(李相恩)의 『조선 왕조 복식사론』(동방도서, 1992)이 있다.
    이 밖에 근대사연구회편의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상·하』(한울, 1987)는 조선후기사를 정치·사상·경제·사회편으로 나누어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잘 정리하고 있다.
    대외관계 분야는 종래의 중국에 대한 조공 문제 중심에서 벗어나 국제적 관계로 재조명하고, 교린정책(交隣政策)도 국제 관계로 재조명하게 되었다.
    즉, 한·중교역사를 국제 질서와 국제 교역으로 설명하게 되고, 대일 관계도 국제 관계로 정리하며, 그 밖에 여진·유구 등과의 관계도 종래 사대교린 관계로 연구해오던 경향을 탈피, 대외교섭사로 추구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일본 사정의 기록을 남긴 지식인의 일본 이해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이원식(李元植)의 『조선통신사』(민음사, 1991), 손승철(孫承喆)의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지성의 샘, 1994), 하우봉(河宇鳳)의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민음사, 1989)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 관한 10년 동안의 연구는 새로운 경향이 보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6·17세기 연구를 통해 그 시기의 동질성이 규명되면서 조선시대의 시기 구분을 종래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한 전·후기 구분에서, 초기 15세기, 중기 16·17세기, 후기 18·19세기로 구분하고자 하는 시기구분론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1864년∼1910년대의 조선
    1864∼1910년의 시기는 한국사의 일대 변혁기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로부터 이탈해 근대적 국제 질서 속에 편입된 조선은 서구 열강과 그것을 모방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처하고, 또 국내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역사는 전통 사회의 해체,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것에 대응하는 보수·개화의 상호 작용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호 작용은 자주적 근대 민족국가 건설로 승화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한국사는 조선 왕조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굴복해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유례없는 변혁기를 통해서 한국 민족은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의 이상을 추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의 거족적인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던 조선 왕조의 양반정치 체제는 19세기에 들어와 무너져갔다. 순조·헌종·철종 등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 오랫동안 외척 세력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척족의 세도정치 하에서 과거제도는 문란해졌고 중앙 관리들도 부패하였다. 뇌물로 관직을 획득한 지방관들의 탐학은 농민의 부담을 무겁게 하였다.
    국가의 재정적 원천인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의 피폐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에 19세기 초반에는 홍경래(洪景來)의 난, 진주민란 등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 이러한 대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이 자주 건의되었으나, 효과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편으로 서구 열강의 위협이라는 대외 문제에도 직면, 만성적인 외우내환을 겪고 있었다. 19세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을 따라 서양 선박이 해안에 자주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와 같은 서구 세력의 침투에 대비해서 효과적인 대응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만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원군은 1863년 고종의 즉위를 계기로 실권을 장악,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일소하고 일원화된 명령 계통 하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행하였다.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병인양요(丙寅洋擾), 1868년의 남연군묘도굴 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을 통해서 나타난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의지는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던 양반 유생과 국민들의 지지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 무렵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천황제로 복귀한 일본은 대마도주를 중개로 한 전통적인 한일외교의 통상 관계를 근대적 외교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교섭하였다.
    그러나 서양이나 일본의 실정에 무지, 무관심했던 조선 정부는 일본측이 외교문서에서 ‘황상(皇上)’·‘조정(朝廷)’ 등 중국에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종래에 조선 정부가 만들어준 도서(圖書)주 10)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사절과의 협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구교(舊交)의 지속을 지향하는 조선과 근대적인 신교(新交)를 노리는 일본과의 외교 정책에서 빚어진 국서(國書)의 거부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개혁 정치는 문제점도 있었다. 삼정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화폐 정책은 유통 질서를 혼란시켰다. 또, 과감한 서원 철폐는 유림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때문에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정계에 등장한 민씨 척족들은 대원군의 전제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민비(閔妃,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원군 세력은 유림들의 불만을 이용해 1873년(고종 10)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 체제(親政體制)를 출범시켰다.
    정권을 장악한 민씨 척족은 조세를 탕감하고 청나라 전(錢)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대내적으로 개혁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유화 정책(宥和政策)으로 전환하였다.
    조선의 정치 변화를 알아차린 일본도 다시 통교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이 여전히 의전 문제(儀典問題)로 일본이 원하는 교섭을 거부하자, 일본은 협상을 중단하고 포함외교(砲艦外交)라는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일본은 1875년에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유발해 이를 구실로 이듬해 2월에 군함 수척을 강화도로 몰고와 무력 위협을 하면서 강제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였다.
    일본과 조약으로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된 조선은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화당의 주장과 청나라의 권도(勸導)에 따라 구미 여러 나라와도 통교하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의 위정자들은 균세 정책(均勢政策)으로써 어느 한 열강이 조선에 대해 독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자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1880년대에 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구미 각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문호 개방 이후 조선 내에서는 박규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면서 나라의 부강을 꾀하자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뒤, 수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근대 문명을 견학하고 부국강병술을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1881년에는 의정부 밑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해 개화·자강운동을 총괄하게 하는 한편, 일본에 조사일본시찰단(朝士日本視察團, 일명 紳士遊覽團)을, 청나라에는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해 각종 근대 시설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뒤 일본에 제3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또 미국과의 조약 체결 뒤인 1883년에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근대문명 시설의 시찰과 서양소개 서적의 전래로 개화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개화당이라는 개화 세력이 점차 형성되었다.
    개항 후 개화·자강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외국 상인이 조선 시장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조일수호조규로 치외법권·무관세무역권·조계설치권 등을 획득한 일본은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1년 인천 등을 차례로 개항시켰다.
    그리고 이들 개항장을 통해 조선의 미곡 및 금을 싼 가격으로 수입해가고, 영국산 면제품을 비싼 값으로 조선에 수출하는 중개 무역으로 경제적인 침투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조선이 1883년 관세권을 회복할 때까지 7년 간 항세(港稅)와 상품의 수출입세를 부담하지 않고 조선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였다. 미곡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는 배경 하에서 1881년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은 마침내 녹봉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였다.
    1882년 7월 겨와 모래가 섞인 녹봉미를 지급받은 구식 군인들은 이를 구실로 대원군의 은밀한 지원 하에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 군란은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의 전래를 계기로 1881년에 일어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은 일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오장경(吳長慶)이 거느린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다. 군란 때 피해를 본 일본은 청나라보다 늦게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측에 배상을 요구하면서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배상은 물론 외교권과 상권을 확장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일본 세력의 독점적 진출에 불안을 느껴왔던 청나라와 민씨 척족정권은 1882년 10월에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이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강화하고 무역을 증대, 적극적으로 정치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친청보수 노선으로 기울어진 민씨 척족정권은 친일개화파를 정권에서 축출하려 하였다. 이 때 조선 정부는 균세 정책을 계속 추구해 미국·영국·독일 등 구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와 민씨 척족정권의 의도가 어떠하던 간에, 1880년대 구미 각국과의 통교와 임오군란으로 인한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조선 내에서는 개화 세력과 보수 세력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개화사상과 반청민족주의사상에 불타는 김옥균(金玉均)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이용,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개화당의 국제 정세 오판, 국내 지지세력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청나라의 즉각적인 군사 개입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말았다.
    정변 후인 1885년에 청·일 양국은 양국 군대의 철수, 제3국 군사교관의 추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에서는 청·일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듯했으나, 그것은 표면에 불과하였다.
    청은 그 뒤 정치적·군사적으로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조선 시장에서 청·일간의 상권 다툼은 격화되었다.
    청나라의 고압 정책과 청·일간의 경쟁에 불안을 느낀 조선 국왕과 정부 일각에서는 러시아 세력에 영합해 난국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이 곧 2차에 걸친 한로밀약사건(韓露密約事件)인데, 러시아의 미온적 태도와 청나라에 의한 사전봉쇄 외교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85년 이후 청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서울에 파견,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1885∼1894년 간 위안스카이에 의해 추진된 청의 노골적 간섭 정책은 전통적 종속 관계를 강화해 속국화(屬國化)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개화파의 개화운동, 자주적 외교수립 노력, 외국에서의 차관도입 시도 등 조선의 자주적 개혁 움직임을 억압하였다.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등을 계기로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개항 이후 서서히 증가 추세를 보여온 조선의 대외무역량은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수준으로 비약하였다. 이것은 처음 개항장에 집중되었던 외국 상권이 내륙의 지역까지 뻗어나감으로써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외국 상인, 특히 일본 상인들의 수법은 처음 객주(客主)·여각(旅閣) 등 토착 상인을 중개로 한 간접무역 방식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조선인 거간(居間)을 기용, 조선인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직접무역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외국 상인의 침투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자국 정부의 정책적 보호 하에 진출해온 청·일 양국 상인들을 상대로, 조선인 민간 상인들 중에는 상회사(商會社)라는 일종의 동업조합을 결성, 청·일의 상권 침략에 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청·일 양국의 경제 침투와 그에 따른 경제 침해에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중앙정부 관리들은 오히려 매관매직으로 인사 및 과거제도를 문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증대하는 국가 경비의 염출을 위해 농민을 가일층 수탈하였다. 지방관들도 상품, 특히 쌀의 유통을 촉진시키면서 중간 수탈을 하는 데 급급하였다. 따라서, 조세부담 증가와 관리들의 탐학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미곡 수출을 위한 상업적 농업의 전개로 농촌 경제 내부에서는 부농과 빈농간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또한 일본 상인에 의한 대량의 면포 공급과 근대적 생활 잡화의 유입으로, 농촌의 수공업적 면포 생산이 위축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담의 증가로 농촌 사회의 경제 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1890년대의 농촌은 이러한 여러 모순들이 혼합되어 긴장의 도가 극한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불만은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을 계기로 민란으로 표출되었다.
    고부민란(古阜民亂)에 가담한 농민들의 항거는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을 통해 조직화되어 대규모적인 동학농민의거로 발전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이 지도한 동학농민군은 정부군보다 우세해 한때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에 의한 청군의 개입과 이를 악용한 일본군의 출동으로, 이 내란은 곧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 군대의 개입으로 사태가 복잡하게 되자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정부측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병도 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면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7월 23일에 친일개화파로서 구성된 김홍집(金弘集)내각을 수립하였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이르기까지 김홍집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친일정권 하에서 추진된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갑오경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갑오경장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추진한 1894년 7∼12월간의 개혁을 의미한다.
    갑오경장은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엄호 하에서 수행된 것이었으나, 추진 주체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였다. 때문에 그들의 정책 구상과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반영된 점에서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자율적인 개혁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개혁은 청나라에 대한 독립 선양, 왕실과 의정부를 분리시킨 근대적 내각제도의 도입, 양반중심 신분제도의 철폐, 재정의 일원화, 과거제도의 폐지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합법화시키는 등 일본의 이익을 뒷받침해주는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친일 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그에 따라 초기 갑오경장의 자율성은 퇴색해갔다. 게다가 갑오경장 추진 세력은 반외세·반침략을 위해 궐기한 동학농민의병(제2차 동학농민의거)을 일본군과 함께 진압하기까지 하였다.
    갑오경장 기간 중에 선포된 「홍범14조 洪範十四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끊고 독립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간섭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의 기도는 러시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편, 조선의 집권층 내부에서는 친러파·친미파가 형성되었다. 삼국 간섭 후 민비를 중심으로 한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반 민중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고, 친일 내각 김홍집 정권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1895년 말의 단발령(斷髮令)은 국민들을 더욱 격분시켜, 결국 유생 중심의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의병 봉기로 인한 혼란을 틈타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하는데, 이후 성립된 정권은 의정부의 부활, 지방 관제의 개혁 등 복고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초빙하는 등 친러노선을 취하였다.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격감하고 그 대신 러시아 세력의 침투가 활발해졌다. 따라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간의 세력 다툼이 심해졌는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되었다.
    아관파천 뒤 1년만인 1897년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개혁을 계속하였다. 대한제국은 왕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자주독립국의 면모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9개조의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의회정치를 부인하며, 민권이나 사법권을 무시한 전제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대한제국이 추진한 광무개혁은 정치적인 면에서 전제군주 국가 체제를 재확인하려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추진한 상공업·농업 등의 경제 정책은 근대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어서 광무연간에는 민족 자력에 의한 철도 건설, 회사·기업·금융기관 등의 설립 운동이 전개되고, 근대적 토지 소유에 입각한 농촌경제 개혁을 위해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이 실시되었다.
    대한제국시기에 재야(在野)에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중심이 된 자유민권의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1896년 창설된 독립협회는 처음에 관민 합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정책이 보수적으로 흐르고 외국에 각종 이권을 계속 양도하는 데 자극 받아, 협회의 지식인·소시민·학생 등이 자주국권 회복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고급 관료들은 탈퇴하고 민중들이 주도하게 되었고, 따라서 독립협회의 정치계몽운동은 활발해졌다.
    1898년 독립협회는 도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중심으로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고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등, 민권 신장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향하면서 자주적 근대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대중 운동을 폈다.
    그러나 독립협회 운동에 위협을 느낀 친러보수정권은 군대와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앞세워 1898년 말에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아관파천 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은 감퇴했지만, 그들의 경제적 침략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은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러시아로부터 한국에서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에 추진된 철도 부설, 금융제도의 개혁 등 일련의 주체적인 민족자본 축적운동을 방해하는 한편, 러시아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미국 등과 제휴하는 외교 교섭을 벌였다.
    결국,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보호국설치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統監政治)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국제법상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체결,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다가 군대마저 해산시킨 뒤, 1910년 8월에 조선을 강점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 국권이 위태롭게 되자 개화파의 전통을 이은 지식인과 변법자강사상(變法自强思想)을 받아들인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들이 중심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주·기업가 등 민족자본가들의 후원을 얻은 이들은 보안회(輔安會)·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大韓協會) 등 정치·사회 단체를 만들어 이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단체들은 일제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침략상을 규탄하고 일제 침략의 앞잡이 구실을 하는 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내각을 비판하면서 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교육과 산업의 진흥으로써 국민의 실력을 양성,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꾀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운동을 통해 각종 학회 및 학교가 설립되었고, 근대적 기업이 설립, 운영되었다.
    그러나 일제통감부는 1907년 「보안법 保安法」·「신문지법 新聞紙法」, 1909년 「출판법 出版法」 등을 제정해 이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은 초기의 국권회복운동적 성격에서 나중에는 문화운동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렇지만 1907년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는 표면적으로 계몽 활동을 펴면서 꾸준히 항일 투쟁을 준비하다가 1911년에야 해산되었다.
    서울·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지방에서는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보호조약체결 이후 주로 위정척사파의 유생들이 조직, 지도한 초기 의병은 항일투쟁 정신이 격렬하기는 했지만 보통 50∼100명 정도의 소규모였고, 각각 독자적인 지역을 기반으로 전투를 전개한 분산성을 띠고 있었다.
    또 장비면에서도 구식 화승총(火繩銃)이 주무기였다. 따라서 군사 조직이나 무기면에서 일본군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들이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의 규모와 전투 능력이 향상되었다. 또한 평민의병장의 진출이 눈에 띠게 두드러지는 등 의병의 신분 구성도 다양해졌다.
    의병군은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라는 의병 연합전선을 형성, 서울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이 때의 의병은 애국애족사상과 반침략사상이 투철해 일제에 대한 철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를 중시하는 사상적 한계성, 국제 원조의 결여, 무기 및 조직의 열세 등으로 상대적으로 우세한 일본 군대의 조직적인 토벌 작전에 따라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1909년 일제가 실시한 대규모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의 활동 무대는 축소되었다.
    반일 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는 1910년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이용하면서 이완용 내각을 상대로 소위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을 체결, 5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조선 왕조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국제관계
    [흥선대원군의 쇄국 외교]
    19세기 후반기는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동양에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에 잦아진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양이(洋夷)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흥선대원군 치하의 조선 정부는 중국 및 일본과 전통적인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을 고수하는 한편, 서양에 대해서는 쇄국양이 정책을 취하였다.
    서양과의 통상·외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은 서양의 무력 침략은 물론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서학(西學)주 11)의 침투를 막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1860년대에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왔을 때, 천주교 신자 남종삼(南鍾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국 및 프랑스의 세력을 동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부 내의 보수주의자와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해 문호를 폐쇄하고 국내의 천주교도들을 탄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러한 쇄국 및 천주교 박해정책은 ‘은둔국 조선’에 대한 프랑스 및미국이 무력 행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로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이후 대원군은 양이쇄국 정책에 박차를 가해, 변방 수비를 강화하고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강한 쇄국 의지를 내외에 보여주었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후, 근대적 외교·통상 관계의 수립을 요망해온 일본의 협상 요구도 서계문제(書契問題)를 구실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1873년 말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개시하면서 지양되었다.
    [고종 치하의 국제 관계]
    대원군 하야 이후 고종 치하의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76년에 일본과 처음으로 근대적 조약(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 뒤 점차 서양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그 결과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이외에 미국(1882)·영국(1883)·독일(1883)·러시아(1884)·이탈리아(1884)·프랑스(1887)·오스트리아(1892)·벨기에(1902)·덴마크(1902) 등 9개국과 차례로 외교·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시기에 맺어진 열국과의 조약은 형식상 자주독립국간에 체결된 조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에게 불리한 치외법권(治外法權)·고정관세(固定關稅, 혹은 협정관세)·최혜국조관(最惠國條款) 등 요소가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시기 조선의 외교는 주로 국내에 주재한 외국 공사를 상대로 하는 소극적인 외교였다. 조선은 1887년과 이듬해에 일본과 미국에 각각 공사관을 개설하고 외교 사절을 상주시켰고, 1890년대 이후 유럽 각국에도 공사관을 설치했지만 이들 해외 공관은 적극적인 외교·통상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1894년까지 전통적인 사대조공 관계를 지속하였다. 청나라는 1879년 일본이 유구(琉球)를 병탄하기 전까지 조선 문제에 무관심해 조선에 종주권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0년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가능성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이 서양제국과 조약을 체결, 이들을 견제하도록 권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880년대 초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방이나 내치·외교는 자주”라고 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알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병자호란 이래 처음으로 조선에 군사 개입을 하였다.
    군란 진압 후 청나라는 군란의 주모자로 알려진 대원군을 청국으로 구치하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또, 조선에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파견하는 등 고압적인 간섭 정책을 폈다.
    1885∼1894년 간에는 위안스카이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 파견해 조선의 내외 정치를 노골적으로 간섭, 종주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1894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또는 馬關條約)으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모두 상실하였다. 그 뒤 청나라는 조선과 통상적인 외교·무역 관계를 유지하였다.
    메이지유신 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수법을 모방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 정책은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입각한 일본의 국수적 민족주의, 러시아의 남하를 예방해야 한다는 전략적 동기,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반대파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정치적 동기, 그리고 통상을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와 과잉 인구의 해외 유출이라는 식민주의적 고려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되었다.
    일본의 대한정책은 일본 내의 상황과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우선 순위 내지 실현 방법이 바뀌었지만, 끈질기게 추구되어 마침내 1910년에는 조선을 병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1876년에 조선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해 부산 이외의 2개 항구 개항, 조계설치권·무관세무역권·일본화폐유통권 등을 획득, 1883년까지 조선 시장에 독점적으로 침투하였다.
    1880년 이후 일본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조선의 중견 관료들을 자기 나라에 초청, 일본의 근대 문물을 견학하게 하여 조선이 일본의 문명개화상을 모방하도록 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조약으로 군대 주둔권을 획득한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나라 세력의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1884년 말 친일개화당의 갑신정변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청나라의 대한간섭 정책을 조장시켜준 결과가 되었다.
    그 뒤 일본은 1885년 톈진조약을 체결, 한반도에서 청국과의 세력 균형을 꾀했으나, 조선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군사력을 키워온 일본은 1894년의 동학농민의거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청국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 서구 열강과 본격적인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청일전쟁 중에 일본은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해 보호국화 하려는 적극간섭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지나치게 고압적인 간섭 정책은 도리어 조선 정부 내에서의 반일친러파를 형성시켰다.
    이에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러파의 거두인 민비를 시해해 상황을 호전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이듬해에는 아관파천이 이루어져 일본 세력은 조선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일본은 일본 다음으로 조선에 가장 예민한 관심을 보인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면서 조선에서의 이권 확충에 주력하였다. 1898년 니시―로젠협정으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에서의 상공업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00년 이후에는 ‘만한교환조건(滿韓交換條件)’의 협상을 러시아에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삼국간섭 이래 계속 군비를 증강해온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츠머스조약·태프트―가쓰라밀약·영일조약 갱신 등으로 러시아·미국·영국 등 조선에 이해 관계가 있는 나라들로부터 한국 지배를 승인 받은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 하더니 1910년에는 이를 병합하였다.
    미국은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서양 국가였다. 1882년에 청나라 이홍장의 알선으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또 협정관세율이 비교적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 등으로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에 비해 비교적 관대한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과 외교담당자는 미국의 거중조정과 그 부력(富力)에 기대를 걸고 미국에 의존하는 정책을 택해, 미국으로부터 고문관·기술자·교사 등을 초빙함은 물론 미국인 선교사도 받아들였다. 1883년에는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고, 1888년에는 워싱턴에 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조선에 대해 내정불간섭 정책을 견지한 미국은 전략적 동기보다는 경제적·문화적 동기로 조선에 접근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조선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가치에 회의를 느끼고 1885년에 주한공사의 직위를 격하시키는 등 소극·퇴영 정책을 택하였다.
    미국은 내정불간섭 정책을 표방하면서 청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체결시 조선측의 거중조정 요청을 무시하더니, 1905년에는 일본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미국 정부가 주장한 내정불간섭 정책과는 달리 알렌을 비롯한 미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개화 세력과 제휴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 그리고 1895년 이후 조선에 진출한 미국의 자본가는 운산금광 채굴권·철도 및 전철 부설권 등 알찬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였다.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의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가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게 되자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860년대 초 러시아는 조선에 경흥부(慶興府)를 통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측의 협상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청·일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84년에 한로수호통상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청국이 조선에 노골적인 간섭 정책을 펴자 조선 국왕은 ‘친아거청책(親俄拒淸策)’의 일환으로서 2차에 걸쳐 한로밀약체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청·일과 충돌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 요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1888년에 한로육로통상장정을 맺어 상권을 확장하는 데 그쳤다. 그 뒤 1891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기공한 러시아는 청일전쟁 중에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삼국 간섭으로써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1896년에 조선의 친러파와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가 후원한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898년에 여순(旅順)·대련(大連)을 조차한 러시아는 요동반도 경략에 치중하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진출을 잠시 등한시하였다. 이는 1898년 일본과 체결한 니시―로젠협정에서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주도 장악한다는 만한교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0년 중국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을 계기로 만주를 장악한 러시아는 그 해에 여순·대련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마산항을 점령, 그 조차를 요구하였다.
    또 1903년에는 압록강 하류의 용암포(龍巖浦)를 점령, 그 조차를 조선 정부에 요구하는 등 적극침투 정책을 택함으로써 일본과 대립하더니 드디어 1904년에 러일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제정러시아의 침투는 중지되었다.
    영국은 1830년대 이래 한반도에 관심을 나타냈으나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직접적인 접근을 보류해왔다.
    그 뒤 1883년에야 치외법권과 낮은 관세율을 특징으로 하는 한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조선에 경제적으로 침투하는 데 치중하였다.
    갑신정변 후 러시아의 한반도 침투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은 1885∼1887년간 거문도를 점령해 러시아 해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는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을 앞세워서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였다. 그 뒤 1905년에 영국은 영일동맹을 갱신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1834년이래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조선에 관심을 보인 프랑스는 병인양요로 조선과 대결하다가 1887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의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은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조선에 진출한 다른 열강들과 경쟁하면서 각종 경제적 이권을 얻는데 주력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정치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생부 이하응(李昰應)이 대원군으로서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일소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최고정책 결정기관이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정치·군사의 최고 기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치제도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명령 계통의 일원화를 꾀한 것이었다. 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삼정(三政)을 정비하였다. 이에 전세징수 대상인 전지(田地)의 확보를 위해 양전사업을, 군포(軍布)의 증수를 위해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그리고 환곡(還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의 강행을 위한 군사비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은 막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악화인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해 사용하게 하고, 또 청전(淸錢)을 수입해 통용하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화폐 정책은 경제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서원이 소유한 전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지방 양반유생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과감하게 실시한 서원철폐 정책은 보수적인 양반유생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기존 양반정치 체제의 부정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면서 척족들의 발호를 억제해 양반정치 체제를 보완, 유지하려는 ‘실용적 보수주의’ 노선이었다.
    [민씨 척족정권]
    1866년에 왕비가 된 민비는 1873년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점차 여흥 민씨(驪興閔氏) 척족으로 자파 세력을 형성,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될 때까지 조선의 대내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민비의 친족들이 중앙 정계의 요직을 거의 다 독점한 이른바 민씨 척족들의 전횡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880년 이후였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척족정권은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하지 않고 관직을 매매, 과거제도를 문란하게 하였다.
    또 국가 경비의 염출을 위해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증수하는 등 일반 국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을 강화하고 당오전(當五錢) 등 악화를 발행, 화폐 유통질서를 혼란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2년 이후에는 친청·자강노선을 택해 개화당의 급진 개화운동에 반대하고 청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의거에 대해 청나라로부터의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1880년대에 일련의 개화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민씨 척족정권에 가담한 온건개화파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개화당의 개혁 운동]
    개항 후부터 형성된 개화당은 부국강병을 이룩해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급진개화파라고도 알려진 이들은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쿠데타로서 정권을 장악한 뒤,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아 군주권을 제한하며 재정을 일원화하고 근대적 내각제도를 수립하는 등 14개조 이상의 개혁 정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 정변주모자들은 청불전쟁(淸佛戰爭)으로 청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하에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지지 결여와 일본 정부당국의 미온적 태도로 그들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갑신정변의 의도는 갑오경장으로 계승되었다. 갑오경장의 추진 배경은 일본에 의해 마련되었으나 개혁의 주체는 조선의 개혁 관료였고, 개혁 내용은 그들이 구상한 것이었다.
    동학농민의거와 청일전쟁을 계기로 발단된 갑오경장은 왕실과 행정을 분리한 입헌군주제의 실시, 양반신분제의 타파, 능력 본위의 평등사회 건설 등을 지향한 근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의 개혁은 부분적인 것에 그쳤고, 근본적인 토지 개혁의 주장이 없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군은 1894년 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봉기하였다. 제1차 봉기는 삼정의 문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말미암은 농민의 부담 가중, 일본으로의 미곡 반출로 인한 농촌 경제의 피폐 등이 원인이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접주들은 5월에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규합해 ‘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의 구호를 내세우며 관아와 무기고를 습격하고 먼저 전라도에서 관군과 대결하면서 서울로 진공하던 중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 제1차 봉기에는 최시형(崔時亨)이 지도하는 동학의 북접 세력(北接勢力)은 참여하지 않았고,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 등 전라도의 남접 세력(南接勢力)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은 탐관오리의 징치(懲治), 일본 세력의 축출 등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봉기를 계기로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출동해 전주성까지 점령했던 동학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자신들의 폐정개혁 요구 조항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해산 후에도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면서 서울의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침략적 행동을 자행하자 동학농민군은 10월에 재기하였다. 이 제2차 봉기는 반외세·반침략의 의병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 봉기에는 동학의 남접뿐만 아니라 북접도 가담하였다. 삼례역(參禮驛)에 집결한 10만의 동학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 12월에 공주부근의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 등에서 대패,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94년 2월부터 1895년 초까지 계속된 동학농민봉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농민들의 정치적·사회적 의식이 높아지고 1895년 이후에 가열된 반일의병운동의 선구가 된 점 등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큰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개혁 정치]
    대한제국은 1897년에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하며 국호를 바꿈으로써 성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집권층은 친러파였다. 그들은 제정러시아의 전제 황정을 모방해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였다. 따라서 이 국제는 전제군주제를 재확인한 보수적인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실권자였던 조병식(趙秉式) 등 친러수구파는 민권 신장과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하고 외국에의 이권 양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독립협회를 탄압하였다.
    대한제국의 보수적 관리들은 경제권을 장악해 근대적 회사·기업·은행 등을 설립, 경영하였다. 또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양전지계 사업을 실시, 토지 및 지세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들에 의해 광무연간에 추진된 농업 및 상공업상의 근대적 시책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 한다.
    [독립협회운동]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5년 말에 귀국하여 결성한 독립협회는 고급관료주도기·민중진출기·민중주도기·민중투쟁기를 거치면서 정치·사회 단체로 성장, 1898년 말까지 구국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협회의 지도층은 서재필·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 등 서구 시민사상 및 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수용한 인사들과 남궁 억(南宮檍)·정교(鄭喬)·장지연(張志淵) 등 개신 유학자들로 구성되었고, 서구식 개혁파 인사들이 협회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을 건립하고 『독립신문』 이외에 협회의 기관지로 『대조선독립협회회보』를 발간하였다.
    협회는 또한 러시아 등 열강에의 이권 양여 반대운동, 서재필 추방 반대운동, 인권과 재산권 보호운동, 노륙법(孥戮法)·연좌법(連坐法) 부활 저지운동 등을 벌임과 동시에 내각 개편운동·의회 설립운동을 전개, 직접 정치에 참여하려 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 목표는 민권에 기초한 입헌대의군주제를 채택하고 외세의 경제적 침투를 방지하며 나아가 국권이 확립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미국·일본 등의 대한접근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은 결국 실패했지만, 독립협회에 관여했던 인사들이 1905년 이후에 활발히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해 그 이상은 계속 추구되었다.
    [애국계몽운동]
    1904년부터 1910년까지의 국망기(國亡期)에 국민의 각성과 국권 옹호를 위해 정치·경제·사회·언론·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독립협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중국의 변법자강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러일전쟁 중 보안회·헌정연구회 등의 정치 단체는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와 입헌정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은 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사회·문화운동으로 그 방향을 바꾸고 산업과 교육 진흥을 민족의 급선무로 강조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대표적 단체는 장지연 등이 헌정연구회 후신으로 1906년에 조직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압력으로 대한자강회가 해체되자 그 사업은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계승되었다.
    일제는 이들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회복운동의 성격을 띠자 탄압하였다. 이러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은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
    애국계몽 단체들은 신문 발간·학회 조직·잡지 간행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는 한편 회사를 설립, 운영해 민족자본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당시 이들에 의해 발간된 신문 중에는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만세보』 등이 있었다. 서북학회·기호흥학회·호남학회·관동학회·대한흥학회·교남교육회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학회도 결성되었다.
    이들 학회는 잡지를 발행해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이 거둔 가장 효과적인 성과는 2,000여 개에 달하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국민 교육이었다. 또, 운동 기간 중에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같은 시기에 전개되고 있던 의병 투쟁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의병 활동]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국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궐기한 의병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맥을 같이 하며, 주자학적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3기로 나뉜다. 제1기는 1895년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의 실시로 일어난 지방유생 중심의 의병이다. 이것은 보수적 위정척사사상에 뿌리를 둔 반일·반개화의 구국척사운동이며 왕조와 왕권의 회복 및 유지를 목표로 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䄵) 등이 그 대표적 지도자였다.
    제2기는 1905년에 국권이 상실된 뒤 국권 회복을 목표로 지방 유림들이 농민을 규합해 일어난 것이다. 최익현(崔益鉉)·민종식(閔宗植)·이은찬(李殷瓚) 등이 그 대표적 의병장이었고, 신돌석(申乭石) 같은 평민의병장도 이 때 출현하였다.
    제3기는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자극받아 일어난 의병운동이다. 이 때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에 의병의 조직과 장비가 강화되어 한때 전국 의병의 연합 전선도 형성되었다.
    1907년에는 이인영(李麟榮)을 13도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추대한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이 계획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의 유명한 의병장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이탈과 그의 뒤를 이은 군사장 허위의 패배로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였다.
    일제는 조직적으로 의병운동을 탄압하였다. 그 중 1909년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은 국내의 활동 거점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후 잔존한 의병들은 국외로 망명, 해외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의병운동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무장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사회·경제
    [조선 후기의 경제]
    농본주의와 자급자족주의의 이상에 입각한 조선 왕조의 경제 구조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 변화를 겪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移秧法) 등 농업 기술의 진보로 농업면에서 광작(廣作)현상이 일어나고, 시장 판매를 위한 상업적 농업이 전개되었다.
    이 밖에도 사금 채취를 주로 하는 광업이 발달하고, 수공업면에서도 관장제수공업(官匠制手工業)에서 사영수공업(私營手工業)으로 이행되는 등 커다란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자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아하였다.
    또 청·일 등 외국과의 무역으로 치부한 의주의 만상(灣商), 부산의 내상(萊商), 주로 인삼을 취급하는 개성의 송상(松商), 한강을 활동 무대로 한 강상(江商)들의 대두는 상업 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양반집권층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실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조선의 경제 상태는 자본주의적 맹아가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
    경제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이후의 세계사는 산업화에 성공한 선진 산업국가가 후진 농업국가를 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 체제에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선진국가가 후진국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자본 자체의 속성, 선진국가간의 경쟁, 자국내의 정치·사회상의 모순, 후진국가의 국내 여건 등에 따라 양상이 다른 제국주의 정치가 전개되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은 포함외교 혹은 ‘달러외교’를 통한 불평등조약 체제의 구축 현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조선은 유치 산업의 보호를 위한 보호관세를 실시할 수 없었다. 또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으로 잉여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했으며, 각종 임산·수산·광산 자원을 마구 침탈당하였다.
    반면에 제국주의 열강들은 무역·이권 취득·차관 공여 등의 방법으로 조선 경제를 침탈해 자본을 축적하였다. 그리고 축적된 자본을 재투자하여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다. 특히, 조선에 침투한 제국주의 국가 중 선두주자였던 일본은 조선과의 통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원시적 자본 축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76∼1882년의 기간에 일본은 조선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면서 일본의 상권은 침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대청·대일 수입액의 비율은 1885년 19 : 81에서 1892년 45 : 55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조선에서의 청나라 상권은 쇠퇴했고, 일본과 구미열강의 상권 진출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아관파천 뒤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조선의 대외무역액 가운데 수입의 과반,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1885∼1893년 간 조선의 대외무역 수지는 수입·수출의 비가 2.5 : 1이나 되는 만성적인 입초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만성적인 국제 수지의 불균형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의 수출품은 쌀·콩·금·인삼 등이었다. 쌀은 대일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 정부는 필요에 따라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수입품은 영국산 면제품이 대종을 이루었고, 중국으로부터는 서적·약재 등도 수입하였다.
    청·일 상인은 영국 제품을 조선 시장에 파는 중개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산업화를 추진한 일본은 점차로 자국산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 1901∼1906년 간에 조선의 수입품 중 일본 상품이 차지한 비율은 61.6∼77.3%로 비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무역 못지 않게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상인의 밀무역을 방지하고 세수(稅收)를 확보할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1890년대 외국 상사의 조선진출 상황을 보면, 1896년 총 258개의 외국인 상사 중 일본 상사가 210개일 정도로 일본 상인의 진출이 압도적이었고, 그 다음이 청국 상인이었다.
    다음으로는 미국·영국·러시아·독일의 상사들이 진출하였다. 이들 외국 상사들은 상업과 무역 외에도 선운(船運)·광업·대금업·제조업·염업·농업·요업 등 광범한 영역에 투자하였다.
    한편, 이들 상사들을 후원하는 은행도 진출했는데, 그 중 일본의 금융 진출이 가장 두드러졌다. 일본의 국립제일은행·제18은행·제58은행 등은 1890년부터 조선에 지점을 설치해 일본 상인에게 자금을 공급하였다. 또 조선산 금을 매입했으며,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는 등 금융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국립제일은행은 보통 은행업무 외에 조선 정부의 해관세업무·우편위체자금의 보관 사무, 그리고 1905년 이후에는 통화발행권을 확보해 조선 정부의 준(準)중앙은행 구실을 하였다. 러시아도 1897년에 한러은행 설립을 시도했으나 독립협회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은 열강들의 이권 쟁탈장으로 바뀌었다. 이 때 러시아는 북부 지방의 광산채굴권·삼림벌채권, 동해의 포경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구미제국도 조선의 이권 쟁탈 대열에 참가,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 등을 따냈다. 구미열강의 이권 침탈은 주로 개인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일본의 경우는 주로 정부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에서 서구자본가가 이미 획득한 이권을 사들이고, 또 한국인의 자발적 민족기업 설립운동을 저지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였다.
    개항 후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얻은 이권은 철도부설권·광산채굴권·어업권·포경권 등 다양하였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농촌에까지 미쳐 일본 투자가는 조선 농민의 토지까지 매점하였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대자본가에 의한 토지 약탈은 가속화되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는 한국인 실업가들의 반대로 중지되었지만, 1907년 통감부의 압력에 의한 「국유미간지이용법 國有未墾地利用法」의 제정으로 일본인의 토지 약탈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일본자본가들은 한국농업주식회사·한국흥업·한국실업 등 농업회사를 설립, 조선에서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특히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일제 하에서 가장 큰 지주로 성장하였다. 일본 농민의 이주와 자본가의 토지 투자 등에 의해 진행된 일본의 토지 약탈은 강점 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가일층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재정 구조]
    아래의 [표 2] 는 1896년도의 한국 최초 예산안으로서, 당시 재정 규모는 500만원 정도로 일본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표 2] 1896년도 예산안(단위)주 12)
    예 산 내 역금 액
    세 입조 세지 세1,477,681
    호 포 세221,338
    잡 세9,132
    인 삼 세150,000
    사 금 세10,000
    항 세429,882
    기왕연도소속수입130,000
    조 세 소 계2,428,033
    잡 수 입5,000
    주 조 화1,282,450
    전 년 도 보 계 잉 여1,693,927
    세 입 총 계4,809,410
    세 출 총 계6,316,831
    주 : 官報(1896.1.12.).
    이 [표 2] 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정부의 재정 구조는 1910년까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세입에는 지세와 항세, 즉 해관세(海關稅)가 주세입이었고, 상공업 부문으로부터의 수세는 적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 경제가 농촌 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근대적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위의 예산의 특징은 화폐 발행액이 세입의 5분의 1 이상을 점하고 있고, 재정 적자가 150만원에 달하고 있는 점이다.
    당시 정부는 개항 후 개화·자강 정책의 실현을 위해 근대적 시설의 운영,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의 초빙, 해외 사절 및 유학생 파견 등을 추가로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전세(田稅)의 증수는 물론 상공업 분야에서의 새로운 세원(稅源)의 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상공업 부문에서의 세입은 미약하였다. 정부는 오히려 지불 보증이 없는 화폐를 증발(增發), 경비를 마련한다는 고식책을 택하였다. 실질가치보다 명목가치가 높은 당오전 같은 화폐의 발행은 금지금(金地金)의 확보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가 등귀와 인플레 등 유통 질서를 혼란시키는 역기능을 수반하였다.
    때문에 화폐를 무한정 발행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외국의 차관을 도입해야만 하였다. 1881년부터 1894년까지의 외국차관액수는 일본에 69만원, 청나라에 100만냥(兩) 정도였다. 1894년에는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도입한 일이 있고, 1905년 이후에는 대일차관액이 1300만원, 1910년경에는 2400만원에 달하였다.
    누적된 적자 재정은 외국의 차관을 필요로 했고, 또 청·일 양국은 차관 공여를 미끼로 조선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1907년에 범국민적으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바로 이 누증하는 외채를 상환하자는 국민들의 자발적 운동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민족 산업의 형성]
    개항전후 시기에 조선의 상업 활동은 주로 육의전(六矣廛) 상인, 공인(貢人) 등의 어용 상인, 그리고 객주(客主)·여각(旅閣) 등 사상(私商)이 담당하였다. 객주·여각 등은 개항 후 거간과 보부상들을 매개로 일본 상인과 거래하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이 점차 이들 중개 상인을 거치지 않고 조선인 소비자 내지 생산자들과 직접 거래하자 조선 상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또, 1880년대에는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근대적 회사 설립의 필요성이 역설됨에 따라, 객주와 여각은 상회사(商會社)를 설립, 외국 상인들에 대항하였다.
    일종의 동업조합인 상회사는 1883년 원산에서 최초로 설립되었다. 그 뒤 일반 상인들이 양조회사·출판사 등을 설립하는가 하면, 정부는 1883년에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1894년까지 설립된 상회사의 수는 30여 개에 이르렀다.
    정부는 1883년에 기기국(機器局)·박문국(博文局)·전환국(典圜局) 등을 설치해 각각 무기 제조·인쇄·조폐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1887년에는 광무국(鑛務局)을 두어 광산 개발을 감독하였다. 이외에도 정부 주도로 해운업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1894년 이전까지의 조선의 근대 기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관설회사(官設會社)가 많았다. 더욱이 사기업이라 해도 관리들이 참여하거나 정부의 허가 또는 보호 하에 운영되는 관허회사(官許會社) 형태의 것이 많았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적인 민족산업이 크게 발전했는데, 특히 이 때는 민간인의 기업 진출이 활발해졌다.
    공업 분야에서는 방직업(紡織業)에 관심이 기울어져 1897년에 안경수(安駉壽)는 대한직조공장을, 그리고 1900년에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를 설립, 운영하였다. 방직업 외에도 요업·제분정미업·금속세공업·연초제조업 등의 분야에도 기업인들이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전에 발맞추어 은행도 설립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은행은 1896년 김종한(金宗漢)·안경수 등이 설립한 조선은행(朝鮮銀行)이었다. 이를 필두로 경강상인(京江商人)들과 김종한이 합작해 설립한 한성은행(漢城銀行), 1899년 민영휘(閔泳徽) 등이 세운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호남의 백인기(白寅基)가 세운 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이 있었다.
    이들 은행은 대체로 거상 배경의 자본가들과 전직 관리들의 합자로 설립되었다. 이들 한국인이 설립한 은행은 일본인 은행에 비해 자본과 경영 실적면에서 열세였다.
    개항 후부터 강점 때까지 근대적 산업을 이끌어간 기업가는 관료, 객주·여각 등의 상인, 지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김종한·안경수·이용익(李容翊) 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직 관료 혹은 관료 출신 기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조선의 산업화가 관주도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서 이는 일본의 경우와는 다르고 중국과 유사하였다.
    [교통·통신 시설의 발달]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군사적·경제적 이유로 가장 중시했던 이권 중의 하나가 철도였다. 철도의 중요성은 이미 조선 정부측에서도 인식하고 있어서 국왕은 1883년 미국공사에게 철도건설 계획을 상의하고 1891년에는 경의선 부설 계획도 구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자금 및 기술 부족과 청·일·미 등의 협조 결여로 좌절되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은 경인·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노력한 결과, 1896년에는 일본에 의해 최초로 경인선이 준공되었다. 이러한 외국인에 의한 철도 건설에 자극받아 한국인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전직 관료였던 박기종(朴琪淙)은 1898년에 부하(釜下)철도회사, 이듬해 대한철도회사 등을 설립해 정부로부터 부산∼낙동강 하류간의 철도와 경의선의 부설 허가를 받기까지 하였다. 또한 1902년에는 이용익 등이 서북철도회사를 설립해 프랑스의 원조로써 경의선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1904년 유길준(兪吉濬)도 호남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또는 관료 주도의 철도부설운동은 일본의 방해, 자금 및 기술의 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이 경부선·경의선을 완공함으로써 한국과 만주 침략의 기간교통로로 삼았다.
    조선 정부는 근대적 수상 교통을 위해 1899년에 기선회사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1892년에 관민합병회사인 이운사(利運社)로 흡수되었다. 광무연간에는 민간해운업이 발달하였다. 대한협동우선주식회사·인천우선회사·인한수선주식회사(仁漢輸船株式會社)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는 활동 영역이 국내의 하천과 연안에 국한되었고, 해외 운수업은 외국 기업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조선에 부설된 최초의 근대적 전신 시설은 청나라가 1883년에 군사·경제적 목적으로 개설한 서울―인천―의주간의 서로전선(西路電線)이었다. 일본은 이보다 조금 앞서 1883년에 부산∼나가사키(長崎)간의 해저 전선을 개통한 바 있다.
    1888년에는 조선전보총국 관할 하에 서울∼부산간의 전신선으로서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개통되었다. 이것은 조선 정부가 주관했으나 1905년에 관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 뒤 1891년에는 서울∼원산, 1899년에는 서울∼함흥간의 전신이 가설, 개통되었다. 남로전선이 개통되면서 처음으로 모스부호를 이용한 한글전신부호가 제정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4년에 홍영식(洪英植)의 건의에 따라 미국의 우편제도를 모방해 우정국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그 업무는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893년에 전우총국, 1895년에 우체사(郵遞司)를 두어 우편 사무를 재개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사회]
    개항에서 병합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일대 전환기였다. 조선 후기에 빈발했던 민란을 통해 전통적인 사회신분제가 해체되고, 그 대신 새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으나 아직 정착되지 못한 유동적인 상태였다.
    임진왜란 후에 나타난 중인층의 성장, 노비의 해방, 양반 특권의 동요 등의 현상이 개항 이후 더욱 촉진되었다. 그러다가 갑오경장을 통해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 서자나 중인 출신이 많이 참여한 점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준양반계층의 사회 진출이 두드러졌다. 개항장의 객주·여각 등 사상(私商)들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일반 상인이나 양반 지주들도 근대적 회사나 공장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적 경제 활동을 벌였다.
    전통 사회에서 천대받던 상인계층은 자기들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운동·애국계몽운동 등에 참여했으며, 그 중 일부는 관계(官界)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인 및 기업가의 대두와 함께 부두·광산·공장 등에서는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계층이 창출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 사회를 이탈한 농민들이었다.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주로 기호지방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개항 후에는 전통시대에서 소외되었던 지역, 즉 서북지방과 영남·호남지방의 인사들이 정치·경제·문화 등 각계 분야에 지도층으로 대두하였다. 기독교 수용이 가장 활발했던 서북지방 인사들은 애국계몽운동에서 선도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유교 교양을 갖춘 양반 지식인보다는 서구의 근대 문물을 몸에 익힌 개화 지식인이나 개신 유학자 등 자립적 중산층 인사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전통 사회의 신분 차별·가족주의·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거족적·평등주의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구조가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한 각종 신흥 세력은 1919년 3·1운동에서 그들의 단합을 과시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사상ㆍ종교
    [유교]
    위정척사론은 삼강오륜에 입각한 유교적 사회 질서를 고수하면서 주자학 이외의 학문이나 문화를 배척하는 사상이다. 18세기 후반 서학(천주교)의 전래와 서세동점의 물결을 유교 문화에 대한 일대 도전으로 간주한 보수주의적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서양을 이적시(夷狄視)해 서양과의 통상 내지 외교를 반대하는 척화양이론(斥和壤夷論)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정통과 이단, 화(華)와 이(夷)를 엄격히 구분하는 주자학적 세계관 내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근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와 최익현이 그 대표적 인물로, 전자는 병인양요시 척양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후자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서양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전개해 다같이 외국과의 통교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서구 및 일본제국주의의 침투로 빚어질 경제적 악영향을 우려하였다. 이 사상은 최익현·유인석 등이 구한말에 조직, 지도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었다.
    또, 19세기 말에 조선의 일부 개신 유학자들은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전통 유학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민족의 독립 보전이라는 과제 해결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청말의 변법자강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개신 유학자였던 박은식(朴殷植)은 종래의 제왕 중심이었던 유교를 공자의 대동주의(大同主義)와 맹자의 인본주의에 입각해 민중적 유교로 개신하였다.
    또, 학교 설립이나 서적 간행을 통해 유교를 민중에게 널리 포교하며, 지리한만한 주자학보다 간이직절한 양명학(陽明學)을 강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은식과 장지연 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09년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개화사상]
    19세기 후반 서구와 서양화된 일본의 중첩된 충격을 받은 뒤,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면서 서양 문명의 요체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나아가 자주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개화사상이라고 한다.
    개화사상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와 역관 출신 오경석(吳慶錫) 등이 중국에서 간행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誌』, 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서양소개 서적을 국내에 들여온 뒤 이를 독서층에 보급하여, 1870년대에 서울 북촌(北村)의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의 개화사상은 1877년경부터 개화의 실현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온건론과 급진론으로 갈라졌다. 온건론은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본받아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 체계 내지 정신 유산, 즉 도(道)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 즉 기(器)만을 선별적으로 채용해 개화하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통적 유교사상과 사회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외래의 기술을 도입하되 국민을 계몽하는 방법을 취하는 점진적 개혁론이었다. 이 온건론의 대표자는 민영익(閔泳翊)·김홍집·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이었다.
    이에 비해 급진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방,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그 정치·경제·군사·교육은 물론 사회제도까지도 수용해 급진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한 사상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수용을 긍정적으로 보고 기존 양반제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따라서 온건론이 청나라 말기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급진론은 청나라 말기의 ‘변법자강론’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온건론자들이 군권(君權) 혹은 국권(國權)을 강조한 데 비해, 급진론자들은 민권(民權)을 중시하였다. 박규수와 유대치(劉大致, 鴻基)의 훈도를 받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 급진개혁파는 결국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동학]
    동학은 1860년에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되어 농촌 사회에 뿌리내린 신흥종교이다. 최제우는 서학(西學)주 11), 즉 천주교의 침투에 대항, 동양의 유·불·선 삼교를 종합하고 아울러 전통 사회의 가치 체계를 원용해 외세의 침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1863년에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뒤,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1880년대 초에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를 간행해 교리를 체계화하고, 포접제(包接制)를 실시, 교문의 조직을 강화하였다.
    주문을 외우거나 부적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무속신앙의 요소를 띠고 있는 동학은 그 당시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던 민중에 쉽게 침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삼남 지방에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동학사상의 요체는 인내천(人乃天)주 06)으로 상징되는 평등주의이다. 인내천은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최제우의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천인여일(天人如一)’과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을 집약한 표현이었다. 동학의 평등주의 사상은 조선조의 봉건적 신분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학 창도 이전의 시대는 하늘[天]의 대리자인 성현이 다스리는 선천시대(先天時代)이지만, 동학창도 이후의 후천시대(後天時代)에는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강령해 하늘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은 현실을 부정하는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정감록 鄭鑑錄』의 운수론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동학에 내포된 반외세·반침략의 민족주의,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주의, 후천개벽사상에 나타난 현실부정적 혁명사상 등은 1894년 동학농민 봉기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교단 조직은 동학농민 의거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동학은 1905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으며, 이에 반대한 이용구(李容九)가 1906년 시천교(侍天敎)를 창건, 두 파로 분파되었다.
    [기독교]
    18세기 말에 전래된 가톨릭은 대원군 치하 때 철저한 탄압으로 그 선교 활동이 한때 둔화되었다. 그러다가 1880년대 국내에 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개신교가 전래되고, 구미와 외교·통상 관계가 수립된 뒤로는 기독교의 국내 선교가 묵인되었다.
    그 뒤 주로 미국·캐나다 등에서 파견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 외에 근대적 교육·의료 사업 및 자선 사업 등을 병행하면서 개화를 추구하는 청년지식인·중소지주·상인들에 영향을 주었다. 개신교는 자립적 중산층의 형성이 비교적 빨랐던 관서 지방에서 가장 왕성하게 수용되었다.
    개신교가 한말 사상계에 준 가장 큰 공헌은 개인의 발견에 있다. 가족 윤리와 충군애국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와는 달리 개신교는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로써, 인간의 주체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평등주의 등 근대적 정치 이념의 정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개신교 선교사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교회나 학교에서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은 교회 또는 학교 내 활동 경험과 서구 지식을 바탕으로 민주적 국민국가 건설 내지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각종 정치·사회 운동에 가담하였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안창호의 신민회는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청교도 정신과 직업소명 의식은 자립적 중산층의 직업 윤리를 강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불교·대종교]
    조선시대에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 때문에 신장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개화승 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廷植) 등이 대외 활동을 벌이고, 또 일본 불교가 전래, 1896년에 이르러서는 승려의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이 철폐되었다. 이 시기의 불교는 현실 문제에 초연했기 때문에 괄목할만한 교세 확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반면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일본 불교는 계속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위태롭게 되자 1909년에 나철(羅喆)에 의해 우리 민족의 원시 신앙을 체계화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大倧敎)가 창건되었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신(三神)을 섬기는 대종교는 일제 강점 뒤 만주 및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신앙 체계로서 성장하였다.
    [교육·언론·학문·기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은 원산에 민간인이 설립한 원산학사(元山學舍)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외아문(外衙門)에 부설된 동문학(同文學)이었다. 정부는 1886년에 본격적인 서양식 교육 보급을 위해 미국인 교사를 초빙해 육영공원(育英公院)을 개설하였다.
    또 같은 해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이화학당도 설립되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새로운 학제가 실시되면서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 관립학교가 많이 생겨 근대적 교육이 보편화되었다.
    1905년을 전후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독지가의 사재(私財), 국민의 성금, 종교 단체의 재정적 후원 등으로 운영되는 사립학교, 즉 사학(私學)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1905∼1910년 간에는 개신교 계통의 학교 설립이 활발해 미션계 학교는 그 당시 전체 학교수의 3분의 1이 되었다.
    그 결과 1910년에는 전국의 학교수가 2, 000 여 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08년에 「사립학교령」, 「교과용도서검정규정」 등을 발표, 사학을 규제해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모색했던 애국계몽운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1883년에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창간되었다. 이것은 1886년에 『한성주보 漢城周報』로 개칭되었는데, 주로 한문으로 쓰여진 관보적 성격의 신문이었다. 또 1896년에 이르러 최초의 순한글 민간지인 『독립신문』이 서재필에 의해 발간되어 민권·법치주의·주권 수호 등 독립 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898년에 이르러 양홍묵(梁弘默)의 『매일신문』, 남궁 억·유근(柳瑾) 등의 『황성신문 皇城新聞』, 이종면(李鍾冕)의 『제국신문』 등이 발행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4년에 영국인 배델(裵說, Bethell, E.)과 양기탁(梁起鐸)이 『대한매일신보』를, 1906년 오세창(吳世昌)이 『만세보』를 발간하였다.
    그 중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 그 당시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민족언론지였다. 그 뒤 일제통감부에서 1907년 「신문지법」, 1909년「출판법」 등으로 한국인에 의한 언론 활동을 제한하고 검열을 강화하자 민족 언론은 쇠퇴하였다.
    국어연구 분야에서는 주시경(周時經)이 『독립신문』을 통해 한글표기법의 통일 작업을 모색하다가 1906년 『국어문법』, 1908년 『국어문전음학』 등을 저술하였다. 또 유길준은 1890년대에 작성한 『조선문전』을 개고해 1909년에 『대한문전』을, 지석영(池錫永)은 1905년에 한글의 문자 체계를 확립한 「대한국문설」을 발표하였다. 이능화(李能和)는 1906년 학부에 국문법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와 같은 국문에 대한 민간 학자들의 관심 제고로 정부에서는 1907년 학부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1909년 국문의 연원, 자체(字體)와 발음의 연혁, 철자법 등 11항목에 대해 통일된 의견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한말에는 국사 연구도 활발하였다. 박은식·장지연·신채호(申采浩) 등은 신문·잡지 등을 통해 국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역사상의 영웅들을 소개,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은 『역사집략』 등 국사교과서를 저술했고, 현채(玄采)는 저술·번역 활동을 통해 근대적인 역사서술 방법론 도입에 기여하였다. 또 최남선(崔南善)은 1910년에 조선광문회를 조직해 고전, 특히 실학자들의 저술을 발굴, 간행하였다.
    1900년 이후 서양의 문학 작품이 번역, 소개되면서 전통적 소설체를 탈피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한글 문장을 사용한 신소설이 나타났다. 신소설은 미신 타파·신교육·신사상·독립의식 고취 등 계몽적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주제면에서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 범주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인직(李人稙)의 「혈의 누」, 이해조(李海朝)의 「자유종」이 신소설의 대표작이다.
    음악·미술 등 예술면에서는 양반들 사이에서는 시조, 서민들 사이에서는 「춘향가」·「심청전」 같은 판소리가 계속 유행되었고, 미술에서도 전통적 동양화가 계승되는 가운데 서민들이 개발한 민화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또, 한말 개신교의 찬송가에서 영향을 받은 서양식의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신식 노래, 즉 창가(唱歌)가 유행했는데 이들은 독립·애국·신교육·신문화를 주제로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역사적 성격
    개항에서 강점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이 중국중심적 세계 질서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국제 질서로 편입되어 마침내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간 과도기였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한국인이 근대 민족국가의 건설을 지향, 외세에 대한 투쟁과 개화·자강의 노력을 멈추지 않은 역사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 노력은 헛된 것 같았지만,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으로 계승, 광복 후 우리 나라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현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은 이 시대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역사적 성격을 부문별로 나누어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정치적으로 조선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후의 한국사는 아시아의 국지적 요인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게 되었다.
    즉 조선에 관심을 가진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움직임이 한국사의 전개에 영향을 주는 주요소로 작용하기 시작,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간의 각축전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으로 마침내 조선이 병탄되었다.
    둘째, 국내정치적으로, 잠재된 채 부분적으로만 표출되었던 전통적인 왕조 체제의 모순이 외세의 충격으로 더욱 심화되면서 그것이 해체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와 함께 전통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서구의 근대 문물을 앞장서서 수용,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국내 정치는 이러한 개혁 세력과 기존정치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 세력간의 정권 투쟁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개혁 세력이 추진한 이상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을 통해 민족적 이상이 구체화되고 그것이 사회·문화계에 확산되어 이상이 실현될 토대가 형성되었다.
    셋째, 경제적인 면에서 이 시기는 전통적 자급자족의 경제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적 세계경제 체제에 편입되는 과도기였다.
    그러나 불평등조약 체제 하에서 진행된 조선의 대외 무역은 정부 재정의 악화, 토착 산업의 와해 등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외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시에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근대적 산업을 일으켜 민족자본을 형성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제국주의 국가의 대규모 기업과의 경쟁에서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산업화에 필요한 자연 자원을 많이 탈취당한 위에 양반지주층이 가진 부(富)가 민족적 산업자본으로 전용되지 못해 산업화의 전제 조건인 원시적 자본 축적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략과 한국기업가들의 민족산업 형성 과정을 통해 이 시대에는 철도·전신·공업 기계 등 근대적 산업 시설이 보급되었다.
    넷째, 사회적인 면에서 이 시기는 전통적인 양반신분 체제가 해체되면서 신흥 계층이 등장하는 유동적인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대받던 중인·상민 등이 관계에 진출하고, 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해 근대적 기업가로 성장하였다. 또, 양반 지주 중에서 기업가로 신분 전환을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당시 개화지식인들은 서구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익히고, 이들 신흥중산층과 제휴해 근대 민족국가의 이념을 정립,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국한되었고, 농촌 사회까지 침투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농촌 사회는 이농(離農)·빈농 대 부농의 대립이란 현상을 보이기는 했으나, 전통적인 지주―소작 관계는 온존되고 있었다.
    다섯째, 사상적인 면에서는 전통 사회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그 대신 새로운 사상 체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서구사상의 영향 하에 변형된 유학 체계인 개신유학사상과 기독교·동학 등 새로운 사상이 영향력이 큰 사상으로 부상하였다. 이들 사상으로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적 정치 이념은 개발되었고, 반면 보수적 유학사상은 여러모로 계속 그 뿌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여섯째, 문호 개방 뒤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 실시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의 결과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이 지속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한글이 보급되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는 등 문화적 민족주의가 발달하였다.
    또, 양반 중심의 귀족문화에서 일반 서민을 위주로 한 새로운 국민문화가 대두하고 있었다. 신문과 잡지의 발행,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된 교양 서적의 보급, 언문일치체 신소설의 등장 등은 이러한 국민문화의 기반을 다져주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2. 연구사
    1. 광복 전의 연구
    광복전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반면, 한국인은 자료 이용, 연구 주제의 선택, 내용의 서술면에서 제약을 받았다. 게다가 관심 분야도 고대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 개항 이후 시기에 대한 한국인 학자의 연구는 저조하였다.
    한말에 우리 나라 사람이 저술한 동시대사로서는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 大韓季年史』,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梅泉野錄』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강목체(綱目體)와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된 전통적 역사서였다.
    1915년에 저술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한국근대사를 일제의 침략과 이에 대한 한국민족의 저항에 초점을 맞추어 쓴 최초의 근대적 역사서였다. 이외에도 1928년 이능화(李能和)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 1945년 문일평(文一平)의 『한미 50년사』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한국근대사 연구 중에서 주목할만한 저술로는 1940년 다보하시(田保橋潔)의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1944년의 『근대조선에 있어서의 정치적 개혁』과 시가다(四方博)의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정』 등이 있다.
    이들의 저술은 일본이 한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근대화를 조장시켜주었다는 시혜론(施惠論), 혹은 한국사의 타율성론·정체성론 등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또, 1940년 미국인 해링턴(Harrington, F.H.)의 『하나님, 부의 신, 그리고 일본』은 이 시기의 한미 관계를 알렌의 활동을 중심으로 고찰한 책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2. 광복 후의 연구
    광복 후 그때까지 열람이 어려웠던 많은 관공문서가 공개되고, 연구 및 저술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한국사가들에 의한 한국사 연구가 활발해졌다.
    광복 후 한국사학계는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상을 비판, 극복하고, 그대신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의 모습을 드러낸 한국사상(韓國史像)을 정립하는 것을 연구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개항 이후 시기에 대한 역사 연구는 다음 세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째 제국주의 열강들, 특히 일본의 한국 침략 및 지배 과정을 밝히는 것, 둘째 그 같은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 또는 저항을 구명하는 것, 셋째 위의 두 작업을 기초로 개항이전에 자생적으로 나타난 근대적 맹아가 정치·사회·경제·사상면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가를 구명하여 한국 사회의 내재적 발전 논리를 추구하는 작업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일본 및 서구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사를 위주로 한 대외관계사 연구, 척사위정운동·의병·동학농민의거 등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저항 운동,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 등 내재적 개혁 운동,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관련된 경제사적 연구가 그 중심 테마를 이루었다.
    [통시적 연구]
    개항에서 강점까지의 시기를 총괄하는 통사는 많지 않다. 이선근(李瑄根)이 1961년에 낸 『한국사―최근세편―』과 1963년에 낸 『한국사―현대편―』은 이 시기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술로서 한국·일본측의 많은 사료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서이다. 이 저서는 광복 이후 근대사 연구의 지침이 되었다.
    최근 1981년에 간행된 이광린(李光麟)의 『한국사강좌』는 1980년까지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한 위에 저술한 대표적 통사이다. 외국인에 의한 것으로는 1960년 콘로이(Conroy, H.)의 『일본의 한국강점 The Japanese Seigure of Korea』과 1967년의 유진 킴(Kim, C.I. Eugene)과 김한교 공저의 『한국과 제국주의 정치학 Korea and the Politics of Imperialism』이 있다.
    이 밖에 이 시대 한국인의 저항 및 개혁 운동을 정치·사상면에 중점을 두어 연구한 것으로 1970년 강재언(姜在彦)의 『조선근대사연구』와 1977년의 『조선의 양이와 개화』, 1972년 최창규(崔昌圭)의 『근대한국정치사상사』, 1975년 김영작(金榮作)의 『한말내쇼날리즘연구』 등이 있다.
    1975년 안병태(安秉珆)의 『조선근대경제사연구』, 1977년의 『조선사회의 구조와 일본제국주의』 등 한국 근대경제사를 정치사와 관련시켜 체계화한 저서도 있다.
    또, 한말의 민족 운동을 근대 민족국가의 정립 과정이라는 연속선상에서 체계화한 1978년 강만길(姜萬吉)의 「대한제국의 성격」, 1982년 정창렬(鄭昌烈)의 「한말변혁운동의 정치·경제적 성격」 등의 논문이 있다.
    경제사·언론사·종교사·교육사 등 특수 분야에 대한 통시대적 연구서로서는 1973년 조기준(趙璣濬)의 『한국자본주의 성립사론』, 1960년 최준(崔埈)의 『한국신문사』, 1962년 유홍렬(柳洪烈)의 『한국천주교회사』(1975년, 수정증보판)가 있다. 또 1971년 김양선(金良善)의 『한국기독교사연구』, 이듬해 민경배(閔庚培)의 『한국기독교회사』 등이 있다.
    특히 1981년에 저술한 이만열(李萬烈)의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은 한말 기독교와 일반사를 관련시켜 연구한 저서이다. 교육사 연구도 활발해 1964년 오천석(吳天錫)의 『한국신교육사』, 1972년 차석기(車錫基)의 『한국민족주의교육의 연구』, 1980년 손인수(孫仁銖)의 『한국개화교육사』 등이 나왔다. 또, 이 시기 정치·지식·기업의 지배층에 대한 실증적인 사회사적 연구로서 1972년에 쓴 김영모(金泳謨)의 『한말지배층연구』가 있다.
    [시기별 연구]
    ① 1876∼1894년 조선이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로부터 근대적 국제 질서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일본 등 외세의 조선 침략사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1966년 김의환(金義煥)은 『조선대일교섭사연구』를, 1973년 조항래(趙恒來)는 『개항기 대일관계사연구』를, 1977년 백종기(白鍾基)는 『근대한일교섭사연구』 등을 저술하였다. 이 연구서들은 개항 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 외교 관계를 다룬 것이다.
    1965년 신국주(申國柱)의 『근대조선외교사연구』, 1977년 도힐러(Deuchler, D.)의 『유교신사와 야만사절 Confucian Gentleman and Barbarian Envoys :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1980년 김기혁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최종국면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같은 해 동덕모(董德模)의 『한국의 개국과 국제 관계』 등은 모두 개항 초기 한국의 국제 관계 및 국내 상황에 대한 연구서이다.
    1979년 김원모(金源模)가 『근대한미교섭사』를, 1981년 박일근(朴日根)이 『미국의 개국정책과 한미외교 관계』를 펴냈다. 이들 저서는 신미양요와 한미조약 체결을 전후한 초기의 한미 관계를 다룬 것이다.
    1885∼1894년 간의 시기는 청나라가 조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로서, 1967년 신기석(申基碩)이 저술한 『한말외교사연구』는 이 시기의 한중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다. 같은 문제를 위안스카이에 초점을 두고 다룬 중국인의 연구로는 1970년에 저술된 린밍더(林明德)의 『원세개와 조선』이 있다.
    개항을 전후해 외국과의 통교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위정척사사상에 대한 연구로는 1975년 홍순창(洪淳昶)의 『한말의 민족사상』, 1977년 이이화(李離和)의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등 논저가 있다. 개화사상·개화파·개화운동 등은 광복 후 한국사학계가 역점을 두고 개발한 큰 주제였다.
    이 방면의 연구로서는 1969년 이광린의 『한국개화사연구』, 1973년의 『개화당연구』, 1979년의 『개화사상연구』 등 일련의 연구서와 1973년 강재언의 전게서 외에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그리고 1981년 전봉덕(田鳳德)의 『한국근대법사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72년에는 김영호(金泳鎬)가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개화운동에 대한 연구는 개화사상 형성의 내적·외적인 요인, 개화당의 성립 과정, 갑신정변 등의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이 각국과 근대적 외교·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자본주의가 침투하는 상황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로는 1970년 한우근(韓㳓劤)의 『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 1975년 이현종(李鉉淙)의 『한국개항장연구』, 1976년 최태호(崔泰鎬)의 『개항전기의 한국관세제도』 등이 있다.
    개항 후 조선의 수입 상품은 면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청·일에 의한 영국산 면제품의 유입과 그 영향, 그리고 한말 직물수공업의 실태에 관한 연구로는 1968년 권병탁(權丙卓)의 『이조 말기의 농촌직물수공업연구』와 1977년 가지무라[梶村樹秀]의 「이조말기 면업의 유통 및 생산구조」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화폐 정책과 관련한 개항 후의 유통구조 분석으로는 1975년 원유한(元裕漢)의 『조선후기 화폐사연구』가 있다. 개항 초기 외국 통화의 유통 현상과 인플레이션, 그로 인한 농업 공황 및 한말의 화폐정책 문제를 다룬 것으로는 1977년 김준보(金俊輔)의 『한국자본주의사연구(Ⅲ)』가 있다.
    또한, 1876∼1894년간 조선 정부의 대외 차관문제에 대한 연구로서 1976년 김정기(金正起)의 「조선 정부의 청차관도입」 등과, 불평등조약으로 박탈된 조선의 관세권 회복문제에 관한 연구로서 1972년 김경태(金敬泰)의 「개항직후의 관세권회복문제」 등이 있다.
    ② 1894∼1910년 동학농민의 봉기와 이를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갑오경장이 추진된 1894∼1896년의 시기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다. 특히 이 시기 동학농민의거에 대해서는 매우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1971년 한우근의 『동학난기인에 관한 연구』, 1973년 신복룡(申福龍)의 『동학당연구』, 1974년 김의환의 『전봉준전기』, 1975년 김상기(金庠基)의 『동학과 동학난』, 1980년 최현식(崔玄植)의 『갑오동학혁명사』, 1983년 한우근의 『동학과 농민봉기』 등의 저서, 1958년 김용섭(金容燮)의 「전봉준공초의 분석」 등의 논문이 있다.
    동학농민의거는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근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관심 대상이 되었으며, 동학사상과 봉기의 관련성 문제가 주요 연구주제였다.
    이 밖에 갑오경장에 대해서는 1971년 강재언의 『근대조선의 사상』, 1982년 박종근(朴宗根)의 『일청전쟁과 조선』, 1990년 유영익(柳永益)의 『갑오경장 연구』 등이 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갑오경장 타율론이 극복되고 제한적인 갑오개혁 자율론이 주장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조선을 들러싼 러·일의 정책과 대립에 대한 연구로는 1958년 말로제모프(Malozemoff, A.)의 『러시아의 극동정책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과 1972년 김의환의 『조선을 둘러싼 근대노일관계연구』가 있다.
    1896∼1904년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독립협회와 광무개혁에 집중되었다. 1976년 신용하(愼鏞廈)의 『독립협회연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형성·조직·사회 사상·실천 운동을 구체적·실증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또, 독립협회의 정치 이념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으로는 1977년 한흥수(韓興壽)의 『근대한국민족주의연구』, 찬드라(Chandra, V.)의 『19세기말 한국에서의 제국주의·저항 및 개혁―개화와 독립협회―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의 상공업 발달에 대한 연구로는 개항 이후 한국인 기업가들의 활동을 소개한, 1973년 조기준의 『한국기업가사』, 한국 자본주의의 주체적 발전 과정을 경제 사상·상공업·교통·통신 등의 발달에 중점 둔 1978년 고병운(高秉雲)의 『근대조선경제사연구』, 또, 상공업에 대한 개괄적 연구 논문인 1973년 강만길의 「대한제국시기의 상공업문제」가 있다.
    이 시기의 농업사 연구로는 1975년 김용섭의 『한국근대농업사연구』가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대한제국 시기의 농업 정책·농업 개혁론 등이 분석되었다.
    이 시기 개혁 운동의 주류를 독립협회 운동으로 파악하는 신용하의 주장과 대한제국 집권층의 개혁 정책으로 파악하는 김용섭·강만길의 주장이 대립, 이른바 광무개혁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본의 조선금융 침투에 대해서는 1972년 고승제(高承濟)의 『식민지금융정책사의 사적분석』이 있다. 조선이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다음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의병투쟁에 대한 연구로는 1974년 김의환의 『의병운동사』를 비롯한 일련의 논저와, 1968년 박성수(朴成壽)의 「1907∼19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해」등의 논문이 있다.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포괄적 연구로는 1980년 신용하의 「한말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이 있다. 1972년 조항래(趙恒來)의 『한말사회단체사논고』와 1966년 이현종의 「대한자강회에 대해」 등의 논문은 애국계몽 단체에 대한 연구이다.
    애국계몽 사상가에 대한 연구서로는 1981년 신일철(申一澈)의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와 1982년 신용하의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그리고 1990년 이만열(李萬烈)의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연구』 등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권력이나 힘을 대로 부림
    주02
    구속
    주03
    등급에 따라 자를 달리함.
    주04
    남산
    주05
    欲 대신 懼를 들기도 함.
    주06
    사람이 곧 하늘이다.
    주07
    成祖
    주08
    지금의 東京
    주09
    지금의 태국
    주10
    인장
    주11
    주로 천주교
    주12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6년)
    이재룡
    영역닫기영역열기 관련 멀티미디어 (94)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